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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1402 : 로마 제국 1108 ( 율리아누스 황제 10 )

로마의 역사 1402 : 로마 제국 1108 ( 율리아누스 황제 10 )

 


 

율리아누스 황제 10

(제위 : 서기 361 ~ 363 )

내전을 무릅쓰고

여기서 율리리아누스는 다시 결단을 강요당하게 된다. 이번의 결단은 병사들이 바치는 제위를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라 그 제위를 지키느냐 마느냐였고, 제위를 지킨다면 내전에 호소해서라도 지킬 의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율리아누스의 속마음을 그후의 행동으로 추측해보면 다음과 같다.

콘스탄티우스는 소수의 병력으로 속공을 펼치는 스타일이 아니라 율리아누스를 토벌하기 위해 오리엔트에 집결해 있는 10만 대군을 모두 거느리고 오지는 않더라도 상당한 규모의 대군을 데려올 것이 분명하다. 그 병력과 도나우 강의 병력을 합쳐 쳐들어 온다면 자신이 가진 갈리아의 2만 3천 명의 병력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 그렇다면 도나우 방위선의 병력을 손에 넣을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자신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속공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율리아누스가 정말로 이렇게 생각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실제로는 재빨리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겼다.

(1) 알레마니족과 프랑크족을 비롯한 게르만족과 불가침 협정을 맺는다.

이것은 그때까지 5년 동안 율리아누스의 적극전법에 계속 억눌려 있었던 야만족도 바라는 바였기 때문에 협정은 간단히 성립되었다.

(2) 동쪽으로 행군하면 콘스탄티우스 휘하 군대와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니까, 2만 3천 명 병력 가운데 1만 3천 명을 선발하여 데려간다.

이 1만 3천 명의 주력은 1년 전에 알프스 산맥 동쪽으로 파견하는 것은 계약 위반일 뿐만 아니라 기족을 놓아두고 오리엔트로 원정을 가는 것을 거부하며 연죄 농성까지 벌였던 야만족 부대였다. 그들은 율리아누스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말을 듣고, 1년 전에 파업을 벌인 이유는 잊기로 했다.

이 1만 3천 명은 1만 명과 3천 명으로 나누었다. 1만 명은 프랑크족 출신이지만 로마군에서 경력을 쌓은 네비타가 이끌고, 거리는 멀지만 야만족을 만날 위험이 없는 갈리아 남쪽으로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를 가로질러 동쪽 도나우 방위선으로 간다.

3천 명은 율리아누스가 직접 이끌고 거리는 짧지만 야만족을 만날 위험이 높은 슈바르츠발트(검은 숲)를 횡단하여 도나우 강 상류에 이른 뒤, 거기서 배를 조달하여 당시에 빈도보나라고 부른 빈과 당시에 아퀸쿰이라고 불린 부다페스트를 오른쪽으로 보면서 도나우 강을 내려간다.

양군 모두 집결지는 도나우 강 중류의 시르미움이었다. 제국 후기에 중요한 도시였던 시르미움은 베오그라드에서 서쪽으로 50여 킬로미터 떨어진 오늘날의 미트로비치다.

이것을 보아도 율리아누스의 의도가 콘스탄티우스의 휘하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도나우 강 방어기지인 시르미움을 손에 넣어 정제 휘하의 도나우 방위군의 합류를 저지하는 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작전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콘스탄티우스 쪽과 율리아누스 쪽이 누가 먼저 시르미움에 도착하느냐 하는 '시간'에 달려 있었다.

시간 승부에서는 율리아누스가 이겼다. 시르미움 앞에 도착한 1만 3천 명의 병력을 보고, 수에서는 그보다 많았을 게 분명한 도나우 방위군은 율리아누스 쪽에 설 것을 먁속했다. 내전은커녕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도나우 강 방위를 맡고 있는 장병들은 율리아누스가 정제로 옹립된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들의 태도를 결정하게 된 것은 지난 5년 동안 율리아누스가 거둔 눈부신 전과였다. 율리아누스가 라인 강 부근에서 벌인 야만족 소탕전의 성공은 그 바로 동쪽에 있는 도나우 강 방위선의 전황에 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라인 강을 건너 침입을 거듭하고 있던 알레마니족과 프랑크족의 세력이 약해지면, 도나우 강을 건너 남쪽으로 침입할 기회를 노리는 사르마티아족이나 고트족도 침입을 망설이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율리아누스가 콘스타니티우스보다 먼저 도착한 덕분이었지만.

콘스탄티우스는 좋게 말하면 신중하지만, 판단도 행동도 항상 느린 사람이다. 율리아누스가 시르미움에 도착한 사실을 안 것은 그가 안티오키아를 출발하여 소아시아의 킬리키아에 들어갔을 때였다니까, 이번에도 콘스탄티우스의 움직임은 느렸다. 뒤이어 도착한 것은 도나우 강 방위군이 모두 율리아누스에게 투항했다는 속식이었다. 이어서 율리아누스와 그의 군대가 벌써 시르미움을 떠나 남동쪽으로 뻗어 있는 간선도로로 행군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렇다면 율리아누스의 목적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볼 수밖에 없다. 율리아누스가 로마 제국 동쪽 수도를 손에 넣을 작정인 것은 분명했다. 콘스탄티우스가 24년 동안이나 차지했던 제위가 위태로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