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로마의 역사 1399 : 로마 제국 1105 ( 율리아누스 황제 7 )

로마의 역사 1399 : 로마 제국 1105 ( 율리아누스 황제 7 )

 


 

율리아누스 황제 7

(제위 : 서기 361 ~ 363 )

사산조 페르시아 (계속)

하지만 아미다 공방전에서 아미다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던 사람들은 원군이 도착할 거라고 확신했는지, 다섯 배가 넘는 적군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용감하게 계속 싸우고 있었다. 탈주하다 붙잡힌 사람 때문에 성벽 밖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적에게 알려져, 70명의 페르시아군이 느닷없이 성벽 안으로 밀려들어 온 적이 있었다. 게다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붉은 망토를 휘둘러 잠입에 성공한 것을 저들 편에 알렸고, 그것을 본 페르시아군은 맹공을 퍼부어왔다. 그들은 성문이 안쪽에서 열리기를 기대했지만, 성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잠입한 페르시아군 70명은 성문도 열기 전에 모두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수비하는 쪽 로마군도 성벽 안에 틀어박혀 계속 방어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용맹함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갈리아 출신 병사들이 밤중에 어둠을 틈타 성벽 밖으로 나가서, 그때마다 페르시아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돌아왔다.

하지만 공방전이 오래 계속될수록 희생자가 늘어나고, 그럴수록 병력 수에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수비 쪽에 걸리는 중압감은 더 무거워졌다. 페르시아군이 성벽보다 더 높은 토성을 쌓고 그 위에서 공격하게 된 뒤부터 전투는 백병전으로 바뀌었다. 전사자를 수용할 공간도 없고 치료할 사람도 없어서 시체를 방치할 수밖에 없는 성벽 안에서 전염병이 발생했다. 이로 말미암아 수비력은 더욱 줄어들었다. 그리고 가장 두려워하고 있던 때가 왔다. 비록 한군데 뿐이지만, 성벽이 무너져 그곳으로 침입하는 페르시아군을 막을 수단이 없었다. 수비하는 로마군 병사들은 쳐들어온 페르시아군에게 순한 양처럼 죽어갔다.

암미아누스도 마침내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그를 따른 것은 병사 두 명 뿐이었다. 발에만 의지한 탈출은 다행히 성공했지만, 15킬로미터를 걸어서 로마 가도의 부속시설인 국영 역참에 도착했을 때에야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사람도 없는 역참은 파괴되어 있었고, 우물은 남아 있었지만 두레박이 파괴되어 있었다. 그래서 병사 한 명이 마리에 감고 있던 헝겁을 찟어 길게 연결하여 그것을 우물 속에 늘어뜨린 다음, 물을 빨아들인 헝겁을 끌어올려 세 사람이 교대로 그 물을 빨아먹으며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산악지대를 헤맨 끝에 암미아누스와 두 병사는 유프라테스 강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순찰하고 있던 로마 기병대를 만나 기병대 주둔지인 멜리테네 기지에 도착하여 암미아누스는 상관인 우르시키누스와 오랫만에 재회했다.

아미다는 페르시아군의 공격을 받은 지 73일 만에 결국 함락되었다. 함락 당시 시내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샤푸르의 명령으로 그 자리에서 모두 살해되었다. 나머지젊은 병사들은 포로가 되어 메소포타미아 중부로 끌려가 수사 시의 재건공사에서 노역을 강요받았다. 암미아누스처럼 탈출에 성공한 병사들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들의 소식은 알 수가 없다.

암미나누스는 아미다로 가는 도중 만난 한 병사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루테리아(파리) 태생의 갈리아인인 그는 시리아로 보내져 로마 제국 동방군에 복무하고 있었는데, 사막을 행군하는 도중에 소속 부대와 떨어졌다고 한다. 병사 자신은 그렇게 말했지만, 어쩌면 탈주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본대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던 그 병사는 우연히 만난 페르시아 여자와 결혼하여 이곳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아미다 공방전에서 파리 태생의 갈리아 병사가 많았는데 그 가운데 몇 명은 이 병사와 같은 운명을 걸었는지 모른다.

아미다에 틀어박혀 싸운 2만 명은 영웅적이라고 평가해도 좋을 만큼 용감하게 싸웠지만 결국 패배했다. 페르시아도 승리하기는 했지만 희생이 막심했다. 73일 동안 계속된 공방전에서 전사한 페르시아 병사의 수는 3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참전한 병사 가운데 3분지 1이 죽은 셈이다. 하지만 그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아마다 공략에 집착한 페르시아 왕 샤푸르의 통찰은 옳았다고 볼 수 있다.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지키는 로마의 '방위선'에 큰 구명이 뜷린 것이다. '방위선'은 계속 이어져 있어야 그 역활을 다할 수 있다. 한 군데라도 구멍이 뚫리면 더 이상 방위선이 아니다. 이런 상태를 방치하면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페르시아의 인정을 받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노령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까지 원정을 했을 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그 아들인 콘스탄티우스가 도로아미타불로 만들게 된 것이다. 지금 그는 도나우 강변이나 밀라노에서 여유있게 지낼 처지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