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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1396 : 로마 제국 1102 ( 율리아누스 황제 4 )

 

로마의 역사 1396 : 로마 제국 1102 ( 율리아누스 황제 4 )

 

 

 

율리아누스 황제 4

(제위 : 서기 361 ~ 363 )

사산조 페르시아 (계속)

그로보터 2년 뒤, 페르시아 왕 사푸르는 다시 니시비시를 공격했다. 하지만 80일에 걸친 공방전 끝에 물러난 것은 이번에도 페르시아군이었다.

그리고 4년 뒤인 350년, 인도에서 온 코끼리 부대까지 참전한 세번째 니시비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때의 공방전은 무려 100일이 넘게 계속되었다. 견고한 성벽이 곳곳에 무너져 지키는 사람들도 죽을 맛이었다지만, 페르시아 쪽 희생도 엄청났다. 희생자 수가 2만이 넘자 그렇게 성미가 강한 40세의 페르시아 왕 사푸르도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왕과 군대가 서쪽 끝의 니시비시에 발목이 잡혀 있는 것을 기화로 광대한 페르시아 왕국 동쪽 변경에서 아시아 야만족이 대거 침입했다는 소식이 왕을 괴롭히고 있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는 동생 콘스탄스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갈리아를 탈취한 야만족 출신인 마그넨티우스 장군을 토벌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난제에 부딪혀 있었다. 350년에 페르시아 왕과 로마 황제 사이에 휴전협정이 간단히 성립된 것은 둘 다 이러한 국내 문제의 어려움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어려운 문제가 해결된 뒤에는 두 나라의 직접 대결이 재개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시기는 359년에 찿아온다. '아미다' 공방전이 바로 그 시작이었다.

로마와 페르시아는 여러 인종과 많은 민족을 통합한 나라라는 의미에서는 같은 제국이지만, 나라의 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군대의 구성도 달랐다. 로마는 상비군을 두고 있는 반면, 페르사아는 극히 일부만 상비군이고 나머지는 지방 영주들의 사병을 모으거나 용병을 고용하거나 농노를 징집하여 편성한다. 그래서 페르사아가 전쟁을 시작할 즈음이면 누구나 그것을 알아차린다. 일부러 첩자를 잠입시킬 필요도 없이, 오리엔트에서 오는 무역상들이 전하는 정보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면 충분했다. 그래서 페르시아 왕 샤푸르가 9년 만에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할 것이라는 것은 로마 쪽에도 알려졌다.

페르시아로서는 설욕전이었다. 샤푸르도 50세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 시대에는 50세에 무언가를 이루지 못하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이 죽는다는 생각이 보통이었다. 콘스탄티우스는 그런 사정을 고려해야 했다. 하지만 페르시아 왕보다 몇 살 아래인 로마 황제는 페르시아 군대를 맞아 싸울 준비를 게을리 했을 뿐만 아니라, 제국 동방의 방위 체제를 평상시 상태로 내버려두었다면 상당히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을 텐데, 오히려 움직이기 시작한 바퀴에 막대기를 끼워넣는 것과 비슷한 짓을 해버렸다.

(1) 콘스탄티우스의 황궁에서는 궁중관료들이 중상과 비방에 따른 희생이 일상적인 행사처럼 되어 있었다. 나라에 중대한 위기가 닥쳤는데도 그런 상태는 여전히 지속되었다. 직지 않은 수의 유능한 장수들이 황제 암살음모죄를 뒤집어 쓰고 처형되었다. 그 휘하의 많은 중견 장교들도 장군들에게 덮친 운명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병사의 수는 문제가 아니다. 중견이 없는 조직은 자기가 가진 힘도 충분히 발뤼할 수가 없다. 지휘관들을 처형한 것이 로마군의 전력 약화를 초래했다.

(2) 실전을 지휘할 장수가 없으면 안되니까, 숙청된 장군을 대신할 지휘관을 임명하게 된다. 하지만 환관에 둘러싸인 콘스탄티우스는 전쟁터에서의 능력보다 궁정관료들의 평판을 인사 기준으로 삼은 것은 당연했다.

페르시아군은 왕이 직접 지휘하는 반면, 로마의 최고사령관인 황제는 도나우 강 중류의 발칸 지방에 머물면서, 궁중 관료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은 '사비니아누스'를 동방에 사령관으로 파견했다. 오리엔트 사정을 잘 알고 오리엔트에서 실전을 경험해본 경험도 풍부한 '우르시키누스'를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을 뿐이었다. 부사령관은 사령관이 반대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위치다. 그리고 전쟁터에서는 임기응변으로 일관된 결단이 필요하다. 사령관과 부사령관의 전략과 전술이 일치하지 않으면 패배를 초래하기 쉬운 것은 당연했다.

한편 샤푸르는 하드웨어적인 면에서도 전쟁 준비를 개울리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소프트웨어적인 면에서도 준비를 철저히 했다. 안티오키아 태생의 상인으로 로마에 등을 돌리고 페르시아 쪽에 붙은 자를 가까이에 두고,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사정을 철저히 숙지했다.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은 이미 모두 성채 도시가 되어 있었지만, 원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당시 그리스인에 의해 세워진 도시들이 대부분이고 동서교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자주 오가는 지방이다. 안티오키아에 사는 그리스계 로마인이라며누 누구나 휜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샤푸르가 내린 판단이 페르시아 쪽으로 돌아선 상인의 진언을 받아들인 결과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세 번이나 공격하고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한 니시비시를 우회하여 그보다 북쪽에 있는 '아미다'로 목표를 정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