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핵, 유대인' 그들은 누구인가? 21
통곡의 벽
* 유태인과 한국인
유태인 저력의 뿌리를 찿아서...
1. 그들과 우리는 무엇이 다른가
각박한 자연과 온후한 자연
민족 단위로 보아 유태인과 한국인의 차이는 대체적으로 저항형과 순응형으로 대별될 수 있다. 유태민족은 저항형, 극복형, 개척형, 진취형, 능동형인 데 비해 우리 민족은 대체적으로 순응형, 수용형, 종순형, 수동형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극명한 차이는 틀림없이 두 민족의 발상.여명기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삶의 터전으로 자리잡아온 자연 풍토와 역사 환경에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유태민족이 삶의 터전으로 자리잡은 팔레스타인 지역은 자연 조건이 좋지 않았다. 유태민족은 처음부터 각박한 자연과의 싸움으로 삶의 첯 장을 열어야만 했던 불운한 민족이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누릴 수 있었던 복 받은 민족이었다.
그러나 유태인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그들의 삶 그 자체는 바로 자연과의 대결이었다. 수용이 아니라 저항과 도전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사람과 가축이 마실 수 있는 물을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작고 큰 우물을 파거나 먼 곳에서 물줄기를 끌여 들여야만 했고 그런 물길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웃 타부족과 끈질긴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어디를 가나 시원한 샘이 흐르는 한국의 지형과는 너무나 달랐다.
오늘날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초기 개척단지인 키부츠에서의 유태인들의 삶은 각박한 자연의 극복사다. 깊은 지하수를 끌어내 긴 파이프로 연결시켜 과수원과 농장에 물을 대야만 했다. 한 방울의 물이라도 아껴 정확한 시간에 적절한 양의 물이 채소의 뿌리에 닿도록 해야만 했다. 자연을 역이용하는 이른바 비닐 하우스도 처음으로 만들었다.
저항하는 개성과 타협하는 개성
유태민족이 가축을 기르며 살아가던 유목민족이라면 우리 민족은 곡물을 재배하는 농경민족으로 대조적이다. 가축을 다루는 유목민의 특징은 강하고 능동적이며 지배적인 개성에 있다. 그들은 살아 움직이는 동물들을 기르고 길들이기 때문에 땅에 씨앗을 뿌리는 행위와는 달리 능동적이며 지배적이다.
어느 동물이든 본능적인 의지가 있다. 의지가 있는 대상과의 거래에는 강한 지배력과 물리적인 힘이 과시된다. 가축을 길들이기도 마찬가지다. 가축을 모는 목자와 그 목자를 따르는 가축들은 지배와 피지배의 역동적인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유태인들은 긴 역사를 통해서 강한 자에 의한 피지배는 간헐적으로 되풀이되기도 했지만 순응적인 타협보다는 투쟁을 택했다. 그 이후 2천 년 동안의 디아스포라 시기도 같았다. 2천 년이라면 지구상의 수많은 민족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오랜 시간이다. 그러나 유태인들의 강한 개성은 주변의 동화나 수용을 거부하는 외고집으로 일관했다. 유태인들은 이집트에 가 살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주변의 대소 민족과의 투쟁사로 일관되어 있다. 유태인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했던 다윗 시대는 일종의 패권제국 같은 위치에서 이웃을 무력으로 제압했던 시기다. 전쟁보다는 외교로써 이웃 국가를 승복시킨 솔로몬 시대가 그래도 안온했다고 볼 수 있으나 이후 북의 이스라엘과 남의 유다로 나뉜 시대에도 줄곧 이웃과의 싸움의 연속이었다.
유태인들 집단 거주지인 게토도 그들 스스로가 독자적으로 만들어간 그들만의 거주 지역이었다. 그 강한 개성과 배타적인 생활 관습이 홀로코스트의 한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현재의 이스라엘 역사도 반세기를 좀 넘는 짧는 세월 동안 다섯 차례에 이르는 전쟁을 치렀다.
이에 반해 수천 년의 우리 민족 역사는 한반도와 인접한 강자와의 투쟁보다는 개성을 죽이는 타협과 양보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방 대륙의 한 끝을 차지했던 고구려나 발해의 한 시절을 제외하고는 대륙 지배 파워에 대한 적응과 순응 그리고 양보의 역사였다. 한국인들은 개성을 양보하는 것이 자신을 보존하는 순리라고 본 반면 유태인들은 강한 개성과 비타협이 자신을 보존하는 방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자연을 벗하고 강자와 타협하고 자기를 낮추면서 지혜롭게 살아온 것이 한국인이었다면 자연을 거스르고 강자와 대결하고 타협을 거부하며 거칠게 살았던 것이 유태인이었다.
독자성 창출과 수용 모방
유태민족은 대단히 독창적인 민족이다. 유태민족만큼 독창적인 민족은 찿기 힘들다. 끊임없이 자기만의 독특한 철학을 계발하고 주변과의 차별적인 독자적 생활전통을 고집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계 인류는 그런 유태인들이 만든 독창적인 사상과 생활철학의 영향을 크게 받아왔다.
우선, 유일신 사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주 하느님 한 분이 계시다'라는 유일신 사상은 유태민족을 유태민족답게 만든 모든 것이었다. 유태민족의 존재 자체가 이 유일신 사상의 실천의지 바로 그것이었다 해도 관언이 아니다. 유태인의 이 독창적인 유일신 사상은 오늘날까지 이른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유태인의 이 독창적인 사상에서 태어난 이단 종교였다.
후발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유태인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쉽게 뿌리를 내렸지만 유태인들이 유일신을 만들었을 기원전 2천 년경에는 사정이 달랐다. 유태민족 이외의 모든 여타 민족들은 다신교나 우상숭배 민족이었다. 유태인들과 이들간의 싸움에는 물리적인 생존과 함께 이런 이념적인 갈등이 주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유일신 사상 다음으로 유태인들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엿새를 일한 후에 일곱 번재 날을 쉬면서 거룩하게 보낸다는 이른바 '안식일'을 들수 있다. 이러한 안식일은 당시에 이례적인 것으로 물산이 풍부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하루를 쉬어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노예제를 운영하던 그 시절이기에 주변의 이민족들이 크게 반발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유태인들은 항상 독창적인 민족이었다. 옹고집과 비타협의 생활습관이 그런 그들만의 독창적인 사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태인들의 성공은 거의 모두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외고집의 독자적인 창출에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인들은 독창적이기보다는 절충.개량.모방형에 가깝다. 한국인들은 자기 속에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하기보다는 타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편이 유리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였던 것 같다. 이 역시 순응적인 민족정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접해 있는 이웃은 강한 선진 민족이며 따라서 앞서 있는 우월자를 믿고 따르고 모방하며 때로는 추종하고 개량하는 삶이 편하고 지혜롭다는 생활철학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처지와 맞지 않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런 문제는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조화하는 기술의 미숙에서 찿으려 했다. 중국을 대신하여 근세에는 일본에서 대부분의 수용이 있었고 지금은 미국 일변도의 모든 것을 수용하고 있다.
전통 고수와 전통 양보
유태민족과 우리 민족과의 차이는 전통에 대한 인식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두 민족은 4천 년이란 오랜 역사를 각각 갖고 있으나 그 오랜 전통문화의 유지에 있어서는 큰 대조를 이룬다.
유태민족은 민족 탄생 당시의 종교.문화를 고스란히 고수해온 세계사상 아주 희귀한 민족이다. 인류사상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던 민족들이 지금 제대로 잔존하고 있는 민족이 드물다. 그리스.로마제국, 중국, 몽고, 티무르, 인도 등 그들 민족 고유의 전통 종교와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민족이 드물다. 이에 비해 유태인은 타 민족에 비해서 특출난 면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태민족은 민족신앙과 전통문화의 유지는 끓임없는 민족 고전의 연구와 학습을 전래시키고 아무리 지역적으로 떨어져 오랫 동안 교접이 없던 상황에서도 유태인들은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통 고전의 핵심은 '토라'와 '탈무드'다. '토라'와 '탈무드'를 통하여 민족 고전을 연구하고 소화하고 생활화함으로써 전통을 지키고 주체성을 잃지 않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유별난 유태인들의 민족 서로 돕기와 혈족 의식도 이와 같은 전통 유지와 동질성의 상호 확인이 가져온 것이며 2천 년에 이르는 오랜 디아스포라 기간 동안 자신의 주체를 잃지 않고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어려운 처지의 동포를 도울 수 있었던 혈족 의식도 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천 년 이산 생활을 통하여 외모와 색깔이 완전히 바뀌어 다른 인종처럼 되었어도 같은 전통문화의 고수라는 공통분모가 같은 뿌리임을 확인시킨다. 그 한 예가 신생 이스라엘 건국 이후 흑인인 에티오피아 유태인들을 받아들인 경우를 볼 수 있다.
한국은 전통문화의 고수.유지보다 전통문화의 포기.양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고구려나 발해 시대를 제외하고는 한반도로 영토가 고착되면서 전통문화의 유지 발전보다는 외래 문화의 흡수.동화에 진력해 왔다.
한국인 종교생활 역시 같다. 토착 종교의 발전이 아니라 수입 불교에 심취하였으며 전통 종교에서 찿을 수 없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이 강하게 전달되었고 민족 신앙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신라.고려 이래로 불교가 정치권과 연계되면서 귀족화하면서 퇴폐하기 시작하였고 뒤이은 이조시대는 유교가 보편적으로 보급되면서 유교사회로 탈바꿈 하였다. 유교의 공리주의와 형식주의는 백성들의 삶을 더욱 곤궁하게 하였고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부폐가 극에 달하자 나라는 점점 쇠락의 길로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조 중엽 천주교가 전래되면서 주로 서울 남부 지방에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이조 말엽 기독교가 천주교를 뒤이어 한반도에 들어와 서북 지방에 뿌리를 내리면서 민중들에게 확산되기에 이른다. 평등사상과 사랑, 영생이라는 사상을 전파하면서 학교를 일으키고 민중들을 깨우치게 하였으나 한계에 도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이미 천주교나 기독교는 서양에서 부패한 종교요 타락한 종교이며 쫒겨난 종교였기 때문이였다.
그들이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전수해주는 것도 아니오 오직 그들의 교세 확장을 위해 위선적인 봉사와 사랑을 펼치고 정신적으로 안주하는 종교로만 역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전래 종교는 모두 잊어버리고 새로 들어온 불교, 천주교, 기독교에 심취하여 아무런 민족의 주체성도 없이 지금 이땅에 많은 무리의 종단을 형성하고 있다. 그들 종교의 사회적 역활은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주체성 없는 남의 종교에 심취하여 남의 역사를 배우고 그들의 성지를 방문하며 그들의 조상을 숭상하고 그들의 유일신을 섬긴다는 점이 뿌리가 없는 민족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서울의 한국 국악원 마당이 썰렁하듯 이미 민족문화의 뿌리를 상실하였고 동질성도 찿을 수 있는 종교도 사상도 정신적인 지주도 없다. 전통문화란 그 민족 성원을 한데 묶는 역활을 하는 접착제와도 같다. 따라서 그것이 퇴색하면 아무리 같은 혈족이라도 동포 의식이 퇴색하게 된다. 우리 역사를 보면 동족간의 분열이 흔하다. 한 몸뚱이로 묶어주는 전통문화가 없어졌기 때문이며 목적을 위해 자기것을 쉽게 버리고 남의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유태민족은 남북으로 나라가 갈라졌으나 서로 싸우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신라처럼 중국의 당나라를 불러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듯 타민족을 불러들여 같은 민족을 멸망시키는 우를 범하지도 않았다. 같은 전통을 지키는 동포라는 의식이 강하였기 때문이다.
전통문화의 퇴락은 동포 의식의 쇠퇴로 이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애족 애국심을 쓰러지게 한다. 그리고 지연.혈연에 따르는 이기주의와 분열로 발전하기 쉬우며 원칙없는 편의주의가 지배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유태인과 한국인의 차이점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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