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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1387 : 로마 제국 1092 ( 콘스탄티우스 황제 40 )

로마의 역사 1387 : 로마 제국 1092 ( 콘스탄티우스 황제 40 )

 

 

콘스탄티우스 황제 40

(제위 : 서기 337 ~ 361 )

로마에서 거행된 마지막 개선식

제국의 수도 로마에 사는 사람들이 황제의 모습을 직접 보는 것은 무려 45년 만이었다. 서기 312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식 이후 처음이다. 도시가 건설된 해로부터 헤아리면 1110년 동안을 수도로 살아온 로마지만, 로마 제국이 군주정으로 가는 길을 걷기 시작한 70년 전부터 수도의 요인인 두뇌 역활이 로마 밖으로 옮겨져 버렸다. 세계의 수도라고 불리며 동경의 대상이었던 로마는 전제군주가 개선식을 거행하기 위해 일시적인 기분으로 찿아오는 도시가 되어 있었다.

콘스탄티우스의 로마 체류기는 현장에 있었던 한 무인의 기슬로 대신하고자 한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루스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난 그리스계 로마인이다. 태어난 해는 확실치 않지만, 서기 330년이 일단 정설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율리아누스와 동년배가 된다. 상업도시 안티오키아에서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교역에 종사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는 군대를 택했다. 게다가 성년에 이르자마자 군대에 들어간 모양이다.

그는 상류층 출신이기 때문인지, 처음부터 장교 대우로 출발했다. 제국 동방에서는 유명한 장수인 우르시키누스의 참모가 되어 이 장군이 서방에 불려가면 도나우 전선으로, 동방으로 보내지면 유프라테스 전선으로 전전하면서 40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했는데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민간인 생활을 시작한 뒤에는 제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로마에도 머물렀다.

민간인 생활을 하기 시작한 뒤부터 그는 저술 활동을 시작했다. 타기투스는 <동시대사>를 서기 96년에 중단했는데, 그 이후를 자기가 계속 쓰겠다는 웅장한 의지를 가지고 로마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스 역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대의 역사가들은 이런 릴레이식 역사 기술을 당연히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타기투스의 저작과 마찬가지로 암미아누스의 <연대기>는 총 31권으로 모두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앞부분 13권이 완전히 사라졌다. 다만 갈루스 부제 시대인 서기 353년부터 378년의 하드리아노폴리스 참패까지 25년에 대한 기슬은 남았다. 이것은 저자 암미아누스에게는 '동시대사'이고, 따라서 그의 저술은 문자 그대로 '동시대인의 증언'이다. 아무리 그리스어와 라틴어가 함께 쓰인 로마 제국이라 해도 그리스계 로마인인 암미아누스에게는 그리스어가 모국어었을 텐데, 그는 라틴어로 책을 썼다. 로마 제국 상류층의 교육관에 따라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함께 습득했기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릴레이 저술의 첫 주자는 라틴어 산문의 명수로 알려진 타키투스다. 그의 뒤를 잇는 이상은 역시 라틴어로 써야 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암미아누스는 오랜 군대 생활로 라틴어에 익숙해져 있었다. 로마 제국은 황제의 포고령에도 두 언어를 병용하여, 동방에서는그리스어를 서방에서는 라틴어를 사용했지만, 군단에서는 오로지 라틴어를 사용했다.

군인 출신이지만이 역사가의 문장은 나쁘지 않다. 정교한 문체는 아니지만, 무인답게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적다. 로마 제국 최후의 역사가로 평가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암미아누수가 수도 로마를 방문한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수행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면, 지금부터 읽게 될 서술은 27세의 젊은 장교의 눈에 비친 정경이다.

<서방에서도 동방에서도 아직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우스는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을 것처럼, 적은 모두 격파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처럼 로마를 방문하여 개선식을 거행할 마음이 들었다. 개선이라 해도 그것은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으로 시작되어 같은 로마인끼리 피를 흘린 결과일 뿐이다. 로마의 전통에 바탕을 둔다면 그가 개선식을 거행할 자격은 없다. 그는 자기 힘으로 외적을 이긴 것도 아니고, 이겼다 해도 그것은 휘하 장수들의 공적 덕분이다. 위험한 전쟁터에서 그가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도 개선식은 거행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중략)......

개선식 준비에는 많은 사람과 돈이 투입되었다. 북쪽에서 로마로 가는 행렬은 로마 성벽으로부터 130킬로미터나 남아 있는 지점부터 연제라도 싸울 수 있는 전투 대형을 짜고, 무장한 병사들이 길을 가득 메우며 끝없이 이어졌다. 길가에 늘어선 사람들은 오랜만에 보는 이 구경거리를 환호와 박수로 맞이했다. 그들 눈이 전차를 탄 황제에게 쏠린 것도 당연했다.

수도의 성문은 멀었는데 원로원 의원과 로마 귀족들이 모두 마중을 나왔다. 그들은 옛날의 영광을 질질 끌고 있을 뿐이지만, 콘스탄티우스는 그들의 정중한 마중을 받고 지극히 만족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배후에 모여 있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황제는 황금에 새겨넣은 수많은 보석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이는 전차를 타고 그 군중 속을 나아갔다. 그 전차의 앞뒤에는 보라색 바탕에 금실로 용을 수놓은 황제기가 바람에 펄럭이면서 뱀처럼 구불거리며 이어진다. 전차의 양 옆에는 2열 종대의 병사들이 오늘을 위해 번쩍번쩍 윤이 나게 닦은 흉갑과 방패를 번쩍이며 행진한다. 기병대는 온몸에 쇠갑옷을 덮은 모습이다. 인간이라기보다 프락시텔레스(고대 그리스 조각가)가 만든 동상 같다.

이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나아가는 콘스탄티우스는 군중이 요란하게 환성을 지르는데도 전차 위에 선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시종일관 신하를 앞에 둔 군주의 모습을 허물어뜨리지 않았다. 전차가 너무 높게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키가 작은 그도 아치문을 지날 때마다 고개를 숙여야 했다. 로마인은 가도에 아치식문을 만들어 장식하기를 좋아해서 가도에는 여러 개의 아치문이 곳곳에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콘스탄티우스의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전차가 나아가는 동안 황제는 줄곧 전방을 향한 채 좌우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목이 움직이지않는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보였고, 저건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동상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면 모두가 믿었을 것이다.

전차 바퀴 하나가 갑자기 기울어졌을 때에도 그는 자세를 허물어뜨리지 않았고,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행진 하는 동안 침도 뱉지 않았고, 입도 움직이지 않았고,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이것이 본질적으로 내성적인 그의 태깔이었다. 그는 이렇게 계속 부동자세를 취하는 것이 그만이 차지하고 있는 높은 지위를 누구나 알 수 있는 형태로 보여주는 최선의 표현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제위에 있는 동안 자기가 타는 마차에는 아무도 동승하지 않았다. 또한 그가 차지하고 있는 공직을 절대로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았다. 과거의 황제들은 이런 일을 아무 문제도 없이 하고 있었지만, 그의 병적인 허영심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행렬이 로마에 입성했다. 인간의 모든 역량을 쏟은 제국의 성지 로마에 들어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