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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1391 : 로마 제국 1097 ( 콘스탄티우스 황제 45 )

로마의 역사 1391 : 로마 제국 1097 ( 콘스탄티우스 황제 45 )

 


 

콘스탄티우스 황제 45

(제위 : 서기 337 ~ 361 )

갈리아의 부흥 (계속)

밀리노에 머물고 있는 콘스탄티우스도 부제의 공적을 인정했는지 2천 리브라(6,560킬로그램)의 은을 원조금으로 보내왔다. 율리아누스는 병사들의 밀린 봉급을 주는 데 이것을 사용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콘스탄티우스는 특별세를 거부하는 등 내정에 참견하게 된 율리아누스를 못마땅하게 여겨, 기회 있을 때마다 밀라노 정제에게 고자질하는 갈리아 고관들의 읜견도 받아들였다.

군사와 내정에서 율리아누스의 귀중한 의논 상대였던 살루스티우스를 장관에서 해임하고 밀라노로 전임 발령을 낸 것이다. 황궁에 근무하는 사람들 가운데 율리아누스가 진심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얼마되지 않았지만, 그 소수의 협력자마저 빼앗겨 버린 것이다. 목숨은 붙어 있지만 팔 하나는 잘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환관이 하는 일은 항상 이렇게 항상 음습했고,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를 결정하는 콘스탄티우스는 자기 혼자서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세간에는 남을 절반은 흘뜯고 절반은 칭찬하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사람이 있다. 그런 부류는 칭찬과 비난의 사이에서 기묘한 균형을 잡는 것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다시말하면 용기가 없는 사람인데, 콘스탄티우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다행히 울리아누스는 그런 데까지 두루 신경을 쓴 사람은 아니었다. 살루스티우스라는 한 팔은 잘렸지만, 서기 358년과 359년에 율리아누스의 활약은 눈부실 정도였다. 그가 지휘할 수 있는 병력도 1만 3천 명에서 2만 3천 명으로 늘어났다. 전투에서 이기면 병사들도 모여드는 법이다. 라인 강 하류에서 갈리아 북부 지방을 휩쓸고 다니면서 분탕질을 하던 프랑크족도 율리아누스의 과감한 공세에 밀려 갈리아에서 쫓겨났다. 그뿐 아니라 라인 강 동쪽의 프랑크족 본거지도 불태워졌다. 라인 강 동쪽에서 세력을 뻗치고 있던 알레마니족과 프랑크족은 이제 웬만해서는 라인 강 근처에는 얼씬거릴 수도 없을 만큼 큰 타격을 받았다.

우선 국내에서 적을 격파하여 국외로 쫓아낸다. 다음에는 그 여세를 몰아 적지로 쳐들어가 적의 본거지를 공격한다. 율리아누스의 이 전략은 356년부터 4년 동안 성공을 거두어, 라인 강은 옛날 원수정 시대처럼 다시 로마 제국의 '방위선'이 되었다. 라인 강을 건너 적지로 쳐들어가는 적극적인 공격도 357년부터 359년 까지 3년 동안 세 번이나 지속되었다. 원수정 시대에 방위선이 철벽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은 군단병들이 기지에 틀어박혀 야만족이 쳐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것만 아니라 자주 방위선을 넘어 적지로 쳐들어가 적을 공격하고 돌아오는 전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라인 강은 계속 방위선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율리아누스는 그 전법을 오렛만에 재현한 것이다.

이로써 젊은 부제는 장병들만이 아니라 갈리아 주민들의 마음까지도 사로잡았다. 당시 갈리아에서는 출산이 늘어났다고 하니 장래에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