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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로마의 역사 1397 : 로마 제국 1103 ( 율리아누스 황제 5 )

로마의 역사 1397 : 로마 제국 1103 ( 율리아누스 황제 5 )

 


 

 

율리아누스 황제 5

(제위 : 서기 361 ~ 363 )

사산조 페르시아 (계속)

티그리스 강 상류에 있는 아미다는 오늘날에는 터키어로 다야르바키를로 불리는 것이 보여주듯, 고대에 중요한 도시였다. 그후 오랜 침체기를 거쳐 근년에 다시 중요성을 되찿은 도시들 가운데 하나다. 고대에는 중요했지만 그후 두드러지게 눈을 끌지 못한 채 현대에 이른 도시들은 이제 이슬람권에 속하는 오리엔트에서도 고대 이름을 현대식으로 고쳐 부르는 경우가 많다. 고대의 도시 안티오키아가 안티키아라고 불리는 경우가 좋은 예다. 고대의 아미다는 니시비스에 비하면 전략적 중요성은 낮았지만, 특별한 명성이라고 해도 좋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 도시는 지금은 정제인 콘스탄티우스가 부제 시절인 십대 소년이었을 때 심혈을 기울여 요새화한 도시다. 도시 이름도 종래의 아미다가 아니라 자기 이름을 붙일 작정이었다. 험한 바위산을 등지고 산기슭에 펼쳐져 있는 이 도시는 티그리스 강을 동쪽에 두고 삼면의 방비만 단단히 하면, 완벽하게 방위하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동쪽을 흐르는 티그리스 강은 아직 상류이기 때문에 물쌀이 빨라 건너기 어렵기 때문에 방벽 역활을 하고 있었다.

페르시아 왕 샤푸르가 이 아미다를 함락시키면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에게는 통렬한 타격을 주는 것을 의미했다. 니시비시는 그대로 통과하고 그 북쪽에 있는 아미다에 무려 10만 대군을 투입했으니까, 샤푸르에게도 그것을 감행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로마는 이것을 알지 못했다. 니시비시가 세 번이나 페르시아군의 맹공을 견뎌냈기 때문에 니시비시보다 수비가 견고한 아미다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지는 모른다. 총사령관 콘스탄티우스는 도나우 강 근처의 시르미움에서 머물고 있었다. 사령관에 임명된 사르니아누스도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기는 했지만 에데사(오늘날 터키의 우르파)에서 한 결음도 동쪽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에데사는 적의 공격 목표가 된 아미다에서 남서쪽으로 15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페르시아 왕 샤푸르는 직접 전장터에 나가서 진두지휘를 하고 있는데, 로마는 황제의 부재하에사령관에 임명된 사령관조차 전쟁터에서 15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사비니아누스는 에데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페르시아 전쟁을 현장에서 지휘하는 사령관 자격으로 다음 두 가지 명령을 내렸다.

첫째, 아미다 주변을 초토화 했다. 적군이 군량을 쉽게 확보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지만, 농민들은 가축을 이끌고 후방 도시로 강제 피난을 떠나야 했다.

둘째, 부사령관 우르시키누스를 아미다로 보냈는데, 소수의 병력으로 원군이라기보다 정찰대로 보냈는지 모른다.

아미다에는 콘스탄티우스가 부제 시절부터 이미 제5군단 병사 1천 명 정도가 상주하고 있었다. 그밖에 아미다에 적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지원병 6천 명 정도를 파견했다. 이 6천 명의 병사들은 중동 태생도 아니고, 이 지방에서 군무 경험을 쌓은 병사도 아니었다. 원래는 갈리아에서 복무하다가 야만족 출신 장수인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에 가담하여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활을 쏘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은 것이 라인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으로 유배된 병사들이었지만, 이 병사들은 게르만족 출신의 병사들인 민큼, 기후, 지형, 풍속과 습관이 완전히 다른 오리엔트에 보내졌어도 타고난 용맹함은 잃지 않았다.

기병을 포함하여 7천 명 정도로 여겨지는 로마군 병사들에다 자기 도시를 지키겠다고 자원한 기개도 있고 젊은 나이의 주민을 합한 2만 명 정도가 아미다를 지키는 실제 전력이었다. 여자들은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페르시아군이 쳐들어올 기미가 보이자 에데사를 비롯한 후방의 안전한 도시로 모두 피난을 보냈다. 아미다에 틀어박힌 것은 순수한 전투 요원은 2만 명이고, 그 2만 명이 10만 적군을 상대하여 저항하게 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어도 장병들이 있는 곳에만 적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방 50킬로미터 일대는 적군이 정찰이나 식량 조달 등으로 적병이 사방에서 움직이고 있는 곳이다. 우르시키누스 부대는 그렇게 돌아다니고 있는 적군과 마주치고 말았다. 다행히 그곳을 무시히 빠져나갔지만, 적에제 자신들의 존재가 노출되었다는 것을 각오해야 했다. 우르시키누스는 적이 포위하고 있는 아미다에 모두 함께 들어갈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그의 부대를 양분하여 젊은 장교와 병사들은 아미다로 보내고 자신은 일단 후방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상상하건데, 우르시키누스는 종래의 전법으로는 아미다를 지킬 수 없다고 이 시점에서 깨달은 게 아닐까. 오리엔트를 잘 알고 있다면, 멀리서 페르시아군을 한 번만 바라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각지의 제후나 호족의 깃발이 얼마나 많이 펄럭이고 있느냐로 판단하는데, 깃발의 수가 많고 게다가 유력한 제후나 호족의 깃발이 포함되면 페르시아 왕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로마와 맞서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이것은 공격하는 페르시아 왕의 발판이 얼마나 단단한지 재는 척도이고, 공방전의 결과를 예상할 수 있는 정보가 된다. 성에 틀어박혀 농성하는 수비대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적군이 체념하고 철수하는 것이다. 우르시키누스는 사비아나누스를 설득하여 소극전법을 버리고 아미다를 공격하는 페르시아군을 후방에서 협공하는 적극적인 전법을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그에게 아미다행을 명령받은 젊은 장교들은 마음 속에 자신들을 사지로 보내는 생각이 한때나마 끓어오르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짐작케 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젊은 장교들은 우르시키누스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아미다로 들어가라는 그의 명령에 순순히 따랐고, 공방전이 진행되는 동안 줄곧 수비대와 같이 저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