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로마의 역사 1395 : 로마 제국 1101 ( 율리아누스 황제 3 )

로마의 역사 1395 : 로마 제국 1101 ( 율리아누스 황제 3 )

 


 

율리아누스 황제 3

(제위 : 서기 361 ~ 363 )

사산조 페르시아

4세기 중엽의 이 시기에 한정해서 말하면, 메소포타미아를 둘러싼 정세는 로마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그것은 서기 297년 당시의 부제 갈레리우스가 페르시아 왕을 이기고 체결한 강화조약으로 결정된 상태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조약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은 다음 두 가지였다.

(1) 니시비시와 싱가라를 최전선으로 하고, 페르시아는 거기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북부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로마에 정식으로 양도한다.

고대 니시비시는 오늘날에는 시리아와의 국경에 바싹 붙어 있는 터키의 도시 누사이빈이다. 고대의 싱가라는 지금의 이라크 세나르이다. 이 두 도시 사이를 오늘날에는 시리아와 이라크의 국경선이 달리고 있다.

고대에도 이 항목의 의미는 중대했다. 이 조약이 체결되기 9년 전에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한번도 싸우지 않고 군대를 등에 업은 외교 교섭만으로 얻어낸 것은 로마가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는 데 대한 페르시아의 묵인이었고,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양도받은 것은 아니었다. 묵인 뿐이라면 일종의 중간 지대를 두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로마는 요새를 염주알처럼 세워서 그 일대를 방위선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양도라면 정식으로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니까 그 일대를 방위선으로 만들 수 있다.

(2) 페르시아는 티그리스 강 동쪽에 있는 다섯 지방에 대한 지배권도 로마에 양도한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흘러드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상류 전역을 모두 로마가 확보했다는 뜻이다. 요즘으로 치면 요르단과 시리아, 터키 세 나라가 서쪽과 북쪽에서 이라크를 제압하는 구도가 된다. 방위 전략상으로 로마 제국이 일찍이 한번도 누려본 적이 없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정황이었다.

그런데도 페르시아 왕이 받아들인 것은 부제 갈레리우스에게 참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기 297년의 이 강화조약에 따른 두 대국 사이의 휴전 상태는 그후 콘스탄티누스 대제 치세 말기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이나 한번도 깨지지 않고 지속되었다. 방위 전략상 로마에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승리에 자만하지 않고 방위선을 철저히 강화했기 때문이다. 방위선 강화는 로마 영토가 된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그치지 않고, 거기서 남쪽으로 연장선상에 있는 사리아와 요르단에도 종래의 방위선이 더욱 견고해졌다. 로마는 평화를 공짜로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페르시아가 언제까지나 참고 있을 리는 없었다. 조약을 맺은 뒤 40년 후에 페르시아 쪽도 반격에 나설 태세가 갖추어져 있었고, 반격을 지휘할 왕도 강인하고 유능한 샤푸르 2세로 바뀌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은 뒤 대제의 세 아들이 제국을 셋으로 나누었을 때, 동방을 맡은 것은 둘째아들 콘스탄티우스였는데 그는 페르시아의 반격을 정면으로 받게 되었다.

대제가 죽은 이듬해에 벌써 샤푸르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은 집중적으로 니시비스로 공격해왔다. 니시비시는 티르리스 강에서 서쪽으로 이틀 거리에 있고, 로마영토가 된 북부 메소포타미아는 최전선에 자리잡고 있어서 성벽을 삼중으로 둘러치고 그 바깥쪽을 다시 깊은 해자로 둘러싼 성채도시가 되어 있었다. 이런 곳을 수만 명의 페르시아군이 맹공을 퍼부었지만, 60일 동안 공격하고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났다.

6년 뒤인 서기 344년, 샤푸르가 이번에는 싱가라 공력에 군대를 투입했다. 싱가라는 니시비시에서 동남쪽으로 10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성채도시였고, 역시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로마 쪽 최전선에 자리잡고 있었다. 344년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참전하여 이틀 동안 전선에서 지휘를 맡았다. 황제가 참전한 것을 알았는지 페르시아군의 공격은 맹렬했다. 전반에는 전세가 페르시아 쪽이 유리하게 전개되었지만, 후반에는 로마군이 꿋꿋이 버티는 바람에 결국 사푸르 왕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싱가라 공방전에서 로마군에게 보기드문 불상사가 일어났다. 한창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을 때 포로가 된 페르시아의 소년 왕세자를 로마 병사들이 채찍으로 때려죽인 것이다. 흥분한 병사들이 저지른 사고였다지만, 기독교 병사들이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나라의 왕세자를 사교 신봉자라고 외치면서 채찍으로 고문하다가 죽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