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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로마인 이야기 8

제2권 : 요약(계속)

 

한니발 전쟁 : 제2차 포에니 전쟁전 기원전 219년-216

 

로마가 북부전선의 방어체제를 확보하지 못한 기원전 221년 카르타고가 지배하고 있던 에스파냐의 하스드루발 총독이 하인으로 부리고 있던 갈리아인이 모욕당한 것에 대한 원한으로 피살되었다. 하스드루발은 하밀카르의 사위로 그의 뒤를 이어 에스파냐를 통치하여 왔지만 한니발이 성장할때까지 공백기간을 이어주는 다리역활을 하였다. 이때 한니발은 26세로 하스드루발의 뒤를 이어 에스파냐의 총독이 되었다.카르타고 정부에서도 만장일치로 그의 총독 취임을 승인했다. 전권을 장악한 한니발은 그후 1년동안 에브로강 이남지역을 완전히 제패하려고 힘쓰면서 그리스인이 세운 도시로 로마의 동맹도시인 에스파냐 동해안에 있는 사군토 도시를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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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군토 동맹도시 모형

 

 

사군토에서는 급히 로마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로마는 자국의 사정으로 당장 지원군을 보낼수가 없어 이 문제를 외교로 해결하려 했다. 우너로우너은 두명의 사절단을 사군토로 보내 한니발을 �아가 항의하였으나 한니발은 애매한 태도로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에 사절단은 카르타고 본국으로 가서 항의를 하였으나 카르타고 정부는 한니발에게 사군토 공격을 중지시키기는 커녕 한니발의 신병을 인도해 달라는 사절단의 요청을 묵살했다. 로마 사절은 사군토에서 병력을 철수하던가 아니면 로마와 전쟁을 벌이던가의 양자택일을 요구하였으나 카르타고는 병력을 철수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로마인도 카르타고인도 이런 작은 사건이 제2차 포에니 전쟁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는 동안 한니발의 사군토 공격은 계속되고 있었고카르타고와 전쟁개시 여부는 로마 민회에서 결정할 문제였다. 사절단이 귀국할 즈음, 사군토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다. 사군토는 무려 8개원이나 버틴끝에 함락되었으며 주민은 모두 노예가 되었고 전리품은 병사,한니발,카르타고 정부가 각각 3분지1씩 나누어 가졌다.이 소식을 들은 로마 민회는 카르타고에 대한 전쟁을 가결한다.한니발은 사군토 공격에 시간을 끌면서 로마의 선전포고를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이 선포되자 한니발은 에브로강 이북지역에 대한 공격의 명분을 갖게 되었고 로마인이 '한니발 전쟁'이라고 부른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이 전쟁의 목적과 전장터가 어디가 될 것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서른도 채 되지않은 한 젊은이 뿐이었다.

 


 

                           에스파냐에서 군대를 사열중인 한니발

 

 

기원전 218년 5월. 한니발은 준비를 끝낸 군대를 이끌고 카르타헤나를 떠났다.한니발이 코끼리를 포함한 그의 대군을 이끌고 에브로 강을 건너 피레네 산맥을 넘고 현재의 프랑스인 갈리아 땅에 들어가 론강을 건너 프랑스를 횡단한 다음,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한 것이야 말로 그후 2천200년 동안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그는 박수를 받기 위해서 알프스를 넘거나 모험이 좋아서 한 것도 아니라면 그는  왜 알프스를 넘는 모험을 감행하였을까?

 

한니발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 하밀카르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라도,바알신전에서 맹세한 것도,한니발의 최종 목적은 로마를 격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밖에서 싸우면 본국과 동맹국의 지원을 무한정 받는 로마에 이길수 없다는 것은 시칠리아가 전쟁터였던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전쟁터는 로마의 근거지인 이탈리아가 아니면 안되었다.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의 서.남.동쪽의 침공로를 다 검토하였으나 3개 방향은 로마의 동맹도시,속주,로마 해군력,원거리 등으로 침공할 여지가 없었고 북쪽은 아직 완전한 방어선이 구축되지 않았으며 갈리아인들은 아직 로마에 대한 감정도 좋지 않고 도로망도 아직 구축되지 않았다는 점, 다소의 피해가 예상되지만  알프스만 넘어 가기만 한다면 북부 로마의 침공로는 예상외로 쉽게 진격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갈리아인들이 가축떼를 데리고 넘나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모험이긴 하지만 냉철한 계산을 토대로 하여 산전된 모험이었다.

 

한니발은 카르타헤나를 떠날때 병력은 보졍 9만,기병 1만2천,코끼리37마리였다.그밖에 카르타고 본국 방어를 위해 2만명을 파견하였고, 에스파냐를 수비하기 위해 보병 1만2천,기병 3천,코끼리 21마리를 남겨 놓았다.에스파냐 방위는 동생 하스드루발에게 맡기고 막내동생 마네고는 원정대와 동행하였다.한니발은 군량미 조달 등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땅에 들어 갔을때 지역 방어를 위한 병력과 원거리 원정에 두려움을 느끼는 에스파냐 원주민들중 본인이 원하는 자는 집으로 귀향하도록 조치하는 등 부대를 재편성 및 정비 하여 보병 5만명,기병 9천명으로 정예화 하였다.

 

 

 

한니발이 에브로 강을 건너자 주변의 로마 동맹도시들이 로마에 전령을 띄웠다. 로마는 한니발이 에스파냐를 완전히 평정할 것으로 판단한다면 로마동맹도시들이 분명히 한니발의 공격목표가 될 것이며 카르타고 본국에서도 그와 동시에 시칠리아에 대한 동시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다.2개 전선에서 카르타고와 싸워야 하는 로마의 입장은 곤욕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해에 집정관으로 선출된 귀족촐신인 푸블리우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평민출신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였다. 두 사람의 당초 임지는 북부 포강 유역으로 정해져 있었으나 코르넬리우스의 임지는 에스파냐로, 셈프로니우스의 임지는 시칠리아로 조정되었다. 로마는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기존에 편성된 4개 군단외에 추가로 2개 군단을 더 편성하였다. 평시에는 로마시민병과 동맹국 병사의 수는 1:1 정도이나 유사시에는 동맹국 병사가 증원되고 위기가 고조되면 군단의 로마시민병 수가 4천에서 5천명으로 증원되는게 관례였다.코르넬리우스는 보병 2만2천,기병 2천200기로 도합 2만4천200명이었다. 셈프로니우스는 보병 2만4천,기병 2천400명으로 도합 2만6천400명이었다.

 

 

집정관 코르넬리우스는 피사로 가서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5단층 겔러리선60척에 군단 전병력을 테우고 에스파냐로 떠났다.집정관 셈프로니우스도 3단층,5단층 160척과 12척의 수송선단을 타고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를 떠나 시칠리아로 향했다. 코르넬리우스가 에스파냐에서 한니발군을 저지만 한다면 셈프로니우스는 카르타고 본국까지 진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군대가 각각 출발하자 에스파냐에서 두번째 소식이 전달되었다. 한니발이 피레네 산맥을 넘고 잇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프랑스 해안의 로마 동맹도시를 공격할 것인가? 로마는 한니발의 속셈을 알 수가 없었다. 로마군이 마르세이유에 도착하면 한니발의 의도가 분명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시칠리아에 도착한 셈프로니우스는 예상밖으로 평온한 시칠리아에 놀랐다.정찰대를 사방에 보내 카르타고군의 동향을 탐지하였으나 카르타고 본국의 움직임도 전혀 전쟁 직전의 분위기는 �아볼 수가 없었다. 병사들은 길거리를 한가로이 거닐고 잇었으며 한니발의 동정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것 같았다.집정관 셈프로니우스는 예하부대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토록 지시하고 해안 순찰대에 경계를 강화토록 하였다.

 

마르세이유 항에 도착한 집정관 코르넬리우스는 한니발 군대가 피레네 산맥을 넘고서는 자취를 감추었다는 보고였다.정찰기병 300명을 풀어 사방을 정찰토록지시하고 한비발군의 동태를 탐지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탐문을 하였으나 수목이 울창한 갈리아지방은 군대의 움직인을 탐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니발이 이동한 경로


 

한니발전쟁당시 카르타고와 로마의 영토와
한니발의 진격로를 잘 보여주고있다.
 

 

한니발은 론 강을 건너기 전까지 여러부족의 갈리아인을 만나 회유하고 힘으로 억누르면서 산림속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한니발은 로마군이 그의 움직임을 탐지하기 위하여 정찰대를 보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군과 충돌로 불필요한 희생을 방지하기 위해서 내륙 깊숙히 이동하고 있었다. 정찰대와 현지인의 도움으로 적당한 도하지점을 발견한 한니발은 갈리아인들이 강 건너편에서 노골적인 적개심을 보이자 기병대를 상류쪽 40키로 지점으로 급속도하를 시켜 갈리아부족을 소탕토록 하였다.갈리아인들은 한니발군의 기병대의 공격으로 부락이 모두 불타고 내륙으로 쫓겨갔다.

 

 

갈리아인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도강이 시장되었다. 상류의 물막이 공사로 유속을  줄이고 땟목을 만들어 병력과 코끼리, 짐을 도하시키는 도중에 물에 빠져 죽는 병사와 코끼리들의 희생을 다수 치루면서 도강을 완료한후 병력은 4만6천명이었다.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5만 9천명중 1만 3천명을 잃은 셈이었다. 하지만 한니발은 이러한 손실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도강중 후위의 안전을 위하여 하류로 정찰을 보낸 기병대가 로마군 정찰기병과 우연히 조우하였다. 갑작스런 기병대 끼리의 접전으로 로마기병은 300기중 140기를 잃었으며 한니발 기병은 200기를 잃고 신속히 철수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집정관 코르넬리우스가 현장으로 달려왔으나 한니발군은 이미 사흘전에 도강을 끝내고 떠난 뒤였다. 기병대만으로 사흘거리는 따라 잡을 수 있으나 적과 접전을 벌일 수가 없다. 중무장 보병대로는 사흘거리를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한니발의 의도가 알프스를 넘는 것이 분명해진 이순간  집정관 코르넬리우스는 양자택일의 고민에 빠진다. 하나는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돌아가 알프스를 넘어 오는 한니발을 맞아 싸우는 방안과 아니면 시칠리아에 있는 동료 집정관 셈프로니우스로 하여금 군단을 이동하여 알프스를 넘어오는 한니발을 대적토록 하고 자신은 예정대로 에스파냐로 진군하여 한니발의 배후를 칠 것인가?

 

결국 코르넬리우스는 절충안을 선택했다. 동행한 동생 그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에게 군단 병력을 주어 에스파냐를 공격토록 하고 자신은 직속장교만 대리고 피사로 가서 예비 2개군단으로 한니발군과 싸운다는 것이다. 급보를 받은 원로원은 예비군단을 현역으로 승격시켜 피사로 보내고 시칠리아의 셈프로니우스에게 급히 북상토록 지시했다. 

 

한니발의 군대가 어느 경로를 통하여 알프스를 넘었는지는 그 후 2천 20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리고 많은 역사학자들이 필사적으로 탐구하였지만 여전히 확실치 않다. 연구자들이 주방하는 경로는 모두 여섯 경로나 된다.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피콜로산메리나도 고개를 넘었다고 주장하고 로마인 역사가 리비우스는 그 보다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 몬지네브로 고개를 넘었다고 주장하고 독일 역사가 몸젠은 폴리비오스설을 지지하고 있다.

 

한편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본 경험이 있는 나폴레옹은 리비우스설을 지지했다. 그래서 한니발이 알프스의 어느 지점을 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떻게 넘었는지는 분명하다. 한니발과 동행한 그리스어 교사인 실레누스가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로마인 조차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을 한니발은 해낸 것이다. 알프스 산기�에 도착한 한니발은 주변의 갈리아인들을 금품으로 회유하거나 군사력으로 압력을 가하여 길을 안내받으며 30마리의 코끼리떼를 앞세우고 짐을 실은 수레와 보병부대가 따르고 후위는 기병이 맡았다.

 

29세의 젊은 총사령관은 편안하게 대열의 중간에서 이동한 것이 아니라 산악민족이 자신들의 지역을 침범한 한니발군에게 노골적인 적개심을 보이면서 절벽위에서 돌을 굴리거나 매복하여 화살로 공격하는 경우가 여러번 발생할 때마다 앞으로 달려나가 앞장서서 상황을 처리하곤 하였다.계절은 9월로 접어들고 있었으며 산속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남쪽나라에서 자란 코끼리들에게는 이러한 고산지대 산악의 겨울 날씨가 기분 좋을리는 없었다. 신경이 예민하여 걸핏하면 난폭해 졌고 꾸불꾸불한 길과 수천길 낭떠러지의 위험한 길에 봉착할때 마다 코끼리는 동물적인 직감으로 위험한 장소에 오면 꼼짝도 하지 않는다. 보병까지 동원하여 코끼리를 떠밀고 짐수레를 끌었다. 발을 헛디딘 코끼리가 짐수레와 병사들을 길동무 삼아 수천길 골짜기 바닥으로 사라졌다. 단말마의 비명이 구름낀 하늘을 뚫고 메아리쳐 들려올때 마다 저 뒤에서 따라오는 장병들은 마음속까지 우울하였다. 숙영지 건설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산악민족이 사용하는 피난처나 요새를 만나면 신들의 은총으로 생각했다. 천막을 칠수도 없는 절벽 아래서 천막을 몸에 두르고 바람과 추위를 참으며 잠을 자는 경우도 허다했다. 모닥불을 피울수도 없어 한니발도 꽁꽁 언 음식을 입에 넣고 녹혀 먹는 경우도 허다했고 병사들과 같이 절벽아래서 설잠을 자야 했다.

 

 

한니발이 위대하다고 이야기하는 이유중에 한가지가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는것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커다란 산맥을 통과한 장군은 세상에서 몇 안되기에 유명할지도 모른다.
알프스를 넘으면서 한니발의 군대는 상당수의 손실을 입게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승리라는 희망을 잊지 않았다.
 
 

한니발은 부족분의 군대를 갈리아인으로 보강하였다

 

 

한니발은 산을 오르기 시작한지 아흐레 만에 겨우 정상에 오를수가 있었다. 코끼리,말,병사 모두가 기진맥진해 있었다. 고개마루 근처에 군대 전체가 쉴 만한 평지가 있었다. 29세의 젊은 총사령관은  전병력을 모아놓고 동쪽 방향을 가리키며 우렁찬 목소리로 연설을 하였다. 저 멀리 이탈리아가 푸른 하늘아래 희미하게 보였다.

 

" 병사들이여! 저곳이 이탈리아다! 이탈리아에 들어가기만 하면 로마 성문앞에 선 것이나 마찮가지다! 여기서 부터 내리막길 뿐이다. 알프스를 넘은 뒤에 한두번의 전투만 치르면 우리는 이탈리아 전체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병사들은 그동안의 피로가 일시에 사라지는듯 하였다. 그후 2천년 뒤에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도 알프스 고개 위에서 프랑스 병사들에게 똑 같은 취지의 유명한 연설을 하면서 한니발 장군을 흉내냈다.

 

겨울산을 내려가기는 오르기 보다 더 힘든게 사실이다. 혹한의 날씨는 눈발을 내리고 밤에는 눈이 얼어붙어 아침이면 빙판갈로 변하여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혹독한 추위속에 살을 에는 듯한 바람과 눈보라는 병사들 뿐만 아니라 코끼리도 지옥을 방불케 하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앞선 병사들이 얼어붙은 얼음을 깨내는 동안 전체 대열이 기다리기도 하였고 눈사태로 길이 막혀 길을 뚫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동사하는 병사가 속출하였고 미끄러져 골짜기로 사라지는 코끼리와 병사들 뿐만 아니라 짐을 실은체로 말과 같이 굴러 떨어지는 짐수레의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와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메아리치며 알프스 산맥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는데 보름이 걸렸다. 이탈리아 땅에 도착한 한니발 군대는 보병 2만명,기병 6천명으로 도합 2만 6천명으로 줄었다. 론강을 건너던 당시 병력이 4만 6천명이니까 알프스를 넘으면서 2만명 이상이 희생을 치런 셈이었다. 일찌기 아무도 이룩하지 못한 위업이지만 치른 희생도 엄청난 규모였다. 29세의 젊은 한니발은 이러한 손실까지도 모두 고려한게 아닐까?

 

알프스를 내려온 곳에 펼쳐저 있는 골짜기에 한니발은 군대 전체에게 보름동안의 휴식을 주었다. 이때 로마군이 공격하였다면 승리할 수 있지 않았겠냐고 이야기한 학자가 있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미 정확한 정보를 통하여 로마군의 매복이나 공격이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 이유는 아직 그때까지 로마는 그 지역까지 방어선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며 포강 이북지역은 아직 갈리아인들의 천지였다. 남으로 진출하다가 로마군에게연전연패하여 북으로 밀려나 포강 이북의 숲속에서 여러부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군의 영향권 밖이므로 로마군의 활동은 불가하다는 점을 한니발은 잘 알고 있었다.

 

한니발은 병사들이 휴식하는 동안 그 지역 일대의 갈리아인들을 회유하기 시작하였다.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며 갈리아인들을 로마로 부터 이탈시키려는 방책이었다. 갈리아인들은 로마에 대한 적대감정과 패배의식이 팽배하여 있던차 한니발이 나타나 동맹을 요구하는 바람에 일부 부족들은 한니발과 동맹을 맺었다.저항하는 부족은 군사력을 사용하여 초토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저항의 본거지였던 트리노를 함락시켜 모두 불태우고 한니발은 적을 �아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한니발이 이탈리아로 쳐들어간 기원전 218년. 로마의 전력 즉 동원 가능한 병력은 어느정도 였을까?

 

동시대 로마 원로원이며 역사가 였던 픽토르의 저서에 의하면 로마는 당시 '로마연합' 가맹국 전역에서 동원할 수 있었던 병력규모는 전부 합하여 75만명이었다. 이 가운데 3분지1이 로마시민이 차지하였다. 로마연합에 가맹한 동맹국들과 각 지방의 동원 가능병력은 패배자 조차 자기들에게 동조시킨 로마연합을 정치걸작으로 평가한 토인비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았다는 이야기다. 실제로는 군무를 돌아가면서 수행하였고 시민들의 기본적인 삶을 팽개치고 오로지 전선에만 매달릴 수도 없는 실정이므로 동시에 75만명을 동원한다는 것은 곤란하다. 따라서 전시에 동원 가능한 전력은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보더래도 5-7만명 정도로 보면 되었다. 한니발은 이러한 로마군의 긴급동원 가능 병력 규모를 5만명 정도로 예상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2만6천의 병력으로는 로마군에 비하여 숫적으로 열세하다. 그러나 그 2만 6천명은 피레네 산맥을 넘었고 론강을 건너 알프스를 넘은 살아남은 정예병 중에도 정예병이었다.그들은 5개월 동안 한솥밥을 먹으며 죽음이 눈앞에 전개되는 험한길을 헤쳐왔으며 같이 동거동락하면서 지내온 동지들이며 에스파냐인,리비아인,누미디어인 등 여러 인종의 혼합체이지만 연대감이 강하였고 그들의 지휘관은 천재적인 재능을 겸비한 젊은 장군 한니발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한니발군의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3:1이나 로마군은 평균적으로 10:1의 비율이다. 한니발이 치른 전투를 추적해 보면 그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략.전술을 철저히 연구한 것으로 판단되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투를 선례로 삼아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전술방식을 채택하였다. 한니발은 주력부대를 보호하고 지원할 지원부대 증강의 필요성을 느끼고 갈리아인들을 회유하여 1만여명의 갈리아인 지원부대를 조직하게 된다. 특히 갈리아인들의 기병은 누미디아 기병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용맹성이 있었고 초기 폭발력은 강하나 지구력이 없다는 점도 한니발은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로마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쳐들어온 한니발군을 대적하기 위하여 분주히 준비하고 있었다. 마르세이유에서 급거 귀국한 집정관 코르넬리우스는 피사에 도착하여 그를 기다리고 있던 2개 군단을 이끌고 최전선 기지가 된 피아첸차로 직행했다. 집정관 코르넬리우스는 한니발의 재능과 전술 능력을 이미 론강 도하작전 경우나 알프스를 넘은 모험심이나 함부로 상대할 애숭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한니발은 갈리아인까지 포함된 증강된 전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남쪽에서 올라오는 셈프로니우스의 지원군이 도착할 �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계절도 11월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로마군은 겨울 휴전기도 무시한체 한니발군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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