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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1398 : 로마 제국 1104 ( 율리아누스 황제 6 )

로마의 역사 1398 : 로마 제국 1104 ( 율리아누스 황제 6 )

 


 

 

율리아누스 황제 6

(제위 : 서기 361 ~ 363 )

사산조 페르시아 (계속)

아미다 공방전을 후세의 우리들이 상세히 알 수 있는 것은 그 젊은 장교의 기록 덕분이다. 그는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로마 방문을 기술할 때 소개한 바 있는 안티오키아 태생의 그리스계 로마인인 암미아누스 마르켈루스인데, 아미다 공방전 당시에는 29세 안팎이었을 것이다.

암미아누스가 페르시아군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군에 입대한 이후 줄곧 상관이었던 우르시키누스를 따라 각지를 전전했기 때문이다. 우르시키누스는 당시 로마군에서는 유명한 장수였지만, 제국 서방에서 복무한 경험은 한번뿐이고 오로지 제국 동방의 전쟁터 경험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진 장군이었다.

그런 우르시키누스 밑에서 군사 경험을 쌓은 암미아누스도 왕이 직접 지휘하는 페르시아 대군에는 강렬한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샤푸르는 수비하는 로마군의 사기를 꺽을 요량으로 아미다 주변 일대를 페르시아군으로 메워버렸다. 지평선까지 뻗어 있는 평원 전체가 페르시아군의 병사와 말, 인도에서 데려온 코끼리와 제후들의 깃발로 가득차 있었다. 한폭판의 화려한 대형 천막에서 제후들을 데리고 나타난 왕이 성벽을 향해 말을 타고 다가갔다. 이아다 성벽 정문에 다가온 샤푸르는 숫양을 본뜬 투구를 머리에 쓰고 있었다. 그 황금 투구에 박힌 수많은 보석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페르시아 왕과 제후와 친위대로 구성된 이 무리는 대담하게도 화살 사정거리까지 아슬아슬하게 접근했다. 성벽위에서도 황금 투구 밑에 드러난 샤푸르의 턱에 세로로 새겨진 주름까지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힘의 과시는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수비하는 로마군 병사들이 화살을 비오듯이 퍼부으며 응답했기 때문이다. 전투는 이튼날 개시하기로 결정되었다.

성벽을 사이에 둔 첫날 전투는 처음부터 격전의 연속이었고, 해가 진 뒤에야 겨우 막이 내렸다. 양쪽 모두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페르시아의 유력한 제후의 아들이 전사한 것이 페르시아 쪽을 깊은 슬픔에 빠뜨렸다. 그 젊은이는 소년기를 막 벗어난 나이였지만, 페르시아에서 손꼽히는 명문 집안에서 대를 이을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 아버지는의 비탄을 존중한 샤푸르는 장례식을 치르기 의해 일주일 동안 휴전하자고 농성 중인 수비 쪽인 로마군에 제의해왔다. 아미다의 로마군도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휴전이 끝나자 공방이 재개되었다. 로마군에서는 공격하는 페르시아 공성무기가 무척 위협이 되었다. 그 공성기는 모두 지금까지 패르시아가 공략한 로마의 요새나 도시에서 빼앗은 것이었기 때문에, 로마군은 자기네 공성 무기로 공격당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도 방어하는 로마군 병사와 주민의 사기는 높았고, 시체가 산처럼 쌓이는 것은 페르시아 쪽이었다.

그동안 우르시키누스는 에데사에서 사령관 시비니아누스를 설득하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유프라테스 강 연변의 기지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을 티그리스 강 연변의 아미다로 보내, 아미다를 공격하고 있는 페르시아군을 배후에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사비니아누스는 너무 위험하다면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도 끈질기게 요구하는 아르시키누스에게 사비니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지령서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로마군이 불리하지 않을 때만 군대를 움직이라고 쓰여 있었다. 황제의 명령이라면 우르시키누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사비니아누스는 우르시키누스를 멜리테네의 군단기지로 보낸다. 물론 그 기지의 군대를 움직이려면 사령관 자신의 지시가 있어야 한다는 족쇄를 채웠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발원지는 둘 다 아르메니아의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상류로 올라갈수록 두 강은 가까워진다. 멜리테네는 유프라테스 강 연변의 기지이고, 아미다는 티그리스 강 연변에 있다. 우르시키누스는 아미다에서 직선거리로 200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멜리테네에 있으면서도 아미다에 병력을 한 명도 보낼 수 없었다.

공화정과 제정을 불문하고 로마군에서는 전선의 사령관에게 자결권을 대폭 인정하고 있었다. 전선에서는 임기응변의 대응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 시대에는 후방에 지시를 청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결렸기 때문이다. 로마의 이런 방식은 로마군의 전통이 되어, 후세의 마키아벨리가 칭찬했을 정도다. 그러나 4세기에는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수정 시대에도 전선의 사령관에게 군대를 움직이는 데 조건을 붙인 황제는 없었다. 그런데 4세기가 되면 '전선'은 '후방'이 명령하지 않은 일에는 손을 대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후방'이 '전선'의 자결권을 제한하는 경향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책임도 지고 싶어하지 않는 소극적인 사람이 결정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기 위해서 써먹을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암미아누스는 아미다에 들어가기 전에 우르시키누스한테 협공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게 분명하지만, 아미다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우르시키누스가 이끄는 원군은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