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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로마인 이야기 14

제2권:요약(마지막) 로마인 이야기 14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기원전 200년-기원전 187년)

 

* 한니발의 시리아 망명과 사라진 재기의 꿈

 

기원전 200년. 로마 민회와 원로원의 절대적 지지로 젊은 나이에 제1인자 자리에 오른 스키피오는 앞으로 15년 동안 로마의 대외정책을 주도하게 된다. 당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축하겸 로마를 방문하였다. 축하는 명분이었고 실제 그들이 의도는 로마의 지원요청이었는데, 그리스의 북쪽 마케도니아 왕국의 침략행위를 중지시키도록 요청했던 것이었다. 도시국가로 발달한 그리스인들은 제한된 영토와 군사력으로 자신들의 이권투쟁에는 항상 대외세력을 끌여 들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스키피오는 이 문제를 우선 대화로 해결하려 했다. 먼저 사절단을 보내 마케도니아 왕 필립포스와 협상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필립포스는 틈만 나면 주변국을 공략하는 등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였는데, 자신은 그의 조상 알렉산드 대왕의 후예임을 스스로 자처하였던 것이다. 그는 실제 군사적인 능력과 식견도 갖고 있었고 용�술도 뛰어났다. 필립포스는 아테네 근처까지 침략하여 내려왔으나, 플라미니우스를 집정관으로 하여 파견된 로마군과의 접전에서 쉽게 무너졌다. 그래서 로마는 필립포스와 강화를 맺게 된다. 이제 로마군은 스키피오의 융통성 있는 전략.전술이 전 로마 장교들이 숙지하여 실제 전투시에 적용하고 있었다. 마케도니아군은 경직된 장창의 팔랑스 방진형태로 오로지 전방으로 진격하는데는 우수한 돌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측방과 배후 공격에는 취약하였다. 로마군은 지금까지 모든 전투에서 적의 장점을 발견하면 금방 자신들의 장점으로 흡수하는 속도도 빨랐다. 접근전에서 에스파냐의 양날검의 위력은 자마전투에서 이미 입증된바 있었다.

 

플라미니우스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환대를 받으며 올림피아 축전에도 참가하여 관람하는 등 그리스인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이자리에서 플라미니우스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선언을 하게 된다. 그리스인들은 환호하였다. 플라미니우스는 20년전 칸나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한니발에 의하여 그리스로 노예로 팔려간 7천명의 로마군을 �아주도록 요청했다. 이에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그리스 전역에서 모두 1천 200명을 �아냈다. 그들은 이미 50-60대가 되어 있었고 죽거나 행방불명이 된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로마의 가족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몸값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분담하기로 하고 그들 노병들과 같이 플라미니우스는 로마로 개선하였다.

 

이무렵 지중해 세계의 강대국은 패권국이 된 로마를 포함하여,카르타고,마케도니아,시리아,이집트였다. 스키피오가 생각한 '온건한 제국주의'는 로마패권하에 독립국인 이들 나라들과의 공존공영이었다. 즉 '팍스 로마나'(로마지배하의 평화) 사상이었다.그것은 어디까지나 온건한 형태의 '팍스 로마나'였다. 이에 반대한 인물이 바로 로마 원로원이며 웅변과 연설의 달인 '대카토'였다. 그는 온건한 정책으로는 영원한 평화를 누리기 힘들다고 역설하면서 패배자에 대해서는 재기의 기회를 완전히 없애는 강력한 로마를 원했다. 그는 카르타고와 체결한 강화조약 내용자체를 비난하면서 온건주의는 미래에 반드시 더 큰 재앙을 초래한다면서 카르타고 궤멸을 항상 주창한 스키피오의 정적이며 반대파였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패배자인 카르타고는 전쟁후 한니발을 수장으로하여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내경제 회복이 진행되고 있었다. 한니발은 세금을 늘려 재원을 마련한게 아니라 경비절약과 사용 재검토를 통하여 경제 재건책을 실시했다. 그의 정책은 효과는 있었지만 반감을 갖는 무리도 있기 마련이다. 카르타고는 국내파와 해외파 사이에 오랫동안 서로 반목하여 왔으며 한니발의 내핍경제 강조에 기존의 생활수준을 줄이기에는 참을 성이 부족한 민족이었다.한니발은 정치적 경험이 없었다. 그의 방법은 옳았으나 융통과 협조보다는 독단적인 언행을 서슴치 않았다. 그들은 한니발의 엄격한 방식을 6년을 견디지 못한체 반대파들이 그를 시리아와 내통하고 있다고 로마 원로원에 고발하였다.

 

로마 원로원은 아프리카 현지 조사단을 편성하여 카르타고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한니발은 이제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고 조사단의 목적이 무었인지 이미 스스로 알고서는 단신 빈손으로 조국 카르타고를 탈출하게 된다. 당시 51세. 한밤중에 말을 달려 해안까지 간 그는 미리 준비해둔 배에 올라타고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를 �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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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지도(출처: 살아가는 이야기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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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리아는 에게해 우측편에 있는'아이톨리아'의 개입요청을 받고 있었다.'아리톨리아'인들은 로마에 대해 불만이 있었는데 전쟁후 마케도니아에 대한 로마의 조치였다. 그들은 병력을 로마에 제공하면서 까지 로마를 지원하였으나, 강화후 마케도니아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데 불만이었다. 그래서 시리아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여 마케도니아를 침공하려는 의도였다. '아이톨리아'인의 지원요청으로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는 한니발과 세운 전략은 다음과 같다.

 

1) 한니발은 '안티오코스' 왕이 제공한 군선 100척과 1만명의 보병,기병1천명을 데리고 카르타고로 가서 카르타고 정부를 설득하여 이탈리아 남부로 쳐들어 간다.

2)'안티오코스' 왕은 나머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제압하고 로마 동쪽에 상륙하여 남쪽의 한니발과 같이 로마를 협공한다.

 

내용은 매우 웅장한 전략이지만 실현성이 희박했다. 실제로 한니발이 이렇게 진언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니발의 가슴 한구석에는 로마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마음의 미련은 남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한니발이 시리아와 내통했다고 고발한 카르타고 반대파의 이야기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며, 한니발이 조국을 버리고 망명길을 시리아로 선택한 점도 시리아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로마에 대한 재도전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그이 나이가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나이였기 때문이었다. 

 

* 시리아의 패전과 한니발의 재망명

 

기원전 193년. 스키피오 아프리카 누스를 단장으로 하는 원로원 의원 3명이 시리아에 사절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소아시아 '아페수스'에서 '안티오코스' 왕과 만났다. 회담은 성과 없이 끝나고 '스키피오'와 한니발이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자리에서 두 장수는 오랫만에 만나 서로 이야기 했다.옛날의 한니발은 그대로 정정하였으나 스키피오는 지병을 앓고 있었다.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두 장수간에는 서로 많은 회한이 있었으리라. 이 만남이 두 영웅들 사이에 두번째이자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후일 같은 해에 세상을 하직한 것을 보아 두사람은 서로 과거와 현실을 비판하며 인생이 덧없슴을 이야기 하면서 후일 이성에서의 만남을 서로 약속하였는지도 모른다.

 

2년후인 기원전 191년.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가 군사를 움직여 6만 대군이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기 시작했다. 로마도 동맹국들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동원하여 그리스로 이동하였다. 로마군은 시리아군과의 접전에서 너무나 쉽게 시리아군을 패퇴시켰다. '안티오코스'는 기병 500명의 호위를 받으며 배를 타고 소아시아로 도망쳤다. 로마군은 계속 '안티오코스'를 추격하여 소아시아로 진군했다. 이듬해 기원전 190년 로마는 '스키피오 아프리카 누스'를 포함하여 친구이며 전장터 동료인 집정관 '라일리우스',형인 집정관 '루키우스'가 3만명의 로마군을 이끌고 소아시아로 넘어갔다. 이동중에 옛날 '스키피오' 휘하에서 근무했던 많은 병사들이 따라 나섰고, 동맹도시들이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안티오코스'는 8만명의 대군을 결집시키고 있다는 소식도 들렸고, 한니발이 직접 8만 대군을 지휘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스키피오'는 주변국에 사전 외교전을 전개하여 병력 피해없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마케도니아와 흑해연안의 비타비아 왕국에도 사절을 보내 중립을 요청했다. '스키피오'는 시리아와의 회담이 결렬되자, 실제 동원된 시리아의 6만 대군과 로마의 3만 대군이 '에페수스' 내륙 '마그네시아' 평원에서 대치했다. '스키피오'와 한니발이 재대결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당시 '스키피오'는 진영에서 병상에 누워있어 직접적인 부대지휘는 '라일리우스'와 '루키우스'가 맡았으며, 한니발도 직접 참전하지 않았는데 '안티오코스' 왕이 한니발을 전선에서 멀리 떼어놓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안티오코스' 왕이 한니발을 다룰 수 있는 기량도 없었지만, 한니발도 남 밑에서 지능을 발휘할 인물은 아니었다.

 

시리아와 전투는 너무 쉽게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로마군 장군들의 기민한 전법과 융통성 있는 전술이 중무장의 마케도니아 방진대형을 주로 사용하는 시리아 대군을 가볍게 물리쳐 대승을 거두었다. 로마군은 이미 '스키피오'의 전술에 숙달되어 있었으나 시리아는 로마군이 에스파냐,이탈리아,아프리카에서 심대한 손실을 초래하면서 전술을 개발하고 전투기량을 향상시킨 반면에 그들은 그동안 잠만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리아 전사자 3만 3천명,로마군 324명으로 로마군의 대승이었다. '안티오코스'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내륙지방 '샤르데스'까지 도망쳤다. 시리아는 로마와 강화조약을 맺고 동맹국이 되었다. 한니발은 로마군에게 인도되기 전에 '크레타' 섬으로 도망가서 숨어 살았지만 '스키피오'는 그 사실을 알고서도 추격대를 보내지 않았다. 그후 한니발은 안전을 고려 '크레타' 섬을 떠나 흑해 연안의 '비타비아' 왕국으로 다시 망명했다. 

 

 

* 스키피오 아프리카 누스의 재판과 실각

 

남보다 뛰어난 공적을 이룩하고 유력한 지위에 오른 사람 가운데, 남의 질투를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질투는 엄밀히 숨어서 기회를 노리다가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약점이 보이면 반대파는 그것을 물고 늘어진다. 명예를 마음껏 누리던 상대편은 사소한 일로 인하여 명예심에 손상을 입게되고 그 공격을 견뎌내지 못하면 스스로 물러나는게 순서였다. '스키피오'의 약점은 건강이었으며 또 가까운 주변 인물들의 약점이 바로 '스키피오'를 공격하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반대파의 우두머리는 원로원의 선동가며 연설가인 '대카토'였으나 그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주변 인물을 내세워 스키피오에 대한 약점을 캐면서 공격의 포문을 연 것이 스키피오가 시리아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직후였다.일차적인 공격 대상자가 '스키피오'의 형인 '루키우스'였다

 

기원전 187년. 시리아를 굴복시키고 개선한 스키피오는 호민관 두명으로 부터 고발을 받았다. 처음에는 '스키피오'의 형인 '루키우스'가 시리아왕 '안티오코스'로 부터 받은 배상금 500탈렌트에 대한 사용처가 불분명하다는 고발이었다. 처음에는 '스키피오'가 나서서 고발의 부당성을 주장하게 된다. 개인 착복이 아닌 부대를 위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이었다. 원로원에서 호민관의 심리가 '루키우스'에서 '스키피오'로 확대되었다. '스키피오'가 시칠리아 파견시 부터 세금징수에 대한 편법사용에 대하여 추궁하자, 그는 경리장부를 찢어버리고 울분을 토하면서 섭섭한 마음이 폭발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원로원에서 질타하는 연설한 뒤에 수도 로마를 떠나 나폴리로 가는 중간에 바다가에 위치한'리테르노'의 자신의 별장으로 낙향하여 그후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후 재판으로 비화되어 '스키피오'는 재판의 소환에도 응하지 않았다. 궐석재판이 진행되던중 원로원 의원중 노예군단을 지휘하다 전사한 집정관 '크라쿠스' 손자인 '크라쿠스'가 연단에 올라 연설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 누스'에 대한 로마인들의 보답이 이렇다면 장차 로마를 위하여 누가 목숨을 걸고 전장터에서 로마를 위하여 싸우겠느냐! 이제 그가 권좌에서 물러나 낙항한 이상 더이상 그를 재판한다는 것은 로마인의 수치다. 그가 로마를 위하여 봉사하고 공헌한 위업을 생각할 때 사소한 문제로 그의 명예를 더럽히는 행위는 바로 원로원 여러분들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이므로 재판은 중지되어야 한다"는 취지의연설을 하였다.

 

원로원은 그의 이야기에 분위기가 변하여 '스키피오'에 대한 탄핵을 중단하기로 하였다. 그후 그 문제는 혐의가 풀렸으나 이미 모든 권력은 반대파인 '대카토'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스키피오'는 정적이 권력을 잡은 로마쪽으로 눈길도 주지않고 칩거하였다. 그로부터 4년후 별장에서 조용히 세월을 보내던 스키피오는 지병이 악화되어 기원전 193년 향년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해 한니발도 망명국 '비타비아' 왕국에서 지내던 중 공명심에 불탄 일부 로마군 장교가 '비타비아' 왕에게 한니발의 신병인도를 요구하자, 이를 알게 된 한니발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독약을 마시고 희대의 전술가는 64세를 일기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 카르타고 멸망: 제3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149-기원전 146년)


 로마 원로원의 '대카토'는 '스키피오'를 실각시킨뒤 능숙한 웅변술과 연설로 청중을 압도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으로 원로원을 좌지우지 하고 있었다. 그는 카르타고에 대한 집요한 반대운동으로 카르타고의 궤멸을 꿈꾸어온 사람이다. 즉 그는 온건노선을 반대해온 사람으로 패전국에 대하여 강력한 조치를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스키피오'가 카르타고와 체결한 강화조약 내용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카르타고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카르타고는 인접의 누미디아 왕국의 침략을 예상하고 로마의 승인도 없이 용병 6만명을 모집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로마 원로원이 현지를 내려와서 양국간에 중재를 했으나 카르타고는 누미디아 수도 근방 90키로미터 까지 용병부대를 진군시키는 사태가 발생되자 로마 원로원이 격분했다. 카르타고는 강화조약을 위반하게 되었고 누미디아를 침략한 용병부대도 누미디아군에게 패배해 버렸다. 로마 원로원의 조사단과 감독에 의해 카르타고군은 용병을 해체하고 해당 지휘관을 처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지지부진 했다.

 

로마는 그리스의 반란사건으로 신경이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물론 '대카도'의 영향이 절대적인 원로원이 사건 수습을 위하여 �아온 30명의 카르타고 대표 사절에게 지금의 해안가 수도를 파괴하고 내륙으로 15키로 정도 떨어진 지역으로 주민 전원이 이주하여 수도를 옮기도록 요구했다. 그당시 내륙 15키로미터는 비옥한 토지가 펼쳐진 지역으로 로마나 다른 도시들도 내륙에 위치한 도시들이 많았기에 로마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요구했으나 '대카토'의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대카토'의 심중에는 카르타고의 반대를 예상하였는지도 모른다. 일국의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엄청난 재원의 낭비이며 주민들의 동의를 얻기도 쉽지 않다. 카르타고 사절로 로마를 방문하고 있던 카르타고 대표 30명은 로마 요구에 대하여 불가함을 역설하였으나 원로원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카르타고 대표들은 귀국 도중 일부는 도망고 나머지는 카르타고에 도착했다.이 소식을 알게 된 민중들의 봉기가 일어났다.무능한 정부에 대한 비판과 로마에 대한 저항으로 번지면서 대표들이 살해되고 일부는 도망을 갔다. 수도 카르타고 전주민은 로마에 대한 항전을 준비했다. 흩어졌던 용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5만명 이상의 수도 주민이 로마의 공격에 대비하여 전원 항전태세에 들어갔다.

 

*  수도 카르타고 함락과 멸망

 

튀니스만의 서쪽에 불쑥 튀어나온 곶의 끝을 차지하고 있는 수도 카르타고 시가지는 천연의 요충지로 삼면이 바다이며 북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동쪽은 바다에 접해 있으며 육지와 연결된 서쪽은 높이 14미터 폭이 10미터나 되는 성벽이 3겹으로 세워져 있어 공격이 거의 불가한 요새지형이었다. 오로지 남쪽 항구로 접안이 가능하여 공격로는 남쪽 항구 방향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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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 전경

* 오늘날 튀니지아 도시모습(출처:튀니지 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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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 유적
카르타고 유적
카르타고 유적

* 카르타고 유적(출처:세계 도시 유적지 시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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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군 총사령관은 '스키피오 아프리카 누스'의 양손자이기도 한 38세의 '스키피오 아이밀리우스' 였다. '스키피오 아프리카 누스'가 세상을 떠난지 46년후인 기원전 146년. 로마 원로원의 지침을 받은 사령관은 농성 3년째 카르타고 수도를 완전 포위하고 있었다. 주민들의 저항도 강하였지만 지형적으로 공격하기에 어려운 요새도시라 로마군도 섣불리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민들은 로마군 포로를 성벽위에 올려 놓고 살해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며 전원 옥쇄를 다짐하고 있었다. 로마 원로원은 그리스 동맹도시중 반란을 획책한 '크란트'를 점령한 후에 도시 전체를 완전히 파괴하고 시민들은 전원 노예로  전락시키고 전 도시의 건물은 모두 파괴하고 땅은 가래로 갈아 소금을 뿌리는 방법으로 초토화 시킨적이 있었다. 전 그리스 동맹도시들에 대한 경고였다. 지금까지 로마가 이렇게 한 적은 없었으나 배신행위에 대한 철저한 복수를 강조한 로마 원로원의 제1인자인 '대카토'의 방침에 따른 행동이었다. 수도 카르타고에 대한 조치도 그리스 동맹도시 '크란트'와 똑 같은 방법으로 조치하도록 총사령관은 지시를 받고 있었다.

 

공격은 해안쪽에서 부터 시작되었다.로마 군선이 항구앞 해안을 봉쇄하고 병사들이 방파제를 쌓아 출입을 완전 봉쇄한 다음, 로마군이 상륙하여 공격했다.건물들이 불타고 카르타고 주민들이 결사항쟁하였으나 도시건물이 하나하나 로마군 수중에 떨어지면서 도시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로마군 사령관은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카르타고 도시가 불타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카르타고가 이렇게 멸망하듯이 언젠가는 로마도 이렇게 멸망하게 될지 모른다며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도시함락 작전은 일주일간이나 시가전이 계속된 뒤에 완전 함락되었다. 도시의 모든 건물이 파괴되고 주민들은 대부분 살륙되었고 그중에도 살아남은 사람은 전원 노예로 전락했다. 땅을 갈고 소금을 뿌려 다시는 풀이 자라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후 '율리어스 시이저'가 수도 카르타고시를 다시 복원할때 까지 그땅은 죽음의 땅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로써 500년 역사를 자랑하며 지중해의 재해권을 휘어잡고 해상왕국으로 최고의 번영을 누리던 카르타고가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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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 [Carthago]
요약
티레의 고대 페니키아인()이 북아프리카의 튀니스만() 북 연안에 건설한 도시 및 도시 국가.
본문
한니발석상 / 프랑스 파리 루브르미술관.

로마인은 카르타고의 주민을 포에니(페니키아)라 불렀으며, 창건연대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지만 대개 BC 720년경으로 추측된다. BC 3세기 전반까지 서(西)지중해에서 최대의 세력을 떨쳤으며, 무역으로 번영하였는데 특히 상업귀족의 세력이 매우 강대하였다. 카르타고라는 이름은 고대 로마인들이 부른 것으로서 페니키아어()로는 콰르트하다쉬트(새로운 도시)이며, 그리스인은 칼케돈이라 불렀다.

카르타고는 땅이 비옥하고 지중해 통상의 요충지로 해상무역을 통해 발전하였다. 특히 에스파냐아프리카를 잇는 통상로상에 있었으므로 BC 600년경에는 서지중해의 무역권을 완전히 잡고 코르시카섬 ·사르데냐 ·에스파냐 등지에도 진출하였으며, BC 6세기 중반기에는 전()시칠리아를 장악했다. 그들에게는 인신공희()라는 잔혹한 종교적 풍습이 있어 신전의 앞마당에는 여신() 타니트와 남신() 바아르아몽에게 산 희생물로서 바쳐진 것으로 추측되는 어린이들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여신 타니트는 카르타고의 주신()으로 이집트의 여신인 이시스의 모습과 닮은 데가 많았다. 국가형태는 1년 임기인 2명의 행정장관, 종신의원으로 구성된 원로원, 백인회(:실제인원은 104명), 시민총회로서의 민회, 임기 무제한의 특별직, 장군 등을 가진 도시국가로서 실질적인 정치체제는 전형적인 과두제였다. 한편 용병제도를 채용한 점은 그리스 ·로마의 도시국가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서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카르타고는 계속해서 서방을 향하여 판도를 넓혀 갔으며, 시칠리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약 3세기에 걸쳐 그리스인과 충돌을 되풀이하였다. BC 6세기에는 에트루리아인()과 결탁하여 그리스인과 충돌하였고 BC 540년경에는 코르시카섬에서 퍼카이아인과 싸웠으며 BC 480년에는 시칠리아 히메라의 싸움에서 시라쿠사의 겔론에게 패하였다.

국력의 재건을 도모한 카르타고는 BC 5세기 후반에서 BC 4세기 중엽에 걸쳐 특히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오스와의 싸움을 벌였다. BC 4세기 중엽 시라쿠사의 티모레온과의 싸움에서는 패배하였고, BC 310년에는 아가토클레스에게 아프리카 본토가 침공되어 카르타고가 포위되었으나 격퇴하고 아가토클레스 사후에 마침내 시칠리아의 패권을 재차 확립하였다.

그러나 그 후 에피루스피로스의 개입으로 결국 시칠리아에 대한 완전지배권을 잃게 되었다. 한편 로마인과의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조약을 맺어 서로 충돌이 없었으나, 피로스전쟁 후 양자의 대립이 격화하여 BC 264∼BC 146년 사이에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이 일어났다. 제1차(BC 264∼BC 241)는 시칠리아에 있는 영토와 제해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시칠리아를 주전장()으로 하여 싸웠으나 패하고 시칠리아를 빼앗겼다.

제2차(BC 218∼BC 201)는 에스파냐에서 멀리 이탈리아로 진격, 한니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자마전투에서 로마의 대()스키피오에게 패배하여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 제3차(BC 149∼BC 146)에서는 로마의 장군 소()스키피오에 의해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고 카르타고도 멸망하였다. 그 후 카르타고의 영역은 전부 로마의 속주() 아프리카로 전락하였으나, 카르타고의 도시 자체는 카이사르에 의해서 재건되어 로마제정시대에는 크게 번영하였다.

특히 수사학() ·법률학 등 학문연구의 일대 중심지가 되었으며, 3세기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지로서 주교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439년에 반달인()에게 점령당하고, 698년에는 아라비아인에게 파괴되어 완전히 쇠퇴하였다. 현재는 고대 카르타고인의 묘지와 카르타고 항구의 유적 및 원형극장과 공중욕탕 등 로마 식민지시대의 유적이 있을 뿐이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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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르타고 연혁(출처: 네이브 백과사전)

 

 

*<제2권>  에필로그

 

한니발 전쟁은 기존 지중해의 최대 강대국이던 카르타고와 당시 융성하던 로마와 제1,2차 포에니 전쟁을 통한 패권싸움이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 남부에 위치한 당시 최강의 그리스 도시국가였던 시라쿠사가 시칠리아의 동쪽 끝에 위치한 메시나 도시국가를 위협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메시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탈리아 반도를 바로 코 앞에 둔 메시나를 로마가 지원하지 않을시 시라쿠사나 카르타고에 넘겨주는 것은 로마로써는 참을 수 없는 상황이였기에 메시나 지원을 민회와 원로원이 결정하면서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시작된다.시라쿠사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로마와 대적하는 시칠리아 전투를 시작으로 제1차 전쟁은 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241년까지 23년 동안 계속된다.

 

수차례의 육지전과 해전을 통하여 당대 최강의 카르타고 해군이 3단층 겔러리선 한척 제대로 없었던 급조된 로마해군에게 연전연패 하게 된다. 로마는 동맹도시들의 신속한 지원과 창의적인 노력으로 수차에 걸쳐 카르타고 해군을 격파하게 된다. 바다에 익숙하지 못한 로마군에게 군선 수백척과 병력 수만명이 수장되는 엄청난 피해를 준 것은 오로지 태풍이었지만, 로마는 오뚜기 처럼 다시 일어서곤 하였다. 이는 로마라는 한 국가의 재생능력이 아닌 그들을 점령하지만 그들을 인정해 주고 대접해준 동맹도시들의 자발적인 지원에 의한 합작품이었다는 사실이다.

 

제1차 전쟁의 결과는 로마의 승리로 강화가 성립되면서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는 로마령으로 귀속된다.

 

전쟁 후기에 나타난 카르타고의 유력자이며 장수인 하밀카르가 시칠리아에서 로마군에게 당한 카르타고의 치욕을 9살배기 자신의 자식에게 강하게 심어준 결과  그후 25년후인 기원전 216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인 한니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하밀카르는 자식 교육 하나는 잘 시켰던 것 같다. 장남 한니발을 포함한 그의 아들 3형제가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중 차남 하스두루발과 3남 마고네가 각각 이탈리아 북부전선과 제노바 전투에서 전사하거나 중상으로 사망하였다. 한니발은 결국 조국을 떠나 망명하게 되는 등 3형제는 결국 아버지의 유업을 충실히 수행하다가 목숨을 잃는다. 이 얼마나 자식교육이 잘 이루어진 것인가! 한 가문의 온 가족이 오로지 로마타도에 일생을 바치고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있다.

 

오늘날 우리는 오로지 자신의 부귀영달만을 추구하는 교육실태와 출세지향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우리나라 가정과 학교교육이 주는 결과는 유사시에는 조국을 버리고 외국으로 탈출하려는 생각을 하고만 있다는 사실이다. 로마의 집정관들이 스스로 전투에서 앞장서서 임하는 자세와 원로원을 포함한 가진자들이 스스로 중보병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는 사실이다. 칸나전투에서 로마 원로원 의원 80명이 중보병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하였다는 사실이다. 과거 중동전 발발시 조국의 위기에 학업을 전폐하고 조국 이스라엘로 달려간 이스라엘 젊은이들과 도망가는 아랍 젊은이들 이야기를  우리들은 들었다.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시 영국의 왕족을 포함한 귀족들이 앞장서서 전장터로 달려갔다는 사실, 독일군 귀족들이 전장터에서 앞장서서 진두지휘하였던 사실들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가진자나 권력층이 평시에 누리던 혜택은 국가가 제공해준 것으로 생각했다. 권력과 부를 가진자들이 국가 위기시에는 누구보다도 앞장서지 못하는 민족은 결코 역사속에 오래 남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가진자들이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부모들이 존재하는 한 그 나라는 오로지 용병으로 로마와 전쟁을 치루다 멸망한 카르타고와 무엇이 다르리오!

 

한니발은 에스파냐로 이주한 아버지 하밀카르 따라 식민지 수도인 카르타헤나에서 자라면서 마케도니아 알렉산드 대왕의 업적에 심취하여 그의 전략전술에 매료된다. 아버지 하밀카르 총독이 에스파냐 식민지를 반석위에 올려놓고 죽자, 사위인 하스두루발이 뒤를 이어 에스파냐 총독을 이어받아 통치하다 수년후 집안 노예에게 암살되었다. 당시 26세인 한니발이 카르타고 정부의 만장일치로 후임 총독에 임명되자 에브로강 이남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한니발은 이탈리아 침공을 위한 준비를 진행하게 된다. 그 방법으로 한니발은 로마 동맹도시인 사군토를 공격하게 되는데 이에 로마는 수차례 회담이 실패되자 카르타고와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한니발의 계산된 수순이었다는 점이다. 이리하여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시작된다.

 

2천2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군사전문가들이 스키피오는잘 몰라도 한니발은 잘 안다. 왜 그럴까?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알프스를 넘었고 이탈리아 반도를 종횡무진하면서, 소수의 군대로 상대적으로 많은 로마군을 다양한 진형을 구사한 포위섬멸작전으로 연전연승하면서, 10만명이상의 로마군 병력을 섬멸시켰고 로마 집정관 10명 이상을 전사시켜 전 이탈리아 반도를 공포에 떨게 하였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은 것이 어쩌면 무식하기 짝이 없는 짖이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나, 당시 그는 전략적으로 그 길 밖에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로마군이 상상하지 못하던 전략.전술로 포위섬멸전술의 신기원을 이루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한니발은 전술면에서는 완벽한 승리였으나 전략면에서는 실패하였다. 로마연합의 해체를 꿈꾸었으나 로마연합의 도시국가들은 한니발의 기대를 져버렸던 것이었다.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본국에 대한 침공으로 카르타고가 위기에 처하자, 한니발은 본국의 귀국명령에 따라 16년만에 이탈리아에서 배를타고 철수하면서 수평선 아득히 헤라신전이 사라질때까지 말없이 응시하던 한니발의 모습을 생각하게 된다. 한니발은 진정 누구를 위한 전쟁을 하였던 것일까? 아버지 하밀카르의 유지를 받든 가문의 복수이었던가? 아니면 카르타고의 지중해 세계의 제패를 꿈꾸었던가? 그는 본국의 지원 없이 16년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로마군과 전쟁을 치렀다. 수만명의 병사들 군량미와 용병의 급여는 어떻게 조달하였을까? 충분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제때에 지급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그래도 어느 한 병사도 한니발을 버리고 떠난 병사가 없다니! 항상 엄숙하고 말이 없으며 밤낮없이 일을 처리하고 식사도 병사와 똑 같이 하며, 잠도 아무밑 아무데서나 병사의 망토를 덮고 잠을 자던 장군! 병사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목숨을 기꺼이 한니발 장군에게 바치고 싶어하며 그를 따랐다는데 그는 과연 어찌하였기에 병사들이 그토록 그를 따랐을까? 오늘날 군인이라면 한번쯤 생각해 볼 가치가 있으며 난 지금도 그 장군의 부하관리와 용병술에 대하여 의문을 떨칠 수가 없음은 사실이다.

 

자마전투는 한니발의 운명을 가르는 분수령이었다. 자신보다 12살이나 어린 로마의 젊은 장수인 스키피오에게 일생에 단 한번의 패배를 하게된다. 자마전투 하루전 회담시 한니발은 그의 말속에 이미 전투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다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자마전투가 자신의 운명뿐만 아니라 카르타고의 운명도 결정 짖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승리하면  4만명의 로마군 목숨과 전리품을 얻을 수는 있다. 그래도 로마는 또 군대를 보내 카르타고를 위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패배하면 5만명의 카르타고 병사와 자신의 목숨은 물론 카르타고는 멸망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으리라! 그의 장기인 기병전력이 부족했지만 80마리의 코끼리와 1만5천의 정예병력으로 대비는 하였다. 그러나 스키피오의 융통성과 창의적인 전술은 스키피오를 단순히 로마인으로 생각한 한니발에게 패전의 쓰라린 결과를 초래한다.

 

상호 강화가 성립되어  카르타고는 로마 동맹국으로 존속하게 되고 한니발이 국정을 맡아 경재재건에 힘쓰나 엄격한 그의 언행에 6년동안 참아온 카르타고인들이 그를 고발하게 된다. 그 고발내용은 시리아와 한니발이 연계하여 로마타도를 획책한다는 것이었다. 그 고발은 어쩌면 정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결국 시리아로 망명했으며 시리아 왕과 로마타도의 원대한 작전까지 구상하였으니까! 희대의 영웅을 배출한 카르타고인은 그들의 영웅이던 한니발을 버렸다. 스키피오도 또 같이 로마 원로원의 탄핵을 받는다. 스키피오는 어쩌면 한니발 장군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카르타고와 강화조약 내용도 그렇고 강화후에도 한니발의 신상인도 요구를 하지 않았던 것도 그렇다. 로마인은 과연 대단한 민족이었던 것 같다. 원로원도 한니발의 신상인도 요구를 하지 않았던 것은 지금의 나로써도 이해할 수가 없다. 오냐하면  10만의 로마군을 섬멸시켰고 로마군 사령관을 10명이상이나 전사시킨 적장이며 전 로마인을 16년간이나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패전국의 적장을 그냥 놓아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또 스키피오는 시리아와 회담시 당시 시리아에 있던 한니발과 같이 만나 이야기를 나눈것 외에 시리아 전투에서 승리후 강화조약시 한니발은 크레타 섬으로 도망을 갔지만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위치를 알고도 추격하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스키피오가 한니발에 대해서는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스키피오도 탄핵을 받은 후 나폴리 근방 그의 별장에서 조용히 살다가 지병으로 4년후 기원전 183년에 세상을 떠났다.향년 52세였다. 같은해 한니발도 비타비아 왕국에서 명예욕에 사로잡힌 어느 로마군 장교가 비타비아 왕에게 한니발의 신병인도 요구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니발은 스스로 지니고 있던 독을 마시고 목숨을 끓었다. 향년 64세였다. 두 장수는 저승길에서 만나 자신들을 버린 조국에 대해서 서로 욕하면서 진정어린 형님.아우가 되어 가던 길에 어느 주막에서 만취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한시대의 영웅이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 또 다른 영웅이 탄생했다. 시대와 운이 맞아 떨어진 사람들 이랄까? 시이져가 그랬고,옥타바아누스,안토니우스,나폴레옹,웰링톤,히틀러,구데리안,이이젠하우어,패턴,롬멜,맥아더 등등이 그랬다.

 

그로부터 약 50년후 제3차 전쟁이 발발하는데 카르타고는 로마와의 약속을 지켜내지 못하고 이웃나라 누미디아를 공격하다 실패하자 로마 원로원의 수도 이전요구에 반기를 들고 로마와 항쟁하다가 로마군이 3년이상의 포위공격으로 수도 카르타고는 로마군에게 점령되어 모든 건물이 파괴되고 대부분의 주민은 살륙되고 그중 살아 남은 주민은 노예로 전락했다. 그래서 제3차 포에니 전쟁도 막을 내린다.그후 율리어스 시이져가 카르타고 도시를 재건 복구할때까지 카르타고는 소금이 뿌려진 황무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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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항공전은 항공전력 단독으로 전투를 이끌어 갈 수 있다는 내용을 보여준 중요한 계기였으며
무엇보다 전투기들이 활약하던 현대전쟁중 하나였다.
초기 작전계획에는 항공작전은 3단계로써, 적대행동을 가하는 이라크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전술전투기, 대형 수송기, 공중급유기및 공중지휘관제기를 급속하게 걸프지역에 투입한다,
또 이를 지원하는 임무는 해군의 항모기동부대, 해병대및 여단규모의 육군항공대가 담당한다.
두번째단계는 방어작전으로써 미군을 공격하는 이라크공군에 대한 제공권을 획득하고, 아군 군사기지를 방어하면서
적의 후방지원및 통신체제를 공격한다. 또 필요할경우 항공전력으로 근접항공지원을 실시한다.
최종적으로는 적군 전투부대를 격파하고 중요시설을 점령한다.
공습 첫날 바그다드에 단독으로 침투해 중요시설을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한 F-117A 스텔스전폭기.
독특한 형태로 스텔스성을 띄고 있었다. 전폭기긴 하나 F/A-18이나 라팔같은
멀티롤타입이 아니었으므로 공대공미사일은 4발밖에 탑재하지 않았다. 주로 단독침투임무를
수행하는 역을 맡았다.
 

영국공군의 (사진은 독일공군) 토네이도 전폭기. 영/이/독 3개국이 합작해 만든 전폭기로써
걸프전에서 예상을 뒤엎는 엄청난 전과를 불러왔으나 초기엔 피해가 컸다.

느린 속력으로 인해 무시받았던 A-10, 하지만 걸프전에서의 활약은 예상을 뒤엎었으며
강력한 기관포와 대전차능력으로 인증받은 공격기. 한국공군도 도입할 수 있었으나
시기를 놓쳐서 불가능.

F-15의 보조전력으로 운용되었던 전술전투기 F-16, 걸프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한국공군에서 KF-16으로 라이센스생산중이다. 미국에선 더이상 생산하지 않는다.
미공군 주요전력 (사용중입니다.)

F-15 전폭기. 역시 걸프전에서 F-16과 같이 뛰어난 전과를 보였다.
미공군전력의 핵심, 탑 파이터.

 

                                  * 걸프전 공군(출처: 전쟁의 역사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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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토마호크미사일
사진크기 : 800*400 (원본사진보기)
출처 : © encyber.com
설명 : 초음속 장거리 순항미사일. 잠수함 또는 군합에서 발사하는 해상 및 지상공격용 미사일.
관련항목 : 잠수함발사순항미사일, 토마호크미사일, 걸프전쟁 이후의 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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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마호크 미사일(출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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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 전쟁의 특징(참고)

 

미래의 전쟁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변화의 틀에서 보면 미래의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전개되는 지를 알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새로운 문명의 출현을 경험하고 있는 변화가 군대를 변화시키고 전쟁의 양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새로운 문명의 출현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제 3의 물결 정보화사회 후기 산업화라고 불리는 정보혁명이 사회 문화 경제만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군대와 전쟁을 정보화의 전장으로 이끌고 있다. 현대 정보화 혁명의 특성에 비추어 앞으로의 군대와 전쟁은 다음과 같은 특징으로 변화하고 있는 중이고 변할 것이다.

 

* 정보화 전쟁으로의 이행

  배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라인 배트남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했다. 왜 거대하고 막강한 군대와 화력을 가진 미국이 작고 조그만한 게릴라부대를 가진 배트남에게 졌는지 그 이유와 해결책을 몰랐다. 그리고 그 당시 소련은 미국이 배트남에 수렁에 빠져있는동안 동유럽에서 미국보다 앞도적인 수로 탱크를 늘렸고 방공망또한 기존의 폭격기로는 침투할 수 없게 더욱더 촘촘히 구축을 해놓은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을 �고자 미국은 기존의 전략과 전술의 변화를 시도를 했다. 변화를 시도하는 도중에 제 3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였다. 여기서 미국은 소수의 이스라엘골란고원에서 다수의 시리아군을 상대로 공륙작전과 보급차단으로 승리를 거두것에 힌트를 삼고 당시 미국사회에 변화시키는 정보화의 물결을 적극받아들여 새로운 군대로 탄생시켰다.

 

1. 대량생산 대량살육전에서 소량생산 맞춤살상전 무기의 스마트화(소량생산 맞춤소비)

산업화 시대의 군대는 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대량으로 파괴를 한다. 산업화 시대의 대량살육의 대표적인 무기가 핵무기다. 그럼 미국은 동유럽의 대량의 구소련의 탱크와 방공망을 핵무기로 부수어 버릴수 도 없다. 만약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인류의 멸망이다. 방공래이더와 탱크부대의 통신시설만 파괴하면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배트남의 개릴라부대의 보급망을 차단하면 개릴라부대는 전멸이다. 보급공장과 보급로을 차단하기 위해서 부정확한 폭탄으로 대량으로 사용하는 것보다는 한 발의 스마트한 폭탄으로 파괴하는 것이 경제적이고 효과적이다.  이렇듯 정보화시대의 무기체계는 화력위주의 전쟁이 아닌 정보에 바탕을 둔 무기체계가 주를 이룰것이다.-스텔스 전투기, 토마호크 미사일, 각종레이저무기, 에이브람스전차........

 

2. 스마트한 무기 스마트한 군인(지식화된 노동자)

스마트한 무기는 고도의 전문기술을 필요로한다. 따라서 이를 운용하는 군인들도 높은 지식과 전문화를 요구한다. 단순히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군인이 아닌 컴퓨터와 야간탐시장비 레이저 조준경 휴대용 위성통신장비를 다루며 각종 폭약과 지뢰를 능수 능란하게 다루고 대포와 탱크운용하기위한 기하학에 능통하는등 고도의 지식을 갖춘 군인이 되어야한다.-최근 우리나라 현역군인의 고학력화

 

3.  군대조직의 혁신(작고 효율적인 회사, 정부조직)

비효율적이고 거대한 중앙집관화된 관료적인 군대조직에서 작고 효율적이고 분권적인 군대 조직으로 변신할 것이다. 미국은 과거 배트남전에서 백악관에서 일일이 지시를 내렸지만 시시각각 전황의 급변하는 전쟁터에서 이러한 지시는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따라서 하급부대에게 작전의 재량권을 주고 창의력과 융통성을 부여하여 전장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것이다. 스마트한 무기는 많은 운용인원을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군인의 수를 줄여 더욱 기동성 있는 군대조직으로 만들 것이다.-세계각국에서 일어나고있는 군인의 수 감축

 

4. 전장의 실시간화 (실시간 뉴스, 국제통신, 인터넷게임)와 전장의 다각화(인공위성) - 속도는 힘이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작전명령이 실시간으로 진행된다. 즉 작전의 명령 수행의 속도에서 가속도를 붙이게 된다. 스마트한 무기와 정보통신기기의 발달로 전후방의 구분이 없고 육해공에서 다각적이고 실시간으로 전쟁이 벌어진다. 그리고 미디어의 발달로 실시간으로 전쟁뉴스를 볼 수 있다. 또한 인공위성의 이용으로 전장의 영역이 우주로 확대된다. -GPS를 이용한 무기체계,CNN......

 

5. 무형의 가치 (붉은 악마)

적의 비행기수 탱크수 군함의 수등 하드웨어의 가치보다는 적의 정보통신 운용능력, 사기등이 중요하게 될 것이다.-병사들의 GPS운용능력.....

 

6. 무인화 (산업로봇, 가정및 사무자동화)

생화학전과 같은 혹독한 전장에서 군인들을 보호하기 위하기 위해 혹은 예산을 절감하기위해 전장을 무인화 시킬 것이다. -전투용 로봇, 무인 비행기등.....

 

7. 시스템의 통합과 네트워크화 (바코드, 인터넷, 전자정부)

다국적군 혹은 동맹군간의 시스템의 통합과 데이터배이스화로 물자와 정보의 교환과 관리가 효율적이게 되고 각 부대간의 전자네트워크화로 정보의 교환이 자유롭게 된다.

 

8. 민간기술을 이용한 군산복합산업 군수산업의 문민화

과거에는 군대가 직접 기술을 개발하여 무기를 제조하였지만 현재 민간기업의 급속한 기술의 발달로 군대가 민간의 기술을 채용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와 반대로 군대에서 개발한 기술이 반대로 민간에게 이용한다.-게임기에 사용되는 그래픽칩기술이용하여 미사일유도장치를 만들거나 일본의 특수도료기술을 이용한 스텔스기의 페인트작업등등...

 

이상 미래 혹은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정보화된 군대의 특징들을 보았다.  위에 정보화된 군대에서 가장 큰 자원이자 무기는 정보이다.

 

*정보화 군대와 비정보화 군대간의 전쟁

지난 90년대 초 걸프전을 통해 미국의 정보화 군대가 산업화된 이라크 군대를 패배시키면서 정보화 군대의 위력을 전 세계에 알렸다. 걸프전을 통해 세계의 각국의 군대는 자국의 군대를 재평가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서방의 유럽의 선진국과 일본과 같이 정보화사회에 진입한 나라에서는 미국과 같은 정보화 군대 제 3물결군대로 재편성이 되겠지만 아직도  산업화 군대를 가진 중국이나 북한, 산업화에도 진입하지 못한 저 개발국가나 각종 테러 단체 범죄단체는 정보화된 군대에 맞서 다른 양상으로 대응할 것이다.

 

1. 맞춤살상형 무기, 비살상형 무기, 우둔한 무기의 스마트화, 특정시설의 테러로 국가시설의 마비, 환경오염을 무기화

맞춤살상형 무기 이용 : 비정보화 군대는 제 3물결형의 무기를 취득하려고 노력을 할 것이다. 값싼 생화학무기를 응용하여 DNA의 조작을 통해 특정인종에 질병을 퍼트릴 수 있고 생화학무기의 소량화로 특정지역이나 특정인물에게 퍼뜨릴 수 있다.

비살상형 무기 :  비살상형 무기는 정보화 군대에서 인명의 보호와 작전의 동시수행을 목표로 제작이 되었지만 저 개발국가나 테러단체에서 악용할 수 있다. 독재에 반대하는 시위에 사용할 수 있고 EMP폭탄을 사용하여 정보화 군대의 전자전 무기를 무력화 시킬수 있다.

특정시설의 테러 : 복잡한 정보화 국가의 기반시설(교통, 경제시설, 전기 수도와 같은 기반시설)을 테러하여  정보화 국가의 경제활동을 마비시킨다.

우둔화 무기의 스마트화 : 스커드와 같은 정확하진 않은 무기들을 간단한 전자장비의 장착으로 무기를 스마트화 시킨다.

환경오염을 무기화 : 인위적으로 환경오염 물질을 가해 주변국가들에게 피해를 준다. 예:걸프전 당시의 걸프만에 석유유출

 

2. 군인의 재교육

정보화 군대의 각종 시뮬레이터기의 취득을 시도할 것이다.

 

3. 정보 네트워크의 파괴, 해킹, 역정보 제공

해커들을 양성하여 네트워크를 마비시키거나 해킹을 통해 군사정보를 빼오거나 역정보를 제공해 혼란을 일으킨다.

 

4. 미디어 전쟁

배트남전을 통해 미국은 미디어가 국민의 사기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깨달았다. 그래서 미국은 미디어의 통제와 조작을 통해 전쟁의 정당성을 설파하고 국민의 사기진작을 도모했으며 전쟁의 추악함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는 다중매체 멀티미디어의 사회이다. 정부가 일일이 다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다중매체사회이다. 테러단체나 상대방 국가에서는 다중매체의 틈새를 이용 상대방 국민에게 사기를 떨어뜨리거나 자국국민에게 조작된 정보를 제공하거나 자신의 목적을 설파하는 등 자신의 목적에 맞게 미디어를 조작할 것이다. - 알자지라 방송, 인터넷 생중계, 테러현장의 생중계방송.......

 

5. 우주의 전장화

중국등의 2차산업국가에서는 자국의 우주기술을 이용 정보화 국가의 인공위성을 파괴할것이다.

 

6. 무인화

무인화 로봇을 이용 테러를 감행 할 수 있다. 

 

7. 국경선의 붕괴

정보화 세계화로 인해 테러리스트와 테러자금 마약 핵물질등이 자유롭게 오간다. 또한 인터넷을 통한 테러무기 생산정보나 테러리스트간의 통신이 증가한다.

 

8. 국제기구의 무력화

각종 신흥민족분리단체와 이슬람 원리주의단체등장등등 전 세계의 테러조직이 냉전이후 생겨나 유엔이 통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9. 국가의 분리

농업문명의 집단과 산업문명의 집단과 정보화 문명의 집단이 섞여있는 중국이나 인도 브라질에서는 계층간의 갈등이 심각하게 진행된다. 

 

10. 문민화된 군수산업의 기술유출

선진국의 민간기술을 응용하여 군사무기를 제조할 수 있다. 또는 문민화 된 군산복합체를 매수하여 기술을 습득할 수도 있다. -게임기의 그래픽칩을 수입하여 미사일 유도장치에 사용할 수 있고 차량용 연료전지를 개조하여 잠수함용 연료전지로 전용할 수 있으며 각 종 간단한 화학물질을 수입하여 테러용 폭탄으로도 제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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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전쟁 양상(출처: 네이브 백과사전)

 

이상으로 제2권을 마치고 제3권 이후 나머지는 약술하나  갈리아 전기,폼페이우스,유대전쟁,클레오파트라와 줄리어스 시이저에 관련된 내용은 요약하고, 이우구스투스 황제 이후는 약술하기로 하겠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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