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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로마인 이야기 10

제2권 :요약(계속)

 

한니발 전쟁 : 제2차 포에니 전쟁

 

 

국적 : 카르타고
활동분야 : 정치·군사
한니발석상
한니발석상

하밀카르 바르카스의 아들. 제1차 포에니전쟁에 패전한 후 아버지를 따라 카르타고(아프리카 북부)에서 에스파냐로 갔으며, 아버지와 매형 하스드루발의 뒤를 이어 BC 221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에스파냐 주둔군의 총지휘관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로마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으며, BC 219년 로마군 점령하의 에스파냐 도시 사군툼을 함락시키고, 이듬해 에브로강을 건너자, 로마로부터 선전포고를 받아 제2차 포에니전쟁(한니발전쟁)의 전단()이 열렸다. 그는 육로로 이탈리아 진공계획을 세우고 피레네산맥을 넘어 남프랑스를 석권하고, 다시 눈덮인 알프스를 넘어서 이탈리아로 침입, BC 217년 트라시메누스 호반()의 전투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로마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BC 216년 칸나에전투에서는 교묘한 용병술()을 발휘하여 로마군을 철저하게 격파하였으나 전선은 점차 교착상태에 빠졌다. 점차 전세를 회복하기 시작한 로마군에 의하여 에스파냐로부터의 원군()도 격멸당하였으며, 로마의 장군 대()스키피오가 에스파냐를 정복하고 카르타고로 육박하였다. 한니발은 고국에 소환되었으며, BC 202년 자마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대패함으로써 결국 제2차 포에니전쟁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났다.

[제2차 포에니전쟁]

 

* 칸나회전 : 제4회전

 

기원전216년. 민회에서 병력 증강을 의결한 후 로마군단은 로마 시민병 보병 4만,기병2천400명 도합 4만2천400명에 동맹국 병사는 보병 4만,기병 4천800명 도합 4만4천800명을 보충하여 전체적으로는 8만7천200명으로 증강하였다.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11:1이다. 그당시 로마군은 기병의 확보에 애를 먹고 있었는데 말을 키우는 생산지는 중부 산악지대 일부와 시칠리아 지역에 국한되어 있어 절대적인 말의 생산숫자도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누미디아 기병이나 갈리아 기병처럼 어릴때 부터 말을 타는 민족이 아니었다.그래서 갑작스런 기병의 증강도 아려울 뿐만 아니라 기량면에서도 한니발 기병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하니발군은 자신이 에스파냐에서 대려온 정예보병 2만,  누미디아 기병 6천 도합 2만6천명에 갈리아 용병 보병 2만,기병4천으로 도합 5만명 수준이었다.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4:1이었다.

 


 


 

강력한 로마군을 상대로 뛰어난 전략으로
전력이 열세인 싸움을
역사상 손에 꼽히는 대섬멸전으로 마무리지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이듬해 기원전 216년 신임 집정관으로 적극전파와 소극전파에서 각각 한명씩의 집정관을 선출하였는데 소극전파에서 귀족출신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선출되었고 적극전파에서는 평민출신인 '테렌티우스 바로'가 선출되었다. '바로'는 군무 경험이 거의 전무한 사병출신으로 대부대를 지휘해 본 경험이 전무하였다. 로마군은 기원전 218년에 6개군단에서 기원전 216년에는 13개 군단으로 증편되었다.

 

로마군이 군단편성을 끝내고 '아피아' 가도를 따라 남으로 이동하고 있을때 적정보고가 들어오기를 한니발군이 남쪽 '폴리아' 지방으로 이동중이라는 보고였다. 한니발은 포로 심문을 통하여 이미 신임 집정관의 성격,경력 등을 상세히 알고 있었으며 기병이 쉽게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평원에서의 전투를 생각하고 있었다.

 

추격하는 로마군에게 달아나듯 남하를 계속하던 한니발은 '오판토'강이 '아드리아해'로 흘러드는 근처에 펼쳐진 평원까지 와서 행군을 멈추고 로마군의 식량저장소가 있는 '칸나'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본국 '카르타고'나 '에스파냐'에서 지원은 단 한번도 없었다. 재해권을 장악한 로마해군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칸나'에서 식량을 조달한 한니발은 마을 뒤 언덕에 진을 치고 로마군을 기다렸다. 로마군 9만명이 한니발 진영 5만명과 10키로쯤 떨어진 곳에 진영을 설치하고 서로 대치했다. 정찰대끼리 간헐적인 접전이 있었으나 소규모 접전에 불과했다.한니발은 소규모 접전시 마다 갈리아 기병에게 로마군에게 패하는 척 도망을 치도록 하였다. 로마군은 소규모 접전에서 다소의 전과를 올리곤 하였는데 대부분 갈리아 용병이었다. 로마진영의 병사들은 절대적인 병력의 우세와 소규모 접전에서의 전과로 차츰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이런 상태라면 충분히 이길수 있다고 생각했다. 31세의 젊은 장군은 처음에는 져주고 막판에 모두 털어가는 고수의 수법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로마군은 그것을 인식 못했다. 그는 로마군 병사와 사령관들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있었으며 그는 자신이 원하는 전장터로 적을 이끌어 내려면 그들의 경계심을 풀도록 할 필요성이 있었다.

 

전투욕에 불탄 로마군은 진영을 '오토판'강 왼쪽 언덕까지 전진시켰다. 한니발도 당장 같은 쪽으로 진영을 이동시켰다. 양군의 거리는 2키로도 체 안되었다. 양 진영은 서로 노려보며 대치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한니발은 적극성도 없이 수규모 전투 결과에 대하여 낙심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31세의 젊은 장군은 40세가 훨씬 넘은 로마군 장수들의 심리를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군이 경계심을 누그뜨리기 위해서는 그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했다.

 

 

이튼날 아침이 되자 로마군 진영에서 집정관 '바로'의 명령을 받은 로마군이 줄지어 나와 '오토판' 강  우측 구릉지대에 진을 쳤다. 강 좌측은 넓은 평야지대로 기병들의 활동이 유리한 점을 고려하여 울퉁불퉁한 언덕이 산재되어 있는 오른쪽 지대를 선택한 것이었다. 로마군 전체가 포진을 끝낸 것을 본 한니발은 자신도 전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 로마군 정면에 진을 쳤다. 그러나 로마군이 가로 횡대로 일직선인 반면 한니발군은 중앙부가 불룩 튀어나온 활모양으로 변형된 진영을 편성했다.

 

 

한니발은 항상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전투를 했다. '트레비아' 전투나 '트레메시노'호반 전투도 마찮가지였다. 그가 원하는 곳으로 적을 유인했다는 점에서 '칸나'도 다를게 없었다.

 

로마군 사령관은 중앙종심을 중무장 보병으로 보강하여 적진의 중앙 돌파를 노린 것이었다. 그래서 완만한 경사의 좁은 지역을 선택하였던 것이었다. 이런 진행때문에 우익 기병 2천 400명은 강과 보병대 사이에 낀 좁은 지역에서 3배나 많은 적의 기병과 싸워야 하는 불리함을 안게 되었다. 기병이 잘 견디어 내고 보병이 중앙돌파에 성공 했을때 후방에 예비로 있는 1만명을 투입하여 전투를 단숨에 승리로 이끌어 가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레비아' 전투때와는 전혀 다른 진용을 짠 한니발은 그 수법에 넘어가지 않았다. 한니발은 로마군의 의도를 이미 간파하고 중앙부를 활모양으로 불룩하게 하여 갈리아 보병으로 전진시켰다. 접전이 벌어지면 갈리아 보병이 로마군의 중앙부를 견제하면서 뒤로 점차적으로 후퇴하는 동안 양익의 기병대가 로마군 기병대를 격파한 다음 양익포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단 갈리아 보병대가 로마 경보병대와 중무장 보병대의 공격을 잘 견디어 내 주면서 나중에는 안쪽으로 들어가는 형태로 로마 중무장 보병대를 아군 깊숙히 유인하는 것이었다. 갈리아 보병대가 임무를 수행하고 좌우측으로 빠지면 자신의 정예 중무장 보병대가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로마 중무장 보병과 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시간의 싸움이었다.

 

 

전투는 우선 양군이 정석대로 각자의 정면에 있는 적과 맞서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한니발의 좌익기병은 로마군 우익기병과, 중앙은 로마군 중앙의 경무장 보병과, 우익은 로마군의 좌익기병과 맞서는 식이었다. 하지만 양군에서 처음 접촉한 것은 활 모양의 진형을 이루고 있던 한니발의 갈리아 용병과 로마의 경무장 보병이었다. 

 

이 싸움에서 양군의 격돌은 처음부터 로마군의 우세속에 전개된다. 이것을 본 로마 집정관 '바로'는 보병대 지휘를 맡고 있던 전직 집정관 '세르빌리우스'에게 중무장 보병대를 투입하라고 명령했다. 로마의 중무장 보병 전체가 육박해 오자, 갈리아 용병으로 구성된 한니발의 전위부대는 점점 뒤로 후퇴하였다. 가운데가 불룩하던 활모양의 한니발 진영이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활모양으로 바뀌었다. 로마 보병대의 중앙돌파에 되도록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만든 활모양의 진형이 효과를 발휘하도록 갈리아 용병들은 후퇴하면서도 잘 견디어 내고 있었다. 로마의 귀족 자제들로 편성된 우익기병은 3배나 많은 전력의 한니발 좌익 기병에게 밀리고는 있었지만 분전하고 있었다. 로마의 좌익 기병도 한니발의 누미디아 기병과 비슷한 숫자로 선전하고 있었다. 한편 로마 중보병의 맹공을 받은 갈리아 용병들이 침착성을 잃자 기세가 오른 로마군 중앙부는 중무장 보병과 경무장 보병이 한덩어리가 되어 후퇴하는 적을 열심히 추격하며 공격하고 있었다. 뒤로 물러나던 갈리아 용병들이 갑자기 좌우측으로 전선을 이탈했다. 그러자 한니발의 중무방 보병대가 나타났다. 정예 2만의 중무장 보병이 7만의 로마군 중무장 보병과의 접전에서 잘 견디어 내고 있었지만 보병전세는 점점 로마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나 반대로 기병전은 로마군이 밀리고 있었다.로마 좌익 기병대가 누미디아 기병대의 공격을 견디어 내지 못하고 패주하기 시작하자 한니발의 작전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갈리아 용병과 경무장 보병대가 로마 기병대가 무너진 로마군 좌익부로 다가왔다. 로마 우익 기병도 무너져 흩어지자 한니발의 좌익기병 부대가 배후로 돌아와 공격하자 로마군 7만명은 5만의 한니발군에 완전히 포위되어 버렸다. 로마 시민인 중무장 보병대가 쉽게 항복할 리는 없었지만 한니발의 포위작전은 바로 섬멸작전이었다. 전 집정관 '세르벨리우스'도, 현집정관 '아이밀리우스'도 전사했다. 독재관 '파피우스'의 부관을 지낸 '마누티우스'도 전사했다. 기병이나 중무장 보병대로 참전한 원로원의원들 80명도 전원 전사했다. 극소수만이 한니발의 포위망을 뚫고 목숨을 건졌다. 포위작전도 완벽했듯 섬멸작전도 완벽했다. 한니발은 로마군의 주력인 중무장 보병의 섬멸을 실현하였다. 사령관 '바로'는 50기의 기병을 이끌고 포위망을 탈출하여 산길을 따라 서쪽으로 수십키로나 떨어져 있는 로마 식민도시 '베누시아'로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보병 4천과 기병200명은 '칸나' 북쪽 20키로나 떨어진 '카사노'까지 도망갔다. 그들중 19세인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도 끼어 있었다. '트레비아' 전투후 에스파냐로 파견된 아버지가 '아이밀리우스' 집정관에게 아들을 맡겼기 때문이다. 젊은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뛰어난 전술을 접한 것은 이번이 세번째였다. 로마 패잔병은 1만도 체 되지 않았고 칸나전투에서 로마쪽 희생자는 7만이었으나 한니발은 희생자 5천 500명중 3분지2가 갈리아 용병이었다. 로마가 이런 참패를 맛본 것은 이 '칸나전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카르타고 언덕에서 바라본 튀니스 만

 

한니발은 전사자들로 부터 가치있는 물건을 빼았는데 이튼날 하루를 꼬박 소비했으며 승리를 알리기 위해 카르타고 본국에 보낸 그의 동생 '마고네'는 죽은 로마 병사들의 손가락에서 빼낸 금반지를 본국 요인들의 눈앞에 산더미 처럼 쌓아 올렸다고 한다. 로마 시민에게 금반지는 결혼 반지가 아니라  개인도장으로 크고 묵직하였다고 한다. 이런 반지가 7만개나 쌓였다면 그 높이가 얼마나 될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로마는 완패 소식을 조용히 받아 들였다. 집정관 '바로'가 패잔병을 수습하여 수도 로마로 돌아오자 원로원 의원들을 비롯한 모든 시민이 성문까지 마중나와서 노고를 치하했다. 로마시민들은 조용히 패전을 감내하며 누구를 비난하거나 입에 담으려 하지 않았다.

 

고대 로마의 유적지, 포로 로마노

화불단행이라는 말처럼 엎친데 덮친겪으로 잇따라 비보가 날아 들었다. 갈리아 원정을 나간 로마군 2개 군단이 전멸했다는 소식이었다. 한니발의 활약에 용기를 얻은 갈리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법무관 '포스트무스'가 이끄는 2개군단이 숲속에서 갈리아인들이 설치한 자연녹채장애물을 이용한 매복작전에 로마군이 포위되어 전멸하였던 것이었다. 갈리아인들은 수목을 짤라 원상태로 세워놓은 다음 로마군을 숲속으로 유인하여 일시에 나무를 쓰려뜨려 로마군이 나무에 깔려 꼼짝못하고 혼란한 틈에 매복하고 있던 갈리아인들이 습격하여 전멸시켰다는 것이었다. 법무관 '포스트무스'도 전사하였다. 로마는 며칠 사이에 통틀어 8만명이나 되는 병력을 잇따라 잃은 셈이었다.

 

한편 '칸나전투'에서 완승한 한니발은 부하장수들이 곧바로 로마공략을 진언하였으나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로마의 붕괴는 로마연합의 붕괴로만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 한니발은 지금시점에서 수도 로마를 공격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한니발도 젊은만큼 마음속으로는 망설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견고한 방어도시를 공략하려면 시칯리아에서 보여주듯이 2-3년이 걸릴것은 뻔하였다. 장기전이 되면 갈리아 병사들도 신뢰할 수가없고 자신의 정예 2만5천으로 대도시를 공략하려면 자멸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한편 한니발은 평지에서 대접전은 자신이 있었는지 모르나 공성전에서는 자심간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공성전에서는 자신의 주특기를 살릴수도 없고 성문을 파괴하거나 성벽을 기어오르는 접근전이 필요하였다. 한니발은 '카푸아'공략시 포로로 풀어주었던 내통자들을 통하여 밤에 몰래 성문을 열개하여 일시에 공략하여 성공한 적이 있을 뿐 다른 특별한 묘책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공성전이 불리함을 한니발은 잘 알고 있었다.

 

로마는 면과 점으로 이루어진 나라로 동맹도시들 사이에 흩어져 있는 식민도시를 로마시민이나 로마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라틴족 시민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으며 이들은 곧 병사들이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로마를 구하기 위하여 수도를 포위하고 있는 자신의 군대를 역포위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한니발은 이탈리아 침공을 결심하였을때 부터 기본전략을 변경할 수가 없었다. 로마연합의 동맹도시들의 로마이반이 1차적 전략목표였다. 한니발은 기본전략을 실현하기 위하여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수도 로마공격도, 패잔병 추격도 실시하지 않고 남쪽으로 군대를 이동하였다.

 

장화처럼 생긴 남부 이탈리아 반도의 발등에서 발끝까지에 해당하는 '칼라브리아' 지방 일대의 동맹도시들이 한니발의 공격으로 함락되거나 스스로 성문을 열었다. 이 지방의 동맹국 가운데 유일하게 로마 쪽에 남은 것은 '레조'뿐이었다. 로마연합은 남쪽 귀퉁이 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로마는 동맹도시 '카푸아'의 이반에 가슴이 아팠다. '카푸아'는 중남부의 '캄파냐'지방에서 '나폴리'나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중요한 도시였다. 이 '카푸아'가 칸나에서 패배한 로마를 버렸다. 동맹국 포로들만 석방하였던 한니발의 계책이 열매를 맺은 것이었다. 한니발과 '카푸아'는 강화를 맺었고 주변 위성도시 4개도 로마에 등을 돌렸다.

 

구글맵-로마 지도

구글맵-로마 지도


 

 

기원전 216년. 칸나전투를 완승으로 장식한 한니발이 기원전 216년부터 215년 겨울을 '카푸아'에서 보내기로 하였다.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한 이래 지금까지의 천막생활에서 이제는 지붕과 벽으로 둘러싸인 집안의 침대위에서 쾌적한 수면을 취할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항니발은 여자에 대해서는 엄격하였다. 주변에서 많은 젊은 여자를 권유하였으나 그는 언제나 그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혼자 생활하면서 책을 보거나 사색에 잠기곤 하였다.'카푸아'에서의 생활은 그동안 전장터에서 지친 한니발 장병들에게는 꿈같은 생활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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