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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로마의 역사 1393 : 로마 제국 1099 ( 율리아누스 황제 1 )

로마의 역사 1393 : 로마 제국 1099 ( 율리아누스 황제 1 )

 

 

 

율리아누스 황제 1

(제위 : 서기 361 ~ 363 )

고대의 오리엔트

로마인에게 오리엔트라고 불리는 지역은 오늘날 중동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공화정과 원수정 시대까지 로마의 동쪽 국경은 이 동방을 지배하고 있던 파르티아와 접해 있었다. 다시말해 이때까지 동방에서 로마의 적은 파르티아 왕국이었다.

그런데 서기 227년을 경계로 적이 바뀌었다. 그 해에 파르티아를 무찌르고 중동의 패권을 잡은 사산조 페르시아가 오리엔트에서 새로운 적이 된 것이다. 이 동쪽 대국들의 주요 기관이 모여 있는 곳은 두 강의 사이라는 뜻을 가진 메소포타미아였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낀 이 일대에 수도를 두어 정치와 경제의 모든 기능을 이곳에 집중시킨 것은 파르티아나 사산조 페르시아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메소포타미아는 언제나 오리엔트의 중심이었고, 오늘날 이 일대는 이라크에 해당된다.

하지만 강대국 로마가 파르티아나 사산조 페르시아를 가상 적국 제1호로 본 진짜 이유는 이 나라들이 메소포타미아라는 비옥한 땅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도의 기능은 메소포타미아에 집중돠어 있었지만, 그 배후에 이란, 파키스탄, 아파키스탄이라는 광대한 배후지가 그 동쪽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인이 파르티아와 그 뒤를 이은 사산조 페르시아를 강적으로 본 것은 오리엔트의 패권을 장악한 그 나라들이 오늘날 이라크, 이란, 파키스탄, 아파키스탄의 영토를 합한 광대한 국가가 되기 때문이었다. 덧붙여 말하면 오늘날의 터키,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 이집트는 모두 고대에는 로마 제국 영토로서 제국의 동쪽 절반을 이루고 있었다. 오늘날 터키의 동쪽 끝은 고대에는 로마 제국의 동맹국이었던 아르메니아 왕국이었다. 오늘날 이라크와 시리아 국경선은 고대 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사아의 국경선과 거의 겹치지만, 이것은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무언가 필연적인 요소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로마 제국처럼 하나로 정비된 국가는 아니었다 해도, 오늘날의 이라크,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합친 대국이 고대에는 존재했다는 느낌으로 이해하지 않는 한,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오리엔트에 대해 갖고 있었던 인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인식을 이해하지 못하면 행동도 이해하기 힘들다.

이렇게 생각하면, 기원전 4세기에 일어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도 다른 면에서 조명이 가능하다. 이 마케도니아의 젊은이는 페르시아왕 다리우스를 타도하고 페르시아를 정복할 의도가 있었던 이상, 다리우스를 격파하고 계속 동쪽으로 진격하여 인도와 페르시아의 경계인 인더스 강까지 다다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로마와 파르티아, 그리고 사산조 페르시아의 관계는 그리스와는 전혀 달랐다. 그리스는 알렉산드로스가 등장하기 200년 전부터 항상 페르시아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자세히 기술했듯이, 그리스는 한때는 아테네까지 침공당한 적도 있었다. 그리스 최강 도시국가인 아테네는 페르시아군에 철저히 파괴당하고 불태워졌다.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원정은 그리스의 반격이었다. 실제로 페르시아로 가는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는 대부분 마케도니아 병사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모든 그리스 도시의 연합군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반면에 로마가 오리엔트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은 그리스와는 달리 반격이나 방위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의 의미는 없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등장하기 반세기 전에 로마도 한때나마 갈리아인에게 수도 로마를 점령당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북이탈리이 지방에 살고 있던 야만족이었다. 로마인은 갈리아인이 침입할 때마다 격퇴하기를 되풀이 했고, 결국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체를 정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요컨데 로마인은 그리스인이 페르시아에 대해 품고 있던 공포심과 복수심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인은 본질적으로 '옥시멘트'(서방)의 민족이었다. 오리엔트에도 법률과 가도는 있었지만, 그것을 네트워크화하여 기능을 확대하고 정착시킨 것은 로마인의 독창이었다. 합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오리엔트와 옥시멘트를 구분하는 하나의 선이 아닐까 싶을 정도지만, 로마가 인도까지 이르는 땅을 영유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 첫번째 이유는 로마가 이미 서방에 널리 패권을 확립하고 있었다는 점. 둘째는 로마인이 영토를 확장할 때는 항상 그곳을 방위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