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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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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6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6​한강 자전거 길​5월의 신록은 점차 짙어지고 연두색 산하가 짙은 초록색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물가는 치솟고 살기는 어렵지만 행락철을 맞아 각자 즐거움을 찿아 고속도로와 국도는 주말 나들이를 가는 차량들로 초만원이다.​5월 초, 비가 내리고 흐리던 어느날 잠수교를 돌아 한강 남북 자전거 길을 달렸다. 그날은 흐린날이라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었고 선선한 바람에 불어 자전거 주행하기에는 좋은 날이었다.​한강 자전거 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자전거 길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깊은 계곡과 산하가 수려한 곳도 많지만 공도로 가는 경우가 많고 오직 자전거길로 만들어진 곳은 한강과 북한강 자전거길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한강 자전거 길도 잘 만들어져 있지만 공도와 병행하는..
로마의 역사 1391 : 로마 제국 1097 ( 콘스탄티우스 황제 45 ) 로마의 역사 1391 : 로마 제국 1097 ( 콘스탄티우스 황제 45 )  ​ ​ 콘스탄티우스 황제 45(제위 : 서기 337 ~ 361 )​​갈리아의 부흥 (계속)​밀리노에 머물고 있는 콘스탄티우스도 부제의 공적을 인정했는지 2천 리브라(6,560킬로그램)의 은을 원조금으로 보내왔다. 율리아누스는 병사들의 밀린 봉급을 주는 데 이것을 사용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콘스탄티우스는 특별세를 거부하는 등 내정에 참견하게 된 율리아누스를 못마땅하게 여겨, 기회 있을 때마다 밀라노 정제에게 고자질하는 갈리아 고관들의 읜견도 받아들였다. ​군사와 내정에서 율리아누스의 귀중한 의논 상대였던 살루스티우스를 장관에서 해임하고 밀라노로 전임 발령을 낸 것이다. 황궁에 근무하는 사람들 가운데 율리아누스가 진심으로 신뢰하..
로마의 역사 1390 : 로마 제국 1095 ( 콘스탄티우스 황제 43 ) 로마의 역사 1390 : 로마 제국 1095 ( 콘스탄티우스 황제 43 )  ​ ​ 콘스탄티우스 황제 43(제위 : 서기 337 ~ 361 )​​갈리아의 부흥 (계속)​로마 제국 후기의 세제는 원수정 시대의 세제와는 정반대의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세금에 대한 사고방식을 '조세 철학'이라고 부른다면, 원수정 시대의 조세 철학이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납부된 세금으로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일을 하고, 이 두 가지 공공으로도 메울 수 없는 것은 개인이 한다는 것이었다. 제국 전역에 뻗어 있는 로마 가도망이 그 좋은 예이다. 국가에서 건설한 것은 8만 킬로미터, 지방자치단체가 건설한 것은 15만 킬로미터다. 이것을 모두 합한 것이 로마 가도망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도가 계속 기능을 발휘하려면 평소부..
로마의 역사 1389 : 로마 제국 1094 ( 콘스탄티우스 황제 42 ) 로마의 역사 1389 : 로마 제국 1094 ( 콘스탄티우스 황제 42 )  ​​ 콘스탄티우스 황제 42(제위 : 서기 337 ~ 361 )​​갈리아의 부흥​콘스탄티우스 황제는 로마에 한 달쯤 머문 뒤에 다시 북쪽으로 돌아갔다. 도나우 방위선이 또다시 위험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야만족의 대거 침입을 허락하면, 막 거행한 개선식이 무색해진다. 도나우 전선에서 휘하 장수들이 야만족 침입을 물리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겨울철에는 밀라노로 돌아가 지낼 수 있었다. ​​한편 파리에서 겨울을 나고 있던 율리아누스는 이듬해인 358년에는 라인 강 하류로 전선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중류와 상류에 걸쳐 위세를 떨치고 있던 알레마니족에게 356년과 357년에서 걸쳐 2년 연속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기 때문에, 이듬해는..
로마의 역사 1388 : 로마 제국 1093 ( 콘스탄티우스 황제 41 ) 로마의 역사 1388 : 로마 제국 1093 ( 콘스탄티우스 황제 41 )  ​ ​  콘스탄티우스 황제 41(제위 : 서기 337 ~ 361 )​​로마에서 거행된 마지막 개선식 (계속)​도심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 길을 지나 행렬은 포로 로마노로 들어갔다. 콘스탄티우스도 과거의 로마가 구가했던 압도적인 힘과 영광의 기념비로 가득 메워진 포룸을 보고는 말이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시선을 어디로 돌려도, 이 포로 로마노에서는 로마 역사를 장식해온 수많은 업적을 기념하는 건물과 부딪치게 된다. 그것을 보는 사람은 그 업적이 이루어진 시대를 회고하며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그 한 모퉁이에 서 있는 원로원 회의장에서 콘스탄티우스는 원로원 의원과 유력자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회의장 ..
로마의 역사 1387 : 로마 제국 1092 ( 콘스탄티우스 황제 40 ) 로마의 역사 1387 : 로마 제국 1092 ( 콘스탄티우스 황제 40 )  ​ ​ 콘스탄티우스 황제 40(제위 : 서기 337 ~ 361 )​​로마에서 거행된 마지막 개선식​제국의 수도 로마에 사는 사람들이 황제의 모습을 직접 보는 것은 무려 45년 만이었다. 서기 312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식 이후 처음이다. 도시가 건설된 해로부터 헤아리면 1110년 동안을 수도로 살아온 로마지만, 로마 제국이 군주정으로 가는 길을 걷기 시작한 70년 전부터 수도의 요인인 두뇌 역활이 로마 밖으로 옮겨져 버렸다. 세계의 수도라고 불리며 동경의 대상이었던 로마는 전제군주가 개선식을 거행하기 위해 일시적인 기분으로 찿아오는 도시가 되어 있었다.​콘스탄티우스의 로마 체류기는 현장에 있었던 한 무인의 기슬로 대신하고자..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5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5​의암 류인석 기념관​지난 주말 5월 4일 토요일, 어린이날 연휴가 시작되는 날, 세 번째로 강촌 내륙길을 주행했다. 어린이날 연휴로 경춘 가도는 차량이 만원으로 저속 운행을 하면서 긴 꼬리를 물고 지나가고 있었다. 대부분 강원도나 동해안으로 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남이 가니 나도 가야 하고 즐기는 데에는 인간들은 목숨까지도 걸고 가는 본능이 있는 법이다. 가장 흥분되고 신나고 즐거운 것은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는 경기다. 검투사 시합을 즐기던 고대 로마인들이나 오늘날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격투기 시합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은 무엇이던 서로 경쟁하여 이기는 것에 희열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 즐거움을 찿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즐기는 도중에 이 세상을 하직할 사람이 ..
로마의 역사 1386 : 로마 제국 1091 ( 콘스탄티우스 황제 39 ) 로마의 역사 1386 : 로마 제국 1091 ( 콘스탄티우스 황제 39 )  ​ ​ 콘스탄티우스 황제 39(제위 : 서기 337 ~ 361 )​​스트라스부르의 승리 (계속)​그날 알레마니족 사망자는 전쟁터에 버려진 시체만으로도 6천 명이 넘었고, 강을 헤엄쳐 건너려다가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족장 크노도마르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포로가 되었다. 로마 쪽 전사자는 대대장급 4명을 포함하여 243명이었다. 제국 후기에 접어든 이후 로마의 전쟁사에서는 오랫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기적적인 완승이었다. ​전투가 끝난 뒤 율리아누스는 포로가 된 적장 크노도마르를 만났다. 젊은 부제는 늙은 적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중한 태도로 대했다. 하지만 알레마니족 노장은 승전보와 함께 정제 콘스탄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