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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로마인 이야기 2

제1권 <요약 계속>

 

제2장 로마 공화정

 

* 공화국으로 이행

 

초대 집정관으로 브루투스와 자결한 루크레티아의 남편인 콜라티누스가 선출되었다.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추방된 타르퀴니우스 왕의 누이가 어머니로 왕과 브루투스는 외숙부와 생질 관계이다.브루투스란 말은 '바보'를 지칭하는 뜻으로 별명이었다. 그는 바보로 멸시 당하면서 왕의 폭정시대에 은영자중하면서 지내온 위인이었다.

 

한 사람의 왕이 해온 일을 두사람의 집정관이 맡게 된 것은 개인적인 전횡을 막기위한 제도였다. 재선이 허용된다 해도 집정관의 임기는 불과 1년밖에 안된다. 브루투스는 원로원의 기능을 강화하여 원로원의 수를 200명에서 300명으로 늘렸다. 새로 임명된 원로원에는 신흥세력에 속하는 유력한 가문의 가부장들이 많았고 임기는 종신제였다.

 

그러던중 젊은이들의 출세길이 아득하다고 생각하고 현실정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비밀리에 왕정복고의 반정이 진행되고 있던중 밀고자에 의하여 관계자들이 모두 잡혀왔는데, 그중에는 현직 집정관인 브루투스의 두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브루투스는 자신의 아들에게 "티투스,티베리우스! 네눔들은 왜 너희들에 대한 고발에 대하여 자신을 지키지 않느냐?" 라고 세번이나 물었으나 대답이 없자 경비병들에게 처리토록 인계하였는데 심한 채찍질을 당한 후에 두 아들은 도끼로 목이 잘리는 처참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쫏겨난 선왕 타르퀴니우스가 왕정복고가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는 무력으로 대결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에트루니아의 여러 부족을 돌아다니며 병력지원을 요청하여  모아진 병력으로 로마로 남진하지 로마에서는 기병대는 집정관 브루투스가, 보병군단은 새로운 집정관인 발레리우스가 맡아 적을 맞아 로마 북방에서 서로 대치하였다. 타르퀴니우스 아들인 아룬테스가 이끄는 기병대와 로마 기병대가 만나자 아룬테스는  장수끼리 일대일로 겨루자고 하여 양쪽 대장끼리 벌어진 싸움에서 결국 두사람이 동시에 쓰러지자 양쪽 군대는 동시에 접전을 벌여 하루 종일 싸운 끝에 로마군의 승리로 굳어지면서 타르퀴니우스는 북으로 도망을 갔다.

 

발레리우스는 전사한 집정관 브루투스를 정중히 장례를 치루고 로마로 개선하여 백마 네필이 끄는 마차를 타고 개선식을 거행하였다.자신의 재산과 집이 호사스러운데다 공석중인 집정관도 빨리 뽑지 않고 왕정복고를 꿈꾸는 것으로 원로원에서 경계하자, 발레리우스는 궁궐같은  자신의 집을 부수버리고 성벽옆에 조그만한 집을 지어 누구나 방문하게 하였으며 새 집정관을 선출하고 법규와 조세정책을 정비하다가 기원전 503년 세상을 떠났다. 브루투스가 공화정의 씨를 심었다면 뿌리를 내린 사람은 발레리우스였다.

 

* 켈트족의 칩입

 

켈트족은 그리스어이나 로마인들은 갈리아인으로 불렀다. 그들 민족은 북유럽 삼림지역에 살았으며 오늘날에는 아일랜드에 일부 남아 있지만 고대에는 북유럽의 가장 넓은 지역에 정착하여 살았던 민족이다. 기원전 6세기가 다가올 무렵부터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켈트족은 남으로 밀려내려오기 시작하였으며 알프스를 넘어 오늘날의 밀라노에서 포강 유역에 자리 잡았다. 그당시는 켈트족이 전혀 로마의 위협이 되지는 않았는데 아펜니노산맥과 에트루리아인들이 중간에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마는 에트루리아인들의 도시를 하나둘 점령하여 로마의 세력권으로 편입하였던바 힘의 무풍지대가 생기게 되자 켈트족은 서서히 로마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396년 로마군대가 에트루리아의 유력한 도시였던 베이를 점령하게 되자 고지대에 견고하고 잘 구축된 베이를 본 로마인들은 수도로 삼고 싶은 욕심이 생겨 귀족과 평민간에 의견충돌과 편싸움으로 10년간이나 베이 공략전에 마침표를 찍은 카밀루스가 귀족들 편을 들고 나서자 평민들은 카밀루스를 제거할 목적으로 전리품 사용문제로 고발하여 국외로 추방하였다.

 

기원전 390년 남진하는 켈트족을 맞아 편싸움에 열중하던 로마는 급조된 로마군으로  켈트족과 싸운 결과 로마군은 패배하고 로마 성문은 열린체 적의 수중으로 로마시내가 점령 당하였다. 켈트족은 로마시내 전역에서 살인.방화.강간.폭행이 무자비하게 자행되었으며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되었다. 죽은 시체를 상수도에 버려 시체가 썩어 전염병이 창궐하여 사람들이 줄줄이 쓰러지고 곡식창고도 불타고 식량도 바닥이 나자 고지대 신전에 농성하던 로마인들이 몸값을 내는 조건으로 항복을 하고 금 300키로를 받은 켈트족은 점령 7개월만에 로마시내를 버리고 자신들의 북쪽 영역으로 돌아갔다.

 

로마는 켈트족의 침입으로 큰 타격을 받았지만 20년쯤 지나자 일단의 응급복구는 끝내고 어수선하지만 로마는 다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도시가 되었고 군비도 증강하여 외적을 물리치는 등 국경도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 정치체제

 

<집정관>

 

집정관은 왕정 시대의 왕을 대신하는 공화정 로마의 최고의 관직으로 민회에서 선출되며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취임하는 것 까지는 왕과 마찮가지나, 종신제 였던 왕에 비해 임기가 1년밖에 안되었다. 다만 재선은 허용되었으며 년령 제한은 40세 이상으로 하였다.정원이 두명인 집정관은 동료 집정광의 생각이나 방식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집정관이 둘다 동의하지 않는 한 정책은 시행되지 않는다. 집정관의 주된 임무는 민회 소집과 내정의 최고 책임자인 동시에 전쟁터에서 지휘를 맡는다.지금의 국무총리,국방장관,합참의장,야전사령관의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는 통합 관직이었다.

 

로마의 군사력은 양분되어 있어 두명의 집정관이 하나씩 통솔하도록 하였고 적이 강할 경우에는 두명이 동시에 출전하고,적이 약하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한 사람만 출전하며 나머지는 수도방위와 내정을 담당하였다. 둘 다 출전할 경우에는 법무관의 지휘를 받는 예비역 병사들이 수도방위를 맡는다. 사태의 위급성이 긴박한 경우에는 집정관중에서 임기 6개월의 독재관이 지명되고 전권이 위임되며 지휘의 통일을 기하고자 만든 제도이다. 또한 집정관의 임기가 1년이기 때문에 전시에는 지휘.작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전직 집정관인 '프로콘술'을 고문관 자격으로 집정관에 동행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독재관>:딕타도르

 

딕타도르는 독재자라는 말의 어원이지만,공화정 로마에서는 국가 비상사태시 임명되는 관직으로 임시 독재 집정관을 의미했다.독재관은 선출이 아니라 두명의 집정관 가운데 한 사람을 지명하기만 하면 되었다. 독재관은 정치체제를 바꾸는 외에 모든 문제의 결정권을 가졌고, 독재관이 결정한 일에는 아무도 반대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었다.임기는 6개월로 즉결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능력이 뛰어나고 경험이 풍부한 집정관급 인물이 지명되는게 보통이었다. 독재관에 지명되면 부관인 '기병장관'을 독단적으로 임명할 권한이 부여되며 전시와 같은 비상사태에 지명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도 기능이 마비되거나 빠른 질서회복이 필요할시에도 적용했다. 과두정치의 결함인 신속한 결정의 결함을 보완하고 공화정 로마의 위기관리체제라고 볼 수 있다.

 

<법무관>

 

법무관은 임기 1년의 사법관계를 담당하였으며 영토가 확장되고 법치국가의 면모가 갖추어 지면서 정원도 16명까지 늘어났으며 나이도 40세 이상으로 제한하여 필요시 집정관을 대신하여 군대도 지휘하는 역활도 고려했다. 두 집정관이 전쟁터로 나갔을 때 민회를 소집하고 의장이 되는 임무도 수행하였다.

 

<회계감사관>:과이스토르

 

회계감사관은 정원이 처음에는 2명이었으나 공화정 말기에는 40명으로 늘어났다. 임기는 1년이며 30세 이상으로 제한하였다. 전정터에서 군단의 재무를 담당하는 것도 회계감사관의 임무였다. 이 관직은 젊은이들의 정계 등용 코스였다.

 

<재무관>:켄소르

 

재무관은 원래 인구조사를 위하여 만든 관직이며  임무는 모든 시민들의 인구상태와 재정상태를 조사하는 관직으로 자신의 재정상태를 정확하게 신고하지 않는 자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상관없이 고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으며 국유지 운용,국고출납 감독,도로.하수도 정비위한 재정지출 결정 등의 임무로 국가 재정의 전반을 책임지는 자리로 오늘날 재무부장관쯤 생각하면 된다.

 

<안찰관>:아이딜리스

 

안찰관의 임기는 1년이고 30세 이상으로 각종 축제행사 연출과 경기대회를 개최를 관장하였고 치안을 유지하는 경찰임무도 부여되었으며 식량공급을 책임지는 임무와 도로보수,교통정리,상하수도 관리,각종 위법행위시 벌금부과 결정,시장 공정운영 감독 등으로 젊은이들의 등용코스이며 인기를 얻기 위하여 자신의 사비를 들여 민중이 좋아할 구경거리를 연출하기도 하였다.

 

<호민관>:트리부누스 폴레비스

 

호민관은 평민의 권리를 수호하는 자로 민회에서 선출되었으며 임기는 1년으로 년령은 제한이 없었다. 호민관의 권리중 집정관이 원로원의 결의를 거친 정책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으나 전시에는 권한이 금지되었다. 호민관은 신체불구속의 특별권한이 인정되었으며 귀족과 평민사이의 다리 역활을 하였다. 호민관 출신은 임기 종료후 자동적으로 원로원석이 제공되며 처음에는 두면이 정원이었으나 나중에는 10명으로 늘어났다.

 

<원로원>:세나투스

 

원로원은 현대의 미.영.프.이탈리아.캐나다 국가의 상원을 생각하면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원로원은 나이든 사람들의 결집체도 아니고 상당한 엄격한 선별작업이 이루어져, 식견과 책임감, 능력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으로 원로원이 합당하다고 인정되는 사람만이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로마 명문 귀족 출신인 경우는 다소 유리하였고 신참자에게도 개방된 직위였다. 임기는 종신이며 독재관이나 집정관을 배출하였고 임기가 끝나면 다시 원로원으로 돌아왔다. 집정관이 둘 다 전쟁터에 나간 사이는 내정,군사,외교 등에 대한 로마가 나가야할 노선을 결정하고 공화정 로마의 심장으로 로마를 이끌어 나간 것이 원로원이다. 그러나 원로원은 정책을 결정할 법적인 권한이 없었고 조언,충고,권고의 권한 밖에 주어져 있지 않았다. 로마 원로원은 번영으로 나아가는 로마의 구심점 역활을 하였던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