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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로마인 이야기 13

 

제2권 : 요약(계속) - 로마인 이야기 13편

 

한니발 전쟁: '자마회전'(제 8회전)

 

국적 : 카르타고
활동분야 : 정치·군사
한니발석상
한니발석상

하밀카르 바르카스의 아들. 제1차 포에니전쟁에 패전한 후 아버지를 따라 카르타고(아프리카 북부)에서 에스파냐로 갔으며, 아버지와 매형 하스드루발의 뒤를 이어 BC 221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에스파냐 주둔군의 총지휘관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로마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으며, BC 219년 로마군 점령하의 에스파냐 도시 사군툼을 함락시키고, 이듬해 에브로강을 건너자, 로마로부터 선전포고를 받아 제2차 포에니전쟁(한니발전쟁)의 전단()이 열렸다. 그는 육로로 이탈리아 진공계획을 세우고 피레네산맥을 넘어 남프랑스를 석권하고, 다시 눈덮인 알프스를 넘어서 이탈리아로 침입, BC 217년 트라시메누스 호반()의 전투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로마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BC 216년 칸나에전투에서는 교묘한 용병술()을 발휘하여 로마군을 철저하게 격파하였으나 전선은 점차 교착상태에 빠졌다. 점차 전세를 회복하기 시작한 로마군에 의하여 에스파냐로부터의 원군()도 격멸당하였으며, 로마의 장군 대()스키피오가 에스파냐를 정복하고 카르타고로 육박하였다. 한니발은 고국에 소환되었으며, BC 202년 자마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대패함으로써 결국 제2차 포에니전쟁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났다.

[제2차 포에니전쟁]

 

'스키피오'가 제시한 강화조건을  로마 원로원과 민회는 승인하였으나 카르타고의 장로회의만 의결하면 성립될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아마 카르타고는 한니발이 돌아오면 최선의 방안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시간을 끌었던것 같다. 통상 강화교섭 동안은  휴전하는 관례에 따라 '스키피오'도 군사행동을 자제했다. 그런데 휴전기간 동안에 사고가 발생했다. 로마에서 '스키피오'에게 가는 보급선단이 태풍을 만나 수도 카르타고 해안 40키로미터 가까이 피신을 했는데 카르타고 해군이 이 보급선단을 나포하여 수도 항구로 예인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키피오'는 즉시 카르타고에 반환을 요구했다.

 

 

이러한 '스키피오'의 요구에 대하여 카르타고 장로회의가 의견이 갈라져 있을때, 한니발이 카르타고 남쭉 '하드로메툼'(오늘날 튀니지 수스)에 상륙하여 도착하였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 소식을 들은 카르타고는 갑자기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 '스키피오'의 강화제의와 보급선 반환요구를 무시했다. 이에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와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한니발과 일전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드루메툼'에서 겨울을 나고 있던 한니발은 '제노바'에서 철수하다 죽은 동생 '마고네' 군대 1만명이 합류했다. 겨울을 나고 이듬해인 기원전 202년. 한니발 휘하에는 보병 4만 6천,기병 4천 그리고 코끼리 80마리가 집결했다. 모국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은 한니발은 '시팍스' 왕의 아들과 협상하였으며 그가 2천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합류하기로 약속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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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군 사열(출처: 군사무기카페,글래디에이터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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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피오'는 한니발과 일전을 준비하면서 기병전력의 보강을 위하여 친구인 '누미디아'의 '마사니사' 왕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마시니사'는 보병 6천,기병 4천명을 거느리고 참전하겠다고 통보가 왔다.

 

기원전 202년은 양쪽 군대가 지원군을 기다리며 '누미디아' 국경근처 가까이로 서로 이동하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행군속도를 빨리하여 누미디아 지원군이 한니발에게 차단되지 않도록 서둘렀다. 고대 명장 열명을 꼽으라면 두 장수가 들어간다.그러나 다섯명을 꼽으라 쳐도 두 장수는 포함된다. 두 명장끼리 전투는 곧 전개될 '자마전투'가 유일무일한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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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투대형 중무장보병 (출처: 군사무기 카페, '글래디에이터'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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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마'에 도착한 한니발은 로마군이 서북쪽 100키로미터쯤 떨어진 '나라가라'에 있다는 것을 정찰대를 통하여 알았다. 한니발이 사방에 보낸 척후병중 세명이 로마군에 잡혔다. '스키피오'는 그들에게 로마진영을 마음껏 둘러보도록 한 사흘후 그들을 환송하여 돌려 보냈다. 자마로 돌아온 척후병은 모든 사실을 한니발에게 보고하면서 '스키피오' 장군의 언행에 대해서도 보고했다. 한니발은 그 보고를 말없이 듣고 있었지만, 보고가 끝나자 한니발은 무언가 한참 생각하더니 '스키피오'에게 회담을 제의하는 사절을 보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회담 제의를 수락하고 시간과 장소는 자신이 정하여 별도 통지하겠다고 사절에게 말했다.

 

양군이 6키로미터쯤 접근 되었을때 양군은 각각 그 자리에서 각자의 진영을 구축하였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내 중간지점의 낮은 언덕에서 다음날 정오경 회담을 하자고 제의하여 양군 사령관은 각각 한무리의 기병대만 대동하고  회담장소인 언덕에서 만났다. 비슷한 재능을 가진 장군끼리 대결도 드문데, 하물며 두 사령관이 대회전 전날 회담을 하는 것은 역사상  그 유래를 �아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한니발을 동행한 두 명의 기록 담당자가 쓴 것과 그 당시 로마 원로원이었던 '픽토르'의 '전쟁기'를 참고하였다는 역사가 '폴리비오스'와 '리비우스'의 저서에 따르면, 이 역사상 보기드문 회담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회담을 제의한 한니발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아마 가장 행복한 선택은 로마인이 이탈리아 밖으로 촉수를 뻗지않고, 카르타고인이 아프리카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이었을 거요!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의 다툼거리는 '시칠리아'이고 '샤르데냐'이고 '에스파냐'였으니까! 하지만 이것도 다 지난 일이고 문제는 현재요! 현재 우리는 둘 다 조국의 존망을 걸고 싸우게끔 되었소! 따라서 이 위험한 도박을 피하고 싶으면 양국간의 다툼을 그만 둘 수 밖에 없소. 나는 기꺼이 그럴만한 용의가 있소! 운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을 마치 어린애 다루듯 농락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하여 배웠기 때문이요! '스키피오' 장군! 젊은 그대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인지는 모르오. 그대는 에스파냐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오늘 이때까지 패배를 모르고 지냈기 때문에 더더욱 납득이 어려울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굳이 과거의 역사에서 선례를 �을 필요도 없소. 오늘날에도 그 좋은 예를 �을 수 있으니까!

 

'칸나전투' 이후 나는 이탈리아 주인이었소. 수도 로마에 육박한 일까지 있었소. 당시에는 이 한니발이 로마인의 생명과 로마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심판자였소. 그런데 지금은 아프리카로 돌아와서, 로마인인 그대와 함께 카르타고 운명에 관한 회담까지 해야하는 처지가 되었소! 이런 나를 교만한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시오! 현재 상황에서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있고 좋은 것은 더 큰쪽을 선택하고 나쁜 것은 더 작은 쪽을 선택하는 것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유일한 대책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오. 그래서 나는 제안하고 싶소! 로마인은 '시칠리아'와 '샤르데냐','에스파냐' 등 지금까지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다툼거리가 된 모든 지방의 정식 소유자가 되는 거요. 카르타고인은 이런 지방을 탈환하기 위하여 두번다시 전쟁에 호소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겠소. 이런 조건이라면 카르타고는 장래까지 계속되는 안전까지 보장받게 되고 그대와 로마인도 커다란 명예를 얻게 될 거라고 나는 확신하오!"

 

한니발은 진정으로 더 이상 로마와의 싸움은 무의미 하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자신이 이곳에서 승리하더 래도 얻을 것은 로마군 목숨과 전리품 뿐이나, 만약 자신이 이 전투에서 진다면 카르타고의 운명이 끝나는 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스키피오'란 젊은 로마장군에게 풍기는 오렛동안 여러 전장터를 경험한  장수로써 느끼는 어떤 무언의 메세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한니발 만이 느낄 수 있는 승패를 내다보는 어떤 영감이랄까? 마음속에는 이미 한니발은 패배를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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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로세움에서 (출처:군사무기 카페, '글래디에이터'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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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피오의 대답이 이어졌다.

 

" 이 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은 로마가 아니라 카르타고 쪽이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장군께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오! 신들이 로마인을 도와서 승리로 이끌었다면, 그것은 신들 조차도 누가 잘못했는지를 알고 방어를 위하여 일어선 자를 편들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인게 분명하오! 만약 로마군이 아프리카를 침공하기 전에 장군께서 이탈리아에서 철수했다면, 그리고 내가 제안한 강화교섭이 결렬되기 전이였다면, 장군의 제안은 장군께서 만족할 만한 결과로 이어졌을 거요. 그러나 장군께서 이탈리아에서 철수한 것은 장군의 뜻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소. 아프리카를 침공한 우리 로마군의 전과에 영향을 받아 철수한거요. 장군께서 제시한 강화조건도 우리가 보기에도 당연한 것이오. 게다가 로마에서는 민회까지 승인한 강화를 결렬시킨 것은 카르타고 쪽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주시오. 그런데 나더러 도데체 뭘 어찌라는거요? 장군께서 내 처지라면 어찌하겠소? 장군과 카르타고 정부가 아무리 승복할 수 없다해도, 내가 제시한 강화조건은 바끌 수가 없소. 한니발 장군! 장군께서 내일 전투를 준비하라고 권할 수 밖에 없소. 왜냐하면 카르타고인, 그 중에서도 특히 한니발 장군 그대는 무엇보다도 평화롭게 사는 데 능숙하지 못한 모양이니까!"

 

두 장군은 각자 헤어져 언덕을 내려왔다. 역사상 유명한 '자바전투'는 이튼날 아침에 결행될 예정이었다. 이번 전투는 카르타고와 로마, 5만의 병력과 4만의 병력이 맞붙는 대회전인 동시에 전쟁의 행방을 결정하지 못한 '칸나전투'와는 달리 '자마전투'는 전장의 행방을 결정짖는 동시에 지중해 세계 전체의 장래를 결정하는 싸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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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바전투 요도(출처:군사무기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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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02년. 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는 '자마'와 '나라가라'의 중간에 펼쳐진 평원 전체에 양군이 포진했다 카르타고군은 보병 4만 6천명,기병 4천명 도합 5만명에다 코끼리 80마리가 가세하고 있었다. '누미디아'의 전 왕인 '시팍스'의 아들이 기병 2천명을 데리고 오기로 했으나 도착하지 않았다.

 

한편 로마군은 '스키피오'가 총지휘를 맡고, '라일리우스'가 좌익 기병을, '누미디아'의 '마사니사' 왕이 우익 기병을 맡아 보병 3만4천명,기병 6천명으로도합 4만명 규모였다.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카르타고군이 11:1인 반면 로마군은 6:1이었다. 병력 구성비가 이탈리아 반도와는 정반대였다. 한니발이 이러한 자신의 약점을 모를리는 없었다. 그는 평범한 장군이라면 생각하지 못할 진형을 펼치고, 그것으로 승리를 거두려고 생각했다.

 

한니발은 선두에 80마리의 코끼리를 배치했다. 두번째 대열에는 1만 2천명의 용병 혼성군을, 세번째 대열에는 소수의 카르타고 시민병과 아프리카,마케도니아 용병 등 1만 9천명의 보병을 배치하였다. 한니발 자신은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1만 5천명의 정예병력을 본대에서 200미터 후방에 배치했다.

 

한니발의 작전은 이러했다.

우선 80마리의 코끼리떼를 돌격시켜 적진 중앙의 로마군 보병대를 혼란에 빠뜨린다. 그런 다음 재빨리 둘째와 세째 대열의 용병대를 투입한다. 이 단계에서 양군의 전투력은 카르타고군이 3만 1천명인 반면 로마군은 3만 4천명이다. 싸움은 비록 로마군쪽이 우세하게 전개되더 래도 얼마 동안은 카르타고군이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의 주력 중무장 보병대가 지치기를 기다린 다음 후위에 대기하고 있던 원기 왕성하고 전투경험도 많은 1만 5천명의 정예병력을 투입하여 승리를 굳힌다는 작전이었다. 기병대가 열세하더 래도 보병대의 양옆에서 떠나지 않고 버텨 주기만 하면 충분하다.

 

지금까지 상대한 로마군 장군들 이었다면 이 전술은 성공할 가능성이 많았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로마인 이면서도 로마인이 아니었다. 한니발은 로마인의 허를 찌르는 전술을 구사하였지만,'스키피오'는 주어진 조건을 독창적으로 이용하여 로마군이 지금까지 시도해 본 적이 없는 전술을 구사했다. 여기에 한니발은 코끼리떼가 최소한으로 로마군 보병대의 전열을 흩어려 주기를 기대하였으며, 또한 기병대의 전투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으나 실제는 그의 기대에 어긋났다. 전장터에서 지휘관은 항상 전체 전장을 살피면서 자신이 기대했던 대로 전투가 진행되지 않을 경우에는 반드시 여러가지 상황에 대한 우발계획을 미리 세워 놓는게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니발은 패배를 해 본적이 없는 장군이다. 자신의 계획대로 항상 로마군이 전투를 응해왔고 의도하는 대로 전투는 진행되어 대부분 승리로 이어졌다. 자만심으로 가득찬 한니발은 적장인 '스키피오' 장군이 적이 생각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장군이라는 점과 창의적이고 시기적절하게 전투력을 구사하는 뛰어난 임기응변술을 제대로 잘 알지 못했다는 점과 전술상황을 자신이 생각한대로 진행될 것으로만 낙관하고 있었다는 점이 결정적인 패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로마군의 중무장 보병은 전위에서 후위까지 '하스탈리',프린키데스','트리알리'의 3열 횡대로 포진하는 것이 정석이나 '스키피오'는 경무장 보병부대를 소대단위로 중무장 보병대 사이사이에 배치했다. 통상 소대별 간격은 두었으나 간격을 두지 않고 적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6천명의 기병은 우익과 좌익으로 배치하고 '마시니사'와 '라일리우스'에게 각각 지휘를 맡겼다.

 

양군은 포진을 끝내고 사령관들의 훈시가 이어졌다. '스키피오'는

 

" 지금까지 에스파냐와 아프리카에서 거둔 전과를 병사들에게 상기시키고 우리에게는 운명의 여신이 미소를 보내고 있으며 오늘의 전투는 강화를 요구해온 적과 싸우는 전투라고 설명햇다. 특히 중무장 보병의 주력을 맡은 칸나전투 패배 장병들에게는 그동안의 고생도 오늘로 끝나게 될 것"이라면서 선전을 당부했다.

 

한편 한니발은 용병들은 부하장군에게 맡기고 자신은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오랜 부하들 한테만 연설했다.

 

" 16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우리는 이탈리아 땅에서 어떤 로마군도, 어떤 로마 장군과 싸움을 해도 진 적이 없었다. 오늘 싸우는 적장은'티치노'와 '트레비아' 전투에서 우리에게 패배한 적장의 아들이고,'칸나'에서 전사한 집정관 사위이다. 오늘도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나와 여러분의 명성을 불후의 것으로 만들자!"

 

한니발의 연설은 1만 5천명의 정예중에도 16년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해 온 고참병 8천명의 가스에 더욱 강하게 울려 퍼졌을 것이다. 그들은 이번에도 한니발에게 목숨을 걸기로 하였다.

 

싸움은 로마군의 좌.우익 기병대의 돌격으로 시작되었다. 한니발도 코끼리 부대의 돌격을 명령했다. 80마리의 코끼리가 달리면서 일으킨 흙먼지가 피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구름처럼 피어 올랐다. 흙먼지를 날리며 돌진해오는 코끼리 떼가 달려오자 '스키피오'의 명령에 따라 경무장 보병소대가 중무장 보병소대 사이로 파고 들었다. 이리하여 가로횡대의 긴 로마군 전열이 소대별 간격을 형성했다.

 

이 통로가 코끼리의 돌진력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코끼리가 경무장 보병소대가 형성한 간격 사이로 그대로 지나쳤다. 코끼리는 전차와 달리 일단 돌격이 시작되면 도중에 멈추기가 어렵다. 통로를 통과한 코끼리들이 부리는 병사가 간신히 멈추었을때, 경보병 부대가 꽹과리와 나팔로 소음을 내고 투창을 던지고 활을 쏘면서 코끼리를 공격했다. 그 결과 코끼리 떼들은 미친듯이 날뛰며 도망치거나 사로잡혀 전선에서 완전히 탈락하여 버렸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양군 중앙의 보병대 끼리 접전이 시작됐다. 로마군의 중무장 보병 2만2천, 누미디아 병사 6천명을 합친 2만 8천명이 한니발 보병3만 1천명과의 접전이었다. 좌.우익 기병들도 카르타고 기병을 압도하여 점점 밀어내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중무장 보병으로 하여금 카르타고군 좌우측 빈 공간인 측면을 공격토록 하였다. 3면에서 공격을 당하는 카르타고 용병부대의 전열이 당황하여 후방으로 도망치려 해도 한니발의 정예부대가 칼을 빼들고 독려하고 있었다. 퇴로를 차단당한 카르타고 혼성 용병부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새로 도입한 로마군의 양날검인 '에스파냐 검'이 접근전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한니발은 로마 중보병들이 지친 지금이야 말로 정예 주력을 투입할 시기라고 판단하고 공격을 명령했다.

 

200미터 까지 접근한 카르타고군을 보고 '스키피오'는 보병대에 전열을 다시 짜도록 지시했다. 부상자를 후송하고 적의 시체를 치운 다음 로마군은 중앙이 들어간 활 모양으로 빠른시간내에 진형을 편성했다. 숫적으로 우세한 아군의 잇점을 살리고, 좌.우익 기병이 합류하기까지 시간을 벌기위한 진형이었다. 경무장 보병과 누미디아 보병이 합류하여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을 때 좌.우익 기병대가 한니발의 기병대를 격파하고 싸움터로 되돌아 왔다. 14년전 '칸나전투'의 재현이었다.다만 상대가 바뀌었을 뿐이었다. 45세의 한니발은 1만 5천의 정예병들이 무참하게 쓰러져 가는 모습을 비통한 심경으로 지커 보고만 있었다. 이들은 모두 전멸했다.

 

카르타고쪽 전사자는 2만명이 훨씬 넘었고 포로도 2만명이나 잡혔다.나머지 카르타고 병사들은 수도 카르타고로 도망쳤다. 한니발도 기병대 수명만 데리고 '하드로메툼'으로 도망쳤다. 로마쪽 전사자는 1천500명. '스키피오'의 완벽한 승리였다.

  

한니발이 '자마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알렉산드 대왕'이나 '마케도니아'의 '피로소' 왕보다 더 위대한 전쟁영웅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나, 그는 자바전투에서 패장이 되었다. 한니발은 보병과 기병을 유기적으로 활용하여 적을 포위섬멸시키는 전술의 효율성을 어쨌던 입증하였기 때문이다. '스키피오'가 한니발이 창안한 이러한 전술을 한니발을 상대로 구사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재능이 탁월했기 때문이었다.

 

고대 로마인 중에서도 '루키아노스' 한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로마인이 구국의 영웅인 '스키피오' 보다 적장인 한니발을 더 뛰어난 장군이라는데 의견이 일치되어 있었다. 한니발의 불행은 우수한 제자가 적군쪽에서 나타나 버렸다는 것이다.

 

카르타고 정부는 '자마전투' 패전 소식에 완전히 당황하여 버렸다. 로마군이 금방이라도 수도 카르타고로 진격해 올 것 같았기 때문에 전 도시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때 한니발이 수도로 돌아왔다. 장로회의 석상에서 한니발은 로마와 강화를 맺을 수 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이에 카르타고 장로회의도 강화제의에 동의하여 한니발은  '코르넬리우스 진지'에 주둔하고 있는 '스키피오'에게 강화를 제의하여 두사람이 강화회담 대표로 마주했다. 강화조약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로마는 카르타고에 대한 독립 동맹국 간주.자치인정 및 존중.카르

    타고에 로마군 기지 건설 및 로마군 주둔 금지

2)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샤르데냐,에스파냐에 대한 기득권 완전포기

3) 마사니사 왕의 누미디아왕국 인정

4) 카르타고는 로마 동맹국에 대한 전쟁 금지

5) 상호 포로 석방

6) 군선 10척을 제외한 모든 군선과 군용 코끼리 로마에 양도

7) 카르타고는 로마의 승인없이 어떠한 국가와도 전쟁금지

8) 강화성립 완료시까지 로마군 군량제공

9) 배상금 1만 탈렌트 50년 분활 상환

10)카르타고 상류층 자제 100면 로마에 인질로 보낼것

 

'자마전투' 이전에 '스키피오'가 제시한 강화조건과 별반 차이가 없으나 7항의 전쟁금지 항목은 '자마패전'의 진정한 결과였다. 이것은 자주적인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완전한 독립국이 아니라는 뜻이다. 10항의 인질은 로마가 패전국에게 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로마화를 이루려는 것이다. 그들은 노예가 아니라 로마의 명문가정에 기거하면서 로마문화와 문명을 배우도록 하여 완전히 로마맨을 만들기 위한 동화정책이며 지지자를 양산하는 방식이다. 특히 조약내용에서 승자와 패자의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패전국에 대한 로마의 기본적인 동화정책이다.배상금도 분할 상환하도록 한 것은 상환기간 동안 조약이행을 감시하고 감독하기 위한 방책이다. 로마는 16년 동안 치런 희생인 전사자 10만,10명 이상의 집정관의 죽음,공포에 떨었던 로마시민 등을 생각하면 카르타고에 대한 너무나 관대한 처분이었다.

 

카르타고 장로회의에서 강화조약에 대한 승인여부 토의시 강화를 반대한 사람은 '스키피오'와의 전투에서 여러차례 패한 이력이 있는 '시스코네'가 반대 연설을 하였는데, 한니발이 듣던 도중에 나가서 '시스코네'의 멱살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장로회는 아연실색을 하였으나 바로 들어온 한니발이 강경한 어조로 연설했다.

 

"나는 36년 동안 조국 카르타고를 위하여 로마와 전투를 벌이면서 찬바람 눈.비 맞으며 오로지 조국 카르타고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제 우리는 다시 로마와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탁상공론만 할게 아니라 지금 강화를 하지 않으면 카르타고는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지금 로마와 강화를 하는 길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랄게 없다. 본인은 로마를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강화조약만이 카르타고가 살 수 있는 길이다!" 

 

한니발이 회의장을 떠나자 장로회의는 강화조약을 승인했다. 그래서 양국은 강화조약을 승인하고 16년 만에 다시 평화가 �아왔다.

 

강화성립을 지켜본 '스키피오'는 로마군을 이끌고 카르타고를 떠나 시칠리아-메시나-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하여 육로로 '아키아' 가도를 따라 수도 로마로 귀환하는 도로 연변에 수많은 시민들이 나와서 꽃과 환호성을 지르며 백마를 타고 지나가는 젊은 개선정군을 영접하였다.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를 제압한 자라는 의미로 '아프리카 누스'란 존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스키피오'에게는 기원전 202년-기원전 201년이 생애 가장 행복한 최고의 1년이 되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2차 포에니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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