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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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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1404 : 로마 제국 1110 ( 율리아누스 황제 12 ) 로마의 역사 1404 : 로마 제국 1110 ( 율리아누스 황제 12 )  ​ ​ 율리아누스 황제 12(제위 : 서기 361 ~ 363 )​​구조조정 대작전 율리아누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들어가자마자 황궁을 개혁한 것은 참으로 상징적인 일화를 발단으로 삼고 있었다.​율리아누스가 머리를 자르기 위해 황궁의 이발사를 불러오라고 명령했을 때의 일이다. 율리아누스가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앞에 나타난 것은 지체 높은 고관으로 여겨질 만큼 아름답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율리아누스는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면서, 내가 필요한 것은 이발사뿐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보다 다욱 아름답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무리의 선두에 서 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오면서 자기가 이발사라..
로마의 역사 1403 : 로마 제국 1109 ( 율리아누스 황제 11 ) 로마의 역사 1403 : 로마 제국 1109 ( 율리아누스 황제 11 )  ​ ​ 율리아누스 황제 11(제위 : 서기 361 ~ 363 )​​내전을 무릅쓰고 (계속) 행군 도중 갑자기 콘스탄티우스가 병으로 쓰러졌다. 주치의들은 상태가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당장 알아냈다. 아버지 대제와 마찬가지로 콘스탄티우스가 죽음을 앞두고 세례를 받아 정식으로 기독교도가 되었다. 죽음을 맞은 것은 서기 361년 11월 3일이었다.​병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처음부터 병사가 정설도 되어 있었다. 43세의 나이로 보면 너무 이른 죽음이었지만, 24년 동안이나 황제를 지낸 뒤에 찿아온 죽음이었다. 모든 결단을 혼자 내려야 하는 로마 제국 황제는 항상 격무에 시달렸고, 그래서 문제가 적은 시대에도 기껏해야 20년이 한계였..
로마의 역사 1402 : 로마 제국 1108 ( 율리아누스 황제 10 ) 로마의 역사 1402 : 로마 제국 1108 ( 율리아누스 황제 10 )  ​ ​ 율리아누스 황제 10(제위 : 서기 361 ~ 363 )​​내전을 무릅쓰고​여기서 율리리아누스는 다시 결단을 강요당하게 된다. 이번의 결단은 병사들이 바치는 제위를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라 그 제위를 지키느냐 마느냐였고, 제위를 지킨다면 내전에 호소해서라도 지킬 의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율리아누스의 속마음을 그후의 행동으로 추측해보면 다음과 같다.​콘스탄티우스는 소수의 병력으로 속공을 펼치는 스타일이 아니라 율리아누스를 토벌하기 위해 오리엔트에 집결해 있는 10만 대군을 모두 거느리고 오지는 않더라도 상당한 규모의 대군을 데려올 것이 분명하다. 그 병력과 도나우 강의 병력을 합쳐 쳐들어 온..
로마의 역사 1401 : 로마 제국 1107 ( 율리아누스 황제 9 ) 로마의 역사 1401 : 로마 제국 1107 ( 율리아누스 황제 9 )  ​ ​  율리아누스 황제 9(제위 : 서기 361 ~ 363 )​​율리아누스, 일어나다 (계속)​자신들의 수령을 방패 위에 태우고 다니는 것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했을 당시 갈리아인들의 풍속이었다.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갈리아는 완벽하게 로마화했고, 갈리아인들은 자신을 갈리아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로마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율리아누스와 함께 4년 동안 싸워온 병사들은 그곳 갈리아에서는 신참자라 해도 좋은 게르만계 야만족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로마 행정당국이 '게르마니아'라고 부른 라인 강 서쪽으로 이주한 지 얼마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이 옛날 갈리아인들의 방식으로 자기네 감정을 폭발시킨 것도 그들로서는..
로마의 역사 1400 : 로마 제국 1106 ( 율리아누스 황제 8 ) 로마의 역사 1400 : 로마 제국 1106 ( 율리아누스 황제 8 )  ​ ​ 율리아누스 황제 8(제위 : 서기 361 ~ 363 )​​율리아누스, 일어나다​아미다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받은 콘스탄티우스는 몸소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를 원정하기로 결심했다. 로마 황제가 몸소 출전하고, 게다가 아미다에서 당한 패배를 설욕하기로 한 이상,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되찿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역대 황제들도 몸소 군대를 지휘할 때는 적의 수도 크테시폰을 공략하여 적의 본거지에 큰 타격을 준 뒤에 돌아갔고, 결과적으로 북부 메소포타미아와 그 북쪽에 있는 아르메니아 왕국을 최전선으로 하는 제국 동방의 방위선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례였다. ​그러려면 우선 적이 편성할 수 있는 최소 병력인 10만 명과 ..
로마의 역사 1399 : 로마 제국 1105 ( 율리아누스 황제 7 ) 로마의 역사 1399 : 로마 제국 1105 ( 율리아누스 황제 7 )  ​ ​ 율리아누스 황제 7(제위 : 서기 361 ~ 363 )​​사산조 페르시아 (계속)​하지만 아미다 공방전에서 아미다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던 사람들은 원군이 도착할 거라고 확신했는지, 다섯 배가 넘는 적군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용감하게 계속 싸우고 있었다. 탈주하다 붙잡힌 사람 때문에 성벽 밖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적에게 알려져, 70명의 페르시아군이 느닷없이 성벽 안으로 밀려들어 온 적이 있었다. 게다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붉은 망토를 휘둘러 잠입에 성공한 것을 저들 편에 알렸고, 그것을 본 페르시아군은 맹공을 퍼부어왔다. 그들은 성문이 안쪽에서 열리기를 기대했지만, 성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잠입한 페르시아군 7..
로마의 역사 1398 : 로마 제국 1104 ( 율리아누스 황제 6 ) 로마의 역사 1398 : 로마 제국 1104 ( 율리아누스 황제 6 )  ​ ​ 율리아누스 황제 6(제위 : 서기 361 ~ 363 )​​사산조 페르시아 (계속)​아미다 공방전을 후세의 우리들이 상세히 알 수 있는 것은 그 젊은 장교의 기록 덕분이다. 그는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로마 방문을 기술할 때 소개한 바 있는 안티오키아 태생의 그리스계 로마인인 암미아누스 마르켈루스인데, 아미다 공방전 당시에는 29세 안팎이었을 것이다.​암미아누스가 페르시아군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군에 입대한 이후 줄곧 상관이었던 우르시키누스를 따라 각지를 전전했기 때문이다. 우르시키누스는 당시 로마군에서는 유명한 장수였지만, 제국 서방에서 복무한 경험은 한번뿐이고 오로지 제국 동방의 전쟁터 경험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9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9신록의 계절 5월에 잎이 만발한 느티나무 모습​​신록의 계절 5월 '가정의 달'도 어느새 소리없이 지나가고, 6월 '호국 보훈의 달'이 성큼 다가왔다. 출산율은 계속 떨어지고 부모 자식간의 사랑도 식어가고 존경하는 스승도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북한 김정은의 미사일 불꽃놀이는 계속되고 동북아 정세는 앞을 예측하기 힘들다. 북한은 러시아에 무기 지원을 해주고 미사일 기술을 이전받아 개량을 거듭하고 있다. 남으로 오물 풍선을 보내고 장거리용 방사포를 시험 발사하고 정찰 위성을 띄우려고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이 무기 개발 투자로 저절로 자멸하도록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국의 대만 침공은 언제 개시될 지도 모르고 만약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