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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로마인 이야기 3

제1권 요약

로마인 이야기 3

 

* 정치건축의 걸작

 

마인은 패배하면 반드시 거기에서 무언가를 배우고,그것을 토대로 하여 기존 개념에 얽메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개량하여 다시 일어서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390년 켈트족의 칩입으로 로마인은 몇가지를 배웠다.

그중 하나가 국론분열의 어리석음이었다. 귀족파와 평민파간의 갈등으로 야만족에 불과한 켈트족에게 실컷 당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기원전 367년 '리키우스법'으로 해소하는데 성공했다.

 

기원전 338년 대외적 관계의 근본적인 개혁에 착수하여 껍데기만 남은 '라틴동맹'을 해체하고 새로운 동맹인 '로마연합'결성을 준비했다.

 

* 로마연합

 

로마는 로마를 중심으로 주변국과 동맹관계를 맺었는데, 구성요소는 아래와 같다.

1) 연합의 기둥은 로마

2) 동맹국

3)'무니키피아' 즉 선거권이 없는 로마시민

4)'클로니아' 즉 식민지. 전략적 요충지에 로마시민 이주정착

5)'소키' 즉 패자동맹국. 납세요구 대신 병력제공 요구하며 인권과 재산은 보장됨. 이에 속하는 나라들이 남부 이탈리아 네아폴리스(나폴리) 등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대부분이었다.

 

로마는 패자를 예속시키기 보다는 패자를 공동 경영자로 삼는 전략을 채택했다. 타국에서는 유래를 �아볼 수 없는 방식으로 '분할하여 지배하라'는 사고방식의 탄생이었다.

 

* 로마의길

 

도로가 그 국가의 동맥이라는 점은 오늘날에도 누구나 알고 있다.로마는 모든 도로를 정치,군사,행정의 전략적 필요성에 의하여 군대가 가는 곳마다 모든 도로를 확장.포장 하였다.

 

 

기원전 312년 재무관 아피우스의 명령으로 건설된 아피아 가도는 캄푸아까지 뻗어 있었으나 시력권이 확장됨에 따라 차츰 연장되어 남부 끝단 브랜디시에 이르는 간선도로가 되었다. 이 도로에 이어 플라미니아 가도,카시아 가도,아루렐리아 가도 등이 건설 되었다. 이미 기존의 도로가 있었지만 확장.포장.직선화.배수처리.암거매설.교량 등을 설치하여 요컨데 고속도로를 건설한 것이다. 이 고속도로는 로마연합이 유기적인 기능을 발휘하는데 중요한 동맥이 되었다. 이러한 고속도로는 '양날의 칼'이 될 수 밖에 없었는데, 아군의 연락,기동에 유리한 만큼 적군도 정보수집,이동에 유리하였던 점이다. 고대에는 방어를 위주로 한 도시국가 나라들은 이러한 로마의 도로개발로 인한 외형적인 전략추구에 비해 도시국가에 머물다 모두 망하였지만 로마는 지중해 일대를 천년 이상 통치한 제국으로 거듭 났다는 사실이다.

 

* 시민권:키비타스

 

로마시민권의 권리와 의무는 아래와 같다.

 

먼저 권리로는

1) 동산과 부동산을 불문하고 모든 사유재산의 보장 그리고 그런 사유재산을 매매할 수 있는 자유

2)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짐으로써 국정참여 권리

3) 법에 따라 재판을 받을 권리와 항소권

4) 독립적인 자유로운 신분을 가진 어른이며 인간으로 간주

 

둘째, 의무로는

1) 16-40까지 현역 근무,40-60세까지 예비역으로 군무에 종사할 의무가 있었다.

노예는 주인에게 오랜시간 헌신적인 봉사후에 보답의 의미로 자유를 주거나, 노예 자신이 저축한 돈으로 자유를 살 수 있었다. 이러한 노예를 '해방노예'라 부르며 그들의 자식대에는 당연히 로마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시민권만 수중에 넣으면 사회에서의 출세는 자신의 재능과 팔자에 달렸다. 물론 이중 국적도 인정되었다.

 

로마 귀족은 나라를 세울 당시 100여명에 불과 하였으나 세월이 흐른 500년 뒤에는 5분지 1로 줄었고 원로원의 수는 300명으로 늘었으니까 15분지 1로 줄어든 셈이다. 가문이 멸족되었거나 아들이 태어나지 않아 대가 끊겨버린 경우가 허다하였고 끊임없는 전쟁으로 귀족들의 희생이 강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는 주변동맹국이나 식민지로 부터 항상 새로운 피를 공급받을 수 있었고 지배계급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로마시민이면 누구나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40년 동안 산악민족인 삼니움족과 싸우고 남부 도시국가와 싸우고 '2차 포에니 전쟁'시에는 한니발군과 여러차례 전투에서 최고의 집정관이 8명이나 전사하였고, 유명한 '칸나 전투'에서는 로마군이 한니발군에 대패하였는데 기병이 6000 여명,보병은 8만여명 가까이 전멸하는 희생을 당하였으나, 로마는 곧 바로 재기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항상 새로운 피를 수혈할 수 있는 통치체제에 근거를 둔 로마인의 사고방식과 정치시스템의 성과였다 .

 

 

 

* 산악민족 삼니움족 정벌

 

삼니움족이라고 불린 민족은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에 걸쳐 산악지역에 살고 있던 민족으로 수도가 확실하지도 않고 통일국가도 아이었으며 독자적인 문명을 가진 민족도 아니었다. 그들은 산속 깊은 숲속에서 수렵 등으로 살고 있던 민족으로  용맹성은 뛰어났으며 평야로는 내려오지 않는 민족이었다.

 

로마에서는 반도 남부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평정하기 위해서는 배후에 있는 산악지역을 정벌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두명의 집정관이 군단을 이끌고 2개 방향에서 공격토록 하였다. 로마군은 삼니움족을 평야지대로 끌어내기 위한 유인책을 여러차례 �으나 그들은 산속 깊은 숲속에서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면서 평원으로 나오지 않았다. 로마군은 산악 게릴라 전술에는 익숙하지 못하여 기병과 중보병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고 피해가 주금씩 늘어만 가고 있었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중 집정관에게 삼니움족이 산맥너머 폴리아 평원에 집결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그래서 집정관은 전군단에게 신속히 서쪽으로 이동토록 명령하여 부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선두부대가 협소한 카디움 협곡에 도착하였을때 갑자기 앞과 뒤 통로가 나무로 차단되면서 매복하고 있었던 삼니움족이 유리한 위치에서 화살,돌,통나무,화공 등으로 맹공격을 해왔다. 로마군은 앞뒤가 막히고 양 옆은 깍아지른 절벽아래쪽인 사지에서 진지를 편성하고 방어전을 폈으나 계속된 적의 공격에 수많은 병사들이 쓰러져 갔다. 삼니움족은 접근전을 펴지 않고 포위망만 압축하고 간혈적인 공격만을 실시하고 잇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며칠이 지나고 있을때 로마군의 식량이 바닥이 나기 시작하였다.로마군은 행군 속도를 빨리하기 위하여 각자 며칠분의 식량만 휴대하고 병참부대는 뒤에 천천히 따라오도록 조치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로마군  집정관은 부관을 삼니움족에게 보내 강화를 요청하여  항복하게 된다. 600명을 볼모로 남겨두고 집정관을 포함한 전 로마군은 무장을 해제당하고 갑옷도 벗기운 체 거의 속옷차림으로 삼니움족이 창을 들고 양쪽에 길게 서있는 사이로 빠져나오는 데 창에 찔리어 죽는자, 피를 흘리는자, 발로차고, 욕설소리를 들으며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돌아왔다.

 

아키아 가도를 따라 돌아오는 로마군을 주변의 주민들이 나와서 위로를 하고 물과 음식을 제공하였다.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은 이러한 참담한 소식을 접하자 비통에 잠겼다. 그러나 그들은 즉시 새로운 대안을 강구하였다.

 

로마는

1) 싸움에 패한 장수를 처벌하지 않는다. 스스로 명예심에 대한 굴욕감으로 고통받는 것으로 죄를 대신하게 하는 로마인 명예심 덕목이다.

2) 새로운 전술을 도입했다.군단(레기온)을 구성하는 중대의 지휘관은 총사령관의 명령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행동이나 임기응변식으로 취할 수 있도록 바꾸었다.이러한 조치는 기동성을 높혀 주었고 무기도 삼니움족의 투창을 도입했다.

3) 그때까지 추진하고 있던 기본전략은 계속 추진한다

 

로마는 삼니움족과는 5년만에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볼모 600명을 데려오는 등 그들과 화친정책을 취하면서 군대를 정비하고 전술을 새로이 개발하는 등 재기를 다지고 있었다.

 

기원전 316년 삼니움족과 전투가 재개되었다. 남부 도시국가 카푸아가 로마의 패배소식을 듣고 동맹에서 이탈하여 삼니움쪽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우선 로마는 카푸아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약속을 배신한 카푸아의 유력자를 모두 처형하는등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한 조치를 취한 로마군은 삼니움족의 포위망을 점점 좁혀 들어가자 삼니움족은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 들어 갔으며 때마침 북쪽의 켈트족과 에트루리아인들이 공동전선을 펴고 야금야금 로마지역을 침식해 들어왔다. 이에 삼니움족도 공동전선을 구축하고자 북상하고 있었다.

 

 

 

기원전297년 로마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당시 집정관인 파피우스와 데키우스가 로마군을 이끌고 게릴라식 작전으로 적 진지를 순식간에 습격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 작전의 진두지휘는 카디움 협곡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강요 당하였던 전 집정관 센티움스였다. 적은 아펜니노산맥 너머 동쪽 센티노 땅에 집결중이었고 그들을 뒤쫏는 로마 본대는 적진으로 부터 5키로 떨어진 지점에 진을 쳤다. 적의 작전을 간파한 집정관 파피우스는 분열 조짐이 있는 에트루리아 지역의 본거지를 먼저 집중적으로 공략하도록 하였다. 예상대로 자국의 참상에 마음이 어지러워진 에트투리아 군대가 싸우기도 전에 전선을 이탈했다.

 

적은 3-4만명 규모로 오른쪽에 켈트족, 왼쪽에 삼니움족이 둘로 나누어 공격준비를 하자 로마군도 1만명의 병력을 파피우스가 1,3군단으로 삼니움족과 마주하고, 데키우스가  5,6군단을 맡아 켈트족을 상대로 전투가 개시 되었다. 초전에 파괴적인 힘을 발휘하는 유명한 켈트족 기병대가 데키우스 진영 측익을 공격하자 데키우스의 5,6군단이 기병이 무너지자 공황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로마군 기병대는  무너지고 중기갑병 주력이 서서히 무너지면서 후퇴하자 성격이 급한 집정관 데키우스가 병사들을 큰 소리로 독려하면서 선두에서 적진으로 달려나가자 명예심에 부끄러운 후퇴하던 병사들이 집정관을 따라 돌격하였다. 마침 파피우스의 지원군이 도착하여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하였고 파피우스의 예비대인 주력 기병대가 투입되어 적 보병을 양쪽에서 협공하자 적의 전열이 흩어지면서 삼니움족이 켈트족의 진영으로 뒤섞여 혼전을 이루자 파피우스는 기병대로 하여금 적의 배후를 공격토록 명령했다. 삼니움족 사령관은 전사하고 포위된 켈트족도 차례로 쓰러졌다.  

이날 전투로 적은 2만8천명이 전사하고 포로8천이 잡혔다.로마군도 데키우스군에서 7천명,파피우스군에서 1천700명이 전사하고 집정관 데키우스도 장렬히 전사하였다. 다음날 데키우스 시체를 겨우 발견하여 엄숙히 장례를 치루었다.

 

기원전 290년. 유일하게 저항하던 삼니움족도 마침내 로마군 군문으로 내려왔다. 강화가 체결되었고 그들은 소키로 동맹국이 되었으며 산악 중심부에 전략기지가 세워졌으며 도로를 구축하고 로마시민을 집단이주시켰다. 이로써 로마는 이탈이아 중남부 재패를 달성하게 되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