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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1401 : 로마 제국 1107 ( 율리아누스 황제 9 )

로마의 역사 1401 : 로마 제국 1107 ( 율리아누스 황제 9 )

 


 

 

율리아누스 황제 9

(제위 : 서기 361 ~ 363 )

율리아누스, 일어나다 (계속)

자신들의 수령을 방패 위에 태우고 다니는 것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했을 당시 갈리아인들의 풍속이었다.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갈리아는 완벽하게 로마화했고, 갈리아인들은 자신을 갈리아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로마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율리아누스와 함께 4년 동안 싸워온 병사들은 그곳 갈리아에서는 신참자라 해도 좋은 게르만계 야만족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로마 행정당국이 '게르마니아'라고 부른 라인 강 서쪽으로 이주한 지 얼마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이 옛날 갈리아인들의 방식으로 자기네 감정을 폭발시킨 것도 그들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였는지 모른다. 어쨌든. 율리아누스는 야만족의 방식으로 황제에 옹립된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날의 율리아누스는 그저 깜짝 놀랐을 뿐, 방패 위에서 해방되자마자 황궁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고 이튼날에도 병사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율리나누스는 처음에는 깜짝 놀랐지만 심사숙고할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정제로 옹립되었는데 가만히 있으면, 반역죄로 문제 삼을 게 뻔했다. 환관 에우세비우스의 피둥피둥한 얼굴에 파묻힐 것 같은 가느다란 눈에 음습한 기쁨을 띠고 콘스탄티우스에게 속닥거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5년 전에도 에우세비우스는 부제 갈루스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우고, 직접 풀라의 감옥에 가서 그곳에 압송되어온 갈루스를 고문하고 참수했다. 갈루스에 이어 이번에는 동생 율리아누스다. 환관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그들 특유의 어두운 원한이 멀리 떨어진 센 강 유역까지 풍겨오는 듯했다. 과거에는 환관 에우세비우스가 쏘는 독화살을 방패가 되어 막아주었던 황후 에우세비아도 얼마 전에 죽었다. 그리고 콘스탄티우스의 누이동생인 율리아누스의 아내 핼레나도 아이를 두 번 사산한 뒤 건강을 잃고 갈리아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헬레나를 사랑한 적은 없었지만 아내로서 존중해주었던 율리아누스는 생전의 아내가 소망한 대로 아내의 주검을 로마에 매장했다. 정제와 부제를 이어주던 여자들이 둘 다 죽었으니까, 두 사람 사이는 인연의 고리가 사라지고 계속 멀어질 뿐이었다.

율리아누스는 깊은 고심끝에 마침내 결심을 했다. 병사들 앞에 나타난 그는 '아우구스투스' 정제를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서기 360년 2월의 일이다. 24세까지 일개 철학도에 불과했던 율리아누스도 이제는 28세가 되어 있었다. 관례에 따라 제위 취임을 기념하여 나누어주는 돈이 얼마였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로마식으로 황제가 된 것이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는 그날부터 콘스탄티우스에게 변명하고 타협하는 길을 찿는 편지 교섭을 시작했다. 편지에서 그는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하고, 황제 추대를 받아들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변명하고, 콘스탄티우스가 자신을 제국 서방의 정제로 인정해주기를 바랐다. 제국의 동쪽과 서쪽에 두 명의 정제가 병립하는 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 시대에 선례가 있었다. 율리아누스가 바란 것은 동쪽과 서쪽에 두 명의 정제가 병립하더라도 그 시대처럼 동방의 정제를 상위에 두는 '이두정'이었다. 그것을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처지에서 율리아누스는 편지 끝에 항상 '카이사르'(부제)라고 서명했다.

항상이라고 말한 것은 이 편지 교섭이 그후 1년 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콘스탄티우스는 페르시아와 전쟁을 준비하면서 후방 기지인 안티오키아에 있었다.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와 갈리아는 거리가 너무 멀다. 빠른 말을 타고 내처 달려도 그 사이를 왕복하는 데에는 최소한 두 달은 걸린다. 게다가 콘스탄티우스가 율리아누스의 편지를 실제로 읽었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안티오키아에서 보낸 답장은 파리에 한 통도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가 심취해 있는 아리우스파 성직자라면 만나줄까 하고, 아리우스파 주교에세 편지를 맡긴 적도 있었지만 그런 노력도 허사로 돌아갔다.

편지를 통한 탄원이 실패로 끝난 것은 콘스탄티우스가 율리아누스에게 대답할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율리아누스의 반기에 분노한 콘스탄티우스는 율리아누스를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제위 찬탈자로 단정하고 야만족 출신 장수인 마그넨티우스를 토벌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율리아누스를 토벌하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를 토벌하러 서쪽으로 가려면 우선 페르시아 왕 샤푸르와 휴전협정을 맺어야 했다. 그에게 지난 1년은 휴전 협정을 맺기 위한 기간이었다.

어쩐 조건을 붙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페르시아 왕은 콘스탄티우스의 휴전 제의를 받아들였다. 첫번째 이유는 로마 황제끼리 싸우는 것은 페르시아 왕이 바라는 바였기 때문이다. 두번째 이유는 아미다를 함락시켜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깊숙히 진격한 이상, 휴전 기간을 활용하여 그 지방에서 페르시아 세력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것을 무언의 위협으로 삼아 아르메니아 왕국을 페르시아 쪽으로 끌어들이는 데에도 로마 대군이 오리엔트에서 물러난 휴전 기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이리하여 서기 361년 봄을 기해 콘스탄티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율리이누스를 토벌하기 위해 서쪽으로 돌아갈 준비를 갖추었다.

율리아누스도 콘스탄티우스에게 계속 편지만 보내고 답장만 기다리며 1년을 보낸 것은 아니다. 그동안에도 갈리아에서 침입한 야만족을 소탕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라인 강을 두 번이나 건너가 알레마니족과 프랑크족 본거지를 습격했다. 그리고 전투에서 돌아오면 어느 도시에서든 행정관들을 소집하여 공정한 세제와 사법을 실시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1년이 지날 무렵,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선발대가 안티오키아를 떠나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