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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로마의 역사 1389 : 로마 제국 1094 ( 콘스탄티우스 황제 42 )

로마의 역사 1389 : 로마 제국 1094 ( 콘스탄티우스 황제 42 )

 


 

콘스탄티우스 황제 42

(제위 : 서기 337 ~ 361 )

갈리아의 부흥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로마에 한 달쯤 머문 뒤에 다시 북쪽으로 돌아갔다. 도나우 방위선이 또다시 위험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야만족의 대거 침입을 허락하면, 막 거행한 개선식이 무색해진다. 도나우 전선에서 휘하 장수들이 야만족 침입을 물리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겨울철에는 밀라노로 돌아가 지낼 수 있었다.

한편 파리에서 겨울을 나고 있던 율리아누스는 이듬해인 358년에는 라인 강 하류로 전선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중류와 상류에 걸쳐 위세를 떨치고 있던 알레마니족에게 356년과 357년에서 걸쳐 2년 연속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기 때문에, 이듬해는 프랑크족을 대상으로 공격 목표를 바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군사적 준비에 처음만큼 많은 노력과 정력을 쏟아부을 필요는 없었다. 갈리아 와서 세번째 겨울을 나는 율리아누스도, 이 젊은 부제에게 진심으로 감복해버린 장병들도, 서로 상대방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익숙한 작업을 진행하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울리아누스는 비로소 갈리아의 통치를 생각할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모든 공직이 행정만 담당하는 민간인과 방위만 담당하는 군인으로 완전히 분리된 지 반세기가 지났다. 하지만 황제가 행정과 방위의 최고 책임자인 것은 원수정 시대와 마찬가지였다. 현대 국가에서도 군의 최고 책임자는 대통령이나 총리다. 고대 로마에서도 공화정 시대에는 집정관, 제정 시대에는 황제가 군사와 민사의 최고 책임자를 겸하고 있다.

율리아누스는 부제로서 갈리아에서 시행한 내정과 군무를 분리할 수는 없다. 물론 계절적으로는 분리할 수 있는데, 봄부터 가을까지는 야만족 격퇴전을 벌이고, 가을이 지난 뒤부터 이른 봄까지 전투에 부적합한 계절에는 내정에 몰두했다는 식으로. 서방인 갈리아,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의 총책임자인 율리아누스는 군사와 정치 양쪽에 항상 신경을 쓰지 않으면 어느 한쪽이 실패로 끝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356년~357년 사이에는 알레마니족을 격파했고, 그리고 358년부터는 라인 강 하류로 옮기지만, 첫해는 비엔에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는 비엔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상스에서 겨울을 났고, 그 이듬해에는 더욱 북상하여 파리에서 겨울을 난 것이다.

그는 군사와 정치 담당자들을 거느리고 계속 북쪽으로 정부를 옮기면서 자신의 의도를 명백히 보여준 것이다. 우선 적을 격퇴한 뒤 안전을 확보한 다음, 안전해진 지방의 행정을 재정비한다. 그리하여 갈리아와 나아가서는 제국의 서방 전체를 부흥시킬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군사와 민사 양쪽의 최고 책임자인 황제만이 실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구체적으로 율리아누스가 맨 처음 한 일은 야만족에게 파괴된 갈리아의 주요 도시를 재건하는 일이었다. 리옹, 오툉, 스트라스부르, 마인츠, 본, 퀼른, 그리고 노이즈와 크산텐. 처음 두 도시를 제외하고는 나마지 도시는 라인 강을 따라 건설된 군단기지에서 출발한 도시들이니까, 이 도시들의 재건은 곧 방위선 강화로 이어진다. 이 주요 도시들 외에도 10여 개에 이르는 성채와 요새가 재건되어 로마군 병사들이 다시 상주하게 되었다.

야만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지고, 일상 생활을 영위할 곳도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정도로 확보할 수 있으면, 다음은 자신의 노력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욕을 주민들에게서 끌어내야 한다.

율리아누스는 공정한 법집행과 공정한 과세로 그것을 실현하려고 했다. 재판제도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공정한 법집행은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대법원장 같은 지위에 있으니까, 주요한 재판에는 눈을 번득이며 주의를 기울이면 어느 정도는 개선할 수 있었다. 반면에 세금에 관해서는 확실한 정책을 내놓을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