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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로마인 이야기 12

 

제2권: 요약(계속)

 

한니발 전쟁: 제2차 포에니 전쟁 후기

                 (기원전 210년-기원전206년)

 

국적 : 카르타고
활동분야 : 정치·군사
한니발석상
한니발석상

하밀카르 바르카스의 아들. 제1차 포에니전쟁에 패전한 후 아버지를 따라 카르타고(아프리카 북부)에서 에스파냐로 갔으며, 아버지와 매형 하스드루발의 뒤를 이어 BC 221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에스파냐 주둔군의 총지휘관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로마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으며, BC 219년 로마군 점령하의 에스파냐 도시 사군툼을 함락시키고, 이듬해 에브로강을 건너자, 로마로부터 선전포고를 받아 제2차 포에니전쟁(한니발전쟁)의 전단()이 열렸다. 그는 육로로 이탈리아 진공계획을 세우고 피레네산맥을 넘어 남프랑스를 석권하고, 다시 눈덮인 알프스를 넘어서 이탈리아로 침입, BC 217년 트라시메누스 호반()의 전투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로마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BC 216년 칸나에전투에서는 교묘한 용병술()을 발휘하여 로마군을 철저하게 격파하였으나 전선은 점차 교착상태에 빠졌다. 점차 전세를 회복하기 시작한 로마군에 의하여 에스파냐로부터의 원군()도 격멸당하였으며, 로마의 장군 대()스키피오가 에스파냐를 정복하고 카르타고로 육박하였다. 한니발은 고국에 소환되었으며, BC 202년 자마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대패함으로써 결국 제2차 포에니전쟁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났다.

[제2차 포에니전쟁]

 

 

스키피오의 등장

 

한니발 전쟁이 일어난지 9년째. '칸나'전투에서 참패 당한지 6년째인 기원전 210년. 이해의 집정관으로 선출된 두 사람 가운데 '마르겔루스'가 파견된 곳은 이탈리아 남부 '폴리아' 지방이고, '레비누스'가 파견된 지방은 시칠리아였다.

 

최전방에 파견된 '마르겔루스'는 한니발과 직접적인 접전은 회피하되 소규모 전투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적군의 병력감소를 꾀하고, '폴리아' 지방의 요충인 '타란토' 탈환을 준비하는 것이다. 4년동안 성공적인 군사.외교 전술로 '마케도니아' 봉쇄작전에 성공한 '리비우스'는 동부전선을  전 집정관 '갈바'에게 인계하고 시칠리아 전선으로 갔다. 시칠리아는 '시라쿠사'가 로마군에 함락되었으나 카르타고가 에스파냐에서 로마군을 괴멸시키면서 시칠리아로 눈을 돌릴 것으로 예상되어 시칠리아 방어는 물론, 한니발에 대한 카르타고의 지원로인 해상을 완전봉쇄하는 중차대한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타란토'를 사이에 두고 한니발과의 대결에 '마르겔루스' 2개군단과 '켄트마르스' 2개군단이 합동으로 투입되었다. 먼저 켄투마르스'가 대결하였으나 병력의 5분지4를 잃고 전직 집정관 '켄트마르스'도 전사했다. '마르겔루스'는 하니발을 추격하면서 여러차례 접전을 벌이면서 꼬리를 놓지 않았다. 하니발은 코끼리떼도 동원해보고 여러 전술을 병행하였으나 '마르겔루스'는 호락호락 걸려 들지 않았다.

 

로마는 이듬해 새 집정관으로 나이든 '파비우스'를 재선출하였으며 '폴비우스 플라쿠스'를 선출했다. '마르겔루스'는 전직 집정관으로 계속 한니발과 대적토록 하였다. 150개 동맹국 중에서 12개 동맹국이 병력지원이 불가하다는 통보해 왔으나 로마는 작년과 같은 수준의 군단을 편성했다.

 

한편 '스키피오'는 보병 1만명, 기병1천명을 그해 여름이 끝날때에야 겨우 편성하여 로마 외항 '오스티아'를 떠나 에스파냐로 향했다. 감찰관 '셀레누스'를 딸려 보낸 것은 물론이었다. 에스파냐로 가던 25세의 '스키피오'는 화려한 언변술과 유쾌한 성격으로 감찰관 '셀레누스'를 회유하여 '에브로'강 이북의 본영 '타라고나'에 남아서 방어하는 임무를 맡아 달라고 부탁하여 승락을 받았다. 자신에게는 '에브로'강 이남에서 카르타고군과의 전투는 자기에게 위임해 달라는 것이었다.

 

  

                     *유럽,지중해 지도(출처: 세계지도사이트)

 

'스키피오'가 에스파냐 '엠포리아이'에 배를 내려 육로로 '타라고나'의 로마군 진영에 도착하였을때 그를 맞이한 것은 8년동안의 고생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에 맥이 풀린 전사한 그의 아버지와 숙부가 남긴 병사들이었다.

 

25세의 젊은 장군 '스키피오'는 전 장병들에게 지금까지의 패배감을 일소시키고 오늘부터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한다면서 병사들에게 심리적 안정과 희망을 갖도록 연설하였다. '스키피오'는 사방의 적의 동태와 지형정보를 입수하는 한편 병사들을 조직적으로 훈련시키면서 그해 겨울을 보냈다. '스키피오'는 자신이 대려온 1만1천명과  작년에 이미 와있던 1만명,그리고 패잔 7천명 도합 2만 8천명이었다. 적은 3개군으로 나누어 각각 2만 5천명 정도의 병력으로 도합 7만명이 훨씬 넘었다. '스키피오'는 적이 협격하면 숫적으로 불리하므로 각개격파 하기로 했다. 적의 제1군은 내륙에, 제2군은 남부 '지브롤터 해협' 근처, 제3군은 오늘날 '포르투칼' 영토인 '타구스' 강 어귀에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 적의 각군 사이의 거리는 열흘 거리였다.

 

 

기원전 209년. '스키피오'는 로마군을 데리고 '에브르' 강을 건넜다. 그와 동시에 친구이며 부사령관인 '라인니우스'도 군선 30척에 병사들을 태우고 남하하고 있었다. '타라고나'에서 출발한 '스키피오'는 보통 20일 걸리는 행군거리를 강행군으로 7일만에 '카르타헤나' 성벽앞에 도착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카르타고군도 깜짝 놀랐다. '카르타헤나'는 한니발 아버지 '하밀카르'가 기원전 228년부터 세운 도시로 에스파냐 식민지의 수도이며 한니발이 자란 성채가 해안가 언덕위에 호화롭게 지어져 있는 고향이기도 한 곳이었다. 에스파냐의 모든 생산물이 이곳 '카르타헤나'를 통하여 본국 카르타고로 보내지고 있었다. 동쪽과 남쪽은 바다에 접해 있으며 서쪽은 석호에 면해있고 북쪽만 육지와 연결되어 있는 천연적인 요새었다. '스키피오'는 성벽앞에 도착하자 마자 로마군의 관례대로 진영을 구축한 것이 아니라, 북쪽 성벽 방향으로 길다란 진지를 구축하게 하였다. 이때 동료 '라일리우스'도 '카르타헤나' 항구 앞 바다에 도착하여 동쪽과 남쪽 해상을 봉쇄하고 있었다.

 

이튼날 북쪽 진지에서 로마군이 성채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공방전이 계속되는 동안 '카타르헤나'의 4천명의 카르타고 수비대는 오로지 북쪽 방어에 집중하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주변 지형을 정찰한 결과 서쪽에 위치한 석호는 적들도 방심하고 있는 곳으로 수비대도 없는 지점이었다.석호는 평소에는 건널 수 없으나 적당한 바람이 불면 걸어서도 건널수 있었다. '스키피오'는 정예 장병 2천명을 뽑아 직접 서쪽 석호를 건너 성벽을 타고 기습적으로 성내로 밀려 들어갔다. 기습작전은 완전히 성공했다.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로마군이 공격하자 수비대는 모두 항복하고 '스키피오'는 하루만에 '카타르헤나'를 점령하여 버렸다. '스키피오'는 부녀자와 노약자는 집으로 돌려 보내고 젊은이는 군선 노잡이로 징용하고 기술자 2천명은 로마군 공병으로 편입했다. 볼모로 와 있던 에스파냐 원주민 부족장 자녀 300명에게는 일일이 머리를 쓰다듬어며 부모들에게 편지를 보내게 했다. 성내에 약혼자가 있는 젊은 여자를 나이든 사람들이 '스키피오'에게 헌납하겠다며 데려왔으나 '스키피오'는 거절하고 약혼자에게 돌려 보냈다. 이러한 '스키피오'의 행동은 주민들로 부터 칭송으로 변해갔다. 도시내 모든 물자와 많은 양의 무기와 금고속 재화는 로마 소유로 하여 전쟁비용으로 충당하기로 하였고 카르타고 유력자들은 모두 포로로 로마에 압송시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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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군과 육체 훈련 ::

 보병이건 기병이건 입대한 병사라면 모두 4개월동안 기초 훈련을 받는데,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바로 행군이다. 베게티우스는 로마군에서 병사가 빨리 행군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말한다. 낙오자가 생기거나, 제각각 다른 속도로 병사들이 달리는 군대는 공격에도 약하다. 그러므로 병사들은 길을 따라 행군하고, 한 부대가 행군하면서도 한 덩어리가 되어 대오를 유지하도록 훈련받는다. 베게티우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여름철에 로마군은 20로마마일(18.4마일= 29.6km)를 행군했으며, 이 거리를 5시간만에 가야 했다고 한다.

 

 로마 병사는 행군말고도 다른 육체 훈련을 받는다. 베게티우스는 무거운 짐을 지고 달리거나, 멀리 또는 높게 뛰는 것을 언급한다. 여름철에는 수영도 군사 훈련 가운데 하나다. 군대 숙영지 가까운 곳에 바다나 강, 호수가 있으면, 모든 신병들은 수영을 하도록 훈련한다.

 

:: 무기 훈련  ::

 로마군 병사들은 날마다 전투 기술을 익히는데 힘썼다. 아래 사진에서는, 병사가 나무 검과 고리버들 세공의 나무 방패를 들고 훈련하고 있다. 진짜 무기 대신 나무를 쓴 까닭은, 훈련하다가 서로 다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사진 설명) 훈련병 재현

 

 행군과 신체 훈련 다음으로, 로마군 병사는 무기 쓰는 법을 배운다. 처음에는 나무 검과 고리버들 세공 나무 방패를 쓴다. 그러나 이 가짜 무기는 진짜보다 두 배나 더 무거웠다. 로마인들은 두 배 무거운 무기로 병사를 훈련하면, 실전에서는 진짜 무기로는 그 두 배의 효과를 내리라 생각한 게 분명하다.

 

 우선 병사들은 이 가짜 무기를 들고, 단단한 1.8m(6피트)높이의 나무 막대에 대고 연습한다. 이 막대 앞에서 병사들은 검을 들고 치고, 반격하거나, 여러가지 동작을 배웠다. 여기서 충분히 연습한 병사들만, 둘씩 짝을 지어 싸움 연습을 하도록 허락받는다. 이런 1:1 싸움 훈련을 아르마투라armatura라고 불렀다. 이 말은 원래 검투사 학교에서 쓰던 말로, 검투사의 전투 기술을 뜻한다.  아르마투라 훈련에서 쓰는 무기는 역시 나무로 된 것이다. 다만 앞의 훈련과는 달리, 진짜 무기와 무게가 같거나 비슷했다.

 

 로마군에선 무기 훈련을 중요하게 여겼다. 일반적으로 무기 교관은 일반 병사의 두 배가 되는 식량을 배급받았다고 한다. 그에 견주어, 무기 훈련이 적절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 병사들은, 상급 장교 앞에서 적정 수준의 무기 훈련 정도를 입증할 때까지 '열등한 식량 배급'을 받았다. (열등한 식량 배급: 베게티우스는 이것이 밀 식량을 보리로 대신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검을 쓰는 훈련을 마치면, 신병들은 투창pilum을 쓰는 법을 배운다. 나무 막대는 이제 투창의 목표물이 된다. 훈련에 쓰는 투창 역시 다른 훈련 무기와 마찬가지로, 진짜 무기의 두 배 무게였다.

 

 이 밖에도 야전 축성술을 배운다. 베게티우스에 따르면, 어떤 곳에서는 겨울에도 훈련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지붕 있는 승마장과 연병장을 지었다고 썼다.

 

 

:: 기병 훈련 ::

 기병 역시 보병과 똑같은 기초 훈련을 받는다. 기병 역시 보병 전투 훈련을 받는데, 실전에는 기병이 말에 내려 싸우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이 충분하지 못하여, 기초 훈련을 4개월 받은 뒤에도, 보병 훈련을 더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보병과 마찬가지로 수영 역시 배워야 하는데, 말과 함께 헤엄치는 법도 알아야 한다.

 

 기초 훈련이 끝나면 이제 말타는 법을 배운다. 말을 타고 내리는 법부터 시작해서, 말 위에서 무기를 쓰는 법까지 배운다. 병사를 훈련하는 교관을 exercitator 또는 magister campi라고 부른다.

 

 로마 기병의 승마술에서 가장 강조하는 점은, 말을 타고 이동할 때 다리를 고정하는 것이다. 이 시대에는 등자가 없었기 때문에, 말을 타고 달릴 때 다리가 꽤 불안정했다. 말을 다루는 법을 배운 뒤에는, 말을 타고 장애물을 뛰어 넘는 법도 배운다. 등자가 없었던 만큼, 달릴 때 안장 위에서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말타기를 익힌 뒤에야, 말을 타고 무기 쓰는 법도 배운다. 보병과 마찬가지로, 버드나무가지를 엮어 만든 방패와 나무 칼을 들고 훈련한다. 역시 훈련용 무기는 실제 무기의 무게와 비슷하거나 더 무겁다. 기병도 보병처럼 나무 표적으로 훈련한 것 같다.

 기마 궁수를 훈련하는 일은 더 까다로운데, 일단 말 위에서 활을 쏠 정도로 기마에 능숙한 사람들 뽑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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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군 훈련(출처:군사무기/전쟁역사 카페)

 

'스키피오'는 점령지에서 육군과 해군을 훈련시키며 카르타고군의 동향파악과 정보를 수집하면서 그해 겨울을 보냈다. 병사들에게는 훈련과 휴식이 반복되었으며 전투력 강화에 힘썼다. 병사들은 '스키피오'의 눈빛만 보아도 무었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알게 하였다. 무기도 원주민의 칼을 모방하여 긴 칼에서 접근전에 유리한 양날검으로 개조했다. 이러한 검을 '에스파냐 검'으로 불렸으며 이후 로마군의 기본무기로 채택되었다. '카타르헤나'는 그해 겨울내 도시 전체가 대장간을 방불케 했다.

 

한편 '카타르헤나'의 점령소식은 로마 전역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지만 이탈리아 반도 남쪽의 한니발은 금방 알지 못한체 로마의 3개군을 상대하고 있었다.

 

카르타고 전경
*오늘날 튀니지아 옛 카르타고 전경(출처: 튀니지 관광청)
카르타고 유적지
카르타고 전경
카르타고 유적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대 도시 카르타고(Carthago)
'한니발과 이 위대한 도시, 카르타고'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튀니스의 동쪽 근교에 있는 카르타고 유적지는 근교 전차 TGM으로 20분 정도가 걸린다. 지중해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페니키아인의 나라 카르타고는 이곳 지명에서 유래되었다. 철도의 좌우 연변에는 카르타고와 로마시대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카르타고 시대의 것은 로마인에 의해 파괴되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로마 시대의 것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프랑스어로는 카르타주(Carthage)라고 한다.

카르타고는 로마와 마주한 아프리카 튀니지아만,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에서 동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기원전 9세기말 페니키아인들이 무역항구로 비옥한 땅위에 수립한 도시이다.

천년동안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의 지배자로 200대가 넘는 전투함과 수많은 상선이 살람보(Salammbo)항 부근에 자리를 잡았다.
로마와 함께 고대 지중해를 지배했던 카르타고는 기원전 264년부터 146년까지 100년이 넘는 세차례의 포에니 전쟁끝에 700여년의 지중해 지배를 로마에 넘겼다. 1차 포에니 전쟁의 하밀카르 바르카, 2차 전쟁에서의 한니발 등 명장수의 전쟁은 3차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의 장수 소스키피오를 끝으로 카르타고는 마침내 로마에 무너지고 만다. 전쟁에 패한 카르타고는 해외영토를 모두 잃고 로마의 노예로 전락하였다.

옛 페니키아 항구(Port punique)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로마시대의 유적지 등의 역사적 볼거리가 풍부한 곳이다.


◈ 카르타고 가는 방법
튀니스에서 카르타고까지의 도로는 잘 포장되어 육상 교통을 이용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또한 튀니스-카르타고 국제공항이 위치해 있어, 세계 주요 도시로부터 항공이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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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카르타고 전경(출처: 하나투어 사이트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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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1군은 그해의 집정관으로 선출된 '카푸아' 탈환의 영웅 '플라쿠스'로 '칼라브리아' 지방 즉 장화 발등에서 발부리에 이르는 지역을 견제하고, 제2군은 그해 집정관으로 재선출된 '파비우스'가 '타란토 '공격을, 제3군은 전직 집정관 '마르겔루스'가 맡아 한니발을 따라 다니며 '파비우스'가 타란토를 공격할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다.

한니발이 '칼라브리아' 지방에서 북상하자 '마르겔루스' 제3군이 막아셨다. 한니발은 처음 전투에서 로마군 2천 600명의 전사자를 내고 승리했다. 다음날은 로마군이 분전하여 한니발군 8천명이 전사하고 로마군이 3천명이 전사했다. 이러한 전투를 하는 동안 '파비우스'가 '타란토'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타란토' 함락으로 한니발은 '폴리아' 지방에서 발판을 잃게 되자 '칼라브리아' 지방으로 회군하여 버렸다.한니발은 '카타르헤나' 점령소식을 듣게 된다. 자기보다 12살이나 아래인 로마의 젊은 장수가 그것도 하루만에 점령하였다는 것이다. 아마 한니발의 심정은 착찹하였을 것이다. 

 

기원전 209년. 로마는 한니발을 장화 발등에서 발부리로 몰아 넣는 것이 그해에 새로운 집정관으로 '마르겔루스'와 '크리스피누스', 그리고 법무관인 '클라미네스'였다. 파견된 세집정관이 6개군단의 로마군으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마르겔루스'는 이제는 하니발과 결전을 해야할 시기로 생각했다.'마르겔루스'는 '크리스피누스'와 합동으로 한니발과 결전을 생각하고 '크리스피누스'를 북상토록하여 로마군 4개군단과 한니발군이 대치했다. 싸움에 응하지 않는 한니발군과 며칠째 노려보며 대치하던중 로마군 지휘부가 중간지점의 언덕에 지형정찰을 나갔다가 매복하고 있던 한니발 기병대의 공격을 받고 '마르겔루스'와 동맹국 지휘관 두명이 전사하고, '크리스피누스'는 중상을 입고 겨우 도망하여 로마군을 이끌고 '타란토'로 철수하였다. '크리스피누스'도 '타란토'에서 상처부위가 악화되어 타계하게 된다. 한니발은 로마 집정관 '마르겔루스'의 시신을 확인하자 그를 그토록 따라다니면서 애를 먹이던 적장에 대하여 후히 장사를 치루도록 지시하고 '마르겔루스'의 반지로 동맹도시에 전령을 보내 성문을 열도록 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로마군이 이미 전 동맹도시에 '마르겔루스'의 죽음을 알렸기 때문이었다. 

 

* 바이쿨라 전투 : 제5회전

 

기원전 208년. 스키피오는 육지와 바다로 나누어 본거지인 '타라고나'를 출발하여 '카타르헤나'에 도착하자 노잡이로 징용한 젊은이들과 2천명의 기능공을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카타르헤나' 방어를 돕도록 조치하고, 부사령관 '라일리루스'로 하여금 군선에 병력을 태우고 이베리아 반도 남쪽을 돌아가 '카디스' 근처의 '마고네'군을 묶어두게 하였다. 자신은 한니발 동생인 '하스두루발'이 위치한 '바이쿨라'로 강행군을 했다. '바이쿨라' 평원의 북쪽을 돌아 '하스두루발' 진영과 강을 두고 마주했다. '하스두루발'은 로마군이 그토록 빨리 도착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동생 '마고네'만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로마군이 도착하자 마자 먼저 경보병과 원주민 지원병력으로 강을 건너 '하스두루발' 전위부대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자 '하스두루발'은 본대를 이끌고 나와 전투대형을 편성하고 있었다.이때를 놓치지 않고 '스키피오'는 중무장 보병대 본대와 기병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노도처럼 '하스두루발' 좌.우측면을 돌아가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투대형도 편성하기 전에 세방향에서 로마군의 공격을 받은 '하스두루발'군은 당황하여 동요하기 시작했다. 전열이 흩어진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의 공격으로 전사 8천,포로1만 2천명을 남기고 '하스두루발'은 소수의 기병대만 대리고 포위망을 탈출하여 도망쳤다. '스키피오'의 완벽한 승리였다.

 

이후 카르타고 세장수는 서로 만나  전황을 토의한 결과 '하스두루발'로 하여금 3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육로로 이탈리아로 가서 한니발을 지원하고 남은 두 장수가 에스파냐에서 스키피오를 상대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보를 알게된 '스키피오'는 로마에 전령을 보냄과 동시에 자신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하스두루발'을 따라 추격을 할 것인지 아니면 에스파냐에서 계속 전투를 할 것인지 였다. 그러나 결론은 이탈리아로 간 '하스두루발'은 본국에 맡기기로 하고 자신은 이곳에서 계속 전투를 하기로 하였다. 스키피오의 이러한 결정에 로마 원로원은 찬반이 분분하였다. 원로원은 스키피오가 하스두루발을 저지하지 못하고 이탈리아로 가게 방치하였다는 점에 대하여 찬반이었다 그러나 적은 이미 알프스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 북쪽 방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원전 207년봄.이해의 집정관에는 '네로'는 법무관 '플비우스'와 함께 남부지역의 한니발 전선을 담당하고 집정관 '리비우스'는 알프스를 넘어 침공하는 '하스두루발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반도 중북부 '리미니'로 파견되었다. 로마 원로원은 남하 방향을 고려 '토스카니' 지방에도 2개군단을 배치했다.

 

 

* 메타로우 전투 : 제6회전

 

'하스두루발'은  갈리아 부족의 협조적인 배려하에 갈리아 지역을 쉽게 통과하여 알프스의 산악민족도 한니발군의 의도를 아는지라 별다른 방해없이 코끼리와 3만의 카르타고군은 비교적 알프스를 쉽게 넘었다.그가 어떻게 이렇게 쉽게 알프스를 넘을 수 있었는지는 사료가 없지만 이것은 한니발에게는 시간계산에서 착오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한니발은 자신이 넘어올 때 걸린 기간을 고려하여 동생이 도착하면 로마군과 대결하기로 하고 '칼라브리아' 지방에서 나오는 시기를 늦추었다.

 

'하스두루발'은 갈리아 용병으로 증강된 5만의 병력으로 평원을 선택하여 아드리아해 쪽으로 해서 남으로 이동하기로 계획하였다. 포강을 지나 '리미니'로 가는 도중 그는 처음으로 형인 한니발에게 전령을 보냈다. 여섯명의 전령이 가지고 떠난 그 편지에는 그가 택한 길목과 합류지점이 적혀 있었다. 이들은 남쪽지방에 도착하여 한니발군이 있는 곳을 �고 있다가 로마군 백인대장에게 붙잡혔다. 그 편지는 폴리아 지방에서 견고한 진영을 짖고 동생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던 한니발 진영 근처에서 진영을 짖고 있던 집정관 '네로'에게 바로 전달되었고 번역을 통해 편지의 내용을 알게된 '네로'는 집정관에게 허용되지 않은 불법적인 행동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것은 지난번 에스파냐에 파견되었던 네로 개인적인 문제였다. 그당시 '하스두루발'에게 당한 모욕때문이었는데 '네로'의 추격을 받던 '하스두루발'이 '네로'에게 강화제의를 하여 방심하고 있던 사이 '하스두루발'이 병력을 이끌고 사라져 버린 사건이었다. 그 사건으로 '네로'는 로마로 소환되고 사령관직에서 파직되었으며 조롱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리미니'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은 3만에 불과하나, '하스두루발'의 군대는 5만이었다. '네로'는 '리미니'의 로마군으로는 대적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직접 병력을 대리고 북상하여 지원하기로 하였다.이는 지역이탈로 허용되지 않은 행동이었다.그러나 '네로'는 설욕의 기회는 이때라고 생각하고 법무관 '폴비우스'에게 남은 군단을 맡기고 정예 경보병 6천과 기병 1천을 뽑아 식량은 휴대 않은체 경무장으로 아군도 모르게 야간에 진영을 나와 '리미니'로 강행군 출발했다. 이동중 식사는 동맹도시에 전령을 보내 준비토록 했으며 행군거리 800키로의 거리를 초인적인 강행군으로  '리미니'로 향했다.

 

         

집정관 '리비우스'가 '메타로우' 강 남쪽 연안의 평야지대에 진영을 편성하고 있는 곳에 '네로'는 1주일만에 도착했는데 아마 하루 100키로 거리를 도보로 이동은 어렵다고 판단되며 주로 말을 이용한 이동이었다고 생각된다. '리비우스'는 '하스두루발'이 '아드리아해' 쪽이나 '플라미니아' 가도를 선택하더래도 감시가 가능한 곳에 포진하고 있었다.

 

'하스두루발'은 '아드리아해' 쪽으로 내려갈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플라미니아' 가도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리비우스'군이 뒤를 바짝 추격하였던바, '하스두루발'은 로마군에게 추격당하면서 이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결전을 치루기로 했다. 행군대형을 돌려 '플라미니아' 가도 좌측 언덕 아래와 강 사이에 좁고 긴 평야지대에 진영을 편성했다. 여기에서 '하스두루발'은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되는데 좌측은 가도 절벽이, 우측에는 강이 흐르고 있는 좁은 공간에 5만의 병력이 밀집되어 기병이나 코끼리 운용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병력의 전술적 활동이 제한 받는 좁은 곳이었다.

 

강 상류를 바라보고 로마군 우익은 '네로'가, 중앙은 '리미니'의 주둔군 사령관 '호르티누스', 좌익은 집정관 '리비우스'가 맡았다. 병력은 모두 4만. 카르타고군은 코끼리를 전면에 내세운 진형으로 병력은 5만5천.

싸움의 시작은 4만명 로마군의 함성소리였다. 함성소리가 벼랑에 부딪쳐 두배나 큰 소리로  되돌아온 함성소리에 놀란 코끼리들이 적진으로 뛰어들지 않고 카르타고군 속으로 난입하기 시작했다. 코끼리의 난동을 본 '하스두루발'이 코끼리 부대의 전선이탈을 지시하자 코끼리를 부리는 병사들이 코끼리 귀 뒤를 침으로 찔러 죽였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 로마군의 공격으로 싸움은 시작되었다. 로마군의 우익은 가도쪽 비탈진 언덕 때문에 적의 좌익을 공격하지 못하고 중앙과 좌익만이 적과 접전이 벌어졌다. '네로'는 우익병력을 본대 뒤를 돌아 좌익 옆으로 돌아가서 카르타고군 이익 배후를 공격하자 왼쪽 언덕과 뒤의 오르막길 가도로 막힌 카르타고군은 먼저 갈리아 용병이 무너지고 시간이 지나자 3만의 카르타고군도 '하스두루발'과 같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네로'는 뒷처리를 부탁하고 '하스두루발'의 목을 가지고 강행군으로 일주일 만에 다시 남쪽 진영으로 돌아왔는데 출발한 날로 부터 14일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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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군 숙영지 ::

  로마군은 가는 곳마다 숙영지부터 세운다. 모든 병사들은 울타리에 쓸 말뚝 2개와 삽 따위를 들고 다닌다.

 

 군대 측량사들은 군대 선두에 서서, 숙영지를 짓기 가장 적당한 곳을 찾아 다녔다. 측량사가 고른 곳으로 군대가 도착하면, 일단 군기를 땅에 꽂는다. 그다음 숙영지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각 병사는 자기가 해야 할 역할을 할당받는다. 참호를 파고, 말뚝으로 울타리를 짓는다. 이렇듯 로마 군단의 조직적인 성격은, 숙영지를 짓는데도 잘 드러난다.  천막에는 병사 8명이 잘 수 있다. 이 가죽 천막은 노새가 끌고 다녔다.

 

 아래 그림은 일반적인 로마군 숙영지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로마군은 보통 아래 배치에 따라 숙영지를 세운다. 그러니 로마 병사들은 언제나 자기가 알아서 자기 역할을 찾아 해낼 수 있다.

 

참호와 울타리

마굿간

 

마굿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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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cipalis

 

 

 

 

 

 

 

병사 천막

병사 천막

병사 천막

 

병사 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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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 천막

 

병사 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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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기

 

지휘관

 막사

사령부

제 단

 

 

병사 천막

병사 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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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 천막

병사 천막

병사 천막

연설대

병사 천막

병사 천막

병사 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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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etoria

 

포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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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umana

 

 

 

 

 

장교 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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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 천막

장교 천막

병사 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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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cipalis

 

장교 천막

장교 천막

장교 천막

장교 천막

병사 천막

병사 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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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 천막

병사 천막

병사 천막

병사 천막

 

 

 

 

 

마굿간

 

마굿간

참호와 울타리

(↑그림 설명) 로마군 숙영지 배치도

 

 이런 숙영지가 항구적인 요새나 퇴역병의 새 도시로 자리잡기도 한다. 런던, 쾰른이나 빈같은 많은 유럽 도시들이 로마군 주둔지에서 시작했다.

 

 (↑그림 설명) 어느 로마군 주둔지를 복원한 그림

 

 또 로마군 주둔지에선 대개 병원으로 보이는 건물도 같이 발굴된다고 한다. 스코틀랜드의 한 로마군 주둔지 유적에는 병실과 목욕탕, 부엌이 있는 병원 건물이 나왔다. 보조군 주둔지에도 병원이 딸려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 로마군 숙영지 편성 그림(출처:구사무기,전쟁의 역사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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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파 전투 : 제7회전

 

이듬해 기원전 206년.에스파냐 카르타고군은 총력을 기울여 반격에 나서기로 하였다 '마고네'는 총 7만의 병력중 보병은 총사령관 '시스코네'가 맡고 '마고네' 자신은 4천의 기병을 지휘하고 나머지 '누미디아' 기병대는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에게 지휘를 맡기고 있었다. 총 7만 4천명의 병사와 코끼리로 이루어진 대군이었다.이러한 병력으로 오늘날 '세비야' 근처 '일리아' 평원에 집결하여 로마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4만 5천명의 보병과 기병 3천명으로 내륙으로 들어가 북쪽 '일리야' 평원을 지나 강의 상류로 나간다음 그 강줄기를 따라 남하하였다. 평야의 북쪽 언덕에는 카르타고군이,남쪽 언덕에는 로마군이 진영을 편성하고 마주하고 있었다. 이튼날 카르타고군이 진영을 나와 전투대형을 편성하자 '스키피오'도 진영을 나가 전투대형을 편성했다. 서로 마주보며 해가 저물자 각자는 진영으로 퇴각하였다. 다음날도 마찮가지 하루종일 서로 노려보다가 해가 저물면 진영으로 퇴각하는 날이 반복되었다. 날이 갈수록 카르타고군이 진영을 나오는 시각이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적의 약점을 발견하고 병사들에게 아침 일찍 식사후 전투준비를 갖추고 해가 뜨기전에 음밀히 카르타고 진영앞으로 이동하여 중앙은 에스파냐 원주민 지원병, 좌우측에는 중무장 보병과 기병을 배치한 상태로 전투대형을 편성했다. 깜짝놀란 카르타고 진영은 아침식사는 커녕 코끼리 부대도 일부만 나온 상태로 허급지급 전투대형을 편성하고 있었다. 양군이 800미터 까지 접근하자 동시에 양군의 돌격이 실시되었다. 카르타고군은 중무장 보병이 로마군의 약체인 중앙의 에스파냐 원주민을 공격하고 로마의 중무장 보병은 사선으로 적의 측면에서 공격하는 형태가 되었다. 카르타고군의 본대가 측면과 배후가 공격받자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기병은 보병대 뒤쪽에서 제대로 전력을 발휘 못하는 형세가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카르타고군이 피로한 빛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스키피오는 2단계 공격병력을 투입하고 이어서 3단계 공격병력을 투입하여 적의 측후방을 계속적으로 공격하자 용병들의 특성상 형세가 기울면 도망가는 것이라 카르타고군이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전투는 로마군의 승리로 결판났다. 적장들은 대서양 연안까지 도망가고 6천여명이 산이나 강으로 도망갔으며 '마시니사'를 포함한 기병대는 포위망을 뚫고 '카디스'까지 도망 갔으나 나머지 카르타고군 6만여명이 로마군에게 섬멸되었다. 세장수를 놓친것을 제외하면 칸나전투에 버금가는 로마군의 대승이었다.

 

'스키피오'의 승전보를 형 '루키우스'를 로마로 보내 전하였고  접한 로마시는 흥분의 도가니였다.한편 '스키피오'는 '카디스'로 도망친 누미디아 기병대장인 '마시니사'에게 심부름꾼을 보내 회담을 제의했다. 그는 기병력이 우수한 누미디아 기병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미디아 왕과 협상을 위해서 극비리에 북아프리카까지 잠행하는 모험도 감행했다. 일단 카드는 던진 상태로 선택은 누미디아 왕에게 달려 있었다.

 

'스키피오'는 기원전 206년 겨울. 2개군단을 남겨놓고 오랫동안 에스파냐에 와서 고생한 고참병들을 데리고 4년만에 로마로 개선하였으나 개선식은 원로원의 반대로 치루지 못하였다. 

 

 

 

  

* 포에니 전쟁 말기: 기원전205년-201년

 

'스키피오'는 원로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열렬한 요구와 민회에서 압도적 다수로 30세 나이에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스키피오'는 그의 임지를 북아프리카로 요구하였으나 원로원과 수장 '파비우스'가 반대하고 나섰다. 원로원은 우선 급선무가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 웅크리고 있는 한니발이었다. 북아프리카에는 동맹국도 없으며 비참한 최후를 장식한 전집정관 '레굴루스'의 전철을 밟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와 북아프리카 전선을 구축한다고 한니발이 이탈리아 전선을 떠난다는 보장도 없다는 것이었다. '지구전'의 대가이며 '이탈리아 방패'로 까지 추앙받는 원로원의 제1인자인 70세의 '파비우스'의 반대 연설로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임지는 부결될 듯 보였으나 이어서 스키피오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 지금 한니발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으며 무언가 새로운 둘파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북아프리카 전선 형성으로 적국 카르타고를 공격한다면 한니발은 반드시 이탈리아 반도를 떠날 것이다. 지금 당면 문제는 지금까지의 전략을 수정하는 것이다. 한니발과 접전을 못하면서 지구전으로 버티는 것은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자신은 에스파냐에서 위업을 이루고 5살이나 더 먹은 현재 북아프리카로 가서 한니발을 반드시 끌어내어 승리할 것이다. 그것은 카르타고 자체를 의미한다"는 요지의 연설이었다.

 

단호한 '스키피오'의 연설은 젊은 원로원들의 지지를 받았다. 원로원은 분위기가 반반이 되었고, 격론 끝에 원로원의 결론은 '스키피오'의 임지를 시칠리아로 결정되었다. 다음해에는 국가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 아프리카로 갈 권리도 인정받았다. '스키피오'에게는 수도에서 군단을 편성하는 권한이 아닌 시칠리아에 가서 지원병을 모집하여 군단을 자력으로 편성하도록 권한이 주어졌다. 즉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를 원정해도 국가공인 군사행동이 아닌 개인적인 행동으로 모든 승패의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스키피오'는 시칠리아에서 주변 동맹국들과 귀환병,시민들의 도움으로병력과 장비를 편성하여 나갔다.시칠리아의 2개군단은 '칸나전투' 패전후 10년 동안 시칠리아에서 지내고 있었다.속주에 대한 정책적인 배려로 속주민들로 부터 물자와 병력을 제공받아 2만 5천의 병력과 1만 2천명의 선원이 편성되었다. 그는 시칠리아를 자신의 군대 보급기지로 만들고 군사들의 훈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에스파냐에서 하던 방식으로 혼합편성된 병사들이 조직적인 훈련으로 '스키피오'의 눈빛만 보고도  의사를 전달 받을 수 있도록 강도높은 훈련이 계속되었다. 카르타고에 대한 정보도 수집하고 그 지역을 잘아는 사람들과 밤을 새며 이야기 하였다. 동료이며 친구인 '아일라이스'에게 직접 정찰선단을 대리고 아프리카 근해로 접근하여 정보수집 임무도 주었고 누미디아 '시팍스' 왕과도 동맹협력 관계를 조율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기원전 204년. '스키피오'는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군단의 지휘권을 인정받아 병력을 이끌고 시칠리아 남쪽 끝에 있는 마르살라를 떠났다. 군선 40척의 호위를 받으며 400척의 수송선단에 2만 6천명의 병력과 군량,물을 싣고 카르타고 수도 서쪽을 향했으나 바람에 의해 동쪽으로 밀려가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여 카르타고 제2의 도시 '우티카' 근방에 상륙했다. 카르타고는 누미디아의 '시팍스' 왕에게 '마시니사'의 약혼자인 절세미인 여인을 왕비로 주면서 '시팍스'왕을 회유하여 자기편으로 끌여들이자 '스키피오'와의 동맹은 좌절되었다. '스키피오'는 '마시니사'를 회유하여 회담한 결과 '스키피오'와 동맹을 맺고 형제의를 맺었다. 나이도 비슷한 '마시니사'는 약혼자를 '시팍스' 왕에게 빼았긴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는 '스키피오'와 대결하기 위하여 3만 3천명의 카르타고 용병과 6만명의 누미디아군이 카르타고 방위군으로 편성되었다. 작년에는 '마고네'가 1만 4천명의 병력을 이탈리아반도 동북쪽 '제노바'에 상륙하여 한니발을 지원하려 하였으나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제노바'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한니발도 남부지역에서 꿈쩍 않고 있었다. 이러한 교착상태를 깬 것이 아프리카 전선이었다.

 

이때까지 로마군은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권모술수나 간교한 술책을 쓰는 것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스키피오'대에 와서는 이러한 사고를 버리고 한니발 처럼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책략을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싸움에서 진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키피오'는 '크리넬리우스 진지'에서 월동에 들어갔다. 10키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카르타고군의 숙영지가 편성되어 있고 그기서 약2키로미터쯤 떨어진 지역에 '누미디아'군의 겨울 숙영지가 편성되었다. '스키피오'는 누미디아 왕 '시팍스'에게 밀사를 보냈다. 카르타고와의 강화 중계 요청이었다. '시팍스' 왕은 타고난 허영심에 중계를 맡아 카르타고 진영의 '시스코네'에게 전달하자 에스파냐에서 '스키피오'에게 죽을 고비를 넘긴 '시스코네'도 별로 싸울 마음이 없었다. 강화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사절들이 오가는 편에 마부들이나 하인들은 백인대장이나 경험이 많은 노련한 장교들로 변장시켜 보내면서 카르타고 진영을 상세히 살피도록 하였다. '스키피오'는 강화교섭의 시간을 계속 끌었다. '스키피오'는 야간 기습을 감행하기로 하고  3분지 1 병력만 진영수비로 남겨두고 병력을 둘로 나누어  자신은 제1군으로 카르타고 진영을,  '마시니사'와 '라일리우스'에게는 제2군을 주어 '누미디아' 진영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야간기습은 제2군이 먼저 '누미디아 '진영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누미디아' 진영은 갈대로 만들어져 있어 쉽게 불에 타는 재료였다. 제2군이 '누미디아' 진영을 공격하여 화염이 오르면 동시에 '스키피오'의 1군이 카르타고 진영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저녁 9시쯤 이동한 로마군은 은밀히 적진 가까이 접근하여 신호를 기다렸다. 자정쯤 되자 '누미디아' 진영에서 화염이 올랐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군이 방심한 사이 기습을 감행하였다. 로마군의 야간기습으로 카르타고군은 3만명을 잃고 패주하였고 누미디아의 '시팍스' 왕도 도망하였다. '마시니사'와 '라일리우스'는 '시팍스'를 추격하여 결국 포로로 잡았다. 누미디아 왕궁에 도착하여 자신의 약혼녀 였던 '시팍스' 왕의 왕비가 된 '스포비스바'를 만났다. 기구한 운명의 두사람은 즉석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스키피오'는 '마시니사'의 새로운 누미디아 왕의 취임을 축하하였으나 적장인 '시팍스' 왕과 왕비를 규정에 의거 포로로 로마로 보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고민끝에 하인을 불러 편지와 독이든 봉투를 왕비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왕비는 '마시니사'의 편지를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새로운 남편이자 옛 약혼자인 '마시니사'의 선물인 독배를 마시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시팍스'는 로마에 잡혀와서 소도시에서 구금생활을 하다가 수년후 눈을 감았다.

 

카르타고 수도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여러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이탈리아에 있는 한니발과 '마고네'의 병력을 철수하도록 정부의 공식문서를 가진 전령이 현지로 급파되었다. '스키피오'에게도 강화사절이 도착하여 강화를 제의하자 '스키피오'는

1) 로마는 카르타고의 자주와 독립을 인정한다.

2) 이탈리아와 알프스 이남의 카르타고군을 완전 철수한다.

3) 에스파냐에 대한 기득권을 포기한다.

4) 마시니사 왕국을 승인한다.

5) 20척의 군선만 남기고 나머지 모든 군선은 로마에 양도한다.

6) 강화기간 동안 로마군 군량을 조달한다.

7) 배상금 5천 탈렌트를 지불한다는 조건이 였다. 카르타고는 이 조건을 모두 받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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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카르타고 유적
사진크기 : 800*600 (원본사진보기)
출처 : © ys
설명 : 튀니지 카르타고. 로마시대의 도시 폐허.
관련항목 : 로마의 건축, 카르타고
카르타고 유적
카르타고 유적
카르타고 유적

* 카르타고 유적(출처:세계 도시 유적지 시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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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동생 '마고네'는 본국의 철수 지시를 받고 '제노바'에서 해상으로 철수도중 선상에서 전투중 입은 상처로 인한 중독으로 눈을 감았다. 한니발은 본국의 귀환 명령에 자신의 정예 8천명을 포함하여 1만 5천의 병력만 대동하고  출발하기로 하였다. 배가 출발하자 로마군의 보복이 두려운 남아있던 동맹도시들의 병사들이 자신들도 대려가 달라면서 배에 달라붙자 한니발은 화살을 쏘게하면서 항구를 벗어났다.  

 

한니발은 어떤 인물인가?그에 관한 기록은 그를 수행하며 기록을 남겼던 그리스 학자인 '셀레누스'의 기록이 유일하다. 그의 기록을 빌리면 한니발은 아래와 같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 추위도 더위도 그는 묵묵히 견디어 냈다.병사들과 똑같은 식사를 먹고 먹고 싶을때 언제던지 먹고 잠도 아무때나 잤다. 항상 문제처리를 우선했고 밤낮의 구별도 없었다. 병사용 망투를 두르고 나무 밑에서 잠을 자고 여자는 에스파냐에서 원주민 여자를 만났다는 것 외에는 전쟁기간중일체 가까이 하지 않았다. 16년 돈안 본국의 지원은 단 두번뿐. 3만명의 군량을 어떻게 조달하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4천명의 병사가 로마군에 투항한 적은 있으나 한니발을 배신하고 떠난 병사는 단 한명도 없었다. 용병들에게 지급하는 급료도 여의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누구도 떠나지 않았으며 마음터 놓고 이야기 하는 상대는 없었고 그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병사들 틈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으며 항상 고고한 태도를 고집하는 그를 병사들이 항상 따랐다. 그의 엄격한 태도에 대한 경외심과 어려움을 극복 못하는 남자로써 호감. 뛰어난 재능보다 그의 지도를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게 하는데 성공한 사람이기도 하다. 지속적인 인간관계는 상호관계이며 일방적인 관계는 지속될 수가 없다" 는 내용이다.

 

좀 애매모호한 표현이지만 한니발은 인간적인 소탈감은 있었든 것 같다. 격식을 차리지 않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업무에 항상 열중하고 그러면서 자기자신을 다스리는 면에서 고고하며 엄격하여 경외심을 갖도록 하였다는 점. 그리고 병사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이 최선을 다하도록 격려하고 관리하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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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 신전

 

헤라 신전

 

헤라 신전

 

헤라 신전

 

헤라 신전, 희생제단이 있던 신전으로 34개 기둥 중 25개가 남아있다

 

*헤라 신전 (출처: 세계 유적지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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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세의 한니발은 '크로토네' 항구 남쪽 끝단 곶 위 '헤라신전'에 동판으로 '페니키아어'와 '그리스어'로 자신의 29세부터 44세까지의 전과를 모두 기록하여 박도록 하였다. 50년 뒤 이곳에서 동판을 발견한 역사가 '포리비우스' 덕분이다. 한니발도 그의 업적을 후세에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항구 곶 위에 우뚝선 백색의 '헤라신전'은 수평선 멀리서도 잘 보였다. 이탈리아 반도를 종횡무진으로 수차례 로마군을 섬멸시키고 전 로마시민을 공포에 떨게 했던 한니발! 로마제국의 멸망도 보지 못하고 저 멀리 백색의 '헤라신전'이 수평선 너머에 사라질때 까지 하염없이 바라보며 떠나던 한니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탈리아 북부와 남부의 한니발군이 따났다는 소식에 로마는 승리의 환호성이 넘치고 수도 로마는 광란의 도시로 축제 분위기 였다. 원로원의 제1인자인 '파비우스' 집에는 축하 인사를 하려온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로마의 위기에서 지구전법으로 로마를 구한 노장 '파비우스'는 한니발이 철수한지 한달만에 생명의 불꽃이 꺼졌다. 그는 아마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를 떠났다는 소식에 16년 동안 점철된 로마를 구한다는 긴장의 불꽃이 다한 모양이었다. 향년 72세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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