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안보와 국방/안보 불감증

조선수군 2차 출동

 

조선수군 2차 출동

 

조선 수군의 2차 출동은 5월 29일부터 6월 10일까지 11일간의 출동이었다.
당초에는 6월 4일 출동하기 위해, 전라 우수영에 연락하여 3일까지 합류하기로 약속하였는데, 5월 27일 원균으로부터 일본수군이 사천, 곤양까지 진출해 왔다는 급보를 받고 계획을 앞당겨 전라좌수군의 단독출전이 되었다. 2차 출동에서부터 거북선이 처음 전투에 참가하였다고 알려져 있다.(注:이 기록에 관해서는 1차 출동시 전투편성에 돌격장이란 직책이 있었던걸로 봐서 1차 출동시에도 거북선이 출동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습니다)

 

1.사천 해전(5월 29일)
일본전함 10척이 사천, 곤양까지 진출해 왔다는 원균의 급보를 받은 전라좌수영 함대는 우수영과의 약속보다 앞서 판옥선 23척, 협선 15척으로 함대를 편성하고 좌별장 우후 이몽구와 같이 5월 29일 새벽에 수영을 출발하였다. 남해 노량으로 가는 도중 경상 우수영 판옥선 3척 이끌고 대기하고 있던 원균과 섬진강 하구의 하동 부근에서 합류하였고, 일본수군이 사천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함대를 이동시켜 사천을 향해 항해하고 있을 때 일본전함 한 척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전부장 이순신과 남해 현령 기효근이 나아가 격파하여 서전에 사기를 북돋았다.


 

사천만(泗川灣)에 도착하여 보니 일본군은 형세가 험준한 곳에 수백 명씩 진을 치고 대항할 태세였으며, 바다에는 12척의 적선이 정박해 있었다. 만(灣)의 입구로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바다가 얕고 벌써 썰물이라 판옥선같은 큰 배가 쉽게 돌진할 수 없고, 날도 어두워져 일단 함대를 뒤로 물린 채 공격을 삼가 하였다.실질적인 연함 함대의 지휘관이었던 이순신장군이 일본군의 헛점을 노려 적을 큰 바다로 유인한 다음 적을 궤멸시킬 계획을 세우고 함대를 천천히 후퇴시켰다.함대가 뱃머리를 돌려 10리도 못나와 이순신 장군의 예상은 적중하였다. 일본군들이 산에서 내려와 배에 타고 조선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때마침 저녁 조수도 밀려들어 큰 배도 활동할 수 있게 되어, 조선함대는 일제히 뱃머리를 돌려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거북선이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위력을 드러내었다. 적선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좌충우돌하며, 각종 총통들이 불을 뿜을 때마다 일본전함에서는 불꽃이 피어 올랐다. 일본수군은 처음 보는 신병기에 겁을 먹고 속수 무책이었다. 이런 와중에 권준, 어여담, 배홍립, 정운, 김완, 이몽구, 김인영, 가안책, 송성, 이웅화등의 다른 판옥선들도 모든 화력을 동원해 적선을 격침시켰다.


 

이 해전은 앞서 다른 해전보다 치열하여 이순신은 전투 중에 왼쪽어깨에 조총을 맞아 중상을 입고 이후 수년동안 고생하게 된다. 전과로는 적함 12척을 격침시켰다. 날이 저물어 사천만 모자랑포로 이동해 그날 밤을 보냈다.


2. 당포해전(6월 2일)
사천해전에서 승리한 조선수군함대는 모자랑포를 출발하여 6월 1일 정오쯤에 고성땅 사량도에서 도착하여 하룻밤 휴식을 취하였다. 밤 사이 일본수군이 당포선창에 정박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2일 아침 8시경에 사량도를 출발하여 10시경에 당포에 도착하니 적선 21척(대선 9척,중소선12척)이 포구에 정박해 있고 약 300여 명의 일본군들은 육지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하고 있었다.

공격 신호와 함께 함대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포구 안으로 진격하였는데 적함 중 판옥선 크기에 누각이 있는 대선이 있었는데, 붉은 비단휘장을 들어친 대장의 배로 누각 안에서는 적장이 꼼짝도 않고 앉아서 지휘하고 있었다.

먼저 거북선이 공격하여 대장군전으로 배에 구멍을 내고, 귀두로 충파를 하니 적함이 흔들리는 사이에 중위장 권준이 적장을 활로 쏘아 맞히고, 바다에 떨어진 그의 목을 우척후장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베어 올렸다. 그러자 일본군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져 갈팡질팡 겁을 내어 도망치는데 총에 맞고 화살에 맞은 자들의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적선 21척을 모조리 격침시켰다

이순신은 패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육지에 상륙하려 하였으나 마침 이때 대선 20여 척이 많은 소선을 이끌고 거제도에 닿았다는 척후선의 보고를 받고, 추격을 포기하고 일본군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서 섬멸하기 위해 방향을 바꾸어 바다로 나오자 일본함대는 5리쯤 되는 곳에서 조선함대를 발견하고 뱃머리를 돌려 도주해 버렸다.

날이 저물어 진주 창선도로 물러나 숙영을 하고 3일 아침 출항하여 개이도 일대를 수색하였으나 적함을 찾지 못하고 고성 고둔포에서 숙영했다.

4일 당포 앞 바다로 이동하여 적을 찾고 있었는데, 정오쯤에 전라 우수영 이억기가 이끄는 함대(판옥선 25척)가 도착하여 합류하였다. 이로써 조선수군은 전라좌,우수영,경상 우수영의 연합함대를 편성하게 되어, 판옥선 총 51척(전라좌 수영 23척, 우수영 25척, 경상 우수영 3척)의 대함대가 편성되었다.

3. 당항포 해전(6월 5일)

연합함대를 편성한 조선수군은 하루동안 작전회의를 하며 착량포에서 숙영했다.
5일 조선에 귀화한 일본인 김모등 백성들이 작은 배를 타고 와서 당포에서 달아난 적함들이 거제도를 지나 당항포에 있다고 알려왔다. 이동 중 일본전함 6척(대선 4척, 소선 2척)을 발견하고 선두의 정운 등이 달려가 격침시켜 버렸다. 이 일본전함들은 진주성 근처을 노략질하다 그곳을 지나던 유숭인의 기병대에 발견되어 쫓겨서 배를 타고 도망가던 중 조선수군에게 걸려든 것이었다.(진해 해전)

당항포에 이르러 그 곳 지형을 살펴본 즉 포구가 20여리나 깊숙이 들어가 있으나 그 폭이 넓어서 전선이 들어갈만 하므로 먼저 척후선을 보냈더니 적이 있다는 신호로 신기전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순신은 전선 4척을 포구어귀에 남겨 두어 후미를 경계토록 하고, 당항포에 이르니 적선 26척(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13척)이 포구 안에 정박해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배는 3층누각이 있었고 검은 휘장 안에 장수인 듯한 자가 앉아서 지휘를 하고 있었다.

거북선을 앞세우고 뚫고 들어가 3도 전선이 교대로 집중공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이 조총을 쏘으며 필사적으로 반격을 하자, 이순신은 작전을 바뀌어 함대를 둘로 나누어 약간의 탈출로를 만들어 주자 일본군은 기함을 호위하며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조선연합함대는 다시 적을 포위하고 협격하였다. 거북선과 판옥선에서 각종 총통들과 신기전이 불을 뿜을 때마다 일본전함들이 격침되었다. 곧 적의 대장선이 불길에 휩싸이고 적의 장수가 화살에 맞아 바다로 떨어졌다.

적함 25척을 격침시켰다. 1척이 남아 있었으나 그대로 둔 채 철수했다. 넓은 바다에서 군사들을 휴식케 하고 밤을 보내며 부장 이순신으로 하여금 강 입구에 매복하고 있다가 남은 적함 1척이 탈출을 시도할 때 요격하도록 하였다. 6일 새벽 탈출을 시도하던 적함은 조선전함의 포격을 받고 격침되었다.

전투가 끝난 9시 경에 일본전함을 불태우고 있는데 경상 우수사 원균과 남해현령 기효근 등이 뒤쫓아와 죽은 일본군의 목을 베니 모두 50여구나 되었다.

4. 율포 해전(6월 7일)

고성 정을우장으로 이동하여 하룻밤을 지내고 천성, 가덕 근방 을 수색하던 중, 적선1척이 율포에서 부산으로 향하다가 조선수군을 보고 달아났으나 율포 바깥 바다에서 대선 3척은 나포되고, 대선 2척과 중선1척은 격침되었다.
8일 거제도 송진포, 9일에는 가덕도 천성, 가덕까지 수색하였으나 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10일 미조항으로 귀항해 각각의 수영으로 개선하였다. 2차출동에서 조선군 피해는 전함손실은 없고, 전사 11명, 부상47명의 손상을 입었다. 다섯차례의 해전에서 일본군의 피해는 전함 72척이 격침되었고, 전상자는 1만명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일본 수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히사가 포함되어 있다(당항포 해전에서 전사)

 

----------------------------------------------------------------------------------------


1592 5 29.

이 날은 이순신 함대가 두 번째로 출동한 날이다.

2차 출동에서는 사천포(泗川浦), 당포(唐浦), 당항포(唐項浦), 율포(栗浦) 등지에서

네 차례의 해전을 치렀다. 그리고 6 14이순신은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장계의 이름은 당포파왜병장(唐浦波倭兵狀).

모두 6천여 자로 된 이 장계는 이순신의 장계들 중에서 가장 긴 것이다.

 

2차 출동에서는 조선 함대를 중세기 세계 최강의 함대로 끌어올린 신병기가 등장했다.

 

거북선이었다.

 

당포파왜병장에는 거북선 출전에 따른 세 편의 특집(特輯)이 기록으로 남아 전해진다.

그간 거북선과 학익진 관계 기록이 태무하다고 알려왔지만

결코 그렇지 않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잠 못 이루는 이순신 수사

 

1차 출동에서 조선함대는 왜선 40여 척을 격파했다.

왜군의 사상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인명 살상보다 병선 깨뜨리기에 중점을 둔 해전이었으므로 왜군측 사상자 대부분은 해전 초 왜선단에 화력이 집중될 무렵에 발생했을 것이다.해전에 소요된 시간은 30 1시간 정도. 이 시간 동안 왜군들이 결사 반격에 나섰던 시간은 초기 15분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왜군측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들로는 조선 함대에 심한 타격을 가할 수 없었고, 이미 초동진화 단계를 넘어 불타고 있는 배를 지키기 위해 무모한 희생을 치를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바람과 천둥처럼 일시에 해치웠다는 장계의 기록은 이순신이 왜선과 왜군을 동시에 해치우고자 했음을 말해 준다.

 

왜군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곧바로 도망쳤고 (대부분의 경우 본능적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약 끝까지 항전했었다면 불에 타 죽었을 것이다.

 

아무튼 1차 출동은 병사들에게 값진 승리와 자신감을 가져다 주었다. 또한 사령관과 지휘부에 대한 병사들의 신뢰와 존경심도 더욱 커졌으며, 함대의 결속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이 역시 커다란 수확이었다.

 

이순신에게도 왜군 기동함대의 전력을 실전을 통해 요모조모 확인할 수 있는 값진 성과였다.고된 훈련만이 살아남는 길그러나 빛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이순신에게는 값진 성과 못지않게 가슴을 졸이게 하는 고민거리들도 많이 생겨났다.쫓기는 신세가 된 임금, 왜적의 총칼 아래 유린당하고 있을 백성들, 언제고 전라도를 향해 수륙 양면으로 쳐들어올 왜적들……

 

여수로 귀항해 온 이후 이순신은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쉽게 잠을 이룰 수도 없었지만 이 같은 위기를 타개해 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특히 함대의 존재가 드러난 만큼 여기에 대한 각별한 대책이 필요했다. 지난번에는 적을 찾아다녔지만 이제부터는 그 반대의 상황이 전개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의 해전은 기습전이 아닌 전면전이 될 공산이 컸다.

 

전면전은 자칫 백병전을 이어질 소지가 많다.왜군들이 화공(火攻)에 대비해서 선체를 젓은 가마니 등으로 덮고 돌격해 온다면 백병전은 불가피해질 것이며, 그것은 이순신이 염려하는 최악의 해전 상황이었다.수군의 60%는 격군(格軍 : 노꾼)이었고, 나머지 병사들 중에서 정식 군사는 5백 명 수준이었다. 이에 비하여 5만에서 10만 명 규모로 들이닥친 왜군들은 백병전에 능한 무사들인지라 백병전이 있게 되면 조선함대는 단 한 차례의 해전도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전라우수영 함대의 형편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예측되는 앞날의 상황들은 대체로 조선함대에는 극히 불리한 것들이었다. 그 와중에 군사들과 백성들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임금과 조정은 어디에 있는지 소식이 두절된 상태였고, 임금이 왜군의 포로가 되었다느니,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피난을 갔다느니 하는 별별 소문과 유언비어들이 난무하고 있었다.사변에 대비하여 그 동안 많은 준비를 해 왔지만 막상 전쟁이 터지고 보니 크고 작은 문제들이 위기에 위기를 만들고 있었다.이순신은 전라좌수사라는 변방의 장수 신분으로서 난국을 헤쳐나가야 했다.

 

2차 출동을 앞두고 이순신은 전면전에 대비한 전술과 많은 수의 왜군 함대를 상대할 경우를 생각하며 다양한 해전술을 구상했다.어떤 경우에든 백병전을 차단하고 시종 화력전으로 전투를 이끌어간다는 것이 이순신 해전의 대원칙이자 필승의 전략이었다.

 

이 원칙은 옥포해전 때에도 적용되어 지켜졌다. 그러나 그때는 기습전이었고, 적의 규모는 조선 함대보다 적었다. 앞으로의 상황은 그 반대가 될 공산이 컸다.한편, 이순신은 이러한 난제들을 일찍부터 예상해 왔고, 예상되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위기관리(Risk Management)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그 결과 나온 것이 학익진법(鶴翼陣法)과 거북선이다. 학익진이 필승의 진법이라면 거북선은 필승의 전함이다.함대는 2차 출동 전까지 거북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전술과 진법을 집중적으로 훈련했다. 훈련을 하면 할수록 새롭게 얻어지는 것들이 많았다.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거북선을 활용한 해전의 이치(理致)들은 더욱 정교히 다듬어졌다.거북선에는 특별히 힘이 세고 지구력이 강한 격군들이 차출되었다. 거북선들이 적진을 누비며 좌충우돌의 충돌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빠른 기동력은 필수였다.사수들 역시 민첩하고 근성이 강한 이들로 선발했다. 적진 깊숙이 들어가서 명중탄을 퍼부어야 하기 때문이다.

속도가 너무 늦다! 더 빨리 전진하라!

특공조는 공격선에 대기하라!

노를 저어라! 더 힘껏 저어라!

훈련은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실전을 뛰어넘는 맹훈련이었다.훈련은 다양한 진법 연마에도 집중되었다. 공격과 방어, 유인과 포위, 판옥선 및 거북선의 합동전술과 거북선 단독의 돌격전술 등등, 훈련은 하루에도 수 차례 걸쳐 반복되었다.

돛을 올려라!

돛을 내려라!

북을 울려라!

함대 군악에 맞춰 전진 앞으로!

공격선에 정렬!

학익진을 펼쳐라!

이순신의 명령은 곧바로 수기(手旗)와 북, 대포 등 다양한 신호로 전달됐는데, 신호에 즉각 반응하지 못하는 대장들은 훈련 중에는 물론 훈련이 끝난 후 열리는 작전회의에서 엄중한 질책을 받아야 했다.이순신이 부임해 오 이래 숫한 훈련이 있어 왔지만 이 기간 동안에 실시된 훈련은 가혹할 만치 고되고 힘든 것이었다. 또한 군사들이 숙지해야 할 역할과 임무들도 더욱 많아졌다.

 

하지만 요령을 피우는 이들은 없었다. 훈련교관들의 눈을 피할 수도 없었지만, 그 길이 자신이 살고 시산시해(屍山屍海 : 시체로 된 산과 바다)가 되는 것을 피하는 길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

 

5월 중순경이 되자 한성을 거점화한 왜의 선봉부대들은 또다시 파죽지세로 북상을 시작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과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임진강을 돌파하고 평양으로 향했으며, 카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은 철령을 넘어 원산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한성의 왜군 사령부에서는 왜군 총사령과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 1573 1655)가 조선에 상륙한 전 왜군부대들을 지휘했다.

 

왜군 선봉부대들의 북상과 때를 같이 하여 여타의 부대들은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지역에서 각기 영지 구축을 시작했다.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큐슈 북단 나고야에 전략사령부를 두고 조선으로 건너가 왜군들을 총지휘하고 있었다.나고야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와 사연이 많은 곳이다.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이며, 백제, 신라, 고구려인들도 이 지역과 많은 교류가 있었다. 오늘날에도 많은 유적과 도자기 등 한반도에서 전승된 문화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일본 역사 속에 한반도를 정복한 것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출병지도 바로 이곳이다.

 

히데요시는 이곳에서 옥포 등지에서의 패전보(敗戰報)를 받았다. 그 내용인즉, 우리 해군들이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조선 해군의 기습으로 패주해 돌아왔으며, 수치감을 이기지 못하고 할복한 이들이 있었던 반면에 살아서 돌아온 것을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여기는 자들도 많았다. 적과 맞섰던 우리 함대들은 모든 전선을 잃고 일부만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히데요시에게는 해괴하고 황당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바다의 나라라는 일본의 해군들이 그까짓 조선 해군에게 참패했다는 사실, 더구나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켜냈어야 할 전선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사실, 모든 전선을 잃었다는 사실 등은 납득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전쟁에 관한 한 신기(神技)에 가까울 만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는 히데요시로서도 이 패전의 진상은 수수께끼일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소식으로만 전해진 사실만 가지고는 어떠한 것도 명확하지가 않았다. 답답한 일이었다.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다 도망가고 없다던 조선 해군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한성이 함락되고 조선의 왕도 도망을 친 시점에 있은 적의 도발이었기에 더욱 이상했다.히데요시는 정확한 정보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부산 주둔 사령부에 전령을 띄워 조선 해군의 실체와 행방, 그리고 그간의 해전 상황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신속히 보고하라!고 독촉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보고서가 도착했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던 사실 외에 새롭게 밝혀진 것이라고는 적은 전라도 지역에 근거를 둔 조선 해군인 듯하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행방과 병력, 적장에 관한 것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00쳐 척이나 되는 전선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는데, 이것이 적이 보유한 모든 병력인지 아니면 일부인지는 아직 확인할 길이 없다. 옥포에서는 수천의 사상자가 생겼고 거의 모든 전선이 해전 중 파괴되거나 전소되었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선을 잃었다는 것은 사실로 드러난 셈이었다. 그 순간 히데요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성난 야수처럼 으르렁대기 시작했다.이 놀라운 사태를 의논하기 위해 황급히 불려온 군사(軍師) 구로다 간베에(黑田官兵衛)를 비롯한 히데요시의 핵심 측근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포함한 다이로(大老 : 히데요시를 보좌하는 최고의 참모직. 모두 다섯 명으로 구성되어 5大老라고 함)들은 머리를 다다미 바닥에 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그들이 판단하기로도 이 사건은 실로 충격적이었고, 간단히 설명될 수 없는 문제였다. 또한 섣불리 나섰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모두 눈치를 살피면서 히데요시의 노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잠자코 있겠다는 심사였다.히데요시는 그렇게 한참 서성대다가 갑자기 무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그의 참모들은 그가 이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그리고는 더욱 긴장하여 머리를 바닥에 바짝 밀착시켰다.

 

통상적인 해전 방식으로 이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이해해 보려고 했던 히데요시는 마침내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너무 싱거운 전쟁을 치른 탓에 모두 나태해진 것이 분명하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적은 바로 나태와 방심이 아닌가. 이렇게 어영부영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그렇지 않아도 뜻밖이다 싶은 정도로 완벽하게 승세를 굳혀가고 있는 자신의 군대가 늘 걱정이었다.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개선장군 행세를 하고 있는 대장들이 많았다. 긴장이 풀어진 군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피의 시대를 살아온 그의 신조였기에 언젠가 한번은 귀가 번쩍 뜨이게 해 줄 작정이었다.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무슨 빌미를 잡아 군기를 잡을까하고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이다.드디어 히데요시가 무겁고도 날카로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조선에 건너간 대장들이 과연 나의 의중을 충심으로 이행하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잡아서 내 앞에 무릎을 꿇리라로 했던 조선 왕은 놓치고, 우리 해군은 적의 놀림감이 되지 않았는가?서해 항로 개척과 전라도 공격을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은 걸 보면(대마도 맞은 편에 있는 거제도에 상륙하지 않았기에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격이다) 나의 명령이 재대로 전달되고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이 모두가 군의 기강이 해이해진 탓으로 그대들에게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같은 상황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이렇게 사납게 쏘아붙인 후, 히데요시는 모종의 결심을 내비치려는 듯 근엄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다음의 사항들을 우키다 사령부에 전하라.

첫째, 지체 말고 조선왕을 사로잡을 것.

둘째, 속히 전라도를 속지(屬地)로 삼아 원정군의 식량을 현지에서 조달케 할 것.

셋째, 남해안 일대를 거점화하고 성을 쌓을 것.

넷째, 남아 있는 조선의 해군들을 찾아내서 철저히 섬멸할 것.

다섯째, 서해안 돌파를 서두를 것.

 

 하지만 절대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 

 

                  20. 고독-첼로솔로[01:58]

                           /작곡 : 원일

                           /음악감독 : 원일

 
 
 

 

                  21. 절망-대금 [0:47]

                          /작곡 : 원일

                          /음악감독 : 원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