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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핵, 유태인' 그들은 누구이가? 19

 

'갈등의 핵, 유태인' 그들은 누구이가? 19

 

 

 

 

통곡의 벽

 

2. 유태교와 유태민족

 

'히브리'란 '떠돌이'의 뜻

유태교와 유태민족과의 관계는 확실한 선을 긋기가 애매하다. 유태교는 유태민족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았으며 유태교는 유태민족만의 종교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태교라면 유태인으로 태어나면서 즉 모태로부터 지니고 살게 되는 종교였다. 유태인 하면 유태교를 의미했다. 민족종교라는 단어의 의미로도 부족할 정도로 민족과 종교가 일체가 되어 있다. 모세가 유태인들을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끌어오면서 전한 야훼 하느님의 장황한 율법도 당초부터 하느님 백성인 유태민족만을 위한 것이었다.

 

유태인의 명칭은 아브라함과 자손들에게 붙여진 '이부리(Ivree)'였는데 여기에서 '히브리(Hebrew)'가 나왔다. 히브리란 단어는 '떠돌아 다니는 사람', 혹은 '옮겨온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앞서의 언급처럼 초기의 유태인들은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이집트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면서 '브 나이 이스라엘(B nai yisrael)'이란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이 말은 '이스라엘 자손' 혹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란 뜻이다. 원래 '이스라엘'이란 말의 뜻은 '하느님과 씨름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소극적인 선교 활동

대체로 유태인들은 선교에 소극적인데 처음부터 유태인들만을 위한 민족종교라는 인식이 뿌리내려 있었기 때문이다. 유태교의 율법에는 타민족 사람들을 강제로 유태교로 개종 시키지 말라고 되어 있다. 선교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지만 강제로 하지는 말라는 계율이다. 이 율법을 져버렸기 때문에 뒷날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이 바로 헤롯왕이었다.

 

기원전 135년 유다왕국의 '히루카누스'왕이 '이두메아'(유대남쪽)라는 작은 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주민들을 모두 강제로 유태교로 개종시켰는데 그 주민중의 한 사람이 바로 '헤롯'이었다. 헤롯은 유다왕국의 정치적인 혼란을 이용하여 당시 지배자였던 로마 황제와 원로원을 온갖 수단을 다하여 구워 삶은 뒤 자신을 왕으로 지지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집트 '클레오파트라'를 찿아가 접근하여 당시 애인이던 로마의 실력자 '안토니우스'에게 신임을 받고 로마의 실력자들과 안면을 넓히고 '안토니우스'가 실각하자 새로운 실력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재빨리 접근하여 마침내 유다왕으로 등극하는 목적을 달성한다.

 

그는 왕으로 등극한 후 유태교의 최고 대법원격인 '산헤드린'을 포함 사제들 45명을 도륙하고 그에게 굴복하지 않는 율법학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의 첯 부인과 두 아들을 죽였고 다시 얻은 부인의 아들도 죽였다. 또 장모와 처남 등 친 혈육도 무참하게 죽였고 이스라엘 왕이 태어났다는 소문에 갖 태어난 어린이들을 모조리 죽였는데 당시 아기 예수는 이집트로 피신하였다. 헤롯왕은 성전을 대대적으로 신.개축하는 등 민중들의 환심을 사려했다. 그가 기원전 4년에 죽자 로마는 세 아들에게 나라를 분활하여 통치토록하였는데 갈릴리 지방은 헤롯 안티파스에게 주어 로마 총독 아래서 통치하게 하였다. 이 아들 헤롯이 바로 예수 시대 나사렛을 포함한 갈릴리 전역의 관리자인 복음서에 나오는 '헤롯'왕이다. 살로메의 춤에 홀려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른 헤롯왕이 바로 그다.

 

그역시 아버지 헤롯 대왕 정도는 아니지만 당시 유태인들의 질시를 받은 음탕한 왕으로서 유태민족은 유태왕으로 그런 인물들이 있다는 것을 대단한 수치로 생각하고 있다. 바로 이방인들을 강제로 개종시킨 결과였다는 것이다.

 

 

기도소에서 출발한 시나고그

오늘날의 유태교는 세 개의 종파로 갈라져 있다. 정통파, 보수파, 그리고 개혁파다. 예배소는 대체로 '시나고그'라고 부른다. 개혁파 가운데 '템플'이란 명칭을 쓰기도 한다. 아주 오래 전에는 '슐'이란 명칭도 섰다. 복음서에 나오는 회당이란 곳이 초기에는 시나고그였다. 어느 명칭이나 기도소라는 뜻으로서 같은 기능을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정통파는 기도시 남여가 따로 앉는다. 기타파에서는 구분이 없다. 정통파는 기도소에서 토라를 읽을 때 연단의 성소의 궤를 향해 읽는다. 보수.개혁파는 회중을 향해 읽는다. 오르간 연주는 보수.개혁파는 성가를 부를 때 연주하지만 정통파는 안식일이나 유태교 축제일에만 오르간을 연주한다. 정통파 중에도 극우파는 아예 시나고그에 오르간이 없는 곳도 있다.

 

 

노아적인 계약의 존재

이른바 '선민의식'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던 유태인은 다른 이민족의 종교는 속으로 비하하는 마음이 있었다. 당시 이민족들은 다신교 및 우상숭배 관습이 대부분이었다. 이민족에 비해 국력과 힘이 열세했던 유태인은 이민족으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과 압력을 무척 많이 받았던게 사실이다. 그러나 신앙적인 면에서는 월등한 우월의식을 갖고 살았다.

 

그런 상대적인 우월의식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같은 창조주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 출현 이후일 것이다. 유태인들은 부인하고 있지만 많은 유태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 이전까지는 자기 신앙을 저버리기는 했어도 개종은 않하던 유태인들이었다. 그런데 기독교가 유태인 사회에 번지면서 유태교에서 이탈이 빈번해진 것이다. 기독교 개종에 대해서 차별을 벗어나고 주류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나 결정적인 역활은 '바리사이파' 유태인이던 '바울'을 포함한 초기 예수의 제자들이 모두 유태인들이었다. 기독교의 세력 신장에 눌린 것이 한 원인이되기도 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꾸준히 개종은 이루어졌다.

 

유태교의 핵심은역시 야훼 하느님과의 계약에 있으며 이는 토라가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유태인들에 따라 질적인 면에서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비슷한 형태의 또 다른 계약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바로 구약의 방주로 유명한 노아와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이것을 노아적 계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노아에 대한 하느님의 배려 내지는 언질을 말한다. 노아는 물론 유태인이 아니다. 최초의 유태인은 그보다 훨씬 뒤에 세상에 나온 아브라함이었다. 그러나 노아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고 하느님이 선택한 사람이었다. 노아적 계약은 유태민족이 아니더라도 창조주 하느님을 믿고 우상을 배격하고 이웃에 대해 선행하며 일정 수준의 윤리 도덕을 지키는 착한 사람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하느님이 보신다는 믿음이다. 즉 '하느님으로 향하는 길에는 여러 통로가 있다. 그 길을 만드는 것은 하느님만의 고유권한이다'라는 생각이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