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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새해에..로마인 이야기...

로마인 이야기에 대하여...

 

아래 뉴스와 글은 최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여류작가인 "시오노 나나미(69)"가 쓴 '로마인 이야기' 책에 관한 이야기이다. 고교시절 이탈리아에 심취되어 30년 넘게 로마에 살면서 로마사를 연구하면서 유적지,전투현장 등 현지를 두루 답사하고 각종 역사 문헌자료를 수집하는 등 '로마인 이야기'를 집필하기 시작한 1992년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지지 않았다" 제1권을 시작으로 매년 1권씩 최종편인 "로마 세계의 종언" 제15권을 완성하였다.

 

남자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니며 역사가도 아닌 사양철학을 전공한 한 일본의 여류작가가 이러한 방대한 저술을 하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씁쓸한 것은 그녀의 조상들이 저지른 대동아전쟁이라는 미명하에 한국,중국,동남아시아 국가와 국민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생각할 때 아이러니라 할수 있겠다. 자신은 일본인이라는 의식이 없었다고 하지만 어쩌면 부끄럽기도한 자기네들의 역사과오를 들먹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그녀는 아마 일본인들 가슴속에 한마디 던지고 싶은 말이 있었을게다.

 

" 일본인들이여!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천년 제국 로마인들의 통치역량을 10%만이라도 흉내내고 동화정책을 폈더라면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원대한 꿈을 이루었을 지도 모른다고..."

 

남을 짖밟는다고 영속하는 권력이 아니오 목숨을 빼았는다고 영원히 종이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로마가 천년제국을 이룰수 있었던 진정한 의미는 정복지에 대한 그들의 문화와 관습을 인정해 주고 그들에게 로마시민권을 주었고 그들을 자신들 편과 똑같이 대해주고 최고통치자 자리인 원로원,민회,재정관,회계관, 총독,집정관이나 황제자리 까지도 차지할 수 있는 제도가 구비되어 있을 때 그들은 진정으로 동화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이 책을 통하여 느끼는 점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세지가 너무나 강하게 들리는 점이다.

 

오늘날의 프랑스,독일,영국,베네룩스3국을 포함한 중서부 유럽은 로마군의 <시이저>장군이 갈리아를 정벌하지 않았더라면 그들 조상은 숲속의 원시인들로 500년이나 문명이 뒤떨어졌을 거라는 점이며 그후 시대의 영웅인 <나폴레옹>이나 <히틀러>같은 인물도 나타나지 못했을 거라는 점이다. 따라서 세계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을 까 하는 점이다.

 

또 오늘날 국민들을 수탈의 대상으로 만 생각하는 위정자도 마찮가지 이며 상대를 인정하지 못하는 자기 아집과 독선이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한 서로가 죽음 즉 멸망의 계곡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남을 '왕처럼 대접'하면 나는 '왕의 친구'가 되고 적을 포용하고 대접하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한 그 권력과 문화는 절대로 오래갈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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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작가 "로마를 알기위해 로마인 이야기 썼다"
[연합뉴스 2006-12-15 13:08]


(도쿄=연합뉴스) 이홍기 특파원 = "인류 역사상 수많은 제국 가운데 유독 로마만이 어떻게 민족과 문화, 종교의 벽을 극복하고 '보편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을까."

로마 건국에서부터 서(西)로마 멸망까지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를 15권이라는 막대한 분량의 '로마인 이야기'로 담아낸 일본의 여류 작가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69)가 줄곧 가졌던 의문이다.

그는 최근 대장정을 마감하면서 가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무도 나의 이러한 의문에 답해주지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답을 찾아보려 했다"며 납득할 만한 해답을 얻는데 15년이 걸렸으며 15권 분량이 필요했다고 밝혔다.

시오노는 최종편인 '로마 세계의 종언' 후기에서도 "한 나라의 역사는 한 사람의 생애와 같다. 철저하게 알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의 탄생부터 죽을 때까지를 알야야하듯이 역사도 마찬가지다"며 15권까지 쓰지않았다면 로마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로마를 알기위해 로마에 머물며 모든 정열을 바친 작가는 지난 1992년 1권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않았다'를 선보인 뒤 해마다 한편씩 내놓았다. 로마인 이야기는 일본에서만 540만부가 팔린 '초(超)베스트셀러'.

그는 "역사는 인간이 만드는 것으로, 복잡한 인간의 활동을 간단하게 기술하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서술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해설은 매우 싫어한다"며 로마인 이야기에 매달렸던 지난 15년을 회고했다.

시오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사상가로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의 인간에 대한 현실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털어놓았다. 로마가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도 마키아벨리의 사상과 맥을 같이한다는 설명이다.

르네상스가 유럽인이 1천년간 기독교 지배를 받아왔음에도 인간성이 향상되지 못한 근본적인 의문에서 출발, 르네상스기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이전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의 삶에 관심을 가졌고,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선과 악의 양면을 가진 인간성의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적인 통치술을 생각해 냈다는 지적이다.

작가는 로마 시대에는 천국을 앞세워 내세를 강조하는 기독교와는 달리, 현재 살고 있는 세계를 좋게 만들고자하는 강한 의지가 있었으며, 로마인들은 인간이라는 복잡한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면서 제도를 만들고 고쳐 나갔다고 설명했다.

시오노는 시리즈를 저술하면서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의식은 없었다면서, 그러나 유럽 역사가들이 로마를 얘기하면서 공화제를 높이 평가하고 제정(帝政)시대를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다른 문명권에서 자란 저자로서는 냉정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15권의 로마 제국 멸망에 대해 기존 역사서와는 달리 '어떻게 멸망했나'에 중점을 뒀다면서 "베네치아 공화국, 고대 로마 제국 등과 같이 번창했다 망하는 것이 역사의 이치로 순리대로 받아들이는 게 역사에 대한 예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1937년 도쿄에서 태어나 63년 가쿠슈인(學習院)대학을 졸업한 시오노는 고교 시절 이탈리아에 심취하기 시작했으며, 대학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한 뒤 이탈리아로 건너가 30년 넘게 로마사를 연구하는데 전념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모델로 알려진 체사레 보르자의 일대기를 그린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으로 1970년 마이니치(每日) 출판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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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1장 로마의 탄생

* 유민의 전설

어느 민족이든 전승이나 전설을 가지고 있다.로마인들은 그들 조상을 비련의 주인공을 선택했다.<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따르면 소아시아 서안의 풍요로운 도시 <트로이>는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그리스군의 공격을 받아 10년 동안이나 계속된 공방전도 드디어 종말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그리스군이 철수하면서 남겨놓은 해안에 거대한 목마를 발견한 트로이 사람들은 그 목마를 그리스군이 공략을 포기하고 남겨준 선물로 생각하고 목마를 성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날밤 승리에 도취된 트로이 병사들은 마음껏 취하고 흥겨운 축제후 깊이 잠든밤, 목마속에 숨어있던 그리스 병사들이 한사람씩 땅으로 내려와서 성문을 열자 미리 되돌아와서 대기하던 그리스 군사들이 순식간에 들어닥쳐 트로이는 화염과 살륙의 아비귀환에 휩싸이면서 그날밤 함락되고 말았다. 살륙과 참극속에서 트로이왕 <프리아모스>의 사위인 <아이네이아스만>이 일족을 데리고 탈출에 성공한다. 그들은 지중해 여러섬을 방황하다 이탈리아 서해안을 북상하여 로마근처의 해안에 정착하게 된다.부족을 통합하고 정착민으로 자리메김 하면서 <아이네이아스>가 죽고 그의 아들 <아스카니오스>가 왕위를 물려받아 30년동안 통치하면서<아비롱가>라는 새도시를 건설한다. 이것이 뒷날 로마의 모체가 된 도시였다.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국한 것은 <로물루스>이고 그는 트로이에서 도망처 나온 <아이네이아스>라고 믿었다. <로물루스>가 태어난 사연은 이렇다.

 

<아바롱가>의 왕이 죽자 동생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조카인 왕녀를 처녀인체 신을 섬기는 무녀로 만들었으나 군신인<마르스>가 왕녀에게 반하여 왕녀와 사랑을 나누었고 그후 쌍둥이가 태어나는데 <로물루스>와<레무스>라고 이름을 지었다. 숙부인 왕이 격노하여 왕녀는 감옥에 갇히고 두쌍둥이를 바구니에 담아 <테베레>강에 띄어졌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늑대가 젖을 물리고 양치기에 발견된 쌍둥이는 양치기 집에서 자라게 된다.

 

두 형제는 자라면서 세력을 규합하여 자신들의 내력을 알게되자 <알바롱가>왕을 공격하여 처단하고 주변의 양치기.농민들이 따르게 되자 로마라 불린 그 땅에 도시를 세우기로 하였다.세력이 확장되자 두 형제는 서로 사이가 나빠져 분활통치를 하기로 하고 <로물루스>는 <팔라티누스>언덕에, <레무스>는 <아벤티누스>언덕에 각각의 세력기반을 두었으나 재차 재발된 싸움에서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제거하여 1인 체제를 굳히게 된다.    

 

*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

중부 이탈이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에트루리아>인과 남부 이탈리아 일대에 정착하기 시작한 <그리스>인이다. 이 두 민족은 로마에 대하여 전혀 욕심을 내지 않았다.<에트투리아>인은 고지대에 도시를 건설하였고, <그리스>인들은 해양.상업목적으로 항구도시를 주로 건설하였다.기원전 8세기의 그리스는 도시국가<폴리스>시대에 접어들어 있었다.목축업을 주로하던 왕정시대에 비해 공업.상업.해운업에 까지 손을 뻗친 덕분에 눈부신 경제발전 이후 인구의 급속한 증가,군력투쟁,빈부격차로 싸움이 그칠날이 없었고 경작지가 없는 그리스에서 국외로 나가는 길 밖에 없었다. 그래서 식민활동이 가장 왕성하던 시기였다.

 

고대 그리스 도시들

 

BC550년경의 로마, 그리스, 페니키아-카르타고의 영역을 현재 세계지도 위에 나타낸 것입니다. 현재 세계지도와 위치, 넓이등을 비교하는데 적합합니다. 노란색이 로마, 보라색이 페니키아-카르타고, 빨간색이 그리스의 영역입니다.

고대 페니키아와 그리스의 식민지 지도입니다. 지중해 식민지와 해상활동을 볼 수 있습니다. 붉은 점이 페니키아(카르타고도 페니키아의 식민지입니다.), 검은 점이 그리스의 식민시입니다.

 

 

 

* 초대왕<로물루스>

기원전 753년 4월21일. <로물루스>는 <팔라티누스>언덕에 방벽을 쌓고 신에게 산제물을 바치는 의식도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로마를 건국하고 초대 왕이 된 <로물루스>는 국정을 왕,원로원,민회 등 이 3개의 기둥이 로마를 떠받히게 되었다. 종교제의,군사,정치의 최고 책임자인 왕은 민회에서 투표로 선출하기로 하였다. 원로원은 각 가문의 어른들로 약 100명 정도로 구성하여 왕에게 국정을 조언하는 역활을 하였고 민회는 로마시민 전원으로 구성되어 왕을 비롯한 정부관리를 선출하는 것이 민회의 역활이었으며 왕이 입안한 정책을 승인이나 부결을 하였고 전쟁,선전포고,강화조약도 민회에서 승인해야만 하였다.

 

45년 이상을 통치한 <로물루스>왕은 어느날 신전에 제사를 지내다가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없어졌다고 한다. 하늘로 승천한 것으로 로마인들 사이에 전설로 전해오고 있다.

 

* 제2대왕 <누마>

로마 땅에서 조상대대로 살아온 <사비니족>출신으로 농사와 지식탐구에 열중하던 지식인으로 높은 덕망과 교양을 겸비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로마 원로원에서 만장일치로 추대하여 장로들이 찿아 갔으나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민회의 승인을 받고 제2대 왕으로 취임하였다. 로마왕은 군주제라기 보다 세습제가 아닌 종신 대통령제로 볼 수 있다. <누마>왕은 <야누스>신전을 건축하여 전쟁시에는 신전문이 열리고 평화시에는 닫히도록 하였다. 달력을 개선하고 종교를 개혁하여 신을 정리하였다. 또한 신에게 봉사하는 신관조직들을 정비하여 신관들은 민회에서 선출하도록 하였고 종신 신관제가 아닌 기한에 제한을 두었다. 왕은 숲속에 자주 들어가 사색에 잠기곤 하였는데 사람들은 왕이 숲속의 림프들과 이야기 한다고 생각하였고 숲에서 나올때 마다 한가지씩 정책을 입안하고 상정하자 민회와 원로원에서는 만장일치로 승낙하였다. 그는 제위 43년 통치를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 제3대왕 <톨루스 호스틸리우스>

<누마>왕의 뒤를 이은 <톨루스>왕은 공격형으로 왕에 취임하자 마자 400년 전통의 <알바농가>를 공격하였다. 각 진영에서 3명씩 결투를 벌이는 형식으로 최후의 승자가 이 전투에서 이긴다는 약속이었다. <알바농가>군이 패배를 하게 되자 약속을 어기고 주변 부족을 선동하여 로마와 맞서게 하고 자신은 진행과정을 관망하다가 다른 부족을 모두 제압하고 공격하는 로마군에 패배하게 되어 <알바농가> 왕은 능지처참형을 당하고 도시는 파괴되고 시민들은 노예가 아닌 로마시민으로서 로마로 강제로 이주되었다. 로마인은 전쟁에 패한 민족을 로마에 동화시키는 <로물루스>시대 이후의 전통으로 그 노선을 계승하면서도,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배신행위를 저지른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노선도 확립하였다. <톨루스>왕은 32년 통치후 사망했다.

 

* 제4대왕 <안쿠스 마르티우스>

<사바니족>출신으로 <누마>왕의 외손자이며 로마에서 태어남. <테레베>강에 다리를 가설하고 강 서안에 요새를 축성하고 다리를 가설하였다. 재정적인 수입원을 소금을 관장하여 돈으로 지불하는 방식을 시행하였다.

 

* 제5대왕 <타르퀴니우스>

<에트루리아>인으로 그리스인과 혼혈로 가신.가족들과 로마로 집단이주하였는데 상당한 재산가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최초의 선거운동으로 전개하였고 민회의 승인을 받아 37년 치세를 이루었다, 원로원수를 100명에서 200명으로 증가시키고 신흥세력을 원로원에 흡수했다. 원로원은 왕이 지명토록 하였고 주변 부족들과 계속적인 전쟁을 하면서도 로마시를 개발하였는데 습지대를 메우고 저지대에 시장, <포로 로마눔>,공공경기장 등 공공건축물을 지었다. 대규모 지하수로공사를 벌여 저지대 오수를 집수하여 강으로 흘러보내는 공사로 로마시는 7군데 언덕을 완전히 연결하는 종합도시로 규모가 성장하게 된다. <카피톨리누스>언덕에 <우피테르>신전도 건축하였다. 왕은 젊은이 중에 유난히 총명한 한 사람을 발견하는데 바로 6대왕이 된 <세르비우스>였다. 왕은 <세르비우스>를 사위로 삼고 총애하자 두 아들이 질투하여 왕을 시해하고 왕권을 차지하려 하였으나 왕후가 재빨리 <세르비우스>를 원로원의 결의만으로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 제6대왕 <세르비우스>

<세르비우스> 왕은 취임하자마자 일곱 언덕을 에워싸는  로마 성벽공사를 마무리 하였고 지금도 일부가 남아 있는바 이름하여 <세르비우스 성벽>이라고 한다. 수렵의 여신 <디아나>신전을 신축하여 주변 부족들의 환대를 받게되고 군제개혁,세제개혁,선거제도개혁 등 개혁을 실시하였고 저지대를 메워 <마르스 광장>을 만들었는데 민회의 투표장이나 군단의 집결지로 이용하였다. 인구조사도 실시하였으며 로마시민은 경제력 정도에 따라 여섯등급으로 나누었다. 이는 군역과 조세부담을 지우는 기준이 되었으며 소선거구제를 채택하였는데 군단의 최소단위인 100인대를 기준으로 한 표로 연결되었다. 로마군제도 대폭 확립하였는데 전위,본대,후위로 구분되는대 전위는 적과 처음 접촉하여 적의 전선을 붕괴시키는 역활을 맡는다. 그런 다음  두번째로 대기하고 있던 군단의 주력인 중무장 보병이 승부를 결정짖고 여차하면 세번째의 후위가 지원하려 들어가는 전술이다 .기병은 기동대로 좌 .우측에 배치하여 적의 측후방을 타격하는 부대로 주로 부유층으로 구성되었다. 로마군은 여러 전투에서 연전연승하였고 주변지역을 합병하여 나갔다. 왕은 44년 치세가 되는 해 선왕의 아들과 자신의 딸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면서 눈을 감았다.

 

* 마지막 왕 거만한<타르퀴니우스>

<세르비우스>왕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장녀는 성격이 포악하고 차녀는 얌전하였다. 그리고 선왕의 두아들도 장남<타르퀴니우스>는 성격이 포악하나 차남은 조용한 성격이라 사촌끼리 서로 성격을 맞추기 위하여 장남-차녀,차남-장녀를 서로 결혼 시켰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차남과 차녀가 갑자기 죽게 되자 홀아비가 된 장남과 장녀를 서로 재혼시켰다. 장녀 <툴리아>는 새로운 남편인 <타르퀴니우스>에게 마음에 불을 당기는 언사를 서슴치 않게 하자 남편 <타르퀴니우스>는 무언가 돌파구를 찿기 위해 왕권을 탈취하기로 마음먹고 로마에 사는 <에트루리아>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원로원의 신흥계급을 자기편으로 끌여들인 다음 무장한 병력을 데리고 원로원으로 들어가서 연설을 하였다."출신이 불분명한 자를 왕으로 모시는 것은 수치"라고 말하자 원로원은 끌어낼 생각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급보를 듣고 왕<세르비우스>가 달려오자 왕의 이야기도 듣지 않고 왕의 허리를 번쩍들어 옆구리에 끼고 밖으로 나와 계단에 내 던졌다.<세르비우스>왕이 굴욕을 씹으며 왕궁으로 돌아오자 자객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왕에게 칼을 휘둘러 쓰러졌으나 숨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잔인하게도 그이 딸 <툴리아>가 모는 마차가 그의 아버지를 덮쳤다.그래서 <세르비우스>왕은 비참한 최후를 마감하게 된다.

 

이렇게 왕이 된 <타르퀴니우스>는 선왕 <세르비우스>의 장례도 금지했다. 선왕파 원로원을 모조리 죽이고 민회선거도 원로원의 승인도 받지 않고 왕에 올랐다.

 

<타르퀴니우스>는 주변 부족들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하였고 화전양면작전도 원활하게 구상하여 하나 하나 영토를 확장하여 나갔다.그러던 중 왕의 아들<섹스투스>가 유부녀에게 저지른 강간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녀는 아버지와 남편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자결하였다. 이에 <브루투스>와 자결한 여자의 남편인<발레리우스>가 <포로 로마노>광장에 그녀의 시체를 안치하여 놓고 군중들에게 연설을 하여 왕과 그의 아들이 자행한 포학함,부도덕성을 들어 추방하자고 제안하였던바, 시민들이 열렬히 지원하여 민병대도 조직하는 데 동의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전쟁터에 있던 왕은 급거 로마로 귀대하여 성문앞에 도착하였으나 성문은 굳게 닫혀있고 이미 추방령이 결정되었다는 통고를 받고 왕은 <에트루리아>인의 도시 <키이레>로 찿아갔다. 왕비와 두 아들이 도망쳐 합류하였으나 문제를 일으킨 <섹스투스>는 시골 도시에서 그를 알아본 사람에게 살해되었다. 왕은 25년 치세를 마감하고 로마에서 추방되었고 로마는 이제부터 공화정시대로 접어들었다.

 

<로물루스>건국 기원전 753년부터 244년째인 기원전509년 이후부터 로마는 공화정시대로 접어들면서 종신제인 왕 대신 임기 1년의 집정관 2명이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가 되었다.

 

공동체도 초기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편이 훨씬 효율적이며 로마7왕의 역사는 시기 적절한 왕들의 등장으로 로마를 반석위에 올려놓는 완벽한 역사였다. 이러한 왕들의 업적으로 튼튼한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릴수 있었던 것은 왕들이 대부분 장수하였고 선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자신의 포부를 가미한 치세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