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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와 국방/안보 불감증

선조,결국 몽진을 나서다...

 

 

선조 결국 몽진을 나서다...

 

선조25년 4월 28일 충주패전을 보고받은 선조는 대신과 대간들을 불러 모아놓고 파천을 발의하게 된다. 그러자 모든 대신들이 부당함을 극언한다.

 

영충주부사 김귀영은

"전하! 종묘와 원릉이 모두 이곳에 있는데 어디로 가신다는 것입니까?한성을 고수하면서 원군을 기다림이 어떠하신지요!"

우승지 신집은

"전하! 만약 파천하신다면 저는 종묘 대문앞에서 자결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전 전하를 따르지 못하겠나이다!"

수찬 박동혁은

" 전하! 도성밖 민심을 보장할 수가 없나이다! 전하 가마군 인부들이 모두 도망갈 것 입니다!"

 

라면서 목놓아 통곡하자 선조는 얼굴빛이 변하면서 내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임금이 먼저 파천주장에 종실 어른인 해풍군과 욍실 사람들 수십명이 모여 파천이 불가하다며 통곡하였다. 이에 선조는 "도성은 버리지 않겠다" 면서 안심을 시키면서 파천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선조는 징병체찰사 이원익,최흥원을 조용히 불러 각각 관서(평안도),해서(황해도)로 보내 파천시 영접준비와 백성들을 무마하는 임무를 주어 보냈다.

 

파천문제는 영의정 이산해,좌의정 유성룡의 반대기 극심하였는데 갑자기 영의정 이산해가 찬성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자 모든 대신들이 부당함을 아뢰고 양사에서 파면을 요청하였으나 선조는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쯤에는 도성 백성들이 대부분 흩어지고 공백상태가 되었다.

 

도승지 신잡이 선조의 파천전교를 하명받고 나오자 유성룡은 "파천은 모두가 분개하고 있는데 무슨 망씀인가?" 그러자 영의정 이산해가 "옛날에도 피난한 적이 있는데 어찌하여 꼭 만류하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유성룡은 선조의 태도로 보아 도성을 버리고 파천가는 것은 시간문제로 판단하고 요동땅으로 도망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약을 대비하여 지난번 귀양까지 간 적은 있으나 다시 세자책봉을 건의하기로 하고 주청하였다.

 

유성룡: " 전하! 적군의 기세가 날로 급박함에 세자를 세워 인심이 정착할 곳이 있게 함이 어떠하신지요!"

선조: 중전이 우너자를 낳으면 처리하기 어려운게 아닌가?"

유성룡:" 송나라 인종은 겨우 서른 나이에 사마광 같은 신하가 세자를 세우자고 주청을 드렸나이다"

선조: "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세자가 될 만 하다"

우승지 신잡이 다시 세자 책봉문제를 주청드리자 선조는 대신들을 불러 모았다.

선조: "나라가 위태로우니 경들은 누구를 세자로 책봉함이 좋겠소?"

대신들: "이는 성상께서 결정할 일이 옵니다!"

 

서너차례 반복한 후에 선조는 대신들의 마음을 알고 있었으며 세자를 세우면 자신의 권력약화를 우려하여 시간을 끌어 세자 책봉에 대한 지연전술을 쓰기로 하였다. 그러자 영의정 이산해가 자리를 뜨려하자 우승지 신집이 오늘 기필코 결정해야 한다고 강변하자, 선조는 한참 생각하다가

 

선조: "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그를 세워 세자로 삼고 싶은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대신들: "종묘사직과 생민들의 복이나이다!"

                                                        -선조25년4월28일,선조실록-

선조는 세자에게 왕위를 양위한다면서 대신들의 의중을 떠보았으나, 유성룡은 선위를 절대 반대하는 등 충성심을 시험하였다. 선조는 유성룡에 대하여 파천반대,세자책봉 주청 등으로 마음이 상하여 앙갚음 생각하고 있었다.

 

4월30일.궁궐내에는 군마들로 파천준비에 분주했다.비는 온종일 내리고 있었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망가고 왕족,궁녀,대신들 100여명이 출발했다.홍제원에 다다러 숙의 이하는 교자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인들의 통공속에 비를 맞으며 벽제관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는데 반찬도 없이 대부분이 굶었다

                                                       - 선조25년4월30일,선조실록-

 

백성들은 임금이 떠나고 한성수비군도 도망가자 궁궐에 난입하여 형조와 노비문서를 관리하던 장예원에 불을 지르고 경북궁,창덕궁,창경궁에도 불을 질렀다. 조신 사대부 지배채재에 대한 분노의 불길이었다.

 

어둠속에 임진강에 도착했다.비는 그쳤으나 강물이 불어 범람하고 있었고 길바닥은 진흙길로 질펀하였다. 나룻배 5-6척만 있었는데 대소간에 서로 먼저 타려고 난리였다.질서도 문란하고 오합지졸이었다. 선조는 배를타고 묵묵히 기다렸다. 내시에게 술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가져오지 못했다고 했다.차를 한잔 할 수 있느냐고 했지만 차도 못가져 왔다고 했다. 선조는 갈증을 참고 아무말이 없었다.내의원 운용이란 사람이 상투속에서 사탕 반덩어리를 꺼내 강물에 타서 드렸다. 강변 정자에 불을 질러 밝히면서 겨우 강을 건너 동파관에 도착했다.사경(새벽1-3시)에 겨우 �은 진지를 드렸다. 세자 이하는 굶었다. 좌의정 유성룡이 백미 3되를 구해와서 다음날 아침 밥을 지어 드렸다.

                                                         - 박정량, 기재사초-

 

선조25년 5월1일.임진나루 건너편 동파관이 어수선 했다. 비가내린 땅은 질펀하였고 빗속을 뚫고 모래재와 벽제역을 지나 한밤중에 동파관에 도착했다. 왜란발발 20여일이 채 되지 않아 임진강 북쪽까지 쫓겨왔다.

선조는 대신들을 모아 놓고 유성룡을 보면서

" 경이 항상 나라� 방비가 소홀하다고 경계하더니 마침내 이지경이 되었구나!" 하면서 눈물을 흘리니 대신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시종이 가지고 온 소주 한병으로 대신들과 한잔씩 마셨다. 찬성 최황이 쌀 두말을 가지고 와서 임금께 바쳤다.                                                - 윤주형, 문소만록-

 

아침이 되자 선조는 대신 이산해와 유성룡을 불러 손으로 가슴을 치며 괴로운 모습으로 일렀다.

" 이모(이산해)야!,유모(유성룡)야!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꺼리거나 숨기지 말고 속에 있는 생각을 털어놓고 말하라!"

또 윤두수를 불러앞으로 나오게 하여 하문하니 신하들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얼런 대답하지 목하였다.                 - 선조수정신록. 선조25년.5.1-

 

선조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니였다. 대신들을 잇달아 부른 것은 '압록강 너머 명나라로 도주하자'고 말 할 참이었다. 선조가 도승지 이항복에게

"승지의 뜻은 어떠한고?"

이항복: 상감께서 의주에는 머물만 하옵니다.만약 형세와 힘이 궁하여 팔도가 모두 함락 된다면 바로 명나라로 가서 호소할 수 있습니다!" 선조는 '명나라로 가서'란 말이 선조의 속뜻과 부합되었다.

윤두수는 평안도가 아니라 함경도를 권유했다.

"함경도는 원래 군사와 말이 날래ㄱ,함흥과 경성은 모두 천연의 요새로 믿을 만 하니 재를 넘어 북쪽으로 감이 어떠하신지요!"

그러나 선조는 윤두수의 말은 무시하고

"승지의 말이 어떠한가?"

의주로 가는 방안을 논의하자는 것인데, 의주는 요동행을 뜻했다. 나라는 망해도 선조는 자신의 살길은 �겠다는 것이었다. 선조의 뜻이 요동땅에 있슴이 분명해 지는 찰라, 좌의정 유성룡 왈,

" 전하! 안됩니다! 대가(임금가마)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땅이 되지 않습니다!"

선조는

"내부(內附:명나라에 빌 붙는것)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유성룡은 거듭 안된다고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선조25년 5.1-

 

내부란 요동내부책(遙東內附策)을 말하는 것으로 이 경우 조선은 명나라의 속국ㅇ리 되는 것이다. 유성룡은 절대절명의 위기라고 생각했다.국왕과 대신들이 나라를 버리고 도주하면 그것으로 조선은 멸망하는 것이기에 유성룡은 극구 반대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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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의 진격로와 조선의 방어전

왜군의 침입과 조선군의 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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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중요한 전기로 만약 선조와 대신들이 압록강을 건넜다면 조선은 이래저래 망했을 것이다. 일본이 차지하거나 명나라의 속국이 되거나 또는 명나라와 일본이 반쪽식 나누어 가져 갈지도 모른다. 이항복과 유성룡이 이 문제로 논쟁했다.

 

이항복: "신이 아뢴 것은 곧장 압록강을 건너자고 한 것이 아니라 극단의 경우를 두고 한 말입니다."

유성룡:"지금 관동(강원도)와 관북(함경도) 등 여러 도가 그대로 있고 호남에서는 충의로운 인사들이 곧 벌떼처럼 일어날 터인데 어떻게 일을 갑자기 논할 수 있겠는가?" 이항복이 끝내 대답을 못하고 어전을 나오자 유성룡이 이항복을 책망했다.

" 어떻게 경솔하게 나라를 버리자는 의견을 내놓는가! 그대가 비록 길가에서 임금을 따라 죽더라도 궁녀나 내시의 충성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이 한번 퍼지면 인심이 와해될 것이니 누가 수습할 수 있겠는가!" 이에 이항복이 사과했다.                                                    -국조보감,선조25년 5월-

 

선조실록에도 "유성룡의 질책에 이항복이 사과했다" 라고 전한다.

이항복은 서인,유성룡은 동인에서 분파한 남인이지만 이는 당파싸움이 아니라 둘다 국가를 앞세우는 인물로 이항복은 여러차례 사과하며 당파를 초월한 사고였다.

 

유성룡의 말대로 아직 반격의 기회는 남아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일본 수군을 격퇴하고 있으며 호남을 보호하고 의병이 가기지에서 궐기하고 있는데 임금의 대가가 압록강을 건너 간다면 누가 목숨바쳐 의병을 일으키고 일본군과 싸우겠는가? 그러나 유성룡은 이일로 선조의 눈밖에 난다.선조는 한번 눈밖에 난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복을 가하는 인물로 그 순간이 오래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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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몽진을 떠나면서 거의 이성을 잃고 오로지 요동땅으로 도망 갈 궁리만 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그래고 자신의 권력을 손상당하는 세장책봉에 대하여 대신들의 마음을 읽기에 노심초사하면서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몽진을 떠난다. 공격하는 일본군에 대한 어떠한 대비책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도망가는 일에만 몰두하는 지도자...

 

비내리는 몽진길에 나선 선조 임금도 한심하였을 것이다. 일국의 임금으로 전권을 휘두르던 자신이 백여명의 대신과 시녀들을 대리고 밥을 굶어가며 임진강 나루터에서 배를 기다리는 자신이 초라하였을 것이다. 유일하게 유성룡에게 국방의 소홀했던 점을 실토하는데... 그러나 이미 늦었다. 나라가 망하느냐 하는 절대절명의 기로에서 명나라로 망명을 생각하는 선조는 오로지 자신만이 살기를 바랐던 무능한 임금이었던 것이다.

 

남쪽에서 수시로 올라오는 장계에는 이순신이 1차 해전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호남 각지에서 근왕병을 모집하여 일군을 공격하고 의병들이 각지에서 준동하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그들을 지원하여 도와 줄 것인가 보다 오로지 북으로 도망가는 일이 급하였던 선조였다.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명의 지원군이 오기를 바라지만 명나라는 조선을 의심하여 확인하는 등 신중한 출병을 검토한다. 당시 명나라도 자국내 여러 반란문제로 어려운 처지라 결정이 어려웠던 시기였다.

 

이조말엽 대한제국이 일본에 넘어갈 즈음이나, 6.25 직전 이승만 정권, 오늘날 참여정부의 모습이 너무나 닮은 꼴이라 안타깝다. 민족의 운명을 불행으로 끌고가는 것은 백성이 아니라 위정자들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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