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로마인 이야기 6

제2권 요약

한니발 전쟁:제1차 포에니전쟁(계속)

 

기원전 256년 봄. 로마는새로 건조한 230척의 군선을 진수하였다. 카르타고는 256척을 바다로 내 보냈다 양쪽 모두 5단층 걸러리선으로 지중해 해전사상 가장 대규모 해전이었다. 5단층 걸러리선에는 노잡이 300명,전투원120명,선원100명이니까 합치면 500명이 넘는다.230척이면 12만명에 다다른다.

 

전투는 마르셀라 남쪽 해상에서 양쪽 함대가 마주쳤다.카르타고군은 양쪽 날개를 편 학익진 모습이었고 로마군은 원뿔형의 중앙돌파 형태로 진용을 갖추고 접전이 시작되었다.장선 두척을 앞세운 로마제1선단은 좌측에서, 제2선단은 우측에서 카르타고군의 중앙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중앙을 돌파당한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의 함선충돌 작전과 까마귀를 이용한 접근전, 화공작전에  피해가 속출되자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로마군은 패주하는 적을 쫓아가지 않고 로마군 제1,2선단은 곧바로 방향을 돌려 달려가서 좌.우측 후방을 공격하는 카르타고군의 배후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로마군의 수송선단과 제3선단이 제1,2선단과 같이 카르타고군을 포위하여 공격하는 형세가 되자 카르타고군은 좌익은 육지와 사이에서 도망갈 길도 �지 못하고 전멸하였고 우익은 넓은 바다로 패주하여 도망쳤다. 이 전투에서 로마굼은 24척에 불과하나 카르타고군은 침몰 30척,포로 63척에으로 로마군의 대승이었다. 이로써 로마군은 세번째 해전에서도 카르타고군을 패주시켰다.

 

로마군은 바로 카르타고군을 추격하여 아프리카 북단 카르타고 해안으로 방향을 돌렸다. 카르타고군이 해안에서 배수진을 치고 있는 곳을 회피하여 동쪽인 클리페아 해변에 상륙하였다. 클리페아 주변의 카르타고 도시들이 당장 줄줄이 로마군에 항복해 왔다. 카르타고 지원군이 공격해 왔으나 로마군은 간단히 격퇴시켰다.이전투에서도 사로잡은 카르타고군은 2만명이나 되었다.

 

로마는 겨울이 되자 한명의 집정관과 군대를 철수하도록 하고 집정관 레굴루스와 그가 지휘하는 1만5천명의 보병과 기병 500명,군선40척을 남겨 두었다. 겨울철 숙영지는 오늘날 튀니스 근방이었다. 수도 카르타고 공격은 이듬해 지원군이 도착하면 개시될 예정이고 준비를 끝낸 로마군은 겨울숙영에 들어갔다.

 

수도 근방에 로마군이 숙영지를 편성한 것에 위기감을 느낀 카르타고는 로마 집정관에게 강화절을 보냈다. 그러나카르타고는 로마 집정관 레굴루스의 요구를 도저히 받아 들일수 없다고 판단하고 거절했다. 카르타고의 육군과 해군은 아직 건재했으며 스파르타 용병대장 크산티푸스를 고용하여 전력을 강화하고 있었다.크산티푸스는 카르타고군과 누미디어 기병을 고용하여 이들을 훈련시키고 해가 바뀌어 봄이 오자 로마군에 싸움을 걸었다.

 


 


 


 

                                         코끼리 부대

 

로마 집정관 레굴루스는 집정관들의 전형인 후임 집정관이 도착하기전에 전과를 올리고 싶은 욕심에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카르타고군의 도전을 받아 들였다.기원전 255년 봄. 카르타고군은 보병 1만2천명,기병4천,코끼리100마리가 투입되었고 로마군은 보병1만,기병 500명으로 중무장 보병으로 편선된 로마정예군대였다. 전투가 개시되자 카르타고군은 근대전의 전차와 유사한 코끼리를 이용한 중앙돌파식 공격으로 로마군의 중무장 보병부대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8천명이 전사하고 해군이 기다리고 있는 클리페아까지 도망칠 수 있었던 병사는 2천명도 되지 않았다. 집정관 레굴루스는 병사 500명과 같이 포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미 로마를 떠나 신임 집정관 두명은 시라쿠사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급한 와중에도 두 집정관은 그대로 아프리카로 이동을 결심했다. 클리페아에 있는 7천명의 로마군과 군선 40척을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마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카르타고군은 육전에서의 승리를 해전에서도 도전하고자 카르타고만에서 북동쪽으로 돌출해 있는 헤르마이움 곶(오늘날 봉곶) 앞바다에서 기다리다가 다가오는 로마군을 향하여 공격하였다.그러나 카르타고군은 기대와는 달리 로마군의 반격에 114척의 군선을 잃고 패주하였다. 클리페아 항구로 들어간 로마함대는 그곳에 남아있던 병사들을 테우고 시칠리아를 향해 돛을 올렸다. 아프리카 전진기지 철수로 카르타고 진격작전은 실패를 인정하는 셈이 되었다. 로마군은 시칠리아 앞 해상에서 엄청난 태풍을 만났다. 태풍시 배가 해안선에 접근하는 것은 금기시 되어 있으나 로마 집정관은 태풍에 놀라 해안 가까이 접근토록 명령했다. 그러나 동맹도시에서 지원나온 키잡이나 노련한 병사들이 위험하여 안된다고 반대를 하였으나 집정관의 강제 명령으로 해안 가까이 접근하자 배들이 높은 파도와 바람에 밀려 암초와 해안 절벽에 부딪혀 파손되고 침몰하는 배가 부지기 수였다. 결과적으로 230척이나 되는 로마군선중 80척만 남고 나머지 모든 군선과 병사 6만여명이 모두 바다속으로 수장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이 깊은 슬픔에 잠겼으나 카르타고는 기뻐 날 뛰었다. 로마에는 최악의 결과로 끝난 그해 겨울, 카르타고에서 강화사절이 �아왔다. 강화사절은 카르타고인이 아닌 포로가 되었던 전 집정관 레굴루스였다. 카르타고의 요구조건은 로마군이 시칠리아에서 완전히 철수 하라는 것이었다. 레굴루스는 강화조건 설득에 성공하던 실패하던 카르타고로 돌아 오도록 약속하고 강화사절로 로마로 왔던 것이다. 그는 원로원에서 카르타고 감시인이 지켜보눈 가운데 연설을 하였는데 카르타고와는 절대로 강화하여서는 안된다며 약속과 다른 반대의 연설을 하였다. 원로원은 아프리카 작전이 실패한데다 전대미문의 해난사고로 엄청난 병력과 재정적 손실을 가져와 의기소침해 있었지만 레굴루스의 참뜻을 이해했다. 강화에 응하면 지금까지의 희생이 너무나 헛되어 버린다는 사실에 강화제의를 거절했다. 약속대로 카르타고로 돌아간 레굴루스는 카르타고 정부의 분노로 동그란 바구니에 갇혀 코끼리들이 그것을 축구공 처럼 걷어차게 하는 방식으로 죽였다.

 

  

1차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가 신흥강국 로마에게 해전에서 패해 시칠리아를 비롯해서 코르시카 샤르데나섬등을 로마에게 양보하게 되며 그후카르타고의 한니발 부자가 에스파냐에서 식민지를 개척하며 힘을 기릅니다. 그리고 로마는 일리리아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일리리아를 침공하여 해적들의 소굴을 소탕하며 이탈리아 반도 북부 갈리아족의 침입을 격퇴하여 영역을  북이탈리아로 확대합니다.                                                                                               

 

                            

강화에 실패하자 기원전 254년 봄. 카르타고는 로마가 전후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기를 노려 실지 시칠리아를 회복하기 위하여 코끼리 140마리를 포함한 카르타고 군대를 시칠리아 서쪽 마르살라에 상륙시켜 공세를 취하였다. 로마는 두명의 신임 집정관과 두명의 전직 집정관이 이끄는 병력을 육로와 해로로 나누어 파견하였다. 신임 집정관중 한명은 포로에서 풀려난 전 집정관 스키피오 였으며 전 집정관 두명은 해난사고의 책임자들이었다. 한번의 실수로 뼈저린 느낌을 받은 장수들을 다시 기용한 것이었다. 그해 로마는 석달이라는 짧은 기간에 220척이나 되는 배를 진수시키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로마군은 여기에 기존의 80척을 포함하여 시칠리아 북해안으로 이동하고 육군도 4개군단을 두명의 집정관이 이끌고 메시나에서 북해안을 따라 행군하고 있었다. 육군과 해군의 합동작전으로 카르타고의 카르타고의 거점인 팔레르모를  공략하는 것이  목표였다                                                                                                                                                                             
                                                                                                                                                   
 
팔레르모를 포위하고 공격을 계속한 결과 주민들 사이에 서로 의견이 충돌하여 친로마파와 친 카르타고파로 갈라졌다. 친로마파가 절대 우위로 성문을 열고 로마군에 항복하자 로마군은 무혈 입성하게 된다. 친카르타고파 주민 1만 3천명은 노예로 전락하고 친로마파 주민은 물론 자유의 몸이되어 팔레르모에 계속 살게 하었다.  
                                                                 
팔레르모 함락으로 시작된 시칠리아 전선은 기원전 253년 카르타고의 보급기지인 마르셀라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런데 겨울철을 맞아 본국으로 돌아가던 로마군이 무시무시한 폭풍우를 만나 이번에는 선원들의 충고대로 항해했으나 150척 가까운 군선과 수많은 병력을 잃었다. 로마는 더이상 해군력 증강 이야기를 아무도 할 수 없었고 남은 군선은 고작 60척이었다                      
       
로마해군의 괴멸로 카르타고는 기회를 포착했다. 코끼리 150마리를 포함하여군대를 시칠리아에 상륙시켜 팔레르모를 공격하기 위하여 북상하였다.로마군은 아프리카 전선에서 코끼리떼에 당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바다에는 태풍이 육지에는 코끼리떼로 하여금 로마군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팔레르모 방어를 준비하고 있는 집정관 메텔루스는 코끼리에 대한 병사들의 두려움을 없애는게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성벽앞 해자를 더 깊이 파게하고 바닥은 좁게 만들었다. 카르타고군이 성벽밖에서 진을 치고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로마군 경보병이 성벽밖에서 투창을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카르타고군이 코끼리를 앞세우고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경보병들은 코끼리떼를 향하여 일제히 투창을 던지고 재빨리 성문안으로 들어왔다. 돌격을 감행하던 코끼리떼가 로마군이 던진 투창에 상처가 나자 고통 때문에 더욱 흥분하여 전속력으로 달렸다. 앞서가던 코끼리들이 해자로 떨어지자 나머지 뒤따르던 코끼리들도 먼지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뒤따라 해자로 떨어졌다. 겨우 해자앞에 멈추어선 코끼리들은 상처로 흥분하여 카르타고군을 짖밟고 있었다. 이때 로마 중보병이 성문을 열고 달려나와 카르타고군을 공격하여 괴멸시켰다. 2만명 가까운 적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지휘관과 함께 마르셀라로 도망칠수 있었던 병사는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코끼리도 10마리를 포획한 외에는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로마군의 대승이었다.이 전투에서 패배한 카르타고 장군은  본국으로 소환되어 사형에 처해졌다.1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된 이래 패전의 책임을 지고 사형당한  카르타고 장군은 전쟁 � 해에 로마군을 메시나 해협을 건너게 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이래 두번째였다.카르타고는 패전책임을 묻지않는 로마인과는 정반대 방식을 취하는 민족이었다.                                                                                            
                                                                                        
코끼리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로마군은 바다에 대한 두려움도 잊기시작하였다.기원전 250년. 이탈리아 각지의 조선소에서 200척의 군선이 진수되었다.그해에 로마는 새로 편성된 함대와 4개군단을 마르셀라 공격에 투입되었다. 마르셀라를 방어하기 위하여 카르타고는 1만명의 용병을 투입하였다.용병이 증원되는 바람에 로마군의 공격은 난항을 거듭하고 있었다.교착상태에 접어든 전선은 겨울이 오자 휴전성태로 들어갔다. 이듬해 기원전 249년.제1차 포에니 전쟁도 어언 16년째를 맞이하고 있었다.로마의 새로 선출된 집정관 플쿠루스는 전통있는 귀족가문의 장수로 220척의 군선을 이끌고 바다쪽에서 트리파나를 공격하였다. 다른 한명의 집정관은 마르셀라를 공격하도록 임무가 부여되었다.플루쿠스는 함대를 이끌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트라파나로 향하였다. 항구에 정박중이던 카르타고 함대는 로마해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항구를 떠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해역에서 남쪽에서 올라오는 로마해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르타고 해군장수는 안개를 이용한 교묘한 유인전술로 로마해군 공격하여  로마의 군선220척 가운데 93척을 격침시키고 30척이 나포되었으며 병력 2만명을 수장시키는 대승리를 이루었다. 집정관 플루쿠스는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수도 로마로 소환되어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이러한 계속되는 대규모 피해로 바닥 났다.                                
 
카르타고는 로마의 국력이 쇄약해진 틈을 타서 카르타고 장군 하밀카르(한미발 장군 아바지)로 하여금 시칠리아의 로마군을 격퇴시키기 위하여 2개군단 정도의 병력을 상륙시켰다. 하밀카르는 육지와 해상에서 게릴라식 점법으로 로마군을 괴롭혔으며 로마에서 강화를 요청해 오기를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어 기대가 빗나갔다. 로마는 카르타고와 시칠리아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보급로를 차단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주변 로마연합국들의 지원을 받아 네번째로 함대를 재편성하였다.이듬해 시칠리아 동쪽 해상에서 해전이 시작되어 접전한 결과 이번에는 로마군이 카르타고 군선 50척 침몰,70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리면서 승리했다. 카르타고 해군장수는 본국으로 소환되어 세번째로 처형되었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 있는 하밀카르로 하여금 로마와 강화를 제의토록 하여 강화교섭이 성립되었다.로마 집정관 카룰루스와 하밀카르간에 강화결과는 �째,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서 완전 철수하고 영유권을 포기하며, 둘째,주변 로마 동맹국들에게 싸움을 걸지 않으며, 셋째, 포로는 몸값을 받지않고 교환하며,네째,배상금 3천200탈렌트를 10년 분활상환조건으로 지급하며, 다섯째, 로마는 카르타고의 자치와 독립을 존중한다는 내용이었다.                                                                              
 
기원전 264년 부터 시작하여 23년동안 계속된 제1차 포에닌 전쟁은 기원전 241년에 끝났다. 카를루스는 그해 6월 로마로 개선했다. 로마는 기원전 673년부터 줄곧 열러있던 야누스 신전의 문도 432년만에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