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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4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4

의암 류인석 기념관 주차장에서

4월 27일, 토요일 아침 10시경 호평동에서 강촌으로 출발했다. 지난번에 소개한 주행 코스로 두번째 강촌 내륙 도로를 주행하기로 했다.

호평동에서 마치 터널을 넘어 가는데 중년의 자전거족 몇 사람이 천천히 달리고 있다. 한 젊은 여성이 로드를 타고 빠르게 추월해서 지나간다. 산책하는 사람들이 터널을 오가는데 검정색 옷을 입고 자전거 차선을 버젓이 걸어간다. 나는 나이 때문인지 고글을 벗어도 터널 안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터널은 조심조심히 가지 않으면 차선을 걸어가는 검정 물체는 위험하다. 마치 터널에는 봄.여름.가을.겨울을 나타내는 조명으로 각종 모양의 색깔 조명을 설치하여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많은 돈을 들였을 것인데 이런 눈요기보다 터널을 좀 밝게 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램이다.

토요일이라 자전거족이 더러 보이지만 청평과 가평으로 가는 길에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그리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청평을 지나 유스호텔이 있는 근처 공원 그늘에서 쉬는데 나이드신 어른 두 분이 자전거 업체에서 파는 전기자전거를 타고 다가왔다. 내 자전거를 보더니,

"이거 모타 설치하는데 얼마요?"

"예, 약 150~200 만원 정도 듭니다"

가격을 물어본 다음에 가는 거리가 궁금했는지,

"이거는 얼마나 멀리가요?"

"예, 모타와 밧테리에 따라 달라지는데, 1~2단으로 가면 약 100~140킬로미터 이상 갑니다."

"음~~ 멀리가네"

"내 자전거는 청평을 겨우 갔다온다오."

자신의 자전거가 멀리 가지 못하는 것이 불만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내 나이를 묻자 대답했더니

"아직 청춘이구먼, 좋을 때야!"

자신들은 나이가 88세, 90세라고 했다.

모타 성능과 밧테리 용량에 따라 갈 수 있는 거리가 달라진다는 의미를 이야기했으나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두 어르신이 보기에 무척 건강해 보인다. 해방과 한국 전쟁을 겪고 월남전 시대까지 지내온 사람들로 그런 혼란과 격동기에 목숨을 희생당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오신 대단하신 어르신들이다. 자신들은 일제 시대 일본말을 배웠다며 서로 일본말을 하면서 나에게 자랑한다. 누구에겐가 자신들의 위대한 역사를 이야기 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과거를 이야기하며 회상에 젖는 듯하다.

일제 앞잡이로 활동했는지, 아니면 독립군으로 활동했는지, 월남전에 참전했는지, 한국 전쟁에는 참전했는지, 아니면 반공포로로 석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건강한 모습으로 보아 보훈 연금을 받으며 자전거를 타면서 노후를 여유있게 보내는 듯하다. 어르신들 이야기를 조금 듣다가는 이야기가 끝없이 지속될 을 같아 출발 준비를 하면서,

"저는 출발하겠습니다! 건강하십시요"하며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며 영광스럽고 찬란했던 자신들의 과거 무용담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사실 노후는 무척 외롭고 쓸쓸하며 같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야기 상대가 필요한 분들이 노인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마 나도 저 나이가 되면 나같은 사람을 보고 "좋을 때구먼!" 하고 나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대화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노후는 자신이 살아온 위대한 과거의 아름답고 달콤한 열매를 따먹으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강촌가는 도중에는 아침 일찍 출발한 자전거족들이 군데군데 쉼터 나무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다. 벤치에 누워있는 사람도 있고 얼굴은 지친 표정이 역력하다.

중년 사람들은 전기자전거를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다. 전기자전거가 무슨 운동이 될까. 자신은 아직 건재하기 때문에 자존심 상하게 전기자전거를 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만용이다. 더운 여름철 일반 자전거로 아이유 고개나 깔딱고개, 벗고개나 서후고개, 중미산 고개, 남산, 북악, 화악산 등을 능히 오를 수 있다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못하고 무리하게 고개길을 억지로 오르면 무릎이 고장나는 경우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무리한 주행은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는 말이다.

요즘은 전기자전거가 대세다. 중년 이상 나이드신 분들이 전기자전거를 타면서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 힘들고 어렵던 오르막도 쉽게 오를 수 있고 속도도 빠르게 달릴 수 있다. 그래서 자전거길에는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나이드신 어른들은 물론 심지어 젊은 친구도 많다. 과속은 사고로 직결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피드의 쾌감에 중독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젊은이 중에는 오토바이 같은 전기자전거나 대형 퀵보드를 타고 무섭게 달리는 사람이 많다. 불법과 과속, 규정 위반, 안전을 위해 자전거 도로에 '자전거 경찰'을 운영하는 시스템이 절실해보인다. 어느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모습을 잠깐 보았는데 전국으로 확대했으면 한다.

강촌을 지나 403번 도로를 타고 방곡리와 창촌리를 지나 소주고개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터널로 가지 않고 옛날 고개길로 올라갔다. 도로를 확포장하면서 새로 소주터널을 만들어 차량이 다니고 있지만 난 터널 주행이 너무 무서워 안전하고 조용한 구소주고개길로 다니고 있다. 한참을 올라 고개 정상에서 다다렀지만 쉬지 않고 바로 반대편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면 차량이 다니는 원래 도로와 만나는데 신호를 받고 좌회전하여 후동리를 지나면 발산면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좌측 추곡리 방향은 춘천.홍천 방향으로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는 충의대교 방향인 남면 마곡리로 가는 길이다.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충의대교 방향으로 가다가 충의대교 입구에서 다시 우측으로 가면 가정리와 방하리로 가는 길이다. 이 길로 가다보면 의암 류인석 기념관이 나타난다.

한참을 달려 기념관 주차장에 들어가 나무 그늘에 자전거를 세우고 경계석에 앉아서 음료를 마시면서 한참을 쉬었다.기념관 주차장에는 몇 대의 차량만 보이고 무척 한가하다. 버스가 한 대 있는데 학생들이 타고온 모양이다. 기념관은 문을 열었고 학생들이 분주히 오가는데 아마 보물찿기를 하는 모양이다.

그곳에 앉아 의암 류인석을 생각해본다. 한말 나라가 일제에 병합되기 전후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한마디로 나라가 망하기 직전, 김씨 세도정권의 부패와 무능, 흥선과 고종, 민비의 세력 다툼 속에서 나라의 혼란이 극에 달하는 시대를 살았던 그는 왜 '의병 항쟁'이라는 고난의 길을 선택한 것일까. 이런 혼란기에 충(忠)을 배우고 의(義)를 배웠던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의병 봉기에 앞장섰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당시 외국인과 일본인들의 건의를 받고 고종이 공표하고 조치한 칙령, 즉 '단발령'이 발령되고 강제적인 시행에 들어가자 백성과 유학자들은 강력하게 반발하였고, 그것은 바로 전국적인 의병 봉기의 단초로 이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단발령 : 유교의 상징, 상투를 자르다.

단발령은 고종 32년 김홍집 내각이 1895년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에 공포한 성인 남자의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머리를 하라는 내용의 고종 칙령이었다. 고종에게 서양인과 일본인들의 단발 건의 이후 당시 내무부대신 유길준 등의 상주로 전격 단행되었다.

당일부로 고종과 황태자 순종은 솔선수범하여 머리를 자르고, 내무부대신 유길준은 고시를 내려, 관리들로 하여금 칼과 가위를 가지고 도성 거리나 성문에서 백성들의 머리를 깍게 하여 이를 직접 지도 감독했으며,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그러나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는 당대의 성리학자들의 격렬하고 강력한 반발로 1897년(건양 2년)에 일단 철회되었으나, 1900년(광무 4년) 이후 광무개혁을 준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다시 부활, 전국적으로 단행되었다. 그러나 1906년(광무 10년)까지도 지방에서는 단발에 호응하지 않자 '군수삭발령'이라는 새로운 규정을 공포하였다.

최초의 단발자는 고종 이전의 개화파들이고, 1885년 청나라에 망명 중인 개화파 정객 윤치호가 스스로 자기 머리를 자르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900년 이후 단발은 조선 각지로 전파되었으나, 그 반발이 심하여 1930년대까지도 단발을 거부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단발령의 여파로 여성 단발도 시행되었는데, 최초의 여성 단발자는 사회주의자 겸 독립운동가 허정숙이었다.

단발령이 실시되고 열흘 간 당시 도성과 경기도에 머물러 있던 지방 사람들은 단발령이 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산골로 숨거나 서둘러 귀향하였고, 미처 피하지 못해 강제로 머리를 잘린 사람들은 상투를 주머니에 넣고 통곡하면서 도성을 떠났다.

단발령에 대한 공포감으로 백성들은 이를 두려워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손님조차 찿아오는 것을 사양하였다. 또한 야밤을 이용하여 지방으로 도피하거나 산골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었다. 호응이 적자 한성뿐만 아니라 지방에 '채두관'을 파견하여 통행인은 물론 민가에까지 들어가 강행하였다.

당시 내세운 단발령 이유는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즉 조선의 근대적 개혁을 내세우기 위함이었다. 고종과 태자가 솔선수범하여 머리르 짜르고 관리와 백성들에게 단발하도록 했으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많은 사대부와 유학자들은 '손발을 자를지언정 두발은 자를 수 없다'고 분개하여 정부가 강행하는 단발령에 완강히 반대하였다.

백성들은 '머리를 길러 상투를 트는 것이 인륜이 기본인 효의 상징'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것은 살아 있는 신체에 가해지는 심각한 박해로 받아들였다. 일부 성리학자들은 '목이 잘릴지언정 머리는 내놓을 수 없다'고 맞섰다.

김홍집 내각은 이른바 친일내각이라는 오해를 받고 있었으므로 '음력 폐지'와 '단발령' 등은 모두 배후에 일본인이 조종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는 내각에 대한 반감으로 확대되었다.

당시는 조선은 동학농민운동과 뒤이은 청일전쟁으로 온통 쑥대밭이 되어 있었고 급기야 1895년 10월 8일에는 명성황후가 무참히 시해당하고(을비사변), 넉달 후인 1896년 2월 11일에는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아관파천)등이 일어난 시기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단발령 강요에 대한 백성들의 반감은 개화 그 자체를 증오하는 감정으로까지 발전하였고, 또 단발령이 일본을 본따 만든 제도라는 인식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그것이 반일 감정으로 이어졌다. 백성은 더욱 단발령에 대해 반대하고 의병을 일으켜서 정부의 단발령 보급 정책에 대항하였다. 단발령으로 촉발된 분위기는 전국 각지의 '의병 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을미사변과 함께 의병운동의 결정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단발령이 강행되자 정감록 비결이 딱 들어맞는다는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하였다. 이에 단발령으로 인해 양반과 상놈이 구별되지 않아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괴담도 전국적으로 유포되었다.

무명고개 정상

의암 류인석의 정신 세계관을 살펴보자. 문집 '우주문답'에 써놓은 마땅한 세계질서는 다음과 같다.

그는 중국을 제왕이 다스리는 것은 천지 개벽 이래 세워진 대일통의 규범이며, 중국이 외국을 통할하고 일국이 만국을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바끌 수 없는, 올바른 이치라고 주장했다. 그 증거라는 것이 하늘이 낙서를 내려주어 구주를 다스리게 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백성들이 나라의 일을 의논하는 것은 천하에 도가 없기 때문이며, 국민들 대표하는 의원들이 국회를 구성하고 법을 논의하는 것은 도를 없애고 기강을 그르치는 것이라고 분명히 써놓았다. 그리고 가장 중국다운 것은 황제로서 대통을 세우고 공자로서 종교를 삼으며 오륜을 지키고 전통적인 의발을 중용하는 것이라고 써놓았다.

류인석은 정치에서 두 가지를 가장 중요시 했는데, 법치를 하지말고 선정을 배풀라는 것이며 정전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나라를 위해서 도. 덕. 학 .정. 형. 문.무를 강조했다. 그는 삼강오상의 도를 근본으로 하여 육경과 사서를 강학하여 도덕을 이룰 수 있다고 했고 이로써 옛날의 이상적인 통치를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복고를 통해 강국이 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서 삼대의 학제를 회복하고 그것을 준수하는 것을 들었다.

이러한 류인석의 정신 세계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두가지로 살펴본다.

류인석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류인석은 의병장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장기적으로 투쟁한 인물이다. 그는 을미의병 때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항전했고, 고종의 아관파천을 단행한 뒤 의병 해산 칙령을 내리자 거의 대부분 의병장들이 의병을 해산하였으나 그는유일하게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투쟁을 지속하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했다.

이후 1907년 고종이 퇴위하고 대한제국군이 강재 해산되자, 그는 연해주로 망명한 뒤 이범윤 계열과 최재형 계열의 극심한 대립으로 분열해버린 독립운동세력을 통합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고, 이는 성과를 거두어 13도 의군이 창설되어 잠시나마 통합된 조직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추진하게 했다. 그후 한일병합이 선포된 뒤 일제의 압력으로 인해 연해주에서 무장투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서간도로 이주한 뒤 후학을 양성하며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다 끝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류인석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류인석은 자신의 최고 신념이었던 위정척사까지도 더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된 1910년대 이르러서도 봉건적 복고 세계관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그것만이 정의이고 반드시 구현해야 할 사회 정의이자 진리라는 고집을 꺽지 않았다. 최익현보다도 더 극단적인 복고를 외쳤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체적으로 격동의 시대에서 뒤쳐지고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신의 길만 고집하다가 실패한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신분제도, 중화사상 지지로 비판받으면서 그중에서 위선적인 행동과 위법행위를 저지른 것에 대해 가장 심한 비판을 받는다. 먼저 관찰사 김규식, 천안군수 김병숙, 평창군수 엄문환 등을 단발령을 시행한 죄로 처형한 것이다. 그가 중화론적 세계관을 고수하고 개화를 극도로 증오한 것을 고려해 볼 때, 그가 관리들을 처형한 것은 모순적인 행위가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이 세 관료가 단발령을 강행했다는 것 자체가 인륜을 파괴하고 조선을 금수의 세상으로 만드는 최악의 범죄 행위로 보았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단발령은 중화 질서를 유일하게 간직한 조선을 서양 오랑캐와 비슷하게 격하시키는 것이고, 공명과 주자가 이어온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비록 존왕양이를 숭상하는 입장이지만 고종의 연호인 '광무'와 순종의 연호인 '융희'를 개화파가 붙여준 이름이라는 이유로 단호히 거부했던 그 였기에 왕이 임명한 관료라는 사실보다 단발령을 시행해 조선을 금수로 만들어버린 자들을 처단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그러나 이런 류인석의 위선적인 행동과 위법적인 행위는 당시에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정부의 명령을 받고 시행한 단발령을 두고 관료를 처형한 것은 정당성 없는 반역에다 살인 행각일 뿐이다. 이것은 존왕양이 정신의 척화사상에 위배된다. 그는 동학도를 배척했으면서도 자신도 동학도와 같이 지방관료를, 그것도 악질 탐관오리가 아닌 황제가 임명한 일반 관료를 함부로 처형하였기에 같은 척사파이자 존왕양이파인 최익현보다 도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또 의병활동 당시 평민 출신 의병 지휘관인 김백선을 독단으로 처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백선은 상관인 안백선이 '대장을 옹위해야할 소임 때문에 병사를 함부로 뺄 수 없다'며 지원군을 보내주지 않아 크게 패하자 안백선 면전에서 칼을 빼들고 항명하다가 이를 본 인접부대 지휘관인 류인석이 그를 군기 문란죄로 처형하였던 것이다.

아무리 칼을 빼들고 항명했다지만 직속 상관도 아닌 인접 부대장이 나서서 처형한다는 것은 정당성이 없다. 이것은 직권남용이다.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아야 하지만 재판도 없이 처형한 류인석의 행위는 사적인 제재와 살인에 해당한다. 그는 "그대는 본시 한낱 포수에 불과한 상민이거늘, 어찌 분수를 모르는가? 여봐라! 저자를 군령위반죄로 다스려 포살하라" 면서 의병들이 보는 앞에서 이를 그대로 이야기하며 처벌했는데, 이는 평민 출신인 김백선을 군령위반보다는 평민 출신과 양반이라는 신분제를 중시한 류인석의 한계가 강하게 드러난다.

유교 이상국가 건설을 주장했던 정도전이 설계하고 이루어진 조선이라는 나라의 지식인인 류인석은 시대의 흐름을 인지 못한 채 복과주의와 중화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그릇된 신념에 불타버린 한여름의 불나방같은 생을 살다간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오늘 그의 기념관 주차장에 앉아서 그를 되돌아보았다. 그는 시대의 변화를 인지 못하고 보수적이며 봉건적인 사고에 함몰된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며 저돌적이며 고집불통형의 삶을 살다간 사람이라 생각된다. 자신의 주장을 너무 강하게 표출하고 자신만이 옳다는 사고로 점철된 불꽃같은 생을 살아간 사람이다.

역사는 이런 사람이 있어서 역사를 장식하고 이야기거리를 만드는지도 모른다. 오늘 내가 신나게 자전거 주행을 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사람의 충(忠)과 의(義) 덕분에 독립운동과 의병의 고장 가정리의 충효로를 지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충이 무엇이고 의가 무엇인지, 조선의 마지막 몸부림처럼 보이는 그의 삶을 돌아보며 나의 가슴에 스며오는 잔잔한 슬픔과 분노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는 의암 류인석의 삶과 비교하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졸렬한 삶을 살아왔다. 물론 그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목련같은 꽃이지만 빠르게 꽃잎을 떨어뜨리는 목련처럼 짧고 굵은 삶을 살다 갔다. 그러나 나는 가늘고 길게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기생충처럼 양식만 축내다가 사라질 내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다. 의암은 충과 효, 의(義)를 유교의 대표적인 정신을 품고 고집스럽게 살다 간 사람이라면, 나는 어떠한 이상과 꿈도 없이 그리고 아무 것도 제대로 이룬 것이 없는 보통 사람에 불과한 삶을 살아왔기에 내 자신이 부끄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