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 출동전 이순신 상황파악
일개 주장(主將)이 마음대로 처리하기 어려우니
- 이순신의 출동준비
1592년 4월 13일 해질 녘에 일본 함대가 부산 앞바다에 출현했고 다음 날인 4월 14일 아침에 대대적인 부산상륙작전이 벌어졌다. 전라좌수영이 설치된 여수에 있던 이순신이 그 사실을 전해들은 것은 4월 15일이었다. 그 날의 <난중일기>이다.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의 통첩에, 왜선 90여 척이 와서 부산 앞 절영도에 정박했다고 하고, 같은 시각에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이 왔는데 왜선 350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고 했다.
이순신은 1592년 5월 4일 비로소 출동했다. 일본군 침공 사실을 접하고 20여 일 만에 출발한 셈이다. 전쟁 초기 20여 일의 기간은 결정적인 국면이 될 수도 있다. 조선도 이순신이 출동하기 이틀 전인 5월 2일 서울이 함락되는 비운에 처했다. 이순신이 출동할 때 선조는 이미 서울을 떠나 북으로 비참한 피란 행차를 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그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궁금할 수 밖에 없는 그 기간 동안의 행적을 우리는 <난중일기>를 통해 만날 수 있다.4월 15일 이어 다음 날인 4월 16일에 다시 급보가 이순신에게 접수되었다. 부산진성의 함락 소식이었다. 이순신은 그 날의 <난중일기>에 “밤 10시경 경상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했다. 분하고 비통함을 이길 수 없었다”라며 원통한 심정을 표했다.다음 날인 4월 17일 그는 휘하 병사들에게 비상 경계령을 내려 교대 시간과 관계없이 모두 소집했다. 그는 <난중일기>에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김성일이 공문을 보냈는데 왜적이 부산을 함락시키고 계속 머물면서 물러가지 않는다고 했다. (……) 계속해서 번을 서는 수군과 교대로 번을 서는 수군이 연달아 방비처로 왔다”는 기록을 남겼다.4월 18일 동래성이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오후 2시경에 경상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동래도 역시 함락되었다고 했다. (……) 저녁에 순천의 군사를 거느린 병방이 석보창에 머물러 있으면서 군사들을 거느리고 오지 않아 잡아 가두었다”라고 적었다.
여기서 병방은 지방에서 군사 관련 사무를 맡은 관리를 말하며 석보창은 지금의 여천시 봉계동 석창을 일컫는다.
부산이 함락되는 국가적 위기에 처하자 이순신의 행보도 빨라졌다. 4월 19일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동문 위로 나가 직접 방어선 구축 작업을 독려하였다”고 기록했고 다음 날인 4월 20일에는 “성 위에 군사를 줄지어 서도록 과녁판에 앉아서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그리고 4월 22일에는 “새벽에 정세도 살피고 부정을 적발하는 일로 군관을 내보냈다”고 적었다.
결국 이때까지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이순신은 일본의 침공 사실을 접하고도 즉각 부산으로 출동할 준비도 하지 않았다. 그의 활동은 전라좌수영 방어선 구축 등의 자위 차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적어도 4월 22일까지의 기록에는 침략군에 대한 전투 태세가 완비되었다거나 출병한다는 기록은 없다. 설상가상으로 <난중일기>에는 4월 23일부터 4월 30일까지 기록이 몽땅 빠져 있어 의구심이 든다.
다행이 4월 27일에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보고서가 있다. 이 보고서에는 4월 20일부터 이순신에게 접수된 공문 세 개와 그 각각에 대한 이순신의 처리 내용이 적혀 있다. 우선 4월 20일 이순신에게 도착한 경상도 감찰사 김수의 공문을 살펴보자. 관찰사는 각 도에 한 명씩 있는 지방 장관을 말한다.
본 도 우수사(원균)에게 “적선의 침범을 막기 위해 전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로 나가라”고 이미 명령했기 때문에 경상도의 여러 진에는 배들이 전혀 없어 우도에 변고가 생길 것 같으면 즉시 도와야 한다는 사실을 보고하였으니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되 감사, 병사와 상의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이순신은 관찰사 김수의 공문에 대해 “신하된 자로서 누구나 마음과 힘을 다하여 나라의 수치를 씻기를 원하지 아니할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같이 출전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엎드려 기다리오며, 소속 수군과 각 관포에 ‘전선을 정비하여 나의 명령을 기다려라’ 하고 급히 공문을 돌리고 본 도의 감사나 병사와도 아울러 상의하였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경상도 관찰사 김수는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지휘 계통이 달라서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김수는 조정에 전라좌수군의 구원을 요청하고 그 내용을 미리 이순신에게 알렸다. 이순신은 김수의 공문을 받고 ‘같이 출전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기다린다고 했다. 누구와 출전하라는 명령를 내렸을까? 아마도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일 것이다. 박홍의 경상좌수영은 궤멸되었고 원균의 경상우수영도 위태로운 가운데 적의 대함대와 맞서야 하는 이순신의 고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제 4월 20일에 작성되어 4월 26일 이순신에게 접수된 조부승지 민준(閔濬)의 공문을 살펴볼 차례이다. 좌부승지는 정3품이니 수사인 이순신과 같은 정3품이지만 왕의 비서로서 군대를 담당하는 직책이었으니 그 힘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만일 형세가 유리한데도 시행해야 할 것을 시행하지 않으면 기회를 크게 놓치게 된다. 조정을 멀리서 지휘할 수 없으니 도내에 있는 주장(主將)의 판단에 맡길 따름이다. 전라도에는 이미 이 뜻을 알렸다 하니 경상도에 공문을 보내어 서로 의논하여 기회를 보아 조처하도록 하라.
민준의 공문에 대해 이순신은 “저는 일개 주장(主將)으로서 마음대로 처리하기 어려우므로 겸관찰사 이광(李珖), 방어사 곽영(郭嶸), 병마절도사 최원(崔遠) 등에게도 분부하신 사연을 낱낱이 아렸습니다. (……) 원균 등에게도 그 도의 물길 사정과 두 도의 수군이 모이기로 약속할 장소와 적선의 많고 적음과 (……) 여러 가지 기밀을 모두 급급히 회답해 줄 것을 통보하였고, 각 관포에 건쟁 기구와 여러 가지 비품을 다시 철저히 정비하여 명령을 기다리라고 공문을 돌려 엄히 지시하였습니다”라고 회답했다.
이때 이순신이 출동하기를 주저한 것은 조선의 진관제(鎭官制) 때문이었다. 자신의 지역은 책임지고 지킨다는 이 개념은 당시의 군대 철칙이었다. 물론 이순신은 수군절도사로서 현지 사정에 따라 발휘할 수 있는 편의종사(便宜從事), 즉 자율집행은 있었지만 자신의 관할 구역이 아닌 경상도 바다에 출동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좌부승지 민준의 두 번째 공문이 그 다음 날인 4월 27일 이순신에게 또 접수되었다. 그 공문은 서울에서 4월 23일에 발송한 것이었다. 그만큼 정세가 다급했다.
이제 경상도 우수사 원균의 보고서를 본즉. 각 관포의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아가 군사의 위세를 자랑하고 적선을 엄습할 계획이라고 하니, 이는 가장 좋은 기회이므로 불가불 그 뒤를 따라 나가야 할 것이다. 그대가 원균과 합세하여 적선을 쳐부순다면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전관을 급히 보내어 이르니, 그대는 각 관포의 병선을 거느리고 급히 출전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좌부승지 민준의 출동 지시에 대해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출동 계획을 밝혔다.
왜적을 꼭 이때에 제어해야 하겠거니와 다만 전후(前後) 적의 배가 500여 척 이상이라 하므로 우리의 위세를 불가불 엄하게 갖추어 엄습할 모습을 보여서 적으로 하여금 겁내어 떨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출전할 기일이 급한데다가 수군의 여러 장수 가운데 보성과 녹도 등지는 3일이나 걸리는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통고하여 소집한다 해도 그곳 수군은 쉽게 모이지 못하여 반드시 기일을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밖의 여러 장수들만이라도 모두 이달 29일 본 영 앞바다에 모이게 하여 거듭 군령을 밝힌 뒤에 즉시 경상도로 출전할 계획입니다.
민준이 첫 번째 보낸 공문은 “조정은 멀리서 지휘할 수 없으니 도내에 있는 주장의 판단”에 맡긴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의 공문은 진일보하여 “그대는 각 관포의 병선을 거느리고 급히 출전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는 구체적인 지시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관할 구역의 군사와 함대를 “이달 29일 본 영 앞바다에 모이게 하여 거듭 군령을 밝힌 뒤에 즉시 경상도로 출전할 계획”인 것을 밝혔다.
그러면 원균은 언제 처음 출동했을까? 민준의 공문은 4월 23일에 발송하여 4월 27일 이순신에게 접수되었다. 서울에서 이순신이 있는 여수까지 4일이 소요되었다. 그럼 역으로 원균이 있던 거제에서 서울까지 4일 정도가 걸린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민준은 원균의 보고서를 받아본 뒤 공문을 작성하여 4월 23일에 발송했으므로 원균이 조정에 보낸 보고서의 발송일은 4월 19일로 볼 수 있다. 그 보고서에 원균은 자신의 출동 계획을 밝혔다. 따라서 그의 출동일은 4월 19일 이후의 시점으로 추정할 수 있다.
4월 28일 날이 저물어 자정이 되었을 때 원균의 긴급 원병 요청 공문이 이순신에게 도착했다. 이 때 원균은 적의 함대 10여척을 격파했으나 결국 경상우수영이 함락되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이순신에게 긴급히 원병을 요청했다. 이순신은 4월 30일 오후 4시에 출동하기로 하고 경상우수영 소속인 네 개의 진에 군사와 함선 소집령을 4월 29일 새벽에 공문으로 발송했다.
그런데 4월 29일 오후 2시경 여수와 인접한 경상도 남해현이 혼란에 빠졌고 지휘관도 도망갔다는 긴급 보고가 이순신에게 들어왔다. 남해현은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이 설치된 여수와 가가운 거리에 있어 그곳에 적이 침입하면 전라좌수영도 위태롭게 된다. 이순신은 그 보고가 사실이면 창고와 무기고 등을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결국 이순신의 지시대로 남해현은 불태워졌다. 그런데 아직 전라도에는 일본군이 보이지 않던 시기였다. 그럼 이순신은 병력을 파견하여 남해의 치안을 안정시키거나 군량미와 무기 등을 전라좌수영으로 옮기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이순신의 관할 구역이 아니어서 그렇게 못 했다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면 군량미와 무기를 지키거나 옮기는 것은 안 되고 불 질러 없애는 것은 괜찮게 되어버리니 궁색한 논리가 된다. <선조실록> 1592년 6월 28일에는 “남해의 섬들은 비록 왜적의 난을 겪지는 않았으나 군량과 군기를 전라좌수사가 먼저 스스로 불태워버려 이미 빈 성이 되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남해 현령 기효근이 이 때 도망갔다고 전해졌으나 실상은 그렇게 보기 어렵다. 나중에 이순신은 제1차 출동을 떠나 원균과 연합 함대를 결성했는데 기효근도 합류했다. 이순신의 보고서에 “남해 현령 기효근, 미조항 첨사 김승룡, 평산포 권관 김축 등이 판옥선 한 척에 같이 타고 (……) 5일과 6일 사이에 속속 뒤따라왔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기효근이 도망을 갔다면 그 죄 때문에 출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남해의 사정은 부하가 이순신에게 잘못된 보고를 올렸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순신은 “29일 본 영 앞바다에 모이게 하려 거듭 군령을 밝힌 뒤에 즉시 경상도로 출전할 계획입니다”라고 했으나 4월 29일에는 출동하지 못했다. 군령을 밝히거나 함대를 편제하는 등의 사유 때문이었다고 짐작한다.이순신은 4월 30일 오후 4시에 출동하기로 하고 경상도 네 개의 진에 그 사실을 공문으로 통보했다. 그러면 4월 30일에는 이순신이 출동을 했을까? 이순신은 결국 4월 30일에도 출동하지 못했다.이순신은 전라우수영 함대를 기다려 함께 출동하기로 했다. 전라좌수영과 가까운 남해에 적이 침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상태에서 이순신 휘하의 함대만 출동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 이순신이 출동을 머뭇거린 것은 나중에 원균이 이순신을 공격할 때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될 운명이었다. 그것은 이때의 보고서에 이순신이 “일이 매우 급하더라도 반드시 구원선이 다 도착하는 것을 기다려서 약속한 연후에 배”를 띄울 것이라고 하여 조선의 조정조차 출동 예정일을 전혀 알 수 없게 된 사실에서도 그 단서를 엿볼 수 있다.
4월 30일의 이순신의 보고서이다.
평산포 등 네 진영의 진장(鎭將)과 현령 등이 왜적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고 먼저 도피했으므로, 신의 군사로는 그 도의 물결이 험하고 평탄한 것도 알 수 없고, 물길을 인도할 배도 없으며, 도 작전을 상의 할 장수도 없는데, 경솔하게 행동을 개시한다는 것은 도한 천만 뜻밖의 실패가 없지도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에게 소속된 전선을 모두 모아도 30척 미만으로서 세력이 매우 고약하기 때문에 겸관찰사 이광도 이미 이 실정을 알고 본 도(전라도) 우수사에게 명령하여 “소속 수군을 거느리고 신의 뒤를 따라서 힘을 모아 구원하도록 하라”고 했으므로 일이 매우 급하더라도 반드시 구원선이 다 도착하는 것을 기다려서 약속한 연후에 배를 띄워 바로 경상도로 출전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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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을 따라 적선을 습격하라고 명령하라고 명령하는 유서
물길을 따라 적선을 습격하여 육지의 적들이 겁을 내어 뒤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 매우 좋은 방책이다. 그래서 경상도 순변사 이일(李鎰)이 내려갈 적이 이미 일러 보내었다. 다만 군사상 나아가고 물러날 때에는 반드시 기회를 따라서 해야만 그르치는 일이 없는 법이다.
오직 마땅히 먼저 적선의 많고 적음과 또 지나가는 길목인 섬과 섬 사이에 적들의 복병이 있는지 없는지를 잘 살펴본 후에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매우 좋은 방책이기는 하지만, 만약 사정과 형편이 해야만 할 것을 아니했다가는 기회를 크게 놓칠 수가 있으므로 조정이 멀리서 지휘할 수는 없고 다만 그 도(道)의 주장(主將; 전라도의 경우는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다)의 지휘에 맡길 뿐이다.
본 도에서는 이미 서로 의논을 나누었다고 하니, 경상도에 통문을 보내어 서로 의논한 뒤에 기회를 보아서 처리하도록 하라. ? 물길을 따라 적선을 습격하라고 명령하는 유서 (1592. 4. 26)
그러나 이 유서는 수군 장수에게 하나마나한 명령만 나열되어 있고, 이순신이 문서로써 명확히 해두고자 하는 타도(他道)로의 군사 이동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었다. 그래서 이를 늦게야 알아차린 조정에서는 다음 날인 4월 27일자로 이 문제에 대한 지시를 급히 다시 보내온 것이다.
원균과 합세하여 적을 치라고 명령하는 유서
왜적이 이미 부산, 동래을 함락시키고 또 밀양을 쳐들어 왔다고 하는바, 이제 경상우수사 원균의 장계를 보니 여러 포구의 수군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나가서 형세를 과시하고 적을 덮쳐 격멸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하는바, 이는 하나의 좋은 기회이니 그 뒤를 잇달아 나가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네가 원균과 합세하여 적의 배를 쳐부수기만 한다면 적을 평정시키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선전관을 보내어 급히 이르도록 하는 것이니, 너는 각 포구의 전선들을 독촉하여 거느리고 급히 달려가서 기회를 잃지 말도록 하라.
그러나 천리 밖에 떨어져 있는지라, 혹시 무슨 뜻 밖의 일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이 지시에 구애 받지는 말라. ? 원균과 합세하여 적을 치라고 명령하는 유서 (1592. 4. 27)
이순신은 왕의 유서에 의해 타도(他道)로의 군사 출동을 정식으로 허락 받았으므로 경상도로의 출동을 결정하고 같은 날(4월 27일) 이에 대한 장계 ‘<이순신의 경상도로 구원 나가는 장계(一)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를 올린다.
임진왜란 초기의 움직임
그러면 개전 초기 이순신의 움직임으로 이야기를 돌려본다.
이순신이 개전 소식을 들은 것은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한 다음 날인 4월 15일 저녁때였다.그날은 나라의 제사, 곧 성종의 왕비 한씨의 제삿날이라 종일 공무를 보지 않았다가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이 보낸 첩보를 받았던 것이다. ‘왜선 90여 척이 나타나 절령도에 정박했다’는 내용이고, 이어서 경상좌수사 박홍으로부터도 ‘왜선 350척이 부산포에 와서 정박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순신은 그날 오후 8시에 임금에게 급변을 알리는 장계를 올리고, 전라순찰사 이광(李珖)과 전라병사 최원(崔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 공문을 보내 이을 통보했다. 뒤따라 경상관찰사 김수로부터도 같은 내용의 공문을 받았다.이튿날 4월 16일 원균으로부터 부산진 함락 통보를 받았고, 17일에는 경상우병사 김성일로부터 ‘왜적이 부산을 함락시킨 뒤 물러나지 않는다’는 통보를 받았으며, 18일에도 원균으로부터 ‘동래성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받았다.20일에는 경상감사 김수로부터 구원병을 요청하는 공문을 받자 이순신은 관내 각 진에 싸울 준비를 명령하는 한편, 김수와 원균 등에게 적정이 어떠한가 급히 회보해달라는 통문을 보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면 이 시기인 임진년 4월 23일부터 30일가지는 일기가 없으니 당시의 사정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갔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26일과 27일에는 잇달아 선조로부터 나아가 적과 싸우라는 내용의 명령서를 받았고, 그날 임금에게 ‘경상도로 구원 나가는 장계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를 올리고 휘하 장수들을 급히 소집했다. 이 두 번째 장계에서 이순신은 이렇게 썼다.
“신은 경상도 순변사 이일과 관찰사 김수, 우수사 원균 등에게 졍상도의 물길 형편과 두 도(경상도와 전라도)의 군사들이 모이기로 약속하는 지점, 또 현재 적선의 수효와 정박해 있는 곳이 어디어디인지, 그 밖의 여러가지 전략에 관한 모든 일들에 대해 급히 회신해달라고 통보했으며, 각 고을과 포구에 모든 전투 기구를 다시 한 번 정비해 놓고 명령을 기다리라고 지시했습니다.”
또 같은 장계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적선의 수효가 500여 척이나 되므로 우리도 위세와 무장을 엄중히 갖추어 적이 겁내고 덜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인데, 신에게 소속된 방답, 사도, 여도, 발포, 녹도 등 다섯 포구의 전선만으로는 심히 외롭고 약하므로 순천, 광양, 낙안, 흥양, 보성 등 다석 고을의 수군들도 함께 거느리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휘하 장수들에게 본영 앞바다로 모이도록 통문을 돌렸사온데, 그 중에서 보성, 녹도 같은 곳은 물길로 사흘이나 걸리는 거리에 있으므로 혹 기일에 도착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곳 장수들은 모두 4월 29일에 본영 앞바다에 모야 약속을 확실히 정하고 곧 출전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순신은 이렇게 자신의 결의를 아뢰었다.
“원컨대 한번 죽음으로써 기약하고 즉시 범의 소굴을 바로 두들겨 기운을 쓸어버리고 나라의 부끄러움을 만분의 일이나마 씻으려 하거니와 성공과 실패, 날래고 둔한 것에 대해서는 신이 미리 헤아릴 바가 아닌가 합니다.”
이순신이 거느린 전라좌수영 함대가 여수를 떠나 출전한 것은 5월 4일이었다.
이순신의 사고와 행동은 이처럼 치밀하고 침착했다. 그는 전란을 당했다고 해서 결코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않았다. 물론 겁을 먹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무모하게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지도 않았다.틀림없이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불철주야로 대비해온 이순신이었다. 그런 만큼 그는 출전에 앞서서도 철저한 정보 수집과 사전 준비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이는 첫 출전, 척 전투가 그만큼 중요한 탓도 있었지만, 그 뒤 7년 동안 목숨을 바쳐 싸우면서 초지일관 지켜온 이순신의 원칙이기도 했다.그것이야말로 역사상 어떤 제왕보다도 탁월했고, 어떤 명장보다도 출중했던 위대한 최고 경영자 이순신의 진면목이었다.
즉시 출동하지 못한 이유
그런데 당시 이순신이 적침 소식을 듣고도 즉시 출동하지 못한 것을 두고 헐뜯는 말이 많았다. 이는 오늘날에도 비록 일부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이순신 비관론자들이 즐겨 이용하는 소재이기도 하다.그들이 그 근거로 활용하는 사료가 바로 유성룡의 <징비록>과 <선조실록>이다. 먼저 <징비록>의 대목은 이렇다.
“처음에 적병이 상륙하는 것을 본 원균이 그 형세가 매우 큰데 놀라서 감히 나가서 싸울 생각은 못하고 전선 100여 척과 대포, 군기 등을 모조리 바다에 버렸다. 그는 수하 비장인 이영남(李英男)과 이운룡(李雲龍)을 데리고 배 4척에 나누어 타고 곤양 어귀로 도망쳐 육지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리하여 그가 거느린 수군 1만여 명이 모두 없어지게 되었다.
이를 본 이영남이 원균에게 말했다. “공은 수군절도사라는 높은 자리에 계시면서 이렇게 군사를 머리고 육지로 피하시면 뒷날 조정에서 죄를 물을 적에 무슨 말로 모면하시리오? 제 생각으로는 전라도에 구원을 청해서 한 번 싸워본 다음에, 그래도 이기지 못하면 퇴군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오.”
이 말을 듣자 원균은 이를 좇았다. 즉시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 청병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우리가 각자 책임을 맡은 분계(分界)가 따로 있는데 어찌 조정의 명령도 없이 마음대로 지경을 넘어갈 수 있겠는가?”하고 거절했다.
원균은 5, 6차나 이영남을 보내 간절히 청했고, 영남이 순신에게 다녀올 대마다 뱃머리에 앉아 바라보고 통곡했다.”
한편, <선조실록>에는 뒷날 조정에서 서인인 좌의정 김응남과 임금과 문답하는 자리에서, “순신이 일찍 출병해주지 않아 원균이 통곡했다”고 했으며, 좌승지 이덕열은, “원균이 열다섯 번이나 청병했어도 순신이 들어주지 않았다”고 모함한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당시 이순신이 바로 출전하지 못했던 이유는 조정의 명령 없이는 자신의 작전구역을 마음대로 벗어나 싸울 수 없는 제도상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수군은 독립부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전라도에 속한 부대였다. 명령체계도 전라관찰사 휘하였다.뿐만 아니라 원균이 15차나 원군을 청했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도 않는 모함이었다. 원균의 부하가 그 피 말리는 난중에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의 뱃길을 5, 6차가 아니라 무려 15차례나 왕복하면서 구원을 청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순신이 ‘각자 책임진 경계가 따로 있는데 조정의 명령도 없이 마음대로 넘어갈 수는 없다’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이순신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될 때 선조가 내린 유서를 다시 적어본다.‘조정의 명령도 없이 마음대로 넘어갈 수 없다’의 근거는 ‘제29호 비밀 병부’이다.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군세가 약했기 때문이었다. 왜적 함대는 수백 척이나 되는데 당시 이순신이 거느린 전함은 24척에 불과했다. 그런 까닭에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함대와 합세하여 출동하려 했던 것이다.
여수의 전라좌수영은 숨 가쁘게 돌아갔다.5월 1일. 이순신 휘하의 모든 장병들이 여수 좌수영에 집합했다.이 자리에서 이순신은 지금까지의 전황을 설명하고 경상도를 구하러 출전하는 문제에 관해 각자의 의견을 말하도록 했다.자신이 최고지휘관이라고 하여 일방적으로 명령한 것이 아니라 부하들의 의견도 듣고, 또 그들 자신의 결의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낙안군수 신호(申浩)를 비롯한 많은 장수가 본도(전라도)를 지키는 것이 옳지, 관할 구역이 아닌 경상도를 구하러 출동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면서 신중론을 제기했다. 그러자 군관 송희립(宋希立)이 나서서 이렇게 주장했다.
“대적이 침범하여 그 형세가 마구 뻗혔는데 앉아서 외로운 성을 지킨다고 해서 그 성이 보존될 수가 없으니 출전해야 마땅합니다. 출전하여 다행히 이기면 적의 기세를 꺾을 것이고, 혹시 불행히 전사한다 하더라도 신하 된 도리로서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이어서 녹도 만호 정운(鄭運)도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 나라의 은혜를 입고 국록을 먹던 신하로서 어찌 이럴 때 죽지 않고 감히 앉아서 볼 수만 있겠습니까? 적군을 치는데 전라도 경상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영남은 호남의 울타리인데 울타리가 무너지면 여기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오. 이제 군병을 이끌고 나가 쳐서 한편으로는 영남을 돕고, 한편으로는 호남을 보호할 생각을 아니하고, 그저 머뭇거리면서 바라만 보고 눈앞의 편안함만 찾으려 든다면 그야말로 적을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라 하겠소!”
여러 장수의 논란을 듣고 있던 이순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그대들의 생각을 시험해본 것이요. 이제 출병을 결정한 이상 감히 다른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용서 없이 군율에 처할 것이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全羅左道水軍節度使 李舜臣)에게 내리는 명령
그대는 한 지역에 대하여 나의 위임을 받았으니 맡은 바 책임이 무겁다. 일반적으로 군대를 출동하여 사태에 대응하여 백성의 치안을 확보하고 적을 막아내는 데 있어서 정상적인 사무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관계가 있지만, 간혹 나와 그대만이 단독으로 처리해야 할 사건에 대하여서는 비밀 병부(兵符)가 아니면 실시할 수가 없으며, 또 뜻밖에 야기되는 사태도 예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만일 비상사태에 대한 명령이 있을 때에는 비밀 병부와 맞추어 보아 의심이 없다고 인정된 후에야 명령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제29호의 비밀 병부를 찍어서 내려주는 것이니 너는 이를 수령하라. 1591년(선조 24년) 2월 15일
지금이나 옛날이나 한 지역을 관할하는 장수가 군대를 거느리고 관할지역 밖으로 출동하는 일은 사태가 매우 심각한 경우가 아니고는 철저히 금지되었다. 이는 뜻밖에 야기되는 사태의 예방, 즉 반역 등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다.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인 1592년 4월 20일경부터 경상우수사 원균이 전라좌수영에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전라좌수영의 군사들이 곧바로 출동할 수 없었던 것은 이처럼 절도사가 자신의 관할구역 밖으로 군사를 이동할 때에는 비밀 병부와 함께 하달되는 왕의 명령이 없이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이런 절차를 무시하고 만약 원균이 전라좌수영에 빨리 출동하여 구원해 달라고 직접 부탁했다면, 그것은 요청하는 쪽에서 군사상 지휘체계를 잘 모르고 한 행위라고 할 것이다.
이순신의 군관 송희립은 임진왜란 전부터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까지 이순신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심복 중의 심복이다. 본관이 여산(礖山)인 그는 명종 8년(1553년) 고흥에서 태어났고, 형 대립(大立), 아우 정립(挺立)과 함께 3형제가 모두 이순신의 휘하에서 싸웠다.이순신은 송희립을 깊이 신임해 중요한 일로 누군가를 보낼 때는 반드시 그를 보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낙안, 흥양, 보성 등지로 군량을 독촉할 때도 그를 보냈고, 도양장의 둔전을 시찰할 때도 그를 보냈으며, 동료 군관 김대복(金大福)이 병들어 누웠을 때도 송희립을 보냈다.그는 사격도 잘해서 이순신이 사슴을 잡아오라고 보내기도 했고, 이순신의 맏아들 회와 더불어 노루를 잡으러 가기도 했다. 도 전선을 만들 재목을 실어올 때 인솔 책임을 맡기기도 했다.송희립은 이순신의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 때도 통제사의 기함에 타고 이순신을 보좌했다. 송희립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전라좌수사를 지냈으며, 인조 원년(1623년)에 71세를 일기로 죽었다.
녹도 만호 정운은 본관이 하동(河東)으로 중종 38년(1543년)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서 태어났다. 28세 대에 무과에 급제했으나 관운이 없어 30세에 겨우 태인 고을 거산찰방이 되었고, 그 뒤 웅천현감, 제주판관 등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전에 유성룡의 천거로 녹도 만호가 되었다. 정운도 이순신처럼 청렴결백하고 정의감이 높은 사람이었다. 비록 벼슬길에서는 크게 ?을 보지 못했지만 자신이 맡은 일에는 빈틈이 없고, 전쟁에서는 늘 앞장설 만큼 용감한 사람이어서 이순신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정운은 임진년 9월에 벌어진 부산포해전에서 적군의 총탄을 머리에 맞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순신은 부산해전이 끝난 뒤 장계에서 정운의 전사를 안타깝게 여겨 이렇게 보고했다. “(……) 녹도 만호 정운은 변란이 생긴 뒤로 충의심을 분발하여 적과 같이 죽기로 맹세하며 매번 싸움에 매양 앞장섰고, 부산 접전 때도 죽음을 무릎 쓰고 돌진하다가 적의 큰 철환이 이마를 뚫어 전사하니 지극히 슬프고 가슴 아픕니다.” 고향인 해남 대산리에 정운의 생가와 사당 충절사, 충신문과 동상이 있다. 또 다른 그의 유적으로는 순천 충무사, 고흥 쌍충사, 동래 몰운대순절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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