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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로마의 역사 1403 : 로마 제국 1109 ( 율리아누스 황제 11 )

로마의 역사 1403 : 로마 제국 1109 ( 율리아누스 황제 11 )

 


 

 

율리아누스 황제 11

(제위 : 서기 361 ~ 363 )

내전을 무릅쓰고 (계속)

 

행군 도중 갑자기 콘스탄티우스가 병으로 쓰러졌다. 주치의들은 상태가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당장 알아냈다. 아버지 대제와 마찬가지로 콘스탄티우스가 죽음을 앞두고 세례를 받아 정식으로 기독교도가 되었다. 죽음을 맞은 것은 서기 361년 11월 3일이었다.

병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처음부터 병사가 정설도 되어 있었다. 43세의 나이로 보면 너무 이른 죽음이었지만, 24년 동안이나 황제를 지낸 뒤에 찿아온 죽음이었다. 모든 결단을 혼자 내려야 하는 로마 제국 황제는 항상 격무에 시달렸고, 그래서 문제가 적은 시대에도 기껏해야 20년이 한계였다는 것은 오현제 시대의 황제들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콘스탄티우스가 죽음을 앞두고 한 일은 세례를 받은 일만이 아니라, 율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것은 율리아누스의 재능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싫어도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친족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앞으로 태어날 자기 자식을 맡긴다는 이유도 있었다. 콘스탄티우스는 아기를 갖지 못해서 계속 고민하고 있었지만, 마침내 세번째 아내가 아이를 갖게 되었다. 제위에 오르자마자 친족에 대한 대량 숙청을 결행했고, 그후에도 친족을 죽이는 것을 잔인하게 지속하였던 콘스탄티우스에게는 참으로 얄궂은 생애의 종말이지만, 아버지가 죽은 뒤에 태어난 아기는 딸이었고, 나중에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아내가 된다.

수도를 항해 진군하고 있던 율리아누스는 파발꾼이 가져온 급보를 받고 콘스탄티우스의 죽음을 알았다.

율리아누스에게는 이보다 더한 행운은 없었다.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제위를손에 넣게 된 것이다. 율리아누스는 수도를 향해 계속 행군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동쪽에서는 선제의 유해가 수도를 행해 다가오고있었다.

서기 361년 12월 11일, 정통 황제이고 로마 제국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된 율리아누스는 연도에서 그를 맞이하는 민중의 환호 속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며칠 뒤, 선제 콘스탄티우스도 고인이 되어 수도로 귀환했다. 그것을 맞이한 율리아누스 황제는 기독교 방식에 따라 몸소 장례식을 주최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매장되어 있는 12사도 교회에 아들 콘스탄티우스도 매장했다.

수도에 입성한 율리아누스를 맞이했을 때 민중이 보낸 환호는 권력자가 누구가 되든 처음 얼마 동안은 환호를 보내기 마련이다. 전임자의 단점은 무언가를 한 데 있고, 후임자의 장점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은 데 있다. 따라서 처음 얼마 동안의 호평만큼 믿을 수 없는 것도 없다. 일반 시민도 황궁 관계자들도 일단은 환호를 보내면서 상황을 지켜본다. '지배당하는 사람들'은 '피지배자'로 간단히 처리될 때가 많지만, 이들도 나름대로 대응책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되면 새로 지배자가 된 사람의 대응로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그때까지의 기득권층을 자극하지 않도록 애쓰면서 권력 기반을 굳히는 방식. 다시 말해서, 타협이니까, 앞으로 개혁다운 개혁에는 손을 대지 않는 쪽으로 가기 쉽다.

둘째, 권력을 잡자마자, 기득권층이나 비기득권층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를 만큼 재빨리 정책을 내놓고 착착 실행에 옮기는 방식.

개혁이 어려운 것은, 개혁으로 손해는 보는 기득권층은 개혁하면 손해라는 것을 금방 알아치리기 때문에 격렬히 반대하는 한편, 개혁으로 이익을 볼 터인 비기득권층은 개혁이 뭔가 어떻게 이로운지 몰라서 당분간은 지지하지 않고 상황을 관망하거나 미지근하게 지지하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가 눈을 뜨지 못하도록 재빨리 연달아 개혁안을 내놓고 실행에 옮기는 편이 무엇보다도 먼저 기득권층의 반대를 억누르기 위해서다.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기 두번째 방법을 선택한 것은 이런 사정을 베려했기 때문일 것이 아니었을까.

철학을 공부한 율리아누스는 권력욕과는 인연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그런 주장은 의미가 없다. 20세까지 유폐 생활을 강요당한 것은 그에게 권력이 없었기 때문이고, 그후 일개 철학도로서 보낸 4년도 황제 콘스탄티우스의 기분에 따라 언제 목이 잘릴지 모르는 나날이었다. 부제가 된 뒤에도 5년 동안이나 정제의 생트집을 빠져나가면서 직무를 수행했다. 그런 율리아누스가 권력의 진짜 의미를 몰랐을 리는 없다.

권력이란 남까지도 자신의 생각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힘이고, 많은 인간이 공존하는 사회에서는 무질서에 빠지고 싶지 않으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문제는 권력이 잘 행사되었느냐 나쁘게 행사되었느냐일 뿐이다. 30세에 황제가 되어 권력을 쥔 율리아누스는 권력을 부정적인 것으로 배제하지 않고, 좋은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그리고 이 생각은 그리스 철학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