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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1405 : 로마 제국 1111 ( 율리아누스 황제 13 )

로마의 역사 1405 : 로마 제국 1111 ( 율리아누스 황제 13 )

 


 

율리아누스 황제 13

(제위 : 서기 361 ~ 363 )

'배교자' 율리아누스

 

역사상 율리아누스는 '율리아누스 아포스타타'( Julianus Apostata)라는 통칭으로 알려져 있고, '배교자 율리아누스'라고 번역된다. 기독교 세력이 강해진 제국 후기부터 사용된 '아포스타타'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라틴어로 '신앙을 바린 자'라는 뜻이니까, '배교자'는 올바른 번역이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버렸다면 그 전에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은 서기 361년 11월 3일에 전권을 장악한 율리아누스는 그 권력을 행사하여 기독교회의 발전을 억제하는 정책을 차례로 실시했지만, 그런 정책을 단행하기 전의 율리아누스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경멸조의 뜻을 담은 '아포스타타'라는 통칭을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30세가 되기 전에 기독교를 믿고 있었을까.

4세기 중엽의 이 시기에는 그리스.로마의 종교가 아직 사교로 배척당하지는 않았다. 기독교를 공인한 313년의 밀라노 칙령에는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동일하게 인정한 것이다.

동료 황제인 리키니우스를 끌어들여 '밀라노 칙령'을 공포한 콘스탄티누스는 나중에 '대제'라는 존칭으로 불렀고, 30년에 걸친 장기 집권을 누렸다. 물론 기독교 집단이 그렇게 존칭을 만들어 불렀기 때문에 역사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만.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콘스탄티우스는 아버지 대제의 정책을 계승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으로 24년 동안 제위에 있었다. 따라서 밀라노 칙령이 공포된 뒤 반세기 동안,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있었다. 실제로 기독교도가 아니면 군대나 정부 요직이 취임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고, 고관들 중에도 기독교 쪽에서 말하는 이교도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밀라노 칙령'을 공포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회로부터 '대제'라는 존칭을 받은 것은 기독교를 공인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밀라노 칙령'에 명시된 완전한 신앙의 자유는 말하자면 표면상의 방침이고, 콘스탄티누스의 본심은 기독교회를 진흥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칙령을 발표한 뒤 차례로 실시한 기독교회 우대 정책이 그것을 실증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회가 그에게 '대제'라는 존칭을 바쳤던 것이다. 만약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 진흥책을 실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오늘날의 기독교는 분규와 내분으로 미미한 세력으로 존재하거나 여러 분파를 이루어 오늘날 만큼 강성한 종교가 되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후 반세기 동안 로마 제국은 대제가 깔아놓은 노선 위를 고속도로를 달리듯이 달려왔다. 율리아누스도 콘스탄티누스의 친족이다, 공식적으로는 어떤 종교를 믿던 완전히 자유였지만, 그가 살아온 환경에서는기독교를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편이 안전했을 게 분명하다. 그는 황족이었지만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그후 14년 동안 인간 사회에서 격리되어 사실상 유폐 샹활을 했다. 그후 10년 동안은 유페 샹활에서는 해방은 되었지만, 정제 콘스탄티우스의 뜻을 거역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부제 시절에 율리아누스가 조금이라도 반기독교적인 태도를 보였다면, 그를 실각시키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환관 에우세비우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율리아누스는 30년 동안 종교적으로는 주위 사람들을 계속 속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를 '배교자'라고 단정하면 그가 분개하지 않을까.

그리고 4세기에는 아직 유아세례가 통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시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도 죽음을 앞두고 비로소 세례를 받았다. 이 시대에 주교나 교부라고 불린 사람들도 모두 어른이 되어 세례를 받고 기독교 성직자가 되었다. 유대교와 달리 할례를 의무화 하지 않은 것이 기독교 보급과 확산의 획기적인 한 요인으로 볼 수 있다고 앞에서 말했다. 어린 시절이면 몰라도 어른이 되어 할례를 받는 것은 극심한 고통이 수반된다. 그래서 할례를 받지 않고 물만 끼얹으면 된다는 것은 전략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감탄할 정도다. 할례가 의무화 되어 있었다면 어른이 되어 성직자가 되기로 한 사람들이 할례를 받아들였을까. 이런 시대였기 때문에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는 것도 이례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이것이 율리아누스가 살았던 4세기의 로마 제국의 실태였다. 따라서 황제가 되기 전에 세례를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배교자'라고 불리게 된 것은 기독교 쪽에서 '배신자로 단죄'되었기 때문이다. 친기독교파인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핏줄이라 황제가 될 수 있었지만 어떻게 반기독교적인 정책을 펼 수 있는가 하는 분노와 경멸을 담은 기독교 쪽에서 부른 별칭이 '배교자'였다.

배교자로 탄핵당하게 된 율리아누스의 반기독교적 정책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로마 제국 국민의 종교를 '밀라노 칙령' 상태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