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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로마의 역사 1392 : 로마 제국 1098 ( 콘스탄티우스 황제 46 )

로마의 역사 1392 : 로마 제국 1098 ( 콘스탄티우스 황제 46 )

 


 

콘스탄티우스 황제 46

(제위 : 서기 337 ~ 361 )

갈리아의 부흥 (계속)

율리아누스는 원수정 시대에는 그 기능을 원활히 발휘하던 삼각체제가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시대에 위정자가 되었다. 율리아누스에게 관료가 가져온 증세 방안도 여느 때처럼 특별세를 거두는 것이었다. 관료들은 머리를 쥐어짜서 겨우 생각해낸 특별세의 명칭만은 그럴듯하게 붙여놓고, 갈리아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던 시기의 여파로 브리타니아에서 세금이 들어오자 않게 되었기 때문에 이 어려움을 타개하려면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다고 부제인 그에게 승인을 요구했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는 단호히 그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다음 세 가지 정책을 당장 실행하라고 명령했다.

첫째, 쓸데없는 지출을 없애고 비용을 절약할 것. 낭비는 도처에 있었다. 군사도 행정도 조직이 비대해지면 자기보존력이 작용하여 쓸데없는 부서나 비용이 늘어나는 법이다. 율리아누스는 그것을 대담하게 잘라내라고 명령한 것이다. 자신도 철저하게 검소한 생활을 하고, 갈리아의 겨울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면서 자기 방에 난방조차 하지 말도록 했다.

둘째, 세금을 공정하게 징수할 것.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부자에게는 관대하고 저소득층에게는 엄격해지기 쉬운 세리가 세금 문제를 적당히 처리하는 것을 엄격한 처벌로 견제했다.

셋째, 특별세 신설로 세금을 늘리기는커녕 기존 세금도 줄일 것. 세금이 줄어든 원인은 갈리아 동부는 야만족의 침입으로 파괴되어 생산성이 저하된 것이었다. 그런데 새로 특별세를 부과하여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들이면, 야만족 격퇴에 성공하여 평화가 돌아와도 그 지방의 활성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율리아누스의 생각이었다. 반대로 세금을 줄이면 그 지방 사람들의 노동 의욕을 자극하여 얼마 후에는 세입이 늘어난다는 것이 율리아누스의 '세금 철학'이었다.

율리아누스의 감세정책은 그때까지 25솔리두스였던 '인두세'라고 불린 세금을 7솔리두스까지 인하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이 획기적이고 대담하기 이를 데 없는 감세율이고 그 정도면 노동 의욕이 높아졌을 것이다.

이 대담한 감세정책과 병행하여 갈리아 동부의 농경지 정비 작업도 병행하였다. 땅만 있다고 농산물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농업용 수로와 홍수를 막는 제방, 저수지 등을 정비해야만 비로소 생산 기반이 된다. 야만족 침입과 내란으로 황폐해진 5년 동안, 이런 인프라가 방치되었다. 갈리아 부흥의 열쇠는 토지 생산성 회복에 있다고 율리아누스는 생각한 게 분명하다.

원수정 시대의 번영은 로마 제국이라는 광역 경제권이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팍스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전제조건이다. 북방 야만족은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을 건너 쳐들어올 뿐만 아니라, 북해에서 갈리아에 상륙하여 분탕질을 하는 부족도 있었다. 그들은 항해술이 뛰어나서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사이에 있는 도버 해협에까지 진출해 있었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의 교통이 정체된 것도 이들 야만족의 해적 행위 때문이었다.

율리아누스는 배 600척을 만들게 했다. 그 가운데 절반은 병사들이 타는 군용선으로, 해적을 소탕하는 데 쓰였다. 나머지 절반은 수송선으로 브리타니아 물산을 갈리아로 수송하는 데 쓰였다. 도버 해협에서 횡행하던 야만족의 소탕은 북해에서 갈리아 북부를 위협하고 있던 야만족의 소탕으로 이어졌다. 갈리아를 횡단하는 육로에 이어 북해에서 라인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로까지 다시 열리자, 브리타니아와 라인 강변의 도시들을 연결하는 물자 유통이 원활해졌다. 라인 강변의 도시들의 재건은 곧바로 라인 강을 오가는 배들의 안전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율리아누스는 내수 활성화를 도모한 게 아닌가 싶다.

생활이 안정되면 민심도 안정된다. 민심이 안정된다는 것은 군사력을 이용한 방위가 기능을 발휘하는 것과 아울러 인전보장 체제가 다시 가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로마의 전통적인 종합안전보장의 철학이기도 했다. 율리아누스 덕분에 적어도 갈리아에서는 150년 만에 그 체제가 재현된 것이다.

지난 4년은 율리아누스에게는 24세에서 28세의 생일을 맞을 때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게다가 사실상 그는 20세가 될 때까지 유폐 생활을 했고, 형 갈루스가 부제에 취임하여 유페 생활에서는 해방되었지만 그후에도 일개 철학도로 살았을 뿐이다. 전쟁터에서 군대를 지휘한 경험도 없을 뿐더러, 소수의 병사도 거느려본 적이 없다. 정치에도 문외한이었던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율리아누스는 어떻게 군사에도 정치에도 성공할 수 있었을까. 연구자들은 그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경험도 없는 풋내기가 갑자기 부제의 책무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었을까. 숨어 있던 재능이 발휘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숨어 있던 재능이 발휘되려면 무언가 강력한 동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그렇게까지 강력하게 움직였던 것일까.

생각하건데, 율리아누스는 자신의 책임을 자각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고양감이 그를 움직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 시기에 율리아누스가 학생 시절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리스의 제자를 자처했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나에게 맡겨진 불행한 사람들을 버릴 수 있을까? 그들에게 행복한 일상을 보장해주는 것이 이제 나의 책무일세. 내가 여기 있는 것은 그 일을 하기 위해서야.

부당한 세금 징수를 되풀이하는 것만 능사로 삼는 황궁의 무신경한 도둑놈들한테서 민중을 지키는 게 내 역활이 아닐까. 전투가 한창일 때 대대장이 자신에게 맡겨진 부서를 방기하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형뿐이네. 그리고 시신을 매장하는 것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불명예뿐이야. 대대장보다 훨씬 높고 신성한 지위를 부여받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내가 그 책무를 방기하면 어떤 처벌이 어울릴까. 신들이 나에게 이 기회를 주었다면, 그 일을 하는 동안은 신들이 나를 지켜주리라 믿네. 이 책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고뇌가 나를 덮쳐도, 순수하고 올곧은 이 자각이 나를 떠받쳐줄 걸세.

살루티우스 같은 의논 상대를 잃어서 곤란한 것은 확실하지만, 언젠가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얻게 되기를 바라면서 일을 계속하고 있네, 하지만 그를 대신할 누군가를 보내줄지 어떨지도 알 수 없네. 대신할 사람을 보내주면. 그 사람과 협력할 마음은 충분히 갖고 있지만 말일세. 그래도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하는 이 기간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라네. 혼자여서 민중을 위한 정책도 자유롭게 실시할 수 있으니까. 오랫동안 낮게 깔려 있던 사악한 구름이 조금은 갈라진 것에 불과하다 해도 말일세.>

책임감과 더불어 율리아누스가 느끼고 있던 고양감도 그가 성공한 요인이라고 생각되지만, 부제가 될 때까지 율리아누스는 철학을 공부하는 일개 철학도일 뿐이었다. 철학은 그가 좋아해서 선택한 길이었고, 20세부터 24세까지 율리아누스는 그가 부제가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좋아해서 선택했다는 것은 남에게 도움이 되려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에 충실하게 선택한 결과라는 뜻이다. 요컨데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율리아누스는 자신이 부제가 된 뒤에는 비로소 자기가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남에게 필요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는 자각은 스스로 커다란 기쁨을 느끼게 한다. 24세의 율리아누스는 처음으로 이런 기쁨을 맛보았던 것이다.

고양감은 젊은이에게 그때까지 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일까지 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일개 철학도가 전쟁에서 이겨버렸다. 할 수 없다고 믿었던 일까지도 할 수 있다는 자각만큼 젊은이에게 기쁨을 가져다주고 자신감을 안겨주는 것은 없다. 고양이란 정신이 높아지는 것이다. 경험이 적은 젊은이에게는 특히 정신의 고양이 일어나가 쉽대. 자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일을 할 수 있게 되고, 게다가 그것이 남들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을 알았을 때, 20후반의 율리아누스를 도취시킨 것은 책임감과 고양감의 칵케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것도 알프스 서쪽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일을 통해 동쪽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일은 율리아누스가 갈리아에 부임한 지 5년째에 해당하는 서기 360년에 일어난다. 24세에 부제가 된 율리아누스는 어느듯 29세를 맞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