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핵, 유대인' 그들은 누구인가? 20
통곡의 벽
3. 기독교와 유대교
기원 전후의 유태인 사회
4천 년 유태인 역사의 절반에 해당하는 2천 년쯤 예수 그리스도가 유태민족에서 태어나면서 유태 역사는 물론 세계사를 바꾸어 놓았다. 예수가 태어난 시절 유데아의 베들레헴을 비롯한 사마리아, 갈릴리 등지는 로마의 식민 통치하에 있었으며 유태인들은 자치가 허용되었지만 대단히 혼미한 상태에 있었다. 당시 유태인 사회를 구성한 계층별 그룹을 살펴보자.
우선 '사두가이파'가 있다. 사두가이파는 유태인 사회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 성전을 관리하고 성전에 희생물을 바치는 역활을 맡아 그 주변에 몰려 사는 사제들, 그리고 넓은 농토를 갖고 있는 지주들, 그리고 아주 보수적인 일부 율법 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산헤드린'이라는 일종의 최고 종교 재판소를 겸한 유태인 사회의 입법.사법 기구를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유태인들의 인식은 날이 갈수록 비판적이었고 때로는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것 같다. 지주는 점령국인 로마의 지배자들과 가까운 협력자였으며 사제들은 성전 마당을 환전상과 장사꾼들에게 돈을 받고 세를 놓았다. 그들은 성직과는 관련이 없으면서 유태인들로부터 성전 관리라는 명목으로 세금을 받아냈다. 이들 계급은 경제적으로 부유했으며 소수였다.
다음은 '바리사이파'다. 이 파에는 농부.소상인.기능공을 비롯한 일반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진보적인 율법 학자 등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이들은 바빌론에 의한 유다왕국이 멸망 후 급속히 유태인 대중 속에서 성장한 신흥 계층으로 랍비라고 주로 호칭되는 많은 신출내기 율법 학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사두가이파의 대응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영성적인 메시아의 내림을 믿고 있는 일반인 및 신흥 재야 종교 세력들의 잡다한 총칭이라 해도 좋은 듯하다. 따라서 숫적으로 보면 이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그리고 과격한 정치 성향의 집단이 있었는데 이른바 열혈 당원으로 불리는 집단으로 로마 치하에서 세를 불려나갔다. 일종의 국수주의 성향의 민족주의자들이다. 종교와 관계없는 정치.사회적인 단체로 무력으로라도 로마의 치하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려는 신념에 불타 있었다. 이들은 간간히 로마군에 대한 테러를 감행하였고 사두가이파를 민족의 반역자로 보았다. 바리사이파도 입으로만 율법 운운하는 비겁한 세속적인 그룹으로 멸시했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 '시몬'과 가리옷 사람인 '유다'가 열혈 당원이었다.
이밖에 고립된 특정 그룹으로 '에쎄네파'가 있다. 사두가이파 다음으로 소수파다. 이파 사람들은 사해에 면한 쿰란 지역 등 후미진 곳에서 자신들만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여 수도자 같은 순수한 종교적인 삶을 영위했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았으며 다른 유태인들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예루살렘은 전체 유태인들의 경제.정치.사회.종교의 핵심 역활을 했다. 갈릴리 같은 먼 곳에 사는 유태인들도 대축일 등 큰 종교적인 행사에는 예루살렘 대성전을 찿아 희생 제물을 바치곤 했다. 일반 사람들은 지방 회당을 중심으로 종교를 포함한 일상생활을 연결시키면서 삶을 영위했다.
이 시절 유태인들은 사두가이파를 제외하고는 가난했다. 전통적인 종교 행사와 성전 관리비,성년이 되면 내는 인두세, 지배자인 로마에 의한 노역과 잡다한 거주세.도로세.재산세.장례세 등 세금이 많았다.
당시 팔레스타인 전역에는 로마의 4개 군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런 2만 명이 넘는 주둔군의 유지비도 유태인들이 내야 했으며 해롯 대왕의 성전 신축 등 유태인 자치 기구에 내는 세금도 많았다.
그래서 일반 주민들은 각종 세금에 짓눌려 종교적 양반 계급인 사두가이파를 제외하면 입에 풀칠하기 위해 허덕여야 했다. 로마는 유태인 세금 징수원을 두고 유태인들의 세금을 거두고 있었는데 사사건건 크고 작은 싸움과 협박이 난무했다. 동족끼리도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이 사회 곳곳에 팽배해져 갔다.
이런 혼미한 사회 상황에서 예수가 나왔던 시기다. 새로운 차원의 새 진리를 설파하며 부조리한 기존층을 비판하면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갔다. 특권층에서 경계의 눈초리를 보낸 것은 당연하였다. 틀림없이 예수를 예언자나 메시아로 보았고 혹은 다윗같은 위대한 행동적인 리더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따른 무리들이 대다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장 무슨 수라도 일어나기를 바라는 유태인들의 절박한 현실이 그런 지도자를 원했기 때문이다.
유태인 역사 속에서 그런 식의 예언자들을 익히 보아왔다. 모세, 다윗같은 행동적인 인물들이 있었다. 기적을 일으키기까지 하는 예수를 보고 사람들은 그런 현실적인 기대가 컸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와 자기 희생의 이웃 사랑을 설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차원의 사람이 아니었다.
같은 뿌리의 새 적자(嫡子)
마태복은 첯 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시작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이러하다"로 되어 있다. 이렇듯 예수는 유태민족의 정통 적자 가족 계보를 갖고 태어났다. 족보만 보더라도 성골임에는 틀림없다.
기독교와 유태교는 예수의 족보에서 보았듯이 뿌리가 같다. 그러나 자라난 가지는 전혀 달랐다. '원죄'에 대한 개념 차이다. 기독교에서는 금단의 선악과를 따먹은 최초의 인간이 지은 잘못을 '원죄'라고 본다. 이 원죄로 인해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태생적으로 씻을 수 없는 죄의 멍에를 지고 살아야 하는 죄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죄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대신 속죄되어 인류가 그 원죄에서 벗어나게 된 것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이 원죄 의식은 기독교 교리의 가장 큰 핵심이 되었다.
그런데 유태교에서는 이 사건을 그리 대수롭게 보지 않는다. 물론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었으나 원죄 같은 것은 아니다고 본다. 유태교는 기독교처럼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엄청난 죄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런 것은 물론 큰 죄이지만 이로 인해 대대손손 원죄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9백 년 이상 자손들을 낳고 살았고 그 자손들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번성했다.
유태인들은 이 구약성경 창세기가 강조한 점은 "세상 여러곳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의 조상은 하나이며 어떤 인종도 한 뿌리에서 뻗어난 형제라는 뜻"으로만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은 그 이후에 사람이 살아야 할 법을 주셨고 그 이후부터 죄란 그 율법에 기준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의지에 따라 죄를 지을 수도 짓지 않을 수도 있다는 해석이다.
유태인이 보는 예수 그리스도
유태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태교 윤리와 유태교 전통생활에 아주 충실했던 출중한 랍비로 보고 있다. 그리고 당시 대다수 유태인들은 예수를 위대한 예언자로 보았으며 예언자관은 로마 치하에서 유태민족을 해방시켜주는 행동주의자적인 인물상이었다. 모세, 여호수아 등으로 이어진 유태민족의 예언자들이 그런 유형의 리더였다.
억눌린 유태인 군중들이 예수를 예언자라고 따르니까 로마 통치자들이 예수를 대단히 위험한 행동적인 인물이 될 것으로 생각했고 그런 연유로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이유는 군중 선동으로 로마 통치에 저항하는 모험주의적인 지도자로 비춰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복음서에는 예수를 처형한 로마 총독인 '빌라도'는 온건한 인물로 부각되어 있으나 로마 기록을 보면 실제로 빌라도는 대단히 잔인한 총독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벌레 죽이듯 죽였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은 그를 지역 총독으로 두었다가 민중 반란이 계속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해임시켰다는 것이다.
당시 십자가형은 로마의 극형에 해당했고 이미 그때까지 유태인을 비롯한 여러 종족의 저항자들 수만 명이 십자가형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당시의 유태인들은 예수가 새 종교를 만드려고 한 사람으로는 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윗의 후손답게 충실하고 경건한 유태교도로서 지냈다는 것이다. 예수는 순수한 종교적인 열정에 가득찬 랍비로 부각되었으며 유태인 사회에 간혈적으로 출현하는 예언자로 부패한 기존 정치권의 지도자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에 대한 유태인의 견해
기독교를 창설한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이며 유태교 바리사이파의 가물이엘이라는 랍비를 따른 유태교도였다. 그는 처음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했으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 눈이 멀고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한다. 그 이후부터 목숨을 내놓고 열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인이 되었고 본격적인 기독교 전도의 전위로 활약했다. 초기 기독교 성장에서 바울만한 업적을 쌓은 인물은 찿기 힘들다.
바울에 대한 유태인들의 생각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당시 예수를 따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가 유태인들로 율법을 충실히 지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스승인 예수는 죽었지만 메시아로 다시 나타나 유태인들을 해방시켜주리라는 믿음을 갖고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울은 이들에게 토라의 율법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야만 하느님에게 갈 수 있다고 선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울은 하느님으로 가는 길은 토라의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며 그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다.
바울은 토라를 철저히 지켜야만 하느님께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히려 토라는 사람들에게 있어 축복이 아니라 장애와 멍에이며, 진정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한다고 했다. 구약에 하느님은 토라를 위반하는 사람들을 벌한다고 가르쳐 야훼 하느님은 공포와 보복의 하느님이라는 인상을 일반 유태인들에게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바울의 주장은 아주 강한 설득력으로 일부 유태인 사회에 파고들었으며 그런 유태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종교로 성장한 기독교의 초기 신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아주 분명한 새로운 신앙관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바울은 유태인들 영역을 넘어 이웃 종족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전파하였다. 이 문제로 수제자 '베드로'를 비롯한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과 의견 대립도 있었다. 할례를 받고 유태교도로 개종한 후에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믿기도 했으나 바울이 이 장벽도 깼다.
어쨌던 유태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수가 없다고 한다. 유태인들은 메시아의 내림을 믿는다. 그러나 전통적인 유태교의 메시아관에 따르면 메시아는 단 한번 오는데, 메시아가 오면 세상의 불의가 없어지고 가난.고통.불화가 사라지는 그런 평화의 시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바뀌었냐고 반문한다. 그것이 메시아가 세상에 오지 않았다는 증거라는 주장이다. 물론 이상은 어디까지나 유태교인들의 주장이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기독교 탄생 이후 유태교와 기독교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왔다. 다른 길이라기보다 기독교는 세계 종교의 대종으로 성장한 반면 유태교는 게토의 한구석에서 외롭게 존명해야만 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러나 공통점이 적지 않다.
우선 신약을 제외한 성서를 함께 나누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구약성경이 유태교에서는 약간의 편집 차이는 있으나 히브리 성경이다. 창세기,아브라함,이삭,야곱 등 선조들의 기복에 찬 이야기 기록을 함께 일고 감동한다. 모세의 십계명을 굳게 믿고 지킨다. 그리고 여러 예언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사람의 가치는 귀중한 것이고 하느님의 정의와 선의 근원이며 피조물인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평화롭게 살아야 할 본분이 주어졌음을 두 종교가 함께 믿는다.
기독교도들의 주기도문도 유태교의 기르침과 다를게 없다고 한다. 결국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펼쳐지는 새 세상이 온다는 믿음도 같다. 일 주일 단위로 하루의 안식일을 갖는 점도 같다.기독교는 일요일, 유태교는 토요일로 요일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핵심적인 차이가 있다. 유태교가 하느님.하느님 말씀인 토라.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의 삼각관계를 이룬데 비해 기독교는 하느님.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백성인 크리스천의 삼각관계를 설정한다.
구약이 야훼 하느님과 아브라함 후손들과의 계약에 중점을 둔 반면 신약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새로운 계약이 성립되어 기독교 교회에 속하는 크리스천이 그 계약 당사자로 되었음을 밝힌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영역이 전인류로 확산된 것이다.
한 뿌리로의 회귀
기독교는 기원 초의 박해를 승리로 이끌어내고 마침내 세계 만민의 종교로 뿌리를 내린다. 기독교는 새 아침의 떠오르는 태양이 되었고 유태교는 저물어 가는 한밤의 초생달이 되어 존립을 위해 숨어 지내야만 했다.
예수 이후 유태인의 역사는 박해와 억압속에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온 몰골이었다. 구세주를 죽인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영겁의 죄인'으로 인식되어 종교적.사회적.문화적으로 유태인들은 근세까지 2-3류 민족으로 취급되었고 떳떳이 살 땅도 없는 유랑민 신세가 되었다.
17세기 이후 계몽주의와 인권사상의 물결 속에서 유태인들의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으나 대등한 위치를 찿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20세기가 저물어가면서 범기독교권에서 유태인들을 같은 혈통을 지닌 오랜 형제로 보기 시작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나치스 독일의 6백만 유태인 참살이 주요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 3월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이스라엘 정부는 전세계 카톨릭 교도와 유태교인들의 형제애를 되새기는 기회로 보고 성대한 환영행사를 했다. 키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범기독교권과의 이러한 화해 움직임은 새천년이 들어서면서 더욱 활기를 띠는 듯하다.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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