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로마의 역사 1386 : 로마 제국 1091 ( 콘스탄티우스 황제 39 )

로마의 역사 1386 : 로마 제국 1091 ( 콘스탄티우스 황제 39 )

 

 

콘스탄티우스 황제 39

(제위 : 서기 337 ~ 361 )

스트라스부르의 승리 (계속)

그날 알레마니족 사망자는 전쟁터에 버려진 시체만으로도 6천 명이 넘었고, 강을 헤엄쳐 건너려다가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족장 크노도마르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포로가 되었다. 로마 쪽 전사자는 대대장급 4명을 포함하여 243명이었다. 제국 후기에 접어든 이후 로마의 전쟁사에서는 오랫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기적적인 완승이었다.

전투가 끝난 뒤 율리아누스는 포로가 된 적장 크노도마르를 만났다. 젊은 부제는 늙은 적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중한 태도로 대했다. 하지만 알레마니족 노장은 승전보와 함께 정제 콘스탄티우스에게 보내졌다. 그후 그는 로마로 보내져 첼리오 언덕에 있는 병영에서 여생을 마쳤다.

사실 스트라스부르 전투에서 율리아누스의 로마군이 처음에는 적의 위세에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다. 좌익의 세베루스가 숲에 매복하고 있는 숨은 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천천히 전진하다가 습격을 당하기 직전에 적의 일부가 참지 못하고 먼저 숲에서 뛰쳐나오는 바람에 매복하고 있는 적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기적적으로 적의 기습을 알아차리고 대처하는 바람에 패배를 면할 수 있었고, 로마군 우익의 기병대가 적 기병대와 접전을 벌이는 순간 적 기병 속에 경기병이 숨어 있다가 로마군 기병의 말에 창을 찌르고 던지며 기습 접전을 벌이자 로마군 기병이 일순간에 무너지면서 뒤로 도망쳤던 것이다. 또 중앙의 보병은 중앙이 둘파되어 로마군 전열이 두동강이 났고 각개격파되기 직전에 후위의 정예 보병이 전진하여 구멍을 메우면서 간신히 버텨주었기 때문에 시간을 벌게 되었고, 그리고 율리아누스가 죄우 전열을 신속히 돌아다니며 중앙의 전위 보병들에게 강한 어조로 용감히 싸울 것을 주문하였고, 또 뒤로 도망치는 기병들에게 호통을 치면서 적과 마주하여 싸울 것을 강력하게 주문하였기 때문에 기병들이 다시 전열을 갖추고 반격을 가한 것이다. 중앙이 돌파되고 기병이 도망쳐버리면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포위될 것은 뻔한 결과로 이어졌을 것이며 결과는 로마군의 참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좌익의 세베루스가 적 우익을 격파하고 적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면서 로마군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적적인 대승을 거둔 것은 율리아누스에게 그때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는 엄청난 힘을 주었다. 부하 장병들에게 그는 이제 영웅이었다. 율리아누스는 그것을 활용하여 승리의 여세를 몰아 계절적으로 아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라인 강을 건너 적지로 쳐들어간 것이다. 적지라 해도 100년 전까지는 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게르마니아 방벽' 안쪽이다. 로마군의 요새나 성채가 곳곳에 버려진 채 남아 있었다. 적지에 쳐들어갈 수는 있어도 적의 본거지를 공격할 시간 여유나 병력 여유는 없었지만, 옛날 로마 제국의 영광의 흔적을 보는 것만으로도 율리아누스에게는 결코 헛된 일은 아니었다. 야만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그는 이제 어엿한 로마 제국의 '임페라토르'였기 때문이다.

알레마니족의 본거지를 야만족도 무색할 만큼 거칠게 휩쓸고 다닌 율리아누스와 로마군은 가을이 찿아오자 다시 라인 강을 건너 서쪽으로 돌아온다. 서기 356년과 357년에 걸친 겨울을 동계 숙영지로 결정한 루테티아(오늘날 파리)에서 보내기 위해서였다.

부제 율리아누스가 라인 강변을 무대로 알레마니족과 용감히 싸우고 있었던 서기 356년부터 357년 사이에 정제 콘스탄티우스도 도나우 강변에서 외적을 격퇴하여 제국을 방위하는 로마 황제의 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도나우 강변의 적은 원수정 시대부터 로마의 국경을 위협해온 사르마티아족과 콰디족이었다. 따라서 야만족을 상대로 싸운 것은 정제와 부제가 같았지만, 울리아누스는 항상 전선에 있었던 반면 콘스탄티우스는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진 밀라노에서 줄곧 머물러 있었다.

이 차이는 정제와 부제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1만 3천 명의 병력밖에 갖지 못한 율리아누스와 달리 콘스탄티누스 휘하의 병력은 10만 명이나 되었다. 따라서 그의 부하 장군들에게 전투 지휘를 맡길 수도 있었다. 그래도 승리를 굳혀야 할 단계가 되면 전쟁터이 나타나곤 했다. 도나우 강을 경계로 남쪽의 로마 영토에서는 야만족을 쫓아내는 일은 거의 끝났고, 드디어 도나우 강을 건너 북쪽으로 진격하게 되었을 때는 콘스탄티우스도 군대와 같이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가 본보기로 삼은 것은 항상 전쟁터에 있었던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대제였다.

도나우 전선의 결과도 뻔하다고 생각했는지, 정제 콘스탄티우스는 357년 봄에 처음으로 로마를 방문했다. 공표된 방문 목적은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이었다. 이것도 아버지를 본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밀라노에서 아이밀리아 가도를 따라 일단 아드리아 해를 빠져나간 뒤, 거기서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수도 로마에 도착한다. 로마에 입성한 것은 4월 28일, 30세의 콘스탄티우스는 영원의 도시 로마를 난생 처음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