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214)
향기마을
[앞서 보는 미래-미래학 20선]<9>부의 미래 [동아일보 2007-01-12 04:33] [동아일보] 《머지않은 미래에 경제학자들이 맞닥뜨리게 될 부 창출 시스템은 한계자원에서 벗어나 근본적으로 무한한 자원이자 경제성장의 주요 요인이 될 지식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디지털 혁명-세계화가 부른 제4의 물결 ..
한니발 전쟁(제2차 포에니 전쟁전 기원전 241-219년) 로마가 강화후 평화를 구가하고 정치제도를 개선시키며 국력을 키우는 반면 카르타고는 패전후 국내 사정이 불안하였다. 귀국한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내전상태에 돌입했다. 해외통상으로 귀족 가문이 된 하밀카르는 카르타고가 지중해 재해권을 잃자 경제적 타격이 가장 큰 부류로 패전에 대한 굴욕감과 실지회복에 대한 강한 열의를 갖고 있었다. 카르타고 정부는 하밀카르로 하여금 병력 1만을 조직하게 하여 반란군을 토벌토록 하였다. 반란군은 하밀카르의 교묘한 작전에 밀려 산정에 포위되었으며 장기 고사작전에 돌입하자 4만명이 넘는 반란군은 굶주림으로 인하여 전의를 상실하게되고 하밀카르의 코끼리떼의 공격으로 전원 전멸하였다.카르타고는 여전히 국내파와 해외파간에 반목..
제1차 포에니전쟁 기원전 256년 봄. 로마는새로 건조한 230척의 군선을 진수하였다. 카르타고는 256척을 바다로 내 보냈다 양쪽 모두 5단층 걸러리선으로 지중해 해전사상 가장 대규모 해전이었다. 5단층 걸러리선에는 노잡이 300명,전투원120명,선원100명이니까 합치면 500명이 넘는다.230척이면 12만명에 다다른다. 전투는 마르셀라 남쪽 해상에서 양쪽 함대가 마주쳤다.카르타고군은 양쪽 날개를 편 학익진 모습이었고 로마군은 원뿔형의 중앙돌파 형태로 진용을 갖추고 접전이 시작되었다.장선 두척을 앞세운 로마제1선단은 좌측에서, 제2선단은 우측에서 카르타고군의 중앙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중앙을 돌파당한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의 함선충돌 작전과 까마귀를 이용한 접근전, 화공작전에 피해가 속출되자 패주하기 시..
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241년) 로마 원로원은 시칠리아의 동쪽 도시국가인 메시나(이탈이아 반도 구두앞쪽 끝 메시나 해협 건너편 항구도시)의 구원요청에 고민을 하고 있었다.메시나는 섬 남쪽의 시칠리아 최강의 도시국가인 시라쿠사의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 자력으로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아프리카 북단의 당시 지중해 지약 최강의 해운국인 카르타고(지도상 아프리카 북단 현재 튀니지아)와 신생국인 로마 사이에 어느쪽에게 지원을 요청할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로마에 지원을 요청하였다.왜냐하면 이미 그당시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섬 서쪽 절반을 이미 영향권아래 두고 있었으며 카르타고 보다 자신들은 메시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 로마 영토를 코앞에 두고 살아야 하는 입장에서 로마쪽의 지원이 유리하였던 것이..
* 이탈리아 남부 그리스 도시국가와 로마의 대결 타랜툼(오늘날 타란토) 앞바다에 10척의 로마 함선이 나타났다. 그당시 로마도 소규모지만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타렌툼 항구로 피항하여 들어왔다. 서로의 세력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협약에 의거 타렌툼은 로마 함선이 세력권 경계선을 침략한 것으로 간주하여 5척을 격침시키고 승무원들은 살해되었으며 나머지 5척은 겨우 달아날 수 있었다. 로마는 자국의 함선이 항구에 들어간 것은 침략행위가 아니라면서 손해배상을 요구하자 타렌툼은 사절을 조롱하면서 쫓아냈다. 이에 로마는 전쟁을 결의하였으나 원로원에서는 손해배상을 받는 쪽으로 마무리 짖자는 의원들도 다수 있어 군대는 당장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타렌툼은 로마에 비하여 긴장하여 북부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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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건축의 걸작 로마인은 패배하면 반드시 거기에서 무언가를 배우고,그것을 토대로 하여 기존 개념에 얽메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개량하여 다시 일어서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390년 켈트족의 칩입으로 로마인은 몇가지를 배웠다.그중 하나가 국론분열의 어리석음이었다. 귀족파와 평민파간의 갈등으로 야만족에 불과한 켈트족에게 실컷 당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기원전 367년 '리키우스법'으로 해소하는데 성공했다. 기원전 338년 대외적 관계의 근본적인 개혁에 착수하여 껍데기만 남은 '라틴동맹'을 해체하고 새로운 동맹인 '로마연합'결성을 준비했다. * 로마연합 로마는 로마를 중심으로 주변국과 동맹관계를 맺었는데, 구성요소는 아래와 같다.1) 연합의 기둥은 로마2) 동맹국3)'무니키피아' 즉 선거..
로마 공화정 * 공화국으로 이행 초대 집정관으로 브루투스와 자결한 루크레티아의 남편인 콜라티누스가 선출되었다.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추방된 타르퀴니우스 왕의 누이가 어머니로 왕과 브루투스는 외숙부와 생질 관계이다.브루투스란 말은 '바보'를 지칭하는 뜻으로 별명이었다. 그는 바보로 멸시 당하면서 왕의 폭정시대에 은영자중하면서 지내온 위인이었다. 한 사람의 왕이 해온 일을 두사람의 집정관이 맡게 된 것은 개인적인 전횡을 막기위한 제도였다. 재선이 허용된다 해도 집정관의 임기는 불과 1년밖에 안된다. 브루투스는 원로원의 기능을 강화하여 원로원의 수를 200명에서 300명으로 늘렸다. 새로 임명된 원로원에는 신흥세력에 속하는 유력한 가문의 가부장들이 많았고 임기는 종신제였다. 그러던중 젊은이들의 출세길이..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마의 탄생 * 유민의 전설어느 민족이든 전승이나 전설을 가지고 있다.로마인들은 그들 조상을 비련의 주인공을 선택했다.의 서사시 에 따르면 소아시아 서안의 풍요로운 도시 는 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그리스군의 공격을 받아 10년 동안이나 계속된 공방전도 드디어 종말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그리스군이 철수하면서 남겨놓은 해안에 거대한 목마를 발견한 트로이 사람들은 그 목마를 그리스군이 공략을 포기하고 남겨준 선물로 생각하고 목마를 성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날밤 승리에 도취된 트로이 병사들은 마음껏 취하고 흥겨운 축제후 깊이 잠든밤, 목마속에 숨어있던 그리스 병사들이 한사람씩 땅으로 내려와서 성문을 열자 미리 되돌아와서 대기하던 그리스 군사들이 순식간에 들어닥쳐 트로이는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