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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1394 : 로마 제국 1100 ( 율리아누스 황제 2 )

로마의 역사 1394 : 로마 제국 1100 ( 율리아누스 황제 2 )

 


 

율리아누스 황제 2

(제위 : 서기 361 ~ 363 )

고대의 오리엔트 (계속)

로마 시내에서 팔고 있었던 당시의 여행용 지도에 서쪽으로는 브리타니아에서 동쪽으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도달하지 못한 겐지스 강과 실론 섬까자 그려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의 시리아와 오늘날 요르단(아라비아)이 동쪽 변방이었던 로마 제국 내부에 비해, 그 동쪽에 펼쳐져 있는 페르시아와 그보다 더 동쪽에 있는 인도를 이 지도만 갖고 여행하면 길을 잃고 행방불명이 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지도의 정확도가 떨어진다. 대부분의 로마인에게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도까지는 들어본 적은 있지만 잘 모르는 지방이아니었을까.

하지만 로마가 지중해를 내해로 만든 시점부터 이 서방과 동방의 대국은 이웃나라가 되었다. 경계선을 긋는 것도 당연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로마는 그 강대한 이웃나라를 합병할 마음까지는 없었으니까. 로마의 이웃나라에 대한 대책은 다음 두 가지로 집약된 것도 당연하다.

첫째, 외교적인 방법으로 아유구스투스와 네로, 그리고 하드리아누스가 실시한 대처법이다. 유프라테스 강을 경계로 장하고 그것을 제국의 방위선으로 강화하는 동시에 메소포타미아 북쪽에 있는 아르메니아를 친로마파 왕권이 정착하도로구 원조를 아끼지 않는다. 이리하여 동쪽 대국의 수도 기능이 집중되어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서쪽과 북쪽에서 느슨하게 포위하는 전략이 성립된다.

둘째는 군사로 성공한 뒤 유리한 조건으로 방위선을 확립하는 방식으로, 크라야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택한 노선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지 않고 계획대로 파르티아를 원정을 실현했다면, 카이사르야 말로 이 노선의 창시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원정길에 죽음을 맞았기 때문에 전쟁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그가 페르시아 원정을 떠난 목적이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확립한 방위선을 지키는 것이었으니까 콘스탄티누스도 이 부류에 속한다. 이들은 모두 군사에 자신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 두번째 노선을 택했을 경우의 전략과 전술을 살펴보면, 아르메니아 군대와 연합하여 서쪽과 북쪽에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진격하여 수도인 크테시폰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그 전과를 토대로 패배자한테서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방을 할양받아, 이 지방을 오리엔트 최전선으로 삼는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은 아르메니아 산악지방에서 발원하여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들어가 중부에 있는 크테시폰 근처에서 가장 가깝게 근접하지만 그후에는 다시 갈라져 페르시아 만으로 흘러든다. 서쪽의 유프라테스 강과 동쪽의 티그리스 강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북부 메소포타미아인데, 로마가 이 지역을 손에 넣으면 파르티아든 사산조 페르시아든 간에 동쪽에 있는 강적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략상 이렇게 유리한 곳은 없었다.

그리고 로마가 이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손에 넣으면, 그 북쪽에 있는 아르메니아가 전략상 중요성이 전보다 줄어든다는 이점도 있었다. 아르메니아 왕국의 문화와 문명이 로마보다는 페르시아에 휠씬 가깝다. 이 나라를 계속 동맹국으로 삼기 위해서 로마는 오랫동안 여러가지로 애를 썼다. 하지만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손에 넣기만 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서쪽만이 아니라 북쪽에서도 로마가 독자적으로 방위체제를 굳힐 수 있기 때문이다. 가상 적국의 중추부를 북서쪽에서 동시에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페르시아는 안심하고 잠을 잘 수가 없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굴욕적이고 방위상으로도 불리하기 짝이 없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샤푸르 왕이 선왕 시대에 감수한 이 상황을 타파하는 데 집념을 불태운 것은 그가 패르시아 왕인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북부 메소포타미아는 동방과 서방의 두 강대국 사이에 분쟁 지역이 될 숙명을 안고 있었다. 로마는 제국 동쪽 절반을 방위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그리고 페르시아는 수도 기능이 집중되어 있는 중부 메소포타미아를 적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양쪽 모두 안전보장의 이치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이 지방에서는 국제 질서라는 의미의 '팍스'(평화)가 확립되기는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