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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로마인 이야기 7

제2권 요약(계속)

 

제2장 한니발 전쟁(제2차 포에니 전쟁전 기원전 241-219년)

 

로마가 강화후 평화를 구가하고 정치제도를 개선시키며 국력을 키우는 반면 카르타고는 패전후 국내 사정이 불안하였다. 귀국한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내전상태에 돌입했다. 해외통상으로 귀족 가문이 된 하밀카르는 카르타고가 지중해 재해권을 잃자 경제적 타격이 가장 큰 부류로 패전에 대한 굴욕감과 실지회복에 대한 강한 열의를 갖고 있었다. 카르타고 정부는 하밀카르로 하여금 병력 1만을 조직하게 하여 반란군을 토벌토록 하였다.

 

반란군은 하밀카르의 교묘한 작전에 밀려 산정에 포위되었으며 장기 고사작전에 돌입하자 4만명이 넘는 반란군은 굶주림으로 인하여 전의를 상실하게되고 하밀카르의 코끼리떼의 공격으로 전원 전멸하였다.카르타고는 여전히 국내파와 해외파간에 반목이 계속되어 정치가 불안하자 하밀카르는 에스파냐(스페인)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식민지 거점을 만들기로 작정하였다. 기존의 해외 식민지를 발판으로 에스파냐 전역으로 카르타고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였다. 당시 하밀카르는 40세로 맏아들 한니발은 아홉살이었다. 당시 한니발이 같이 데려가 주기를 간청하자 바알 신전에 데리고 가서 평생 로마를 적으로 삼을 것을 서약시킨 뒤에야 같이 대려갔다. 

 

에스파냐로 이주한 하밀카르는 같이 대려온 카르타고 병사들과 조직적인 전투로 에스파냐 원주민을 하나하나 무력화 시키면서 점령지역을 확대하여 나갔다. 목초지는 영농지로 변모하고 원주민은 용병으로 영입하고 광산도 개발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시켜 나갔다.에스파냐의 카르타고 세력권은 하밀카르가 이주한지 9년 뒤에는 동남부 전체를 제패할 만큼 확대되었다. 여기서 생긴 수익은 자체 비용을 제하고도 본국 카르타고의 농장경영에 투자할 정도로 막대하였다. 이주 10년째 기원전 228년에는 에스파냐 동해안에 신카르타고라는 이름지은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왕궁같은 하밀카르의 집이 세워지고 바르카스 가문의 왕국이자 거점이며 상징이 되었다. 하밀카르는 신도시가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년전에 전사했다.

 

그 뒤를 사위인 한 하스두루발이 맡았고 한니발은 18세에 불과했다.기원전 226년 로마는 동맹국인 마르세이유를 보호하고 에스파냐의 카르타고 세력이 피레네 산맥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에브로 강 이북으로는 카르타고가 세력권을 넓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하스드루발과 협정을 맺었다.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후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리스어가 라틴어에 비하여 완성도가 높았고 시라쿠사의 높은 그리스 문화는 로마인들을 매료시켰다. 그리하여 로마의 많은 젊은 청년들이 시칠리아 섬으로 줄을 이었다. 동맹국과 속주로 편입된 시칠리아는 생산되는 밀을 10%의 세금을 로마에 제공하고도 막대한 생산량을 판매하여 부를 누렸다. 로마는 카르타고가 지배하던 여러 섬과 동맹도시들로 부터 재정적인 수입이 날로 늘어만 갔다.로마는 동부 지중해의 아드리아해 입구의 해적들의 소굴인 일리아인들을 소탕하고 그 지역의 중심도시 아폴로니아에 로마군 기지를 세웠다. 그래서 로마는 동쪽의 브랜디시와 아폴로니아, 서쪽의 시칠리아와 북쪽에 위치한 샤르데냐를 확보함으로써 지중해 전체 재해권이 공고해졌다.

 

이제 로마는 북부 국경만 안정시키면 되었다.그러나 225년 5만명이나 되는 갈리아인들이 포강 이남으로 남하하여 약탈을 자행하자 로마는 집정관 두명에게 각각 2개군단씩을 주어 파견하였다. 로마보병 2만 1천명,기병 1천200,동맹국 보병 3만,기병2천 등 도합 보병5만1천명,기병 3천200기였다. 집정관 파포스는 동쪽의 리머니로, 집정관 레굴루스는 서쪽의 피사로 진군토록 하였다.매복전으로 갈리아군을 공격한 로마군은 갈리아군의 대패로 싸움은 쉽게 끝났다. 갈리아군은 사망 4만명,포로 1만명을 헤아렸고 로마군은 집정관 레굴루스가 전사했다.

 

기원전 224년 또다시 로마군은 4개군단을 북진시켜 루비콘강 이북의 갈리아인들을 분리 격파하였다. 이듬해기원전 223년에는 집정관 플라미니우스의 과감한 공격으로 포강 이북의 갈리아 거주지역에 집결한 갈리아군 5만명을 무력화 시키고 강화를 맺었다. 다음해 기원전 222년에는 알프스 너머 프랑스 지방의 갈리아인 5만명이 로마로 쳐들어와서 로마군은 포강 이북 밀라노까지 진격하여 평정함으로써 이탈리아 반도 북부 갈리아 거주지역을 거의 평정하였다.

 

* 로마군단

로마인의 성향은 로마군단 편성에 잘 나타나 있다.

로마인의 군단편성 방식은 좀 특이하다.

 

    The basic organisation of a quingenaria (500 strong) cavalry regiment

 

우선 로마시민권 소유자는 누구나 35개 행정구역 가운데 어느 하나에 소속해있다.  각 행정구에 소속된 17세부터 60세까지의 남자는 무산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병역 해당자로서 소유하는 자산에 따라 5계급으로 나눈다. 이들은 다시 현역과 예비역으로 구분되며 현역은 17세부터 45세까지이며'유니오레스'로 불렀다.즉 '주니어'의 어원이다. 46세부터 60세까지는 예비역으로 '헤리오레스'라고 불렀다. 즉 '시니어'의 아원이다. 하지만 장교급은 년령제한이 없었다. 그러나 장교도 60세가 넘으면 특별한 경우가 아닌한 퇴역하게 된다.

 

자연 휴전기로 되어 있는 겨울철에는 로마의 마르스 광장에 민회가 열린다. 거기서 우선 내년 전선을 담당할 집정관 두명이 선출되고 이어서 장교들이 선출된다. 로마군의 전략단위는 집정관 한명이 이끄는 2개군단인데, 집정관이 두명이기 때문에 모두 4개군단이 편성된다. 4개군단에 필요한 장교는 24명으로 정해져 있다. 그 가운데 10명은 10년이상 군무 경험자이고 나이도 27세 이상이 아니면 민회선거에 입후보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나머지 14명은 최소한 5년 이상 군무에 종사한 경험도 있고 나이도 23세 이상이면 유자격자로 인정되었다. 민회에서 선출된 장교는 표를 많이 받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이 배치된다.

 

처음 4명은 1군단에,다음 3명은 2군단,다음 4명은 3군단,다음 3명은 4군단에 총14명을 배치하고 나머지 10명은 나이순에 따라 처음 2명은 1군단, 다음 3명은 2군단,다음 2명은 3군단,다음 3명은 4군단에 배치했다. 이것으로 알수 있듯이 4개군단 가운데 가장 전력지수가 높은 군단이 1군단이었으며 전체 로마군단의 기관차 역활을 하였다.집정관 및 장교들의 선출과 배치가 끝나면 35개 행정구는 매번 합리적인 추첨을 통하여 이듬해 병력을 제공할 행정구를 결정하였다.

 

추첨에 의하여 선정된 4개 행정구는 각행정구에서 4명씩 차출하여 1군단 부터 4명씩 16명을 배치하고 다음 16명을 2군단부터 배치하는 방식으로 각군단의 정족수가 채워질때까지 반복한다. 매우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로마군은 조용하게 기계적으로 혼란없이 잘 편성하였던것 같다. 이들은 이미 여러번 이러한 군단편성을 매년 되풀이 하여 왔기에 자연스럽게 잘 진행 되었다. 로마의 상비군은 이렇게 편성된 4개군단으로 1개군단은 보병과 기병을 합하여4천500명 안밖이다. 강력한 적과의 싸움이 예상되는 경우에는 1개군단의 병력을 5천명 정도로 증강한다.4개군단이면 1만8천 내지 2만명선이 된다. 기병은 재산이 가장 많은 제1계급에서 나오기 마련이고 4개군단 통틀어 1천200기였다.

 

군단 편성이 끝나면 집정관을 포함한 전장병이 눈앞에 있는 신전으로 가서 자유를 누리는 시민으로 국가와 가족을 지키기 위한 군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신들에게 맹세하는 것이다. 이 일이 끝나면 집정관이 군단집결 일시와 장소를 알린다. 집결일은 대개 3월 15일로 되어 있으며 이때부터 병사들은 그날이 올 때까지 집에서 지낼 수 있다.

 

 

 

로마 시민병 편성이 끝나면 두 집정관은 로마연합의 동맹국들에게 내년봄 전선에 나갈 병력 파견을 요청하게 된다. 대부분 동맹도시들도 로마방식을 흉내내어 병력을 차출하였다. 동원가용 병력규모는 전체적으로 대략 60만명 정도였다.로마군단의 총지휘권은 항상 로마인이 장악하였고 집정관의 요청에 따라 정해진 날짜와 장소에 로마시민병과 동맹국 병사들이 집결하여 로마의 군율에 따라 싸울 것을 최고사령관인 로마 집정관에게 명세하면 비로소 로마연합군의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집결지에 모인 동맹국 병사들은 각자 자기나라의 지휘관 인솔을 받으며 지휘관중 일부는 작전회의에도 참가하였다.

 

로마 연합군은 전술적인 이유와 납세의무의 대소에 따라 다섯 부류로 나눈다. 우선 기병 600기는 30기씩 20개 분대로 편성하고,두번째 경무장 보병은 제4,5계급 자산가로 편성하며 병력수는 2천400명으로 이들은 전위나 유격대로 편성되어 운용되었다. 세째 중무장 보병은 로마군의 주력으로 상류.중류층 로마시민들로 구성되며 제1,2,3계급 출신 대부분이 여기에 편성되었고 제4계급의 일부도 부족시 편성되었다.

 

3열 횡대로 늘어서서 싸우는 것이 정석이었던 로마군은 다음 세부류로 나눈다. �째는 최전선인 제1열에 배치되는 '하스탈리'. 전투경험이 적은 17세 이상의 젊은이들로 병력수는 2천400명. 두번째 열은 로마군단의 핵심인 '프린키페스'. 최전선 열이 돌파되면 굳게 버티어 서서 적의 돌파를 막는 것이 이들의 역활. 나이는 30대.병력수는 2천400명.세번째 열은 40세 전후부터45세까지 구성된 '트리알리'. 전투경험이 많은 베테랑들로 병력수는 1천200명. 3열 횡대의 중무장 보병은 각각 20개 소대로 나누며 1열,2열은 소대규모 120명.제3열은 60명규모로 편성하였다. 이것이 로마군단의 최소 전투단위인 '백인대'(겐투리아)이고 백인대를 지휘하는 이가 고대 로마를 소재로한 영화에는 반드시 등장하는 '백인대장'(겐투리오)이다.

 

로마 군단병은 BC 104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전과 이후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군제 개혁 이전의 고대 공화정 로마 군대는 물론 로마 초기엔 팔랑크스도 썼고 창도 들고 전열과 병종도 몇개가 더 있고 여러가지 다른점도 많지만  BC 2세기, 포에니 전쟁 이전과 이후 로마군은 BC 2세기, 칸네에서 한니발에게 참패한 로마군은 스피키오 아프리카누스의 지도아래 군대를 개혁하게 된다.


로마의 보병은 백인대(centuria)라는 부대 단위로 구성되었고 각 백인대는 백인 대장(centurion)에 의해 지휘 받으며 한개의 백인대는 10명씩 6줄. 즉 옆으로 10명 뒤로 6명 총 60명으로 편성되었는데 그림으로 아래와 같다.


            ㅁ  <-백인대장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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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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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ㅁ <-백인대장

 

 

 

 

 

백인대장. 오른손에 든건 포도나무 가지. 말안듣는 병사들을 다루기 위한 용도로 사용.  로마 군대의 무서움은 이들에게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야말로 일선의 지휘관이며, 가장 용감하고, 가장 뛰어나고, 가장 침착한 군인들이었다.

 

그리고 이 백인대 두개가 모여 하나의 마니풀루스를 이루며 2명의 백인대장과 120명의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ㅁ                                   ㅁ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ㅁ                                    ㅁ
  

 

이런 보병 중대 30개가 모여 한개 군단을 형성하며 군단 하나의 배치를 보자면 먼저 10개의 마니풀루스(120명)가 각각 좌우로 하나의 마니풀루스만큼의 간격을 두고 가로로 배치되고 이 첫줄의 보병중대를 하스탈티(hastati)라고 하며 제일 어린 신병들. 나이가 어린만큼 팔팔하고 저돌적이지만 말안듣고 까불대다 제풀에 도망가는일도 자주 발생. 갑옷도 제일 빈약하게 가슴에 청동판만 하나 걸쳤다.

 

그 바로 뒤에 다시 10개의 마니풀루스가 격자모양으로 배치되며 이들이 프린키페스(principes). 어느정도 노련한 병사들. 이들은 주로 로리카 하마타를 입고 하스타(hasta)라는 짧은 창을 들었다. 이는 트리알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10개의 보병중대가 격자 모양으로 배치되는데 이게 트리알리(triarii)로 가장 고참병들이다. 갑옷도 가장 튼튼하게 차려입고 트리알리의 헬멧은 깃털이 세개 꽃혀 있었으며 이들의 수는 프린시페스의 절반정도였다.

 

그리고 맨 앞에는 벨리테스(velites)들이 포진한는데 이들은 늑대 가죽을 뒤집어 썼고, 척후대나 경무장 보병대의 역할을 하고 돈없고 가난한 사람들로 편성되었다.

 

 

 

 

하스탈티. 가슴에 청동판을 댄다.

 

 

하스탈티가 로리카 하마타를 입었습니다만, 돈많은 하스타티는 하마타도 착용 했으며 어깨걸이가 있는 쇠사슬 갑옷을 로리카 하마타라고 하였다.

 

로마군단에는 기병 중대(turma)가 있었는데요, 한개의 투르마는 30명 정도로 구성되었다. 한 군단은 10개정도의 투르마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한개의 백인대엔 시그니페르(signifer), 즉 기수가 포함되데, 이 군기(signum)를 중심으로 백인대가 모이고 움직이며 고로 전투중에 기수가 앞으로 달려가면 백인대는 싫든 좋든 함께 달려나가야 하였다.

 

 

백인대 기수 시그니페르.


각 한 군단에는 벡실라리우스(vexillus)가 군기를 들고 따라 다니는데 군기는 장군의 위치를 나타내며 그 운반은 한 분견대가 맡았다.이 군기를 적에게 빼앗긴다는건 엄청난 치욕이었으며 기수가 늑대 가죽을 썼다.

 

 

군단 기수인 벡실라리우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아퀼리페르(aquilifer) 라는 병사가 있는데 아퀼라(aquila)는 독수리, 즉 군단의 상징을 들고 다니며 이걸 뺐기면, 군단은 반드시 그 군기를 다시 �아오곤 하였다. 기수가 사자가죽을 뒤집어 썼다.

 

 

 

 

종합해보면 

 

------------------------------  척후병 : 벨리테스
ㅁ ㅁ ㅁ ㅁ ㅁ ㅁ ㅁ ㅁ ㅁ ㅁ   제 1열 : 하스탈티
. ㅁ ㅁ ㅁ ㅁ ㅁ ㅁ ㅁ ㅁ ㅁ ㅁ 제 2열 : 프린시페스
ㅁ ㅁ ㅁ ㅁ ㅁ ㅁ ㅁ ㅁ ㅁ ㅁ   제 3열 : 트리알리


ㅁ 하나가 한개 중대 (마니풀루스) 입니다.


이당시 로마병들의 무장을 살펴보면 대체로 이들은 스스로 돈을 써서 갑옷과 무기를 사기 때문에 통일된 복장은 구경하기 힘들고 각자 계급에 맞게 무기를 차려입고 그 계급에 따라 부대를 구성했다. 

 

갑옷 안에는 튜니카(tunica)라는 옷을 받쳐 입었으며 주로 양모나 린넨(아마)으로 만들었다.

 

 

하스타티의 경우 가슴대기에 얇은 철판 하나를 끈으로 묶어 달았다. 프린시페스와 트리알리의 경우 어깨걸이가 있는 로리카 하마타(lorica hamata)라고 불리는 체인메일을 착용했다. 이 어깨걸이 덕택에 갑옷이 상당히 튼튼해졌는데 원래 이런 방식은 아프리카쪽에서 온거였다. 아래의 그림은 로리카 하마타입니다. 로리카 스콰마타(lorica squamata)라는 비늘 갑옷도 존재하였는데 이는 주로 백인 대장이나 보조병들이 입었다. 또한 개선식때 입는 의전용 화려한 청동제 갑빠 갑옷도 있었다.

 

 

 

그리고 로마군은 헬멧을 썼는데, 청동제, 혹은 철제로된 이 헬멧은 후기로 갈수록 화려해졌다. 깃털도 달고, 문양도 많았으며 이 헬멧에는 상당히 많은 유형이 있다. 갈리아에서 온것, 그리스에서 온것, 이탈리아에 있던것, 그러나 대부분의 형태는 비슷하였다. 청동제였다가, 철제로 바뀌었다가, 다시 청동제로, 마리우스 이후에 철제로 바뀌어 갑옷과 함께 로마군의 상징이 되었다.

 

 

로마군 헬멧

 

보조적으로 어깨 가리개나 무릎 가리개 또한 착용 했으며 어깨가리개와 무릎가리개는 다키아인을 상대로 큰 위력을 보여주었다.

 

로마군은 글라디우스(gladius. 라틴어로 칼 그 자체를 의미)라고 부르는 칼을, 그리고 하스타(hasta)라는 창을 사용하였는데 이 창은 후기에 나오는 던지는 창인 필룸과는 다른 접전용 창이였다.

 

글라디우스엔 여러종류가 있지만, 가장 위력적이고 보편적인 무기는 하이스파니아, 혹은 이베리아 글라디우스라고 부르는 살짝 휘어진 칼이였다.

 

이 필룸과 하스파니아(스페인) 글라디우스는 스피키오 아프리카누스가 젊을 적 하스파니아 원정에 참여했을때 가져온 것들로 이후 자마전투를 거쳐 로마군의 기본 무기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하스파니아 글라디우스.

이 당시의 일반적인 보병전은 창이 주 무기이고 칼이 보조무기 였으나, 로마군은 정 반대로 짧은 단검이 주무기가 되었다. 짧은 칼과 커다란 방패, 그리고 밀집대형으로 팔랑크스를 격파했다. 그리고 이런 로마군의 밀집대형에 가장 중요한게 바로 글라디우스였다.

 

 또, 로마 기병대가 쓰는 칼은 스파타(spatha. 꽃봉오리)라고 하며 이는 글라디우스와 비슷했다. 다만 보병용 글라디우스보단 약간 짧았죠. 손잡이는 주로 상아나 은(특히 은)으로 만들어졌다.

 



필룸은 철로된 부분이 길고 창촉이 무거워 한번 빗나가면 땅에 부�혀 휘어지기 때문에 적이 다시 주워 쓰지 못하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필룸은 미늘이 달려있어 적의 방패에 한번 꽂히면 전투중에 그것을 빼기가 쉽지 않았다. 필룸도 꽤 무게가 나가기 때문에 결국 적은 방패를 버리고 전투를 하여야만 하였다. 필룸은 사정거리가 10~30m정도였다.

 


그리고 방패는 제정초기에 등장하는 커다란 장방형 방패가 아닌 군단의 상징적인 마크(주로 날개나 번개)가 그려진 둥그런 형태로된 커다란 나무 방패였다.

 

한개 군단엔 총 30개의 마니풀루스. 120*30 = 3600 명 정도가 있는 거구요. 이들은 6열씩 한줄로 구성되니 총 18줄이 되는거지만, 이건 다닥다닥 붙어있을 경우고, 앞서 말했듯이 각각의 마니풀루스는 앞뒤 좌우로 한개의 마니풀루스가 더 덜어갈 만큼의 간격을 두고 배열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넓게 퍼져있으면서도 부분적으로는 굉장히 조직적이고 유동적인 전투가 가능하였다.

 

하스탈티가 밀리면 뒤로 빠지고 그러면 뒷열의 프린시페스가 도와주고. 그마저도 안되면 제3열의고참병 트리알리가 담당하였다. 트리알리가 전투에 참여한다는건 그만큼 상황이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로마군은 다닥다닥 붙어다니기 때문에 부상자의 신속한 호송과 처리 또한 가능하였고, 방패로 온몸을 가린 상황에서 짧은 칼만 휘두르고 찔러 적에게 피해를 입혔다. 보통 야만인들은 크고 길고 파괴적인 무기를 흔들고 휘두르고 빙빙 돌리기 때문에 서로간의 공간이 많이 필요한데, 이런 야만인이 다닥다닥 붙은 로마군과 만나면 혼자서 로마군 두세명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것이였다. 게다가 이미 필룸의 투척으로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는데 방패까지 포기한 상황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몇몇 전투에선, 특히 자마 전투에서 로마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한니발의 코끼리 부대를 막기 위해 경보병과 혼합배치를 하였다. 마니풀루스 사이의 간격에 경보병을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그 사이 틈으로 코끼리들을 내보낸 뒤에 뒷쪽의 경보병(벨리테스)들이 창을 던져 코끼리를 잡았다.

 


보통 로마의 집정관, 법무관의 군대는 앞서 말한 로마 군단 두개와 동맹군에서 지원나온 군단 두개로 구성되기 때문에 전체적인 수는 더 늘어났다.


일반적으로

 

기병대   동맹군 보조병      로마군단      로마군단        동맹군 보조병   기병대
------   ㅇㅇㅇㅇㅇㅇ    ㅁㅁㅁㅁㅁㅁ ㅁㅁㅁㅁㅁㅁ    ㅇㅇㅇㅇㅇㅇ   -------
------   ㅇㅇㅇㅇㅇㅇ     ㅁㅁㅁㅁㅁㅁ ㅁㅁㅁㅁㅁㅁ   ㅇㅇㅇㅇㅇㅇ   -------
------   ㅇㅇㅇㅇㅇㅇ    ㅁㅁㅁㅁㅁㅁ ㅁㅁㅁㅁㅁㅁ    ㅇㅇㅇㅇㅇㅇ   -------


순으로 배치되었다. 알라(ala, 즉 날개.) 라고 불리는 동맹군 보조병(auxilia)은 로마인이 아닌 속주의 병사들로 구성되었고, 군기가(물론 예외도 있지만) 로마군보다 헤이할 뿐더러 무장도 빈약하였다. 전세가 분리할 경우 가장먼저 도망치는게 이들이였고 그러나 이들은 훌륭한 몇몇 사령관의 지휘 아래에선 경무장 보병으로써 로마 군단병보다 더 뛰어난 위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로마군에도 기사(equites)라는 계급이 분명 존재했는데,이 기사라는 단어는 시간이 흐르면서  말타고 직접 싸우는 기병이 아니라 잘먹고 잘사는 돈많은 귀족 계층을 의미하는 단어로 변해갔다. 물론 앞에서의 투르마 처럼 로마인으로 구성된 기병대가 분명 존재하였지만 별다른 활약도 없을 뿐더러 로마군의 중심은 여전히 로마 시민권자로 구성된 중무장 보병이었다. 주요 기병대는 대부분 동맹 속주에서 차출해 왔으며 특히 스피키오 아프리카누스는 누미디아의 기병을 이용해 한니발을 패배시켰다. 또한 카이사르는(후기의 이야기이지만) 게르만 기병대를 이용했다.

 

 

 

 이 마니풀루스는 나중에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에 의해 코호르트로 바뀌는데 이때되면 부대 편제뿐아니라 무기도 많이 바뀌게 된다. 하스탈티, 프린키페스, 트리알리의 구분도 없어지는 형태로 변모하였다.


 

총사령관의 참모나 중대를 지휘하는 중대장은 민회에서 선출되며 대부분 명문귀족의 자제나 유명한 무장이 선출되나 백인대장은 그가 속해있는  소대원의 투표로 선출한다.말하자면 하사관에서 산전수전 다겪은 전투 베테랑이 선출되는 것이 보통이다. 2개군단의 백인대장은  모두 60명인데 이들 가운데 투표수가 많은 12명까지는 집정관이 소집하는 작전회의에도 참삭하였다.여기에는 12명의 장교와 기병대장 1명,동맹국 지휘관도 참석하였다.로마군단의 주류는 상급지휘관인 장교가 아니라 하급 지휘관인 백인대장이었다. 무장으로 최고사령관의 능력은 백인대장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부릴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승패의 관건이었다.

 

 

 

 

 

장비는 경보병은 칼,투창,방패,투구,가슴바대와 센들식 군화였다.

방패는 지름이 90센티쯤 되는 그리스식 원형방패다. 투구와 가슴바대는

가죽제품이었다. 투구에 화려한 장식을 다는 것은 게르만족이나 갈리아인

에 비해 키가 작은 로마인의 키를 조금이라도 커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군대의 주축인 중무장보병에 한하여 허용되었다.투창은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 낭창낭창하게 되어 있고 길이는 1미터쯤 되었다. 한번 던진

창은 가느다란 끝부분이 박히면서 휘어지거나 뿌러지도록 되어 있어 두번

다시 사용할 수가 없으며 적의 손에 넘어가더래도 적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투구는 쇠나 구리로 만든다.그 위에 50센티쯤 깃털로 장식을 달았다. 갑옷은 가슴과 등을 완전히 덮도록 제작되었고 얇게 편 쇠나 두꺼운 가죽으로 만들었다. 정강이를 덮는 경갑도 같은 재료였다. 방패는 이 시대는 가로1.2미터*세로1.5미터의 타원형으로 두장의 널판지를 대고 안쪽에는 마포를 대고 바깥쪽에는 쇠가죽을 대었으며 폭25센티의 쇠로 테두리가 보강되었고 외형은 곡선모양으로 적의 화살과 돌맹이, 칼,투창의 직접적인 충격을 비껴나도록 고안되어 있었다.칼은 기원전 205년 스키피오가 개혁하기전까지는 가늘고 긴 모양이었으며 에스파냐 원주민의 양검날을 도입하여 개조하였다.지금까지는 장검으로 베는 방식이였으며 단검은 찌르는데 주로 사용하였다. 창은 던지거나 찌르는데 주로 사용하였고 길이는 3미터,사정거리는 25미터였다.

 

기병은 귀족 자제들로  편성되었고 말등에 등자는 없었다. 등자는 중세시대 발명품이다. 기병은 척후,정찰,전령,패잔병추격전에 주로 사용하였고 전술적으로는 당시에는 중요도가 낮았다. 이러한 기병의 운용은 로마군이 한니발에게 찔린 최대의 약점이 되었다.

 

동맹국 병사중 적격자로 추천된 자들이 집정관의 호위부대로 편성되었고 기병의 3분지1,보병의 5분지1을 선발하여 중무장 보병에 합류시키고 나머지 동맹국 병사는 동향사람들로 편성하여 소대단위로 좌.우익 즉 양쪽 군단의 좌.우익을 담당하였다.

 

행군순서는 동맹국의 전위부대,집정관과 호위부대,동맹국 우익부대,짐마차,제1군단과 짐마차,제2군단과 짐마차,마지막은 동맹국 좌익부대와 짐마차 대열로 편성하여 행군 이동하였다.

 

로마군의 하루 이동거리는 평균 20키로였다.로마인은 무엇이던지 체계화해야 했던 이유는 해마다 바뀌는 군대의 체계적인 규율이 없으면 혼란이 초래되기 때문이다. 고작 하룻밤 숙영을 위해서도 교범에 근거를 둔 숙영지 편성을 원칙대로 하였으며 신도시 건설에도 적용했다. 로마군이 지배했던 이탈리아 반도,프랑스,독일.동유럽지역 등 전지역의 대부분 도시들이 로마군이 세운 전초 즉 숙영지를 근거로 발전된 도시들이며 로마군은 이러한 기지를 서로 연결하는 거미줄 같은 도로망을 개발하였던 것이다.

 


 

 
 
 

 

행군중 해질녘이 되면 당번을 맡고 있는 장교 한사람이 1개 소대를 데리고 그날밤 숫영지를 건설하기 위한 알맞는 지역을 �으려 간다. 방어에도 분제가 없고 마실물도 가까이 있으며 2개군단 2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지역을 �아내면 중앙에 깃발을 세운다. 그기가 집정관의 천막이 쳐질 곳이다. 그곳을 중심으로 집결지가 편성이 되는데걸음으로 길이를 재고 각각 지정된 곳에 깃발을 세운다. 이 일이 끝날 무렵 본대가 도착하면 설치 작업에 들어간다. 숙영지를 양분하는 중앙에 성화대가 설치되고 그 옆에는 제사를 지내거나 점을 치는 장소가 설치된다.또 연설대가 설치되고 뒤에는 집정관의 천막이 설치된다. 집정관을 지키듯 호위병사들의 천막이 줄을 맞추어 쳐지고 장교 12명의 천막이 그 바깥쪽에 에워싼다. 기병과 동맹국들의 천막도 이 구역에 설치되고 그 아래쪽에는 군단병사들의 천막이 줄을 맞추어 설치된다. 마굿간은 숙영지 외벽을 따라 설치되며 참호와 울타리가 완성되면 숙영지 건설은 끝난다.

 

천막 설치후 청소를 하고 천막사이의 다니는 길은 물을 뿌리고 다진다. 식사는 천막별로 제각기 준비하며 순서대로 요리하고 설거지,화기처리는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다. 하수도,화장실,샤워장도 규정에 의거 설치했다. 로마인의 주식은 육식보다 밀가루를 사용한 빵이나 죽이었고 야채와 생선,치즈,우유,양젖,올리브유,포도주,곡물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로마군의 상은 용맹을 떨친 병사는 철제창이나 잔을,성벽공격시 최선두 병사는 황금사슬,아군을 구한 병사는 떡갈나무잎 관을 주었다.그러나 백인대장에 선출되거나 몇번이나 백인대장에 선출되었느냐가 가장 큰 명예였다. 제1군단의 프린키페스에서도 제1소대의 백인대장은 최고의 명예스런 직책이었다.

 

로마군의 벌은 야간 보초중 잠을 자거나 임무를 게을리한 병사는 사실상 사형이 기다리고 있었는바 모든 병사가 양쪽에 늘어선 사이를 지나가면 몽둥이로 때리는 체벌이었는데 대부분 이 벌을 받으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전투에 임해서 열심히 싸우지 않거나 너무 일찍 적에게 등을 돌린 경우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벌로 군단이나 부대 전체가 벌을 받는다.식량을 밀대신 보리를 주거나, 천막을 치지 못하게 하거나, 울타리 밖에서 별도로 기거하게 하였다.

 

집단으로 반발하거나 총사령관에게 반기를 든 경우는 군단 전체가 추첨을 하여 10명중 1명의 비율로 희생자가 선택된다. 이 사람이 동료들 모두의 죄를 짊어지고 심한 채찍질후 참수를 당하게 된다. '10분의1처형'으로 통칭되는 이 형벌은 로마군에서는 최고의 형벌로 규정되어 있다. 자신도 죄를 지었으면서도 동료를 처형하는 역이니까 정신적으로 잔혹하기 이를데 없는 벌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