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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1400 : 로마 제국 1106 ( 율리아누스 황제 8 )

로마의 역사 1400 : 로마 제국 1106 ( 율리아누스 황제 8 )

 


 

율리아누스 황제 8

(제위 : 서기 361 ~ 363 )

율리아누스, 일어나다

아미다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받은 콘스탄티우스는 몸소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를 원정하기로 결심했다. 로마 황제가 몸소 출전하고, 게다가 아미다에서 당한 패배를 설욕하기로 한 이상,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되찿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역대 황제들도 몸소 군대를 지휘할 때는 적의 수도 크테시폰을 공략하여 적의 본거지에 큰 타격을 준 뒤에 돌아갔고, 결과적으로 북부 메소포타미아와 그 북쪽에 있는 아르메니아 왕국을 최전선으로 하는 제국 동방의 방위선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례였다.

그러려면 우선 적이 편성할 수 있는 최소 병력인 10만 명과 맞먹는 대군이 필요하다. 그와 동시에, 적의 수도가 있는 중부 메소포타미아를 목표로 삼는 이상, 적지에서 싸울 때 반드시 필요한 보급로 확보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게다가 유럽에서 온 병사들에게는 익숙치 않은 환경인 중동의 사막에서 싸워야 하는 불리함도 있었다. 총사령관인 황제의 허영심 때문이 아니라, 역시 10만 명은 필요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두 배로 늘린 로마군 병력을 계승했는데, 그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시대에도 그 병력이 그대로 존속했다면 로마군 전체 병력은 통털어 60만 명은 되었을 게 분명하다. 각 지방의 방어에 꼭 필요한 병력을 고려하더라도 10만 병력을 동방에 모으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있었다.

이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후세의 역사가들은 콘스탄티우스가 부제 울리아누스에게 병력 공출을 명령한 것을 부제에 대한 정제의 심술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서기 359년 겨울에 갈리아에 내린 황제의 명령은 부제를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1) 로마와 용병 계약을 맺고 부족별로 편성되어 로마 쪽에서 군무에 종사하고 있는 야만족 부대인 아울실리아 팔라티나 4개 부대.

(2) 다른 부대에서도 부대마다 300명씩 선발.

(3) 부제에게 딸린 근위 기마대인 스콜라이 2개 부대에서도 선발.

이들을 모두 동방으로 보내라는 것이 콘스탄티우스가 율리아누스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야만족 부대도 부족 이름을 명시하여 어느 부대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4개 부대는 모두 용병으로 알려진 부대였다. 그밖에도 일부러 '선발'이라고 조건을 달았다. '선발'이라면 정예를 뽑아 보내라는 뜻이다. 동방에 보내야 하는 병사가 모두 몇 명인지는 어떤 역사가도 정확하게 제시하는 숫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어림잡아 보기로 한다. 어림셈의 기준이 되는 것은 당시 율리아누스가 가지고 있었던 병력 2만 3천이었다는 사실과 1개 부대가 1천 명 안팎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어림하면 정제가 요구한 병력은 9천 7백 명에서 1만 명 사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2만 3천 명 가운데 1만 명인데 모두 정예 병력이다. 율리아누스 휘하에 남은 1만 3천 명은 쓰레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정예는 아니다. 이제 막 28세가 된 율리아누스가 깜짝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훈령을 제국에서 제2인자인 부제에게 전하는데, 정제 콘스탄티우스는 이유를 상세히 설명한 친서를 보내서 요청한 것이 아니라 황궁에서도 지위가 낮은 공증인을 한 사람 보내서 부제에게 알리게 했다. 그것이 정제가 부제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일개 신하에게 명령을 내리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율리아누스는 사촌형이 보내온 명령에 따를 작정이었다. 불만은 있었지만 불만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그의 처지였다.

하지만 동방으로 파견될 병사들은 따를 마음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야만족

병사 4개 부대가 강경하게 반대했다. 로마군과 맺은 계약에 따르면 자신들은 알프스 서쪽에서만 군무에 종사한다고 명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족을 떠나 머나먼 오리엔트로 가는 것은 당치도 않고 , 또 그럴 생각도 없다면서 율리아누스 앞에서 분명히 말했다. 다른 병사들도 율리아누스를 떠나 정제 휘하에 편입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4년 전 몸에 어색한 군복 정장 차림으로 병사들 앞에 나타났을 때 웃음을 참았던 병사들도 이제는 율리아누스를 진심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정제의 이번 명령도 부제에 대한 심술이라고 믿고, 자신들의 젊은 부제를 동정했다.

율리아누스는 곤경에 빠졌다. 병사들의 희망을 맏아들이면 명령 불족종이 되고, 반대로 콘스탄티우스의 명령에 따르면 야만족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었다. 이럴 때 논의 할 수 있는 살루스티우스는 해임되어 갈리아를 떠났고, 그리스 출신 철학자들도 이런 경우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었다.

율리아누스가 고민하고 있는 사이 야만족 병사들은 무리를 지어 율리아누스가 사는 황궁 앞에서 연좌 농성을 시작했다. 황궁이라 해도 임시 본거지에 불과한 파리의 황궁이다. 과격해진 병사들의 난입을 막을 수 있는 구조도 아니고, 그럴 경우에 대비해서 황궁을 지키는 사람도 부족했다.

그러면서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율리아누스는 몇 번이나 황궁에서 나와서 연좌 농성을 벌이고 있는 야만족 병사들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가족을 남겨두고 가는 것이 걱정이라면 국영 역마차를 동원하여 가족을 같이 가게 해주겠다고 제의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병사들이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또한 그들은 노숙에 익숙했다. 율리아누스의 단체교섭은 계속 실패로 끝났다.

그렇게 한 달을 허비해버린 서기 360년 2월. 엄청나면서도 사소한 일로 정황이 일변한다. 어느때 처럼 병사들 앞이 나타난 율리아누스를 한 무리의 병사들이 별안간 안아 올려 방패 위로 밀어올리고 소리쳤다.

"율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병사들은 율리아누스를 태운 방패를 전후좌우에서 둘러메고는 시내를 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율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라고 외치면서.

"율리아누스 정제!"라는 목소리는 순식간에 병사들 사이에 퍼졌고, 모든 사람들의 동의를 나타내는듯 한 목소리가 되었다. 병사 한 명이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금목걸이를 풀어, 방패 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율리아누스 머리 위애 제관처럼 올려놓았다. 그 금목걸이는 로마군에서 전공을 세운 병사들에게 주는 포상품 가운데 하나였다. 그 순간 "정제 율리아누스!"를 외치는 목소리는 로마 시대에 세콰나 강이리라고 불린 센 강 건너편까지 들릴 만큼 요란한 함성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