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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로마인 이야기 5 (한니발 전쟁):제1차 포에니 전쟁

제2권:요약

 

한니발 전쟁

 

제1장: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241년)

 

 

로마 원로원은 시칠리아의 동쪽 도시국가인 메시나(이탈이아 반도 구두앞쪽 끝  메시나 해협 건너편 항구도시)의 구원요청에 고민을 하고 있었다.메시나는 섬 남쪽의 시칠리아 최강의 도시국가인 시라쿠사의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 자력으로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아프리카 북단의 당시 지중해 지약 최강의 해운국인 카르타고(지도상 아프리카 북단 현재 튀니지아)와 신생국인 로마 사이에 어느쪽에게 지원을 요청할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로마에 지원을 요청하였다.왜냐하면 이미 그당시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섬 서쪽 절반을 이미 영향권아래 두고 있었으며 카르타고 보다 자신들은 메시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 로마 영토를 코앞에 두고 살아야 하는 입장에서 로마쪽의 지원이 유리하였던 것이다.

 

로마는 메시나와는 동맹관계도 아니었고 구원병을 보내려면 좁은 해협이지만 바다를 건너야 했다. 만일 메세나의 구원요청을 거절하면 시칠리아 서쪽 절반을 자기 세력하에 두고 있는 카르타고측에 구원을 요청할게 뻔하였다. 이때까지  시칠리아의 역사는 그리스 식민도시들 사이의 항쟁사라 해도 좋았지만 어부지리를 얻는 쪽은 카르타고 였다. 그래도 시칠리아 동쪽 절반에 건재한 시라쿠사와 메시나가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완충지대 역활을 맡고 있었다.그러나 메시나가 카르타고 수중에 떨어지면 상황은 달라진다. 완충지대가 없으지고 아테네가 쇠퇴한 이 무렵에 카르타고는 지중해 제일의 해운국으로 메시나를 해운기지로 삼게 되면 이탈리아 남부를 둘러싼 해역의 지배권은 카르타고의 것이라 생각해도 된다.그렇게 되면 로마를 맹주로 하는 로마연합 도시들의 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 
 

 

로마인들이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메시나 해협도 지중해 최강의 함대를 가진 카르타고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메시나가 카르타고의 수중에 넘어가는 것은 로마인에게는 이탈리아 본토와 시칠리아섬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다리가 놓이는 것을 의미했다.로마 원로원에서 이러한 전략적인 문제로 결정을 짖지 못하자 민회에서 결의를 하여 메시나 지원을 결정하게 된다. 참전을 결의했다 해도 이 참전이 카르타고와 정면 대결로 이어져 제1차포에니 전쟁만 23년 동안이나 계속되리라고 생각한 로마인은 아무도 없었다.로마의 목적은 메시나를 시라쿠사나 카르타고에 넘겨주지 않는 것이었다.메시나가 로마연합에 가담하게 되면 다리를 놓는 쪽은 로마가 된다.로마는 메시나를 지원하기 위하여 집정관 한명과 2개 군단을 지원하게 된다.기원전 264년 제1차 포에니 전쟁 �해.로마군을 이끌고 간 집정관은 아우피스 클라우디우스 였다.

 

로마를 출발하여 강행군으로 반도끝단 레기움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이탈리아 남부 동맹 도시에서 제공된 수송선단인 군선이 기다리고 있었다.메시나 동태를 정탐하기 위한 카르타고 군선이 메시나 해협을 순항하는 모습이 보였으나 집정관 클라우디우스는 귀족가문의 남자답게 조금도 기죽지 않고 부관으로 하여금 함정과 소수의 병력을 주어 우선 시험삼아 한밤중에 해협을 정찰토록 하였다.정찰대가 맞은편 해안에 도착하여 무사 도착의 신호를 보내자,1만7천명의 병력을 태운 선단은 한덩어리가 되어 빠른 물살을 건너갔다. 메시나에 도착한 집정관은 마중나온 시민대표와 동맹협정을 맺었고 군사지원 명분을 구비했다. 로마군에게 위협을 주는 것은 시라쿠사만이 아니라 시칠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카르타고 군대였다.그리스 민족의 도시국가인 시라쿠사와 페니키아 민족의 나라인 카르타고가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서로 동맹을 맺은 후에 시라쿠사군은 남쪽에서 카르타고군은 서쪽에서 메시나를 향하여 각각 진격하였다.

 

 

이때가 로마가 라틴동맹의 체제를 로마연합으로 바꾸고 영역을 확대했을때의 모습입니다. 삼니움족과 에트루리아인 그리고 남부의 그리스도시들을 로마로 끌어들입니다. 물론 전쟁을 통해서요.  바로 포에니1차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죠.

그리고 서부에는 제2의 알렉산더라고 일컬을 만한 한니발과 더불어 용병술의 천재인 에페이로스왕국의 피로스가 마케도니아와 전쟁을 벌여 에페이로스왕국의 힘을 과시합니다. bc282~270년에 이탈리아반도의 장화의 끝자락의 항구도시 타렌툼을 피로스가 공격합니다.

또한 동부의 알렉산더제국은 가장 강성했던 안티고노스1세를 셀레우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와 리시마코스(트라키아),카산드로스등이 입소스 전투에서 패사시키죠. 그의 안티고노스의 아들은 결국 마케도니아로 돌아와서 카산드로스가 죽고 마케도니아의 왕이되며 안티고노스왕조를 엽니다. 그리고 시리아의 셀레우코스는 영역을 확대하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도 서부의 그리스도시인 키레나이카와 로도스와 소아시아 서부해안의 도시와섬들을 장악합니다. 키프로스도 마찬가지지요.

1차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가 신흥강국 로마에게 해전에서 패해 시칠리아를 비롯해서 코르시카 샤르데나섬등을 로마에게 양보하며 아시다시피 한니발 부자가 에스파냐에서 식민지를 개척하며 힘을 기릅니다. 그리고 로마는 일리리아해적�문에 일리리아를 침공하며 또 갈리아족의 침입으로 영역으로 북이탈리아로 확대합니다.

시리아에서는 셀레우코스왕조의 내부분열과 혼란을 틈타 파르티아등의 수많은 크고작은 국가들이 독립합니다. 하지만 이들중은 나중에 셀레우코스의 패권등을 인정하는 계열과 파르티아처럼 적이되어 싸우는 종류로 나뉩니다.

 

 

 

로마군은 시라쿠사군과 전격전에서 간단히 격파하고 카르타고군도 손쉽게 격파했다.로마 집정관은 메시나 방어를 위하여 일부 병력을 남겨놓고 남쪽으로 진격하여 시라쿠사를 공략하여 도시성벽을 포위하자 겨울이 왔다.관습에 따라 겨울에는 휴전에 들어갔다. 이듬해 새로운 집정관 마니우스 오타틸리우스(산악민족인 삼니움족 출신)가 새로운 병력 4개군단을 이끌고 시칠리아 전선에 투입되자 전선을 인계한 집정관 클라우디우스는 휘하 군단 병력을 모두 데리고 로마로 철수하게 된다. 당시 로마군은 1년마다 총사령관과 군단병력이 모두 교체 되었는데 시민병이기 때문에 시민 생활에서 오래 떠나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라쿠사의 지배자인 히에론은 명석한 현실주의자로 어부지리로 카르타고가 얻는 잇점을 고려할때 로마와 굳이 피흘리는 전쟁은 무의미 하다고 판단하고 로마군에 강화를 요청하게 된다.로마는 관대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고 시라쿠사는 그후 50년 동안 로마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면서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된다. 로마는 2개 군단만 잔류시키고 나머지 군대는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카르타고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시칠리아에서 기득권이 상실된 것을 우려하여 시칠리아 전선에 육.해군 4만명이 넘는 군대를 시칠리아 남쪽 아그리겐툼(오늘날 아그리젠트)에 상륙시켰다.드디어 본격적인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로마는 신속하게 집정관 두명이 지휘하는 4개군단을 파견하여 아그리젠트를 포위했지만 식량저장소가 적에게 습격당하는 등 작전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지루한 포위공격이 계속되었고 카르타고군은 용병이라 포위생활에 지친 나머지 도시 몰래 탈출하여 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로마군은 며칠뒤 아그리젠트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도시는 파괴되고 주민 2만 5천명은 노예로 삼았다.

 

아그리젠트 함락으로 이제 로마는 되돌아설 수 없는 데까지 갔으며 기득권을 포기 못하는 카르타고와 전면전은 불가피 하였고 어느 한쪽이 시칠리아를 완전히 장악하지 않는한 끝나지 않을 숙명적인 전쟁이 전개되었다.

 

 

                                     로마군 방어형태

                                                                

로마군 방진대형 
 
   

                                                  로마군 공격대형
 

이듬해 기원전 261년.로마는 지난해와 같이 두명의 집정관과 4개군단을 시칠리아에 파견하였다 .이해도 로마군이 공격의 여세를 몰아 계속 진군하여 카르타고 세력하의 도시들을 차례로 공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내륙도시에 불과하고 항구도시는 카르타고의 지원이 계속되고 있어 육지쪽에서 공격하여 함락시켜도 계속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그래서 로마는 카르타고의 보급로를 차단하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해군력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당시 동맹인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3단층짜리 겔러리선이 고작이었으나 카르타고는 그보다 속도가 3배나 빠른 5단층 겔러리선을 120척이나 보유하고 있었다.바다에 대한 경험이 없는 로마군은 해군력이 미미하였다.로마는 해군력 건설을 서둘러 동맹국가로 부터 함선기술자를 지원 받아 메시나에서 노획한 카르타고 5단층선을 분해하여 복제 모방생산하는 방법으로 함선을 건조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5단층짜리 100척과 3단층 200척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Roman Pentera (Pentecotera)


 

                                                    Dromon (Dromond)


 

                                            Roman Galley


 

                                                      Phoenician War Ship

 


 

 
 

                                                     Egyptian War Ship

 


 

                                                           Greek Trireme

 


 


 

                                                       Roman Trireme

 

지휘를 맡은 것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후세의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할아버지)였다. 육전에서 눈부신 공을 세운 그는 해군을 지휘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육전은 집정관 두일리스에게 맡겨 시칠리아로 파견하였다. 육로로 이동한 로마군은 무사히 메시나에 도착하였지만 바다로 남하한 해군은 선박의 보조가 맞지않아 분산되는 바람에 주력함이 뒤떨어지자 스키피오는 가까이 있는 17척만 이끌고 리파리 섬을 점령하려 갔는데 이섬은 로마에서 시칠리아로 가는 해로길의 요충이기 때문이다. 섬은 간단히 점령되었고 로마군은 하루밤을 지내고 아침에 눈을뜨니 카르타고 함대가 항구를 봉쇄하여 공격하는 바람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집정관 스키피오를 포함하여 모두 항복하고 말았다.너무 일찍 포로가 되어버린 스키피오는 그후 포로교환으로 귀국하게 된다.패장을 벌하지 않는 로마는 6년뒤 그를 재차 집정관으로 선출하여 전선으로 복귀하게 된다.

 

한편 육.해군을 모두 지휘하게된 집정관 두울리스는 로마해군은 카르타고 해군과는 직접적인 싸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배의 높이도 낮고 속도도 늦으며 함대의 운용능력이나 해상전술에서 경험과 전통이 없어 불리하기 때문에 불리함을 만회하기 위하여 로마군의 주특기인 육전과 같은 방법으로 싸우는 방안에 대하여 골몰한 결과 '까마귀'라는 신무기를 고안해 냈는데 집정관 두울리스의 이러한 창의력은 그후 해전에서 빛나는 전과를 가져오게 된다.로마 병사들이 그것을 '까마귀'라고 했는데 까마귀는 항해중에는 뱃머리와 가장 가까운 돛대에 로프로 고정되어 있는 일종의 잔교(좁은다리)다. 뱃머리부터 적선에 접근하면 돛대에서 풀려난 까마귀는 적선 갑판으로 떨어진다.까마귀끝에 붙여놓은 날카로운 철제 칼고리가 낙하할 때의 힘으로 갑판에 꽃혀 고정된다. 로마병사들이 이 다리를 통하여 적선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간다.또한 까마귀는 180도 방향회전이 가능하여 적선이 좌.우 어디서 나타나도 일단 접근에만 성공하면 위력이 발휘되었다.항해술에 약한 로마군은 이 까마귀를 이용하여 해상전투를 육상전투로 바꾸려 한 것이다.

 

까마귀(Corvus)라고 하는 함선간 도하장비

이 까마귀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다.

1차 포에니 전쟁당시 제일 유명한것이 해전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에트루리아의 해군력을 그대로 흡수한 로마와 카르타고와의 전투는 까마귀라는 함선간 도하장비를 통해 로마의 승리로 결정짓게 되었다.


 

                까마귀(잔교)를 통해 쏟아져 적함에 들어가는 로마군

집정관 두울리스는 까마귀를 장착한 함대를 이끌고 메시나를 떠나 5단층짜리 100척으로 구성된 카르타고 함대와 밀라초 앞바다에서 마주했다.함대의 수도 1.5배나 많은 카르타고 해군은 전술기동항해도 제대로 못해 함선의 전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로마군을 향해 조소와 웃음을 보내고 있었다.그기에다 배에 이상한 물체를 돛대에 단 로마함선을 보고 촌스럽다는 듯이 야유를 보내면서 의기양양해 하고 있었다.막상 접근전이 시작되자 까마귀를 적선에 걸친 로마군이 벌떼처럼 카르타고군 배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자 카르타고군은 웃음이 싹 가시고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계속된 해상전투에서 카르타고 해군은 침몰 15척,포로 30척으로 로마군의 대승이었다. 적장이 탄 기함이 침몰되자 적장은 쾌속선을타고 나머지 함선과 남쪽으로 도망가 버렸다.

 

승전보를 받은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두울리스는 적함의 선체를 대리석에 박아 로마로 보냈다.조심조심 바다로 처음나간 로마해군이 당대 최강의 카르타고 해군을 무력화시킨 대대적인 사건이었다. 이로써 카르타고 세력권이 급속하게 약화되고 있었고 그후 2년동안 별다른 전황없이 지내다가 기원전 257년 시칠리아 북쪽 팔레모에 가까운 해역에서 2차 해전이 벌어졌으나 역시 카르타고의 대패로 로마군이 승리했다.자심간이 붙은 로마군은 전쟁터를 시칠리아선에서 카르타고 본국으로 옮기는 전략을 수립하여 군선을 준비하는등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카르타고도 로마군의 카르타고 상륙을 원천적으로 저지한다는 전략하에 군선건조와 전력준비에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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