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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로마인 이야기 11

 

제2권 요약(계속)

 

한니발 전쟁:제2차 포에니 전쟁 중기

                 (기원전 215-211년)

 

 

* 이탈리아 중남부지역 전쟁 : "한니발이 수도 로마 성문앞에

                                      나타나다!"

 

'나폴리' 북쪽 30키로 떨어진 '카푸아'에서 한적한 겨울을 나고있던 한니발은 로마시민 포로 8천명을 데리고 있었다.그들을 먹이는 문제도 해결하고 로마에 포로 몸 값을 요구하며 로마와 강화를 맺기위한 방안으로 포로 대표 10명을 차출하였다. 강화조건은 로마가 '시칠리아','샤르데냐' 및 '카푸아' 이남의 이탈리아 남부를 포기하는 강화조건을 제시한 뒤 측근 한 명을 붙혀 수도 로마로 보냈다. 한니발로서는 이 조건만 로마가 들어 준다면 자신의 이탈리아 침공 목적은 달성되는 셈이었다. 로마 원로원에 도착한 포로들은 한니발의 강화조건을 그대로 전했는데, 로마 원로원은 비통한 표정으로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들은 친척과 동료의원들이 포로로 잡혀있었으나 결렬한 논쟁후에 내린 최종 결론은 한니발의 강화조건에 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포로들은 대답을 가지고 한니발에게 돌아갔다. 로마인은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않았고 로마가 몸값도 지불할 능력도 있었으며, 8천명의 포로를 로마군단 재건에 필요로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한니발의 강화조건을 거절하였던 것이었다. 강화제의를 거절당한 한니발은 포로 8천명을 그리스에 노예로 팔아 넘겼다.

 

전쟁수행 의지를 천명한 로마는 원로원의원 전원이 부동산을 포함한 전 재산을 헌납하기로 결의하고 실행에 옮겼다.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국채도 발행되어 무산자 계급을 제외한 전 시민에게 각자의 경제력에 따라 국채가 할당되었다. 로마는 동맹국들로 부터 병력지원은 받았으나 기타 자금지원은 받지 않았으며 물자지원도 십일조 세금을 제외한 추가 물량은 돈을 주고 샀다. 로마는 공화국의 위기 앞에서도 맹주로써의 자존심은 지키려고 노력하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동맹국인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의  지배자로 오랜세월 동안 로마와 동맹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히에론'이 죽자 쿠테타로 정권이 전복되어 한니발의 책략에 로마를 버리고 동맹을 맺게 되었다. 그래서 한니발은 시칠리아에 새로운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다른 낭보는 '마케도니아'왕 '필립포스 5세'가 한니발에 동맹을 제의해온 것이었다. 이제 전쟁은 국제전으로 양상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필립포스' 왕은 '아드리아해' 해안에 위치한 '일리리아' 지역이 해적들의 소굴이었던바, 얼마전 로마군의 공격으로 모두 와해되었으며 그후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 '일리리아 '지방을 로마로 부터 되찿고 싶었고 도시 '아폴로니아'와 '두라초'의 로마군 기지를 공략하고 한니발과 같이 로마를 공격하여 '마케도니아' 제패를 꿈꾸고 있었다.그는 자신의 조상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흉내를 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한니발이 '필립포스'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라는 지중해 세계의 2대 강국 사이에 동맹이 성립되었다.

 

로마는 이러한 사실을 빨리 알게 되었는데 귀국하던 마케도니아 사절이 로마해군에게 잡히는 바람에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한니발이 '마케도니아' 패권 회복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고려하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 문제와 '시라쿠사'에게 시칠리아 전체를 돌려주는 문제는 차후문제였다. 차후에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대전차 경기장

대전차 경기장

 

 

 

 

 

 

대전차 경기장(Circo Massimo)

이 장방형의 길쭉한 건물은 시민들의 즐거움을 제공해 주기 위해 지어진 전차경기장으로 벤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1인승 이륜 전차 경기와 검투사들(글래디에이터)의 검투가 이루어진 곳이다. 지금은 무너진 흔적만 남아있는데, 그 크기가 너비 664mX124m에 이른다. 이 건물은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의 하나로 과거에는 2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경기장이었다. 로마의 역사와 견줄 수 있을 정도이며, 중간 중간에 계속 증축되었다. 이 경기장은 에트루스칸 왕 때, 타르키니오 프리스코에 의해 만들어 것으로 추정되며, 트라얀(Trajan)에 의해 개축되었고, 카라칼라(Caracalla )가 확장공사를 하였다. 현재는 이 지역이 공원과 폐허만 남아 있지만 콘스탄티누스도 개축 공사에 참여하여 이 당시에만 20만명을 수용했었다고 한다.

이 지역은 '사비니 여인의 강탈(the rape of the Sabine women)' 이야기와 관계가 깊은 곳으로 바티칸 미술관과 피렌체의 광장에서도 조각품을 볼 수 있다.

사비니 여인의 강탈(the rape of the Sabine women)

로물러스 형제에 의해 로마가 세워진 직후 여인들이 부족했었는데, 로물러스는 현재 대전차 경기장이 세워진 곳에서 인근의 사비니인들을 딸과 아내를 동반하도록 초청하여 큰 파티를 열었다. 파티가 열리는 동안 로마사람들은 손님으로 온 사비니 여인을 습격하여 강간하고 남자들은 쫓아버렸다. 이 당시 여자들은 약탈된 재산으로 법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했는데, 초창기에는 도망하지 못하도록 감시를 받았으며, 자손들이 로마에 정착한 후에도 여인들의 지위는 노예와 다름이 없었으며, 그들은 이렇게 로마 사회에 융화되었다.


보통 배낭여행을 빼고는 들어가기 힘든 지역으로, 건너편에서 보면 벽면이 보인다. 이 대전차경기장의 오른편은 팔라티노 언덕이, 왼편은 아벤티노 언덕이다.

 

기원전 215년부터 로마는 동서남북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이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동쪽은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왕', 남쪽은 한니발에 붙은 배신 동맹도시 '시라쿠사', 서쪽은 비록 떨어져 있으나 '에스파냐'의 한니발 동생 '히스두루발', 북쪽은 '갈리아인',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 안에는 가장 막강한 한니발이 자리잡고 있었다.

 

동부전선의 경우는 로마 해군이 '마케도니아' 사절을 잡아 한니발과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못하여 그해가 끝날때 까지 '마케도니아' 군은 어떠한 군사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로마는 우선 동쪽 '아드리아'해의 재해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브랜디시' 항구를 중심으로 해군력을 보강하였다. 남부의 시칠리아섬은 '시라쿠사'의 배반으로 더 이상의 카르타고군의 세력 확장을 막고 재해권을 유지하여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을 차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칸나전투'에서 살아남은 패잔병력으로 구성된 로마군단이 시칠리아 전선에 파견되었다. 동부 에스파냐에서는 '코르넬리우스' 형제가 '에브로'강 이남 지역을 순조롭게 평정하고 있었다.

 

갈리아인과 맞서는 북부전선의 경우, 2개 군단이 숲속에서 갈리아인들에게 전멸당한 이래 로마군은 반도 중북부에 위치한 '루비콘'강 이북에서 완전 철수하였다. 갈리아인들의 준동을 막기 위하여 로마는 '리미니'와 '피노체'에 '칸나전투'의 패장 '바로'를 파견하여 그에게 현지주민을 동원하여 1개 군단을 조직토록 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칸나전투' 이후 로마가 취한 조치는 모든 방향에서 한니발에 대한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한니발을 고립시키기 위해서는 지구전 전략으로 변경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에 따라 기원전 215년 집정관으로 재선출된 '파비우스'의 지구전 전략은 군단이 집결하여 한니발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두 집정관이 각각의 군단을 이끌고 한니발과 게릴라전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로마군이 정면으로 대적하면 한니발을 상대할 수가 없으니 가급적 회전은 회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니발이 없는 카르타고군은 가차없이 공격하였다. 정면 충돌을 피하면서 주변을 굳게 지키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틈만나면 한니발의 꼬리 정도는 물고 늘어졌다. 로마는 곤경에 빠진 4년동안 병력은 교체했으나 가급적 사령관은 교체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위기가 닥치면 국론이 분열되지만, 로마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한니발에게 참패를 당한 뒤에도 이러한 로마인의 정신자세는 로마의 진정한 강점으로 남아 있었다. 이탈리아 남부가 대부분 한니발의 세력하에 들어가 버렸지만, '카푸아'가 로마 연합에서 이탈한 뒤에도 로마가 걱정한 '캄파나' 지방의 도미노식 이반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로마의 다른 동맹국과 식민지도 로마연합에 계속 남아 있었다. 이것도 역시 로마가 가지고 있던 강점이었다.

 

로마가 직접 통치하는 속주들도 로마를 떠나지 않았다.'샤르데나'에서는 원주민이 로마군과 협력하여 카르타고군을 격퇴시켰고 시칠리아도 '시라쿠사'외에는 로마를 배반한 도시는 없었다. 밀이 부족하여 속주에서 들어오는 밀도 십일조 세금 외에는 돈을 주고 샀다. 로마가 이런방식을 취한 것은 속주나 동맹국의 이반을 막는 방책이었으며 자긍심이었다.

 

기원전 215년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 고립되는 것을 우려하여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이나 연락을 고려하여 정비된 항구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니발은 '캄파나' 지방의 항구도시 획득에 집중되었다.

 

                                                    

                             소렌토 항구 풍경

소랜토 항구

 

한니발을 저지하기 위하여 로마는 '캄파나 '지방에 세 명의 장군을 투입했다. '파비우스', '마르겔루스','크라쿠스'였다. 한니발은 깊은 만의 보호를 받고 있는 '나폴리'와 '포추올리' 라는 2개의 항구 도시를 노리고 있었다. 로마의 세 장군은 '카푸아'에 거점을 두고 있는 한니발을 삼면에서 포위하는 형태가 되었다.

 

집정관 '파비우스'는 2개 군단을 이끌고 '카푸아'에서 북서쪽으로 20키로 떨어진 곳에 포진했다. '라티나' 가도를 감시할 수 있는 지점으로 수도 로마의 방어도 겸하고 있었다. '카푸아'에서 남동쪽으로 20키로 떨어진 곳에는 전직 법무관인' 마르겔루스'의 2개 군단이 대기했다. 그리고 '아피아' 가도를 감시할 수 있는 남서쪽에는 집정관 '크라쿠스'가 노예들로 편성된 2개군단이 진을 쳤다.

 

한니발이 카푸아 남쪽에 있는 '나폴리'나 '포추올리'로 군대를 보내려면 당장 마르겔루스와 크라쿠스가 협공하는 구도이기도 하였다. 한니발에게 적이 없는 유일한 방향은 북동쪽이나 '아펜니노'산맥이 막혀 있었다.

 

'카푸아'에서 출동한 한니발은 삼면을 포위한 로마군에 대해 모두 싸움을 걸었지만 싸움에 응한 로마 장군은 아무도 없었다. 절반의 병력을 남부지역 점령을 위하여 보낸 상태로 로마 6개 군단과 자신이 데리고 있는 절반의 병력만으로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기는 무리라고 판단했다. 결국 소규모 충돌전만 거듭되었을 뿐, 겨울로 접어들자 한니발도 이탈리아 남부로 회군해 버렸다

 

 

이듬해 기원전 214년. 새로 선출된 집정관에 '파비우스'와 '마르겔루스'가 재선되었다. 로마군은 승리도 패배도 하지 안았지만 '파비우스'의 지구전 전략을 지지했다. 병력도 20개 군단으로 증편하여 전선에 투입했다. 반도의 중북부에 위치한 '루비콘'강 이북에 2개 군단을 '리미니'에서 전진기지를 구축했다. '피노체'에는 패장 '바로'가 현지 주민들로 새로 1개 군단을 편성하여 갈리아인들이 남쪽의 한니발을 지원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통제하고 있었고, 수도방위를 위하여 로마에 2개 군단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한니발과 맞서는 '캄파나' 지방에 '파비우스'와 '마르겔루스'의 4개 군단, '칼라브리아' 지방에는 전 집정관 '크라쿠스'의 노예로 편성된 2개 군단이 파견되었다. 시칠리아에서는 '칸나전' 패전병들로 구성된 2개 군단이 '시라쿠사' 공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에스파냐에서는 '코르넬리우스' 형제가 한니발의 두 형제와 잘 싸우고 있었다. 한니발의 막내동생 '마고네'는 '칸나전투' 후에 본국으로 귀국하여 전과보고를 한 후에 카르카고 본국의 지시에 의해 에스파냐로 파견되어 있었다. '샤르데냐섬'에도 2개 군단이 주둔하고 카르타고군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같은해 로마는 동부의 '마케도니아' 전선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레비우스'가 1개 군단을 이끌고 이 전선을 담당하였다. 20개 군단의 로마군은 19만 명이었으며 총 동원 가능한 병력이 75만명 정도이나 한니발이 점령한 지역에 15만명이 들어가 버린 상태로 군단의 병력 규모는 다소 줄어진 상태였다.

 

봄이 되자 한니발이 다시 북상해 왔다. 남부 평정을 중지하고 절반의 병력도 북상토록 지시하여 항구도시 확보에 주력하기로 하였다.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하여 북상하고 있던 한니발 제2군 앞을 '크라쿠스'의 노예군단이 막아섰다. '크라쿠스'는 군단 노예장병들에게 이번 전투에서 이기면 자유인을 약속했다. 분발한 노예군단은 놀라운 힘을 발휘하였고 한니발의 제2군은 태반을 잃었다.  한니발은 작전을 바꾸어 '캄파냐 '지방에 계속 머물러 있기에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이 지역을 방치한체 '타란토'를 공략하기 위하여 남동부쪽으로 남하했다. '크라쿠스'의 노예군단이 계속 한니발을 추격했다. 한니발의 '타란토' 공략은 그를 추격한 '크라쿠스'의 노예군단과 '파비우스' 군단에 의해 뜻대로 이루지 못하고 그해도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

 

'마케도니아' 전선의 '레비누스'는 군사와 외교를 통하여 '마케도니아'를 고립시키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로마는 그해 22개 군단으로 증강하여 한니발과는 6개 군단이 3명의 집정관에 의하여 각각 추격과 게릴라식 전법으로 한니발 군의 정면대결을 피하면서 지구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타란토'를 공략하기 위하여 중병설을 퍼뜨리면서 '타란토'의 패잔 포로들과 내통하여 은밀히 정예병을 데리고 '타란토'로 갔다. 내통자들이 밤중에 성문을 열자 한니발군이 성내로 진입하여 시내 요소를 완전 장악한 사실을 시민들은 아침에야 알았다. 해안가 총독 성체에 로마 총독과 500명의 로마군이 항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한니발에 대한 지구전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다음해 집정관이 새로 선출되고 군단도 25개 군단으로 증강되었다. 로마는 '카푸아'의 탈환을 노리고 있었다. 기원전 212년 로마는 6개 군단을 '카푸아' 탈환전에 투입했다. '카푸아'는 '타란토'에 있는 한니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한니발이 '크라쿠스'가 이끄는 노예군단의 방해를 피하면서 '캄파냐' 지방에 들어 왔을 때, '카푸아'는 로마 6개 군단에 완전 포위되어 있었다. 로마군은 진영 앞뒤에 성체를 쌓고 어디를 공격해도 견딜 수 있는 진지를 구축했다. 로마군의 포위망은 참호와 목책, 흙자루 보강 등으로 개미새끼 한마리도 통과할 수가 없는 포위망이었다. 한니발은 '카푸아'를 포위하고 있는 로마군의 세 장수에게 싸움을 걸었지만 평원전투에는 세 장수 모두 응하지 않았다. 한니발은 자신의 유인책에 로마군이 끌여오지 않자 주변의 동맹도시 '나폴리', '포추올리','쿠마' 같은 항구도시를 공격하였으나 잘 견뎌냈고 로마 지원군이 달려오면 한니발은 주변 일대를 약탈하고 불태웠다. 이런 계속된 소규모 전투에서 서로 사상자가 나오고 한니발의 전력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한니발이 남부의 여러 도시에 병력을 조금씩 분산하여 통제를 하고 있었으나 자력으로 로마군의 공격을 견디어 낼 도시는 없었다. 한니발의 부하중에 뛰어난 장수가 없었고 한니발이 없는 부대는 로마군의 먹이가 되기가 일쑤였다.

 

시칠리아 전선은 '마르겔루스'가 칸나전투 패전군단과 추가 병력을 포함하여 3만여 명의 병력으로 배신 동맹도시 '시라쿠사' 공략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라쿠사'는 쉽게 함락되지 않았는데 그리스의 유명한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시라쿠사'에 있었다. '시라쿠사'는 '아르키메데스'의 머리속에서 여러 신무기를 개발하였는데, 투석기와 성벽 방어용 회전 크레인을 개발하여 로마군에게 심대한 피해를 주고 있었다. 성벽에 달라붙은 로마군에게 고개를 내민 크레인 기계가 로마병사가 오르는 사다리와 로마병사를 회전력으로 쳐서 날려버리는 식이었다. 투석기계도 해안에 대기중인 로마선단까지 돌이 날아와 배가 파손되거나 병사들이 사상을 당하는 피해를 주었다. 로마군 사령관 '마르겔루스'는 고민에 빠졌다. 좀처럼 공략이 어려운 '시라쿠사'를 공략할 수 있는 방안을 포로들 심문을 통해서 '시라쿠사' 도시의 축제일이 곧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르겔루스'는 축제일 밤에 기습하기로 하고 정예 장병 1천명을 선발하여 축제당일 야밤에 감시인의 눈을 피하여 성벽을 기어 올랐다. 축제일에 술과 음식을 먹고 잠들거나 방심한 경비병을 처치하고 성문을 여는데 성공하자 1만명의 로마군이 어둠을 뚫고 성내로 물밀듯이 진입하였다. 로마군은 '시라쿠사'를 함락하고 엄청난 전리품을 로마로 보냈다. 로마인들이 전리품을 보고 놀랐는데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재를 보고 감탄을 하였다고 한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로마군이 다가오는 데도 수학문제를 풀고 있었는데 그를 알아보지 못한 병사의 칼에 죽었다. 사령관 '마르켈루스'는 그의 죽음을 매우 아쉬워 하였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로마 시대 개선문 중 가장 상태가 완벽하게 보존된 개선문이며, 규모가 가장 크고, 후기 로마시대의 문화 예술의 걸작품이다. 콜롯세움 바로 옆에 세워져 있으며, 오른편으로 포로 로마노가 위치하고 있다.
로마에서 가장 큰 이 개선문은 밀라노 칙령(313년)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적 막센티우스와 치룬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으로 AD 315년에 만들어졌다. 높이 21미터, 너비 25m의 세개의 아치형 문이 있고, 코린트 양식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나라의 독립문을 비롯하여, 인도 델리의 인디아 게이트 등은 모두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한 것인데, 파리 개선문의 원조가 된 것이 바로 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이다.

 

한편 이탈리아 남부에서 '크라쿠스'는 한니발 군을 추격하면서 계속 괴롭히고 있었다. 한니발은 '크라쿠스'를 제거할 필요성을 느꼈다. 한니발군의 강화제의에  '크라쿠스'는 소수의 호위병만 데리고 지정된 장소로 나갔는데 숲속에 미리 숨어있던 한니발 기병대의 공격을 받고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다. 4년동안 동거동락 하면서 자신들을 자유인으로 만들어준 사령관의 죽음이 알려지자 노예군단은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모두 실의에 빠져 그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하루밤 사이에 진영을 나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2개 군단의 병사들이 하루밤 사이에 소멸되어 버린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한니발은 '시라쿠사'의 함락으로 이제 '카푸아'만이 유일한 동맹자로 남게 되자 '카푸아'의 중요성이 전보다 더 커졌다. 문제는 강력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는 로마군을 끌어내어 격멸시키는 일이었다. 한니발은 최소한의 병력과 군량을 준비하고 본대는 뒤따라 오도록 하고 자신은 먼저 '카푸아'로 달려갔다. 갑작스런 한니발의 기습을 받은 로마군은  포위망 진지에서 끄떡도 하지 않았으며 한니발의 유인책도 먹혀들지가 않았다. 한니발은 로마군을 싸움터로 끌어내기 위하여  본대의 도착도 기다리지 않고 모험을 하는데, 로마군의 '카푸아' 포위진지를 우회하여 '라티나' 가도를 따라 수도 로마로 달려갔다.

 

부하들을 수도 로마성벽에서 4.5키로 떨어진 곳에 숙영하도록 지시하고 자신은 기병대만 이끌고 더욱 북상하여 로마성벽이 보이는 곳까지 나아갔다. 성벽 근처에 이르자 그는 로마를 둘러싼 성벽을 따라 산책을 감행했다. '콜리나' 성문까지 갔으니까 전체 성벽의 3분지 1을 둘러 본 셈이었다. 그는 왜 이러한 모험을 감행했을까? 어떠한 자료도 없으나 아마 '카푸아'를 포위하고 있는 로마군을 당황하게 만들어 끌어내거나 수도로마를 방위하는 로마군을 끌어 내려는 의도와 로마성벽을 직접 답사하면서 어쩌면 마지막으로 공성 가능성을 가름해 본게 아닐까?

 

한니발의 이 대단한 시위에 로마인들도 심장이 멋어버릴 만큼 놀랐다. 성벽위로 몰려나온 시민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백마를 탄 36세의 젊은 카르타고 장군은 화살의 사정거리를 벗어난 거리에서 산책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한니발의 시위에 놀란 집정관 '갈바'는 수도방위 2개 군단을 데리고 있었으나 '파비우스'로 부터 절대로 한니발과 직접적인 상대를 하지 말도록 충고받고 있었다. 병력을 성밖으로 내보내기는 했지만 포진을 끝낸 로마군의 의도도 시위뿐이었다. 한니발은 수도방위의 로마군을 쳐부수고, 그 소식을 듣고 달려 올 '카푸아'의 로마군을 쳐부술 계획의 의도를 갖고 있었으나 로마군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로마군은 한니발의 의중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기원전 211년. 한니발의 이러한 수도 로마행은 그토록 강렬하게 로마를 무찌르고 싶어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해온 한니발이 수도 로마를 본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되었다. 아마 로마성벽을 바라보면서 한니발의 마음은 매우 착찹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아버지대부터 로마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이어온 그로써 에스파냐에서 론강을 건너 갈리아인들을 회유하면서 천혜의 고산지대인 겨울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에 도착하면서 오로지 필승의 의지로 그토록 엄청난 고난과 고통을 감내하며 겪어왔고, 로마군에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략.전술을 계승한 천재적인 전술로 '티치노' 전투, '트레비아' 전투, '트라메시노' 호반 전투, '칸나회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아직도 로마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되돌아 보며 한숨지었을지 모른다. 그는 전술작전에서는 모두 승리하였으나 전략면에서 결국 실패를 한 셈이었다.

 

그는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수만 명의 용병으로 구성된 장병을 16년간이나 용병비용을 들이며 먹이고 싸웠다. 그는 가는 곳마다 로마군을 대적하여 포위섬멸 작전으로 격파하면서 이탈리아 반도를 종횡무진 누볐으나 결과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이는 카르타고 본국의 전략이 아닌 한니발 개인의 원한과 적개심이 불러온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천년제국의 로마가 이후에 더욱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점령지에 대한 동화와 평등의 정책이었다는 사실을 한니발은 몰랐던 게 아닐까? 살륙으로 점철된 그의 승리는 로마인에게는 적개심과 두려움의 존재였으며 누구에게도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는 점으로 인하여 그의 편에 진정으로 남기를 희망했던 로마인은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결국 이후에 벌어진 북아프리카의 자마전투에서 자신보다 12살이나 어린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에게 일생일대에 한 번의 패배로 조국 카르타고를 떠나 망명길에 올라 '서아시아' 땅에서 로마군의 끈질긴 추격에 결국 더이상 도망갈 곳을 찿지못하자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는 비운의 장군이었으며 한시대를 풍미한 외로운 영웅이었다.

 

                                콜로세움

                                                                             콜로세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알려진 로마의 상징이며 거대한 원형경기장으로 당시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콜롯세움 주변(Piazza del Colosseo)은 콜롯세움과 포로로마노등의 고대로마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네로의 궁전의 뜰에 있었던 인공연못에 AD 72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80년에 완성된 대형 원형투기장 겸 극장이다. 생사를 겨누는 검투사와 짐승과의 격투기등이 여기에서 개최되었고 80개 정도가 되는 출구에 5만 5000명도 넘는 관객이 입장할 수 있는 경기장이였다. 네로 통치시대를 영화로 한 영화 "쿼바디스"에서는 기독교도의 박해장으로 사용된 콜롯세움 장면을 잘 보여준다.
고대 로마 유적지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최대지름 188m, 최소지름 156m, 둘레 527m, 높이 57m의 4층으로된 타원형 건물이다. 콜로세움은 거대하다는 뜻으로 근처에 거대한 네로상이 있어서 이름 지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1층은 토스카나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의 아치가 장식되어 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려면 입구 반대편에서 엘리베이트를 이용하면 된다. 이곳을 찾아오려면 지하철 b선 롤롯세움역에서 하차하면된다. 레스토랑과 가게가 주변에 거의 없기때문에, 하루동안을 계획하고 관광하려는 사람이라면 음료수와 약간의 먹을 것을 준비해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입장료는 우리돈 만원 상당이며, 개관은 매일 09:00∼19:00까지 일,수요일은 09:00∼13:00까지만 관람이 가능하다.

 

수도 로마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한 체, 한니발은 남쪽으로 돌아가는 도중에도 '카푸아'를 포위하고 있는 로마군 한테는 접근도 하지 않고 우회하여 곧장 이탈리아 남부로 이동하였는데 도중까지 와 있던 그의 본대도 한니발을 따라 장화 발부리에 해당하는 '칼라브리아' 지방으로 내려갔다. 한니발의 구원을 기다릴 수 없는 '카푸아'는 그후 얼마동안 장렬한 공방전 끝에 함락되었으며, 전투 중 전직 집정관 '플크루스'가 전사했다. 점령된 '카푸아'는 배신행위로 인하여 자치권도 상실하고 동맹국에서 속주로 격하되었으며 이는 로마에 대한 2번째의 배신이었다. '카푸아'의 지도급 인사 70명을 처형하고 시민들은 노예로 만들지 않았으나 그후 '카푸아'는 로마제국의 영원한 미움을 받아 도시발전을 꾀할수 없었다.

 

기원전 211년. 나쁜 소식이 로마에 전달되었다. 에스파냐에 가있던 '코르넬리우스'의 로마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이었다.

 

8년 동안 '코르넬리우스'형제가 한니발의 지원을 차단하고 근거지를 공략하여 에스파냐의 3분지1을 평정한 상태였다. 로마 본국에서 추가적인 병력지원도 없이 소규모 전투의 연속은 병력의 감소를 초래하였고 용병을 사용하지 않는 로마군은 에스파냐 원주민과 동맹관계를 맺고 병력을 지원받았지만 금품 회유에 쉽게 배신하는 원주민들 때문에 골치를 썩히고 있었다.카르타고군이 로마군의 에스파냐 원주민병사들에게 은밀하게 접선하여 회우함으로써 로마진영에서는 수시로 탈주사건이 발생되고 있었다.

 

카르타고군은 7만 5천명의 병력을 2만 5천명씩 3개군으로 편성하여 제1군은 한니발 동생인 '하스두루발'이, 제2군은 막내동생 '마고네'가, 제3군은 카르타고에서 파견된 '시스코네'가 각각 이끌고 로마 2개 군단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로마군은 원주민 병력의 배반과 탈주는 바로 카르타고군의 증강으로 이어졌다.

 

그해 여름 어느날 밤. '코르넬리우스'의 로마 진영에서 한꺼번에 7천 500명이나 되는 원주민 병력들이 진영에서 탈주하자, 보고를 받은 즉시 '코르넬리우스'는 추격대를 편성하여 그들을 추격했다. 밤새 추격한 로마군이 새벽이 되자 로마군 앞을 가로막은 것은 탈주병을 맞으려 나온 누미디아 기병대였다.  접전이 진행되던 중 카르타고의 제1군인 '하스두루발'과 제2군인 '마고네'가 달려와서 포위공격으로 사령관을 포함한 로마군이 전멸하였다. 나머지 진영에 있던 로마의 1개 군단도 숫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분전하였으나 카르타고군의 집중공격으로 전멸하였다. 패전병을 백인대장 한 명이 규합하여 '에브로' 강을 건너 북쪽으로 도망쳤다. 

 

로마 원로원은 에스파냐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예비사령관으로 '칸나전투'의 패장 '클라우디스 네로'를 임명하여 병력 1만 명을 이끌고 에스파냐 사태를 수습토록 보냈다. 현지에 도착한 사령관 '네로'는 카르타고군을 추격했다. 그러나 '하스두루발'의  강화제의에 속아 카르타고군을 놓쳐버린 사건으로 로마로 소환되었다. 그래서 원로원은 에스파냐에 파견할 사령관을 선임하는데 고심을 하고 있었다. 당시 집정관 출신이나 40세를 넘는 군단을 지휘할 적당한 인물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어느날 젊은이 한 사람이 원로원에 나타났다. 원로원은 처음에 그 젊은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에스파냐에서 전사한 '코르넬리우스' 아들인 24세의 '스키피오'였다. 그는 자신을 에스파냐로 보내 달라고 청원하면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였다. 원로원은 나이도 젊고 1년전 안찰관을 지낸 경험 외에는 실전 경험도 '티치노' 전투와 '칸나'전투 경험 밖에 없는 30세도 안된 젊은이한테 전략단위인 2개 군단을 맡길 수 없었으며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원로원의 제1인자인 '파비우스'도 반대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열정적인 연설로 원로원을 설득하여 승인을 받게 되었으나 조건부였다. 그에게 경험많은 전 법무관인 '실레누스'를 감찰관으로 딸려 보내는 것이며 사령관이 잘못을 저지르면 당장 '셀레누스'가 군단의 지휘를 맡도록 하는 조건이었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스키피오'는 원로원의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무대에 또 한사람의 천재적인 장군이 등장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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