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로마의 역사 1407 : 로마 제국 1113 ( 율리아누스 황제 15 )

로마의 역사 1407 : 로마 제국 1113 ( 율리아누스 황제 15 )

 


 

율리아누스 황제 15

(제위 : 서기 361 ~ 363 )

'배교자' 율리아누스 (계속)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개인의 이익은, 실력으로 제위를 얻은 자신과는 달리 황제의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제위에 오르게 될 세 아들의 세습권이 정통성을 획득하는 일이었다. 종래의 로마 황제는 주권자인 로마 시민과 원로원이라는 인간이 권력을 위임해야만 정통성을 획득했지만, 황제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것이 인간이면 황제를 죽이거나 하여 권리를 박탈할 권리도 인간에게 있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곤란하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 기독교 세력이 미미했던 1세기 중엽에 기독교를 유대인의 민족 종교에서 세계 종교로 나아가게 한 성 바울은 '우리는 모두 위에 서 있는 사람에게 복종해야 한다. 우리가 믿는 가르침에서는 신 이외에 다른 권위를 인정하지 않지만, 현실 세계에서 존재하는 모든 권위는 신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권위가 된 것이다. 따라서 현세의 권력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결국 현세의 권위 위에 군림하는 지고의 신에게 복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 세계인 속계에서 백성을 통치하거나 지배할 권리를 군주에게 주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는 생각의 유효성을 깨달았으니, 콘스탄티누스의 뛰어난 정치 감각은 경탄할 만하다. 군주에게 권력을 위임하거나 박탈할 권리는 인간이 '알 수 있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알 수 없는' 유일신에게 있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신은 실제로 아무런 의사 표시를 하지 않는다. 그런 신이 권력의 위임과 박탈을 결정한다면, 신의 뜻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겨지는 누군가가 신의 뜻을 받들어 인간에게 전달해야 한다. 기독교에서는 성직자를 통해서 신의 뜻이 전해진다고 믿고 있다. 신의 뜻을 전달하는 권위있는 통로는 사자와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사제나 고독한 환경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수도사보다 교리를 해석하고 졍리하고 통합하는 공회의에 참석할 권리를 갖는 주교였다. 다시 말헤서 세속 군주에게 통치권을 주느냐 마느냐 하는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은 기독교회의 지도상으로는 주교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주교를 '자기편'으로 만들기만 하면 '신의 뜻'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을 알면 이야기는 간단하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진흥책을 펼쳐 기독교를 확산시켜 로마 제국의 국교로 만들고 주교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자신의 통치 권위는 물론 자신의 세 아들에게도 신의 뜻을 이용하여 통치의 정통성을 부여받는 방안을 생각한 것이라면 경탄할 만한 전략이라고 추측된다. 결국은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과 진흥책은 기독교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득을 취하기 위한 매우 기본적인 인간의 본성인 탐욕에서 비룻되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주교들을 자기편으로 회유할 수 있느냐에 집약된다.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뜻을 이어받은 아들 콘스탄티우스가 반세기에 걸쳐 교회를 건설하고 성직자의 사유제산과 교회 재산에 대한 세금을 면제해주고, 주교에게 주교관구의 사법권을 위탁하는 등의 우대정책을 편 것은 '신의 뜻'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제위 세습의 정통성을 획득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황제를 인간이 아니라 신이 결정한다면,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키거나 황제를 살해할 일도 없어져서 정국이 안정될 거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콘스탄티우스 뒤를 이어 로마 제국 황제를 이어받은 율리아누스는 지난 50년 동안 이런 방식이 지속된 뒤였다. 더구나 공포정치로 24년 치세를 누린 콘스탄티우스 시대에 성장했다. 30세의 젊은 율리아누스가 그런 상태에서 정국 안정을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하는가에 의문을 품은 것은 당연하다.

그는 30세인데도 그는 아내가 죽은 뒤 재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를 가까이 한 적이 없고 자식도 없었다. 자식을 낳으려고 세 번이나 결혼한 콘스탄티우스와는 이런 점에서도 달랐다. '아들은 고를 수 없어도 후계자는 고를 수 있다'고 말한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율리아누스도 동감했을지 모른다.

아니면 정치 세계에서 '신의 뜻'이 유효성이 갖는다고 율리아누스는 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신의 뜻'의 도움을 빌려 제위 세습의 정통성을 확보해주었는데도 맏아들은 자신의 얕은 생각 때문에 일개 부대장한테 어이없이 살해되었고, 셋째아들은 반란을 일으킨 야만족 출신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둘째아들 콘스탄티우스만은 병상에서 죽음을 맞았지만, 그 역시 자신이 부제로 임명한 율리아누스가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를 토벌하러 가는 도중에 지병으로 쓰러졌다. 율리아누스는 '신의 뜻'의 유효성을 믿지 않게 된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종교는 믿는 것은 중요하지만, 율리아누스는 철학도였기 때문에 냉철한 판단으로 종교의 문제점을 생각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따라서 율리아누스는 '신의 뜻'을 전달하는 주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지난 50년 동안 계속된 기독교 우대정책을 완전히 폐지하는 일도 주저 없이 철저하게 단행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 황제에게 편애를 받으면서 누구보다도 많은 호사를 누리며 세력을 확대하던 기독교도들에게는 갑자기 어느날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