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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로마의 역사 1406 : 로마 제국 1112 ( 율리아누스 황제 14 )

로마의 역사 1406 : 로마 제국 1112 ( 율리아누스 황제 14 )

 


 

 

율리아누스 황제 14

(제위 : 서기 361 ~ 363 )

'배교자' 율리아누스 (계속)

율리아누스는 모든 신앙의 존재를 다시 공인했다. 그리스.로마의 신들도, 이집트의 이시스 여신도, 시리아에서 기원한 미트라 신도, 유대의 신도, 기독교 내부에서 지금까지 교리 해석의 차이로 싸워온 삼위일체설의 아타나시오파도, 거기에 반대하는 아리우스파도, 이 두 종파 이외에 다른 종교들도 모두 좋다고 인정한 것이다.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 이상, '이교도'라는 말도 '이단'으로 배척하는 마음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전면적인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공표된 율리아누스 황제의 칙령이었다.

일신교는 기독교나 유대교, 그후에 나타난 이슬람교처럼 유일신만 인정하는 데 특징이 있다. 모세 십계명 가운데 첫번째는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로 되어 있다.

다신교는 사전에 '여러신의 존재를 믿고 예배하는 종교'라고 풀이되어 있는데, 이는 오해를 낳기 쉽다. 고대의 다신교도들도 존재한다고 여겨진 신들을 모두 믿은 것은 아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도, 철학자 키케로나 역사가 타키투스도, 그리스.로마 신들이나 자신의 수호신은 믿었겠지만, 유대나 갈리아나 게르만의 신들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신들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은 존중해주었다. 서낭당 앞을 지난 때 참배는 하지 않았지만 그 앞에서 불경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관용은 다양한 생각과 생활관습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 가운데 하나지만, 율리아누스는 그런 관용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다 못해 '전면적 관용'을 발령한 것이다.

그 증거로 율리아누스는 기독교도들이 파괴한 그리스,로마 신전을 재건하라고 명령했을 뿐만 아니라, 무려 300년 전에 로마 제국이 파괴한 예루살렘의 유대교 신전도 재건하라고 명령했다. 유대교에서는 영혼의 서식처였던 예루살렘 신전은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이 마지막에 틀어박혀 저항한 곳이어서, 이 반란을 진압한 티투스 황제의 명령으로 파괴되었고 그후에도 오랫동안 재건이 허용돠지 않았다. 기독교 세력이 커지면서 전보다 훨씬 불리한 상황에 물려 있었던 유대교도가 이 칙령을 환영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모든 종교와 종파를 차별하지 않고 공인한 이상, 제국은 그런 종교나 종파에 동등한 환경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율리아누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말라노 칙령' 이후 반세가 동안 기독교회가 누려온 온갖 특전도 모두 폐지해야 한다. 지난 50년 동안 로마 제국의 기독교 국가화는 점점 빨라지고 격렬해졌지만, 30세의 율리아누스는 그 시대의 흐름에 거역하기로 한 것이다.

왜 거역하려 하는지는 알았지만, 그가 어떻게 그런 일에 도전할 수 있었는지는 다른 문제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율리아누스가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로마 제국의 기독교 국가화로 크게 방향을 튼 이유에 대해서 앞에서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기술에서 이미 이야기했다. 한 개인의 경우에는 '진정한 가르침에 눈을 떴다'는 말로 끝나겠지만, 제국 통치의 최고 책임자라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가 없다면 곤란하다. 개인적인 이유로 공동체의 장래까지 결정하면 공동체 구성원에게 폐가 된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공익에도 좋고 개인에게도 이로운 방향으로 로마 제국의 기독교 국가화를 결정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된다.

공익은 정국 안정이다. 서기 275년 무렵에 태어난 콘스탄티누스는 위기로 치닫는 제국이라고 부른 3세기 후반의 로마 제국을 몸소 알고 있었다. 자연사 한 황제보다 살해당한 황제가 훨씬 더 많고, 정국은 그때마다 격변을 되풀이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도 이 혼미한 상태에서 제국을 탈출시키기 위한 방책을 찿았지만, 그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정국 안정이야말로 로마 제국 존속의 열쇠라는 데에는 그와 동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