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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로마인 이야기 9

제2권: 요약(계속)

 

한니발 전쟁:제2차 포에니 전쟁

 

* 티치노(현재의 토리노) 전투 : 제1회전

 

지금까지 만난 로마인의 적들은 겨울이 되면 서로 휴전기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 이번에는 상식이 통할 것 같지 않은 한니발이다. 로마 2개 군단은 피아첸차에 그대로 묶여 충분히 요새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겨울을 지내야 할 상황이었다.

집정관 코르넬리우스는 전병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연설을 시작했다.

 

" 로마장병들이여! 그들은 지난 전쟁에서 패한 카르타고인들이다! 이는 승자와 패자의 싸움이며 이미 론강에서 그들 기병대를 물리친 적이 있다. 그들은 전력도 많은 손실을 초래했고 알프스를 넘어와 추위와 굶주림에 다치고 지친 병사들이다! 우리 땅에 침입한 적을 물리치는 것은 우리 공화국과 가족을 위한 싸움이다. 우리들이 어떻게 싸우느냐에 따라 우리 공화국과 가족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신들이여 우리를 보호해 주소서!"

 


한니발 진영은 포로로 잡은 갈리아인들 끼리 결투하여 승자는 자유인이 되게 하였다.결투 장면을 전 장병이 둘러선 가운데서 구경하게 한 다음 병사들에게 한니발도 사기진작의 연설을 하였다.

 

" 카르타고 장병들이여! 너희들은 방금 본 갈리아인들과 똑 같은 마음으로 싸운다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의 좌우에는 두개의 바다로 막혀있고 뒤에는 고생끝에 넘어온 알프스산맥이 막혀있다! 앞에는 론강보다 물살이 센 포강이 막혀있다! 너희들에겐 로마군과 � 전투에서 이기느냐, 아니면 패하여 죽느냐 하는 길 밖에 없다! 너희가 승자가 된다면 엄청난 보수를 받게 될 것이고 시칠리아와 샤르데냐 뿐만 아니라 로마인이 지배하고 있는 모든 땅의 지배자가 되리라! 충분한 휴식끝에 앞으로의 고생은 보수가 기다리는 고생이다! 적장이 누군지는 몰라도 전쟁터의 영웅이며 카르타고의 영웅이신 용장 하밀카르를 아버지로 둔 나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대군을 이끌고 에스파냐에서 이탈리아까지 먼 길을 온 나와 어깨를 겨룰수 있는 로마의 장수는 아무도 없다! 이 전쟁은 반드시 이긴다! 전쟁에 승리하면 너희들에게 카르타고나 에스파냐의 어디던지 원하는 땅을 줄 것이며 자식대까지 조세도 감면해 줄 것이다! 금은보화를 원하는 자에게는 응분의 금화도 주겠다! 카르타고 시민권을 원하는 자에게는 그것도 주겠노라! 각자에게 로마인 노예 2명씩도 주겠다! 그래서 이번 전쟁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할 운명이 여러분한테 달렸다!" 

 

 

 

카르타고 전 장병의 환호속에 한니발은 겨울이지만 로마군을 �아 동쪽으로 행군을 시작했다.로마 집정관 코르넬리우스도 기병대와 경보병대 소수를 이끌고 적정정찰을 나갔다. 피아첸차에서 포강 상류쪽에 티치노(오늘날 파비아) 근방 에 가장 평탄한 지대가 펼쳐저 있다. 로마 기병대는 포강의 지류인 티치노강에 임시다리를 놓고 서쪽으로 진출하자 서쪽 지평선에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한니발도 기병만 대리고 지형정찰을 나오던 중이었다. 양군은 거리를 좁히면서 서로의 정장이 포함된 부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로마군과 한니발군의 기병이 서로 접전이 벌어졌다. 처음 얼마동안의 전황은 호각지세로 전개되었다.

한니발의 양쪽 날개인 누미디어 기병의 전투력은 대단하여 로마의 갈리아 기병을 순식간에 격파하고 로마 본대를 위협했다. 로마기병은 포위 직전에 부상당한 집정관을 포함하여 패주하기 시작했다. 로마군이 임시로 가설한 다리를 건너자 대기하던 경보병 병력이 다리를 파괴했다. 한니발은 더 이상 추격을 하지 못하고  미쳐 강을 건너지 못한 패잔 기병 600명을 포로로 잡았다.

 

한니발은 다잡은 로마 집정관을 아슬아슬하게 놓쳐버린 것을 못내 아쉬워 했다지만, 그보다는 집정관을 구해낸 젊은 기사를 놓친 것을 더 아쉬워 해야했다. 집정관의 아들인 그 기사는 그해 나이 17세. 아버지와 같은 푸불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앞으로 16년 뒤에는 로마군을 이끌고 자마전투에서 한니발과 대결하게 된다. 피아첸차까지 도망쳐 돌아온  코르넬리우스는 중상이지만 한니발 기병전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평원에서의 숙영이나 전투는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방비가 허술한 피아첸차는 곧 도착할 2개군단 등 4개 군단의 숙영지로는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유리한 지형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 트레비아 전투 : 제 2회전

 

이탈리아 반도 동북쪽에 있는 포강은 알프스에서 발원하여 북쪽에서 흘러드나 트레비아강은 아펜니노 산맥에서 발원하여 남쪽에서 포강으로 흘러드는 지류이다. 트레비아강이 흘러드는  일대는 아펜니노 산맥이 가까이 있어 울퉁불퉁한 지형으로 기병활동에 제한을 주고 있다. 집정관 코르펠리우스는 이 일대에서 가장 높고 넓은 곳에 군단의 견고한 진지를 편성했다.

 

한니발은 이대로 겨울을 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포로들의 심문결과 로마군의 군량 저장소가 '카스테조' 마을 이라는 사실을 알고 보병과 코끼리 부대는 동쪽으로 진군토록 지시하고 자신은 기병대를 이끌고 '카스테라' 마을을 습격하여 군량 저장소를 확보했다. 주변 갈리아 마을을 약탈하여 식량을 확보할 필요도 없어졌다. 갈리아인들의 일부는 티치노 전투에서 한니발군이 승리하자 한니발 진영으로 모여 들었다. 아직도 포강 이북지역 갈리아인들의 절반 이상이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해가 바꾸기 전에 다시 한번 싸움을 벌여 갈리아인들의 동향을 카르타고쪽으로 돌려놓고 싶었다. 충분한 군량을 확보한 한니발은 계속 동쪽으로 진군하였다.

 

한편 셈프로니우스가 이끄는 2개군단이 강행군으로 코르넬리우스가 기다리는 숙영지에 도착했다. 지친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두 집정관은 전황 토의를 거듭했다. 코르넬리우스는 안전한 숙영지에서 겨울을 나고자 하였으나 셈프로니우스는 평민 출신으로 분발하여 강력하게 나갈 것을 강조했다. 한니발은 이러한 적장의 심리까지 파악한 모양으로 셈프로니우스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매일 교대로 지휘하 것는 로마 집정관들이며 한사람이 중상을 당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한니발은 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고 적장의 심리까지 파악하여 그것을 이용하는 천재적인 능력을 소유한 젊은 장수였다.

 

양군은 트리비아강을 사이에 두고 진영을 세웠다. 29세의 젊은 장군은 대낮에 당당히 트레비아 강둑 언저리까지 군대를 전진 시켰다. 기원전 218년 12월말. 한니발은 막내동생 마네고를 대리고 주변지형을 조사하러 나갔다. 트레비아강 서안을 꼼꼼히 조사한 뒤 관목숲이 있는 남쪽 방향을 가리키며 동생에게 말했다.

 

" 저곳에 보병1천,기병1천을 선발하여 내일 동이트기 전에 숙영지를 떠나 저 숲속에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  

 

숙영지로 돌아온 한니발은 모든 병사들에게 충분한 식사를 주도록 명령하고 이튼날 아침 동이트기 전에 아침식사를 끝내고 모닥불로 따뜻해진 몸에 기름을 발라두라고 했다. 양력 12월22일. 아침은 어느때 보다도 더한층 추위가 혹독하였고 금방 비가 내릴것 같은 찌푸린 날씨였다. 한니발은 로마진영을 기습했다. 집정관 셈프로니우스는 적이 기병만으로 공격한다는 사실을 알고 황급히 전 기병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기병대는 아침식사는 커녕 방한복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속옷에 갑옷과 병기만 휴대하고 신속히 말에 올라 달려나갔다. 로마기병과 중무장 보병이 전열을 갖추어 접전을 벌이자 한니발군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로마기병과 중무장 보병이 강을 건너 퇴각하는 한니발군을 쫓아 눈사태처럼 우르르 강을 건넜다. 골짜기 강이지만 비가내려 물이 불어난 강을 건너온 로마군은 온 몸이 흠뻑젖은 상태였다. 강 건너편에 아침을 든든히 먹고 몸에 기름까지 바르고 기다리고 있는 한니발군과 물에 젖은 로마군간에 접전이 시작되었다. 한니발은 중앙에 갈리아 보병대를 배치하고 양쪽 날개를 보강하여 로마군을 양익포위를 시도했다. 로마군 중무장 보병이 한니발군의 중앙을 돌파하여 선전하고 있을 때 기병끼리 격돌한 지역에서는 반대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접전이 시작되자 누미디아 기병대의 강한 전력에 로마군 기병대가 격파어 패주하자 로마군 양쪽 배후에 한니발군의 기병과 숲속에 숨어 있던 마고네군이 후방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4만의 로마군 보병의 포위망이 조금씩 좁혀들자 아침을 든든히 먹고 몸에 기름을 바른 한니발군은 추위는 커녕 더욱 사기가 오른 반면, 강을 건너 흠뻑젖은 상태로 방한복도 벗고 아침 식사도 못한체 급하게 전투에 임한 로마군은 추위와 허기진 로마군은 전열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포위망을 돌파하여 하류 트레비아 강을 건너 도망친 병사는 1만여명에 불과하였고 포위된 3만의 로마병사들의 살륙전이 계속되는 속에 도망칠 수 있었던 병사들도 숲속에 숨어있던 한니발의 동생 마고네군에 의하여 대부분 강물속에서 죽어갔다. 이 회전에서 로마군은 전술적인 패배와 정면대결에서 한니발군에게 완패를 당하였다. 트레비아 전투에서 한니발군이 승리하자 갈리아인들이 한니발 진영으로 몰려와 지원하였던 결과 한니발 진영의 군대는 5만으로 늘어났다. 겨우 목숨을 살아 도망친 로마의 두 집정관은 피아첸차에서 만나 패잔병들을 모아 리미니로 떠났다. 로마는 몇달전 재패를 끝낸 북부 이탈리아 지역을 완전히 포기했다. 한니발은 로마시민 포로에게는 적은 식사에 가혹한 사역을 시키는 반면 동맹국 포로는 후한 대접과 자신의 적은 로마이지 동맹국의 시민들이 아님을 주지시키고 귀향조치 했다. 이는 동맹국들에게 로마에 등을 돌리도록 하기위한 선전책이었으며 나중에 로마시민 포로는 모두 현지에서 처형했다.

 

* 트라메시노 전투 : 제3회전

 

패전 책임자는 처형하는 것이 관례인 카르타고와는 달리 로마는 패장을 처벌하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삼고 있다. 귀족과 평민출신의 집정관을 처벌한다면 명확하게 증명할 수 없는 패전 책임을 지고 처벌받는 것은 파벌싸움을 조장할 뿐만 아니라 원한에 의한 처벌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패전의 원인이 지휘관의 능력부족이라면 로마 민회는 두번다시 그를 집정관으로 선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트레비아 전투에서 패한 집정관 셈프로니우스는 그 후 두번다시 집정관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반대로 중상을 입은 코르넬리우스는 전직 집정관에 임명되어 1만명의 로마군대와 같이 에스파냐에 파견되었다.

 

한니발 원정 2년째가 되는 기원전 217년. 로마는 그해에 전선을 담당할 집정관으로 귀족인 세르빌리우스와 평민인 플라미니우스를 선출했다. 플라미니우스는 기원전 232년에 호민관, 그후 원로원에 들어간 그는 기원전 227년 시칠리아 총독. 기원전 223년에는 집정관에 선출되어 갈리아 전투를 승리한바 있다. 기원전 220년에는 재무관에 선출되어 오늘날 이탈리아 3번국도로 남아있는 플라미디아 가도를 건설했다. 두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된 그는 나이 45세 안팎의 무르익은 나이였다. 

 

로마군은 한니발의 남하 방향을 예측하기 어려워 집정관 세르빌리우스는 이탈리아 반도 우측에 위치한 길목 지점인 '리미니'로 파견되어 한니발이 플라미디아 가도를 선택할 경우에 대비했고, 집정관 플리미니우스는 아펜니노 산맥의 서쪽인 '아레초'에서 한니발이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토스카나' 지방으로 내려올 경우에 대비했다. 두 집정관에게는 2개군단씩 각각 2만 5천명의 병력이 주어졌으며 한니발의 움직임이 파악되면 유사시 남쪽인 '페루자' 근처에서 합류하여 협공하기로 되어 있었다.

 

기원전 217년 4월. 30세가 된 한니발은 전군을 이끌고 겨울 숙영지를 따났다. 그는 '볼로냐'에서 리미니로 간 다음 이탈리아 반도 우측 플라미니아 가도를 지나 남하하는 평이한 길을 선택하지 않고 곧장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곧장 피렌체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다음 전장터는 에트루리아인들이 살고 있는 '토스카나'지방으로 결정하고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줄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주도권은 한니발이 쥐고 있었다. 아펜니노 산맥을 간단히 넘고 '토스카니' 지방에 도착한 한니발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된다. 지중해 기후인 이탈리아는 겨울부터 봄까지 집중적인 비가 내리는 지역으로 아펜니노 산맥에서 발원하는 '아르노' 강은 '피렌체'를 지나 몇몇 지류를 모아 '피사'로 가서 '티레이아' 강으로 흘러드는데 '토스카나' 지방에서 범람하여 이 지역 일대가 평지로 물에 잠기면 늪지대로 변한다. 한니발 군대가 평지로 내려 왔을때 온 천지가 늪지대로 변해 있었다. 한니발은 눈병이 나서 결국 한쪽눈을 실명하게 되는데 마지막 남은 코끼리에 올라타고 부대를 지휘하여 겨우 '피렌체'에 도착했다. 한니발은 척후를 사방에 내보내 로마군의 동향을 살폈다. 남동쪽으로 100키로 떨어진 지점 '아레초'에 로마군 2개 군단이 있는 것도 알았다. 적의 위치를 파악한 한니발은 휴식을 끝낸 부대로 하여금 '아레초' 서쪽 방향으로 행군하여 남하토록 하였다.이동간 그 지역 일대를 약탈하고 불지르며 겹겹이 구릉이 포개진 평야지대를 지나서 '아레초'로 향했다.

 

집정관 플리미니우스는 '리미니'에 있는 동료 집정관에게 전령을 보내 적군의 움직임을 알리고 '리미니'에 있는 2개군단의 남하를 요청하면서 우선 기병대를 먼저 보내주도록 했다. 양군이 페루자 근방에서 합류하여 적을 협공하여 격멸하기로 했다. 한니발이 평범한 적장이라면 로마군이 승리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니발은 적정에 대한 정보수집과 활용면에서 그 유례를 �아볼 수 없을 만큼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신속한 행동도 발군인 한니발은 로마군의 합류를 지켜보지만 않았다.그는 적의 움직임,적장과 적의 습관과 행동까지도 예측하였고 적을 유인하여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적을 섬멸하는 작전을 항상 구상하고 있었다.

 

눈 앞에서 로마연합의 충실한 동맹자인 '에트루리아'인들이 한니발에게 약탈과 살해를 당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로마연합의 맹주인 로마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는 분통이 터지는 가슴을 억누를 수가 없었지만 셈프로니우스의 기병이나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접전을 벌일 용기나 나지 않았다. 일단 페루자에서 합류한 다음 상대적으로 우세한 전력으로 한니발과 접전을 벌이고 싶었다.플로미니우스는 적의 위치를 확인도 못한체 부대를 페루자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아레초'와 '페루자'의 중간쯤 되는 곳에 이탈리아 중부지방에서 가장 큰 '트라시메노' 호수가 시야 가득 펼쳐저 있었다. 이 호수 북쪽에는 산악구릉과 호수사이에 좁고 긴 평야지대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다. 이곳을 지나 동쪽으로 조금난 가면 플리미니우스가 셈프로니우스와 합류지점으로 생각하고 있는 '페루자'에 도착할 수가 있다.

 

한니발은 로마군 4개군단이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하기로 작정하고 먼저 가까이 있는 플라미니우스의 2개 군단을 먼저 격파하기로 했다. 그들이 페루자에 도착하기 전에 길목에서 그들을 기습공격할 장소로 지형을 연구한 결과 로마군이 지나갈 만한 곳으로 '트레메시노' 호수를 주목했다. 이동로 중에서 적을 섬멸하기 가장 좋은 장소로 호수북쪽 좁고 긴 평야를 선택하고 그날만은 부대의 행군을 서둘러 저녁이 되기 전에 '트라메시노' 호반에 도착했다. 척후병을 미리 보내 주변지형을 면밀히 조사한 그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각 부대를 지정된 구역으로 배치했다. 야영은 현지에서 하되 불을 피우는 것은 일체 금지했다. 한니발의 의도는 길쭉하고 좁은 호반옆으로 적을 끌여들여 적 부대가 호반옆 길쭉한 평야에 들어왔을때 기병은 서쪽 신기슭 배후에서, 중무장 보병은 동쪽 적의 선두방향에서,나머지 보병은 북쪽 산기슭에서 공격하는 포위 작전을 세웠다. 유일하게 남쪽에는 넓은 호수가 펼쳐저 있다. 한니발의 장기는 포위작전인데 자연적인 호수까지 이용한 계획이었다. 한니발 부대는 숨소리도 죽인체 로마군이 접근해 오기를 밤새 기다리고 있었다.

 

집정관 플리미니우스의 2개 군단은 한니발군의 위치를 놓쳐버린 상태로 아군과 합류지점인 '페루자'로 가기 위하여 밤이 된 뒤에야 호반 근처에 도착했다. 한니발 군대가 어디서 야영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척후를 보내 정찰도 하지 않은체 추척하기를 적은 호반을 지나 페루자쪽으로 갔을 것으로 판단하고 호반의 서쪽에 있는 평지에 숙영지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호반 주위는 쥐죽은 듯 조용하였고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집정관 플로미니우스가 만약 척후를 사방에 풀어 면밀히 정찰을 하였다면 매복하고 있는 한니발군을 발견 하였을 것이다.그랬다면 다음날 있을 엄청난 패배를 피할수 있었을 것이나 그는 적정에 대하여 소홀히 하였던바 돌이킬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기원전 217년 4월. 이튼날 아침 '트라시메노' 호수 주변은 짙은 안개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적을 빨리 따라 잡겠다는 일념에 진영을 아침 일찍 거둔 로마군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좁은 호반 평야지대에 발을 들여 놓았다. 앞의 시계가 차장된 가운데 각 부대의 표지판이 겨우 보일 정도였다. 전 병력이 빠른 강행군으로 길고 좁은 호반지대 평야에 들어오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 이변을 알아차린 부대는 로마군 전위부대였다. 호반의 동쪽 끝에 기다리고 있던 한니발 중보병부대와 조우했다. 전위부대가 전투를 벌이는 동안 본대와 후위쪽에서는 전위부대쪽에서 함성소리가 들렸으나 진작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는 상태로 부대가 계속 앞으로 밀려들고 있을때  적의 기병대가 호반의 서쪽 산기슭에서 나타났다. 북쪽 언덕 산기슭에 숨어 있던 갈리아 병사와 경보병대가 로마군을 공격했다. 5만명의 한니발군의 포위망속에서 2만5천의 로마군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분전하였으나 집정관 플리미니우스를 포함한 1만7천명이 살륙되고 전위에서 포위망을 뚫고 달아난 6천명 정도 한니발의 기병대에 의하여 모두 포로로 잡혔다. 산이나 강으로 도망쳐 로마까지 살아 돌아온 병사는 2천명에 불과했다. 한니발군의 손실도 2천명이나 대부분 갈리아 지원병이고 정예병은 손실없이 고스란히 남았다.

 

패전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로마 민회와 원로원은 비통에 잠겼다. 완패를 인정했다. 사흘후 법무관은 민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 5만의 군대를 이끌고 플라미니아 가도를 이용하면 사흘밖에 걸리지 않는 한니발군을 눈앞에 두고 있는 로마는 비상사태를 맞았다. 수도방위 2개군단과 기병은 이미 잃은 리미니에서 이동중인 셈프로니우스의 2개군단 뿐이다. 모두가 한니발이 바로 로마를 공격할 것으로 생각하고 수도 로마는 일종의 공황상태가 발생하고 있었다. 계절은 막 5월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30세의 카르타고 장군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길을 선택했다. 그는 로마로 바로 가는 길을 버리고 동쪽으로 '아드리아해'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휘하 장수들이 불만을 품었으나 한니발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의 능력을 충분히 경험하였고 전장터가 로마밖에서는 절대로 로마를 무너뜨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전장터를 로마 본국인 이탈리아 반도로 선택했고 로마연합을 해체하지 않는 한 로마를 굴복시키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드리아해'쪽에서 남쪽으로 이탈리아 반도 '로마연합' 동맹도시를 하나하나 굴복시켜나가는 즉 로마아성을 공격하기 보다 우선 아성을 둘러싸고 있는 '바깥해자'를 메울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한니발은 포로들 가운데 동맹도시에서 온 포로들은 후한 대접으로 귀향조치하였고 로마 시민병은 모두 처형했다. 그는 '로마연합'의 해체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토스카나' 지방의 '에트투리아'인들도 당장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 로마에 등을 돌릴 것으로 기대했다.

 

이제 로마인도 한니발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한니발의 의도는 로마연합 가맹국 영토를 중점적으로 약탈하고 불태우며 로마군이 출동하면 싸워 이긴다. 승리가 거듭될 때 마다 로마에 등을 돌리는 동맹도시가 늘어난다. 바깥해자가 다 메워지면 로마를 공격하여 괴멸시킨다는 것이 한니발의 전략이었다. 이치에 맞는 완전전략이었다.

 

'아드리아해'로 빠져나온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시간을 부여했다. 헤어진 옷을 벗어 버리고 로마군 시체에서 군복을 벗겨 갈아 입었다. 후일 이러한 복장이 로마군을 괴롭혔다. 적을 분간 못하는 복장으로 로마군이 자주 기습을 당하였던 것이다. 말에게는 포도주로 목욕을 시키는 등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한니발은 남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로마동맹 도시에 대한 약탈과 방화,살륙을 자행하면서 빼았은 물자가 너무 많아서 다 가져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5만명의 장병들의 배를 채우는 문제도 보통이 아니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폴리아' 지방에서 제멋대로 분탕질을 한 뒤. 한니발은 '캄파냐' 지방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 지역에는 대도시 '카푸아','쿠마','포추올리','나폴리','소렌토' 등 로마의 바다 동맹국들이 산재되어 있었다.

 

한편 로마는 사태의 위급성을 고려 '독재관'을 임명하기로 하였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후 32년만에 독재관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취임했다. 로마의 명문귀족 파비우스 가문의 총수이며 58세로 집정관에 두번이나 선출되어 갈리아 전쟁에서 승리도 하였던 경력자의 소유자다.

 

'리미니'에서 달려온 2개군단과 새로 편성한 2개군단을 합하여 4개군단으로 한니발을 추격한 '파비우스' 전략은 추격은 하되 한니발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벌이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코르넬리우스','셈프로니우스','플라미니우스' 등 한니발과 싸운 집정관들은 모두 패배하였다. 그는 자기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적과 전투를 벌이지 않으면서 바짝 뒤를 쫓는 작전은 적군의 소모를 기다리는 작전이었다. 병사들은 눈앞에 전개되는 적이 동맹도시에 대한 약탈과 방화를 바라보면서 맹주로써 책임을 다하지 못함을 원통해 하고 있었다. 로마 원로원에서는 '파비우스'의 작전을 놓고 지구전파와 적극전파간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니발이 '캄파냐' 지방에서 약탈을 자행한 후 겨울이 오자 남부의 '폴리아' 지방으로 이동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독재관 '파비우스'는 적이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야 할 3군데 길목에 병력을 분산배치하여 고개길에서 매복을 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한니발은 그러한 로마군의 동태를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로마군이 매복하고 있는 산기슭에 도착하자 밤이 되기를 기다려 소떼 2천마리 뿔에 횟불을 달게 하여 로마군이 매복한 반대편 다른쪽 골짜기 고개길로 돌진시켰다. 독재관 '파비우스'는 한니발군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도 한니발의 의도를 알수가 없어 접전을 벌일 엄두를 못내고 병사들에게 절대로 움직이지 말도록 지시하였다.적의 횟불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밤을 지새는 동안 로마군이 매복한 지점 아래로 한니발군은 유유히 통과해 버렸다. 아침에야 이 사실을 알게된 '파비우스'는 기병대로 하여금 추격을 하였으나 '누미디아'기병에게 당할 수가 없었다.

 

로마로 소환된 '파비우스'는 독재관에서 파직되고 지구전파와 적극전파간에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다. 지구전파의 약점은 소뿔 사건 보다도 동맹도시들의 피해에 있었으며 그에 따른 '로마연합'의 이탈이었다.

 

대규모 전투는 한니발도 바라는 바였다. 로마군을 수차례 패배시켰고 약탈과 방화로 동맹도시들을 억누르고 포로로 잡은 동맹도시 시민들은 돌려 보내기도 하였지만 로마연합을 이탈하여 성문을 열거나 한니발한테 달려온 도시는 아직 하나도 없었다. 한니발은 로마와 대규모 결전을 해야할 시점이며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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