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안보와 국방/안보 불감증

이순신 :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1,2,3

순신 - 경상도로 구원 나가는 장계()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

 

삼가 구원병 나가는 일로 아뢰나이다.

이달 4 20일 도착한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晬)의 공문에서 말하기를, “적의 형세가 극성하여 부산, 동래, 양산이 이미 함락되었고, 적들은 내지(內池)로 향해 가고 있으므로, 본두 우수사에게 적선을 막아내기 위하여 수군을 모두 이끌고 바라로 나가라고 이미 지시하였기 때문에 경상도 여러 진()에는 전선이 1척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경상)우도에 변고가 생기면 즉시 와서 구원해야 할 일로 저정에 보고를 올렸는데, 지금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뜻을 (전라)감사와 병사들과도 의논하여 시행하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적의 형세가 극성하여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러 큰 진들이 연달아 함락되고 내지까지 침범당하니 지극히 통분하여 간담이 쪼개지는 듯 아픕니다. 이럴 때 신하된 자로서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라의 치욕을 씻고자 아니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나아가 같이 싸우라는 조정의 명령을 엎드려 기다리면서, 소속 수군과 각 고을 및 포구에는 전선을 정비하여 주장(主將)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라는 내용으로 급보를 띄웠으며 본 도의 감사 및 병마사와도 의논을 하였습니다.

 

지난 번 지시에서 사정 형편상 할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가는 기회를 크게 놓치는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은 멀리 있어서 지휘할 수 없으니, 도내의 주장(主將)의 지휘에 일임한다.”라고 하셨습니다.그러나 신은 주장의 한 사람일 뿐이므로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전라)겸관찰사 이광(李珖), 방어사 곽영(郭嶸), 병마절도사 최원(崔遠) 등에게도 지시문의 내용을 낱낱이 설명해 주는 한편, 경상도 순변사 이일(李鎰), 관찰사 김수, 우도수군절도사 원균 등에게도 그 도의 물길 사정과, 두 도의 수군이 모일 장소와, 적선 수와 그들이 현재 정박해 있는 곳, 그밖에 여러 가지 전략에 관한 일들을 전부 급히 회답해 달라는 내용으로 급히 공문을 띄웠습니다.

 

그리고 소속 각 고을과 포구에는 제반 전투 기구를 다시금 잘 손질해 놓고 명령을 기다리라는 내용으로 공문을 보내어 엄중히 신칙하였습니다. 왜적들이 침입해온 지 오래 되었으니 반드시 적들은 지쳐 있을 것이고 지니고 있는 전쟁 물자들 또한 다 떨어져 갈 것으로 생각되므로, 적들을 쳐야 할 시기는 바로 지금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앞뒤로 건너온 적선의 수가 5백여 척이나 된다고 하니, 우리 측의 위세와 무장을 엄중하게 갖추어 적을 습격할 태세를 보임으로써 적들이 무서워서 떨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영 소속의 방답(), 사도(蛇渡), 여도(呂島), 발포(鉢浦), 녹도(鹿島) 등 다섯 진()과 포구의 전선들만으로는 그 세력이 몹시 외롭고 약합니다. 그러므로 기타 수군이 나뉘어져 있는 순천, 낙안, 흥양, 보성 등 다섯 고을의 수령들도 규정에 따라 함께 거느리고 가야만 하겠기에 경상도로 구원 나가려면 거쳐야 되는 바다 길목에 있는 본영 앞바다로 일제히 도착하라고 급히 공문을 띄웠습니다.

 

수군들의 여러 장수들 중에 보성과 녹도 같은 곳은 오는 데 3-4일이나 걸리는 먼 곳에 있으므로 공문을 받고 나서 집합하려면 틀림없이 기일에 대어오기 힘들겠지만, 다른 여러 곳의 장수들은 모두 이달 29일에 본영 앞바다에 모이라고 분명히 지시한 후 곧바로 경상도로 구원 나갈 계획입니다. 경상도순변사, 겸관찰사, 우도수군절도사 등에게도 공문을 띄워 약속하였습니다. - 경상도로 구원 나가는 장계()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 (1592. 4. 27)

 

4 30이순신은 출동 준비를 완료하고 경상도로 출동하기 직전에 다시 장계를 올려 지난 수일 동안의 사정과 정보를 말하고 전투에 임하는 마음의 각오를 전하고 있다.

 

 

이순신 - 경상도로 구원 나가는 장계()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

 

삼가 사변에 대비하는 일로 아뢰나이다.

이달 4 29일 낮 12시경(午時)에 경상수사(元均)의 회답 공문이 왔는데 말하기를, “왜적의 배 5백여 척이 부산, 김해, 양산강, 명지도(鳴旨島; 김해군 명지면) 등 여러 곳에 정박한 후, 적들은 뭍으로 올라가서 제멋대로 날뛰고 있는데, 연해안 각 고을과 포구의 우리 병영(兵營)과 수영(水營)들은 거의 다 적의 수중에 떨어졌고, 성들도 함락되었으며, 봉화까지 끊어져버려 지극히 통부합니다. 그래서 본 도의 수군을 뽑아 출동시켜서 적선 10여 척을 추격하여 불태워버렸으나, 나날이 적병들이 늘어나서 그 세력이 더욱 성해짐으로써 적은 많고 우리는 적기 때문에 대적할 수 없었으며, 본영 역시 이미 함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양 도의 수군이 합세하여 적선을 친다면 뭍으로 오른 왜구들도 뒤를 돌아다보는 걱정거리가 생기게 될 것이니, 귀 도()의 전선들을 남김없이 거느리고 당포(唐浦) 앞바다로 달려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소속 해군 중위장인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 좌부장인 낙안 군수 신호(申浩), 우부장인 흥양 현감 배흥립(裵興立), 중부장인 광양 현감 어영담(魚泳潭), 유군장(遊軍將)인 발포 가장(假將; 임시장수)이자 본영의 군관인 훈련봉사 나대용(羅大用), 우부장인 보성 군수 김득광(金得光), 후부장인 녹도 만호 정운(鄭運), 좌척후장인 여도 권관 김인영(金仁英), 우척우장인 사도 첨사 김완(金浣), 한후장(悍後將)인 본영 군관 급제(及第) 최대성(崔大成), 참퇴장(斬退將; 도망가는 자를 참하는 장군)인 본영 군관 급제 배응록(裵應祿), 돌격장인 본영 군관 이언량(李彦良) 등과 지시 사항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선봉장은 우수사와 약속할 때 그 도의 장수 중에서 뽑아 정할 계획이고, 신의 우후 이몽구(李夢龜)를 본영(本營)의 유진장(留鎭將; 본영에 남아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장수)으로 정했으며, 방답, 사도, 여도, 녹도, 발포, 등 다섯 포구에는 신의 군관 중에서 담략이 있는 자를 가장(假將)으로 정하여 엄중히 신칙하여 보냈습니다.

 

신은 수군의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오늘 4 30일 새벽 4시경(寅時)에 출발할 계획이므로, 경상우도 소속이자 본영과 이웃하고 있는 진()인 남해현 미조항(彌助項), 상주포(尙州浦), 곡포(曲浦), 평산포(平山浦) 등 네 진은 이미 첩입군(疊入軍; 공동관할 지역의 군대. 공동관할 지역이기 때문에 전라수군 쪽에서도 군사적 요구나 작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곳임)으로 편입시켜 그곳 현령, 첨사, 만호 등이 군선을 정비하여 중간까지 나와서 기다리라는 내용의 비밀공문을 4 29일 새벽에 전령에게 주어 급히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 2시경(未時)에 신이 전령으로 보냈던 본영의 진무(鎭撫)인 순천 수군 이언호(李彦浩)가 급히 돌아와서 남해 고을 성 안의 관아와 민가들이 모조리 다 텅 비었고 굴뚝에는 연기라고는 전혀 나지 않아 쓸쓸하였으며, 창고의 문들은 이미 열려서 곡식들이 전부 흩어져 없어졌고, 무기고의 병기들 역시 전부 없어졌습니다. 군기창고 밖 행랑채에 다만 한 사람이 남아 있기에 그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온 성의 군사들이 왜적들이 이미 가까이 쳐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전부 도망쳐버렸으며, 현령과 첨사까지도 따라서 도망갔는데,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이 쌀섬을 등에 지고 장전(長箭)을 가지고 남문에서 달려 나오다가 화살 일부를 주었습니다.” 라고 보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장전을 살펴보니 분명히 곡포(曲浦)라고 새겨져 있었으므로 성을 비우고 도망갔다는 말이 그럴듯하였지만, 하인들의 하는 말인지라 꼭 그렇다고 믿기도 어려워서 신의 군관 송한련(宋漢連)에게 지시하기를,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도리어 적에게 군량을 대주어 점차 본 도(전라좌도)로 쳐들어와서 오랫동안 머물러서 퇴각하지 않아도 되도록 도와주슨 셈이 되니, 곡식창고와 무기창고를 불살라서 없애버리도록 하라.”고 전령을 급히 보냈습니다.

 

그러나 대개 흉측한적들이 세력을 떨쳐 패를 나누어 도적질하며 한 패는 내지로 향하여 전부 쳐부수고는 길게 달려가고, 또 한 패는 연해안을 따라 남김없이 쳐서 함락시키는데도 불구하고 육해군 모든 장수들이 하나도 막아서 싸우지 못하여 이미 적의 소굴로 되어버렸으며, 바닷가 진영으로서 남은 곳이라고는 오직 이(경상) 우수영과 남해, 평산포 등 네 진()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이 우수영 역시 함락되었고, 남해 섬 전체도 이미 무인지경이 되었다고 하는데, 소위 (경상)우수영은 신이 지키는 진()과 같은 바다로 서로 연이어 있고, 남해는 북소리나 나팔소리를 서로 들을 수 있고 앉아 있는 사람의 수까지 똑똑히 셀 수 있는 형편이므로, 본 도(전라좌도) 또한 왜적에게 침범당할 걱정이 조석(朝夕)으로 박두하였으니 지극히 한심합니다.[1][2]

 

본 도의 내지와 연해안 각 고을과 변두리를 방비하기 위하여 새로 뽑은 조방군(助防軍) 등 강한 정예 군사들은 모두 육전으로 나갔고, 변두리 작은 진지에는 병기를 가진 자가 매우 적으며, 수군들로는 단지 맨주먹의 군사들 뿐이어서 그 세력이 심히 약하지만 달리 왜적을 막아낼 계책이 없는 실정입니다.수군 중위장 순천 부사 권준(權俊)은 관찰사의 명령으로 바다에서 떠나 전주로 달려가서 그곳에서 사변에 대비하고 있습니다.그런데다가 장기간 임지에 있던 자들도 한번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만 들으면 가솔을 이끌고 짐을 꾸려 피난 가는 바람에 피난행렬이 길 위에 줄을 이었는데, 혹은 밤을 타서 도망가고, 혹은 틈을 엿보아 이사를 갑니다. 본영의 파수병들과 본고장 백성들 중에서 역시 이와 같이 하는 자들이 있으므로 신은 그 길목을 지키면서 도망가는 자들을 붙잡을 장수를 보냈는데, 도망가는 자 두 명을 잡아와서 우선 목을 베어 군중(軍中)에 효시함으로써 군사들의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경상도로 구원 나가라는 전하의 명령이 지극히 간곡할 뿐더러 신도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들은 뒤부터는 분노가 가슴 속에 서리고 쓰라림이 골수에 사무쳐서 한번 적의 소굴을 무찌름으로써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충성심이 자나 깨나 간절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경상우수사(元均)와 힘을 합쳐 적도들을 쳐부수고 섬멸할 것을 기약합니다.

 

그러나 첩입군(疊入郡: 우수영과 좌수영의 공동 관할 군)인 남해의 평산(平山) 등 네 곳 진장(鎭將)과 현령 등은 적의 얼굴도 보기 전에 먼저 피해 달아나버렸으니, 신의 외롭고 단출한 객지 군사들은 그 도의 물길이 험한지 평탄한지도 잘 알 수 없으며, 물길을 인도해 줄 배도 없고, 또 작전에 호응해 줄 장수도 없으므로 가벼이 출동하는 것은 또한 천리 뜻밖에 걱정도 없지 않을 뿐더러, 신의 소속 전선은 모두 합해도 30척도 죄지 못하므로 세력이 매우 약한 형편입니다. 전라 겸관찰사 이광(李珖)도 이미 이런 사정을 알고 본도(전라도)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 그의 소속 수군을 거느리고 신의 뒤를 따라 가서 힘을 합쳐 구원하라고 지시하였으므로, 비록 사정은 다급하지만, 구원선들이 다 오기를 기다렸다가 전략을 의논한 후 출발하여 바로 경상도로 나아갈 계획입니다. 흉악한 적도들이 벌써 조령을 넘어 머지않아 서울을 침범하게 되자 본도 겸관찰사(李珖)가 홀로 그 의로움을 떨쳐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곧바로 서울로 가서 전하를 보위하는 일에 힘쓸 계획을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하여 칼을 어루만지고 탄식하면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서울로 달려가서 먼저 내지로 쳐들어간 왜적들부터 꺾어 버리고 싶었으나, 변경을 지키는 신하의 몸으로 멋대로 할 수도 없는지라 그저 답답해하면서 분을 참고 스스로 억누르며 엎드려 조정의 지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지금 왜적의 세력이 왕성해진 것은 모두 적들과 바다에서 싸우지 않고 적들이 멋대로 뭍으로 올라가게 내버려 둔 때문입니다.경상도의 바닷가 여러 고을들은 깊은 해자와 높은 성루로 튼튼한 곳이 많겠는데, 성을 기키던 비겁한 군사들이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만 듣고서도 간담이 떨려 모조리 도망칠 생각만 품었으므로, 적이 에워싸기만 하면 반드시 함락되어 온전한 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지난날 부산, 동래, 연해안 여러 장수들이 만약 배와 노를 잘 정비하여 바다 가득히 진을 치고 있다가 왜적의 배를 들이칠 위세를 보이면서 정세와 힘을 잘 살피고 헤아려서 적절히 병법대로 나아가고 물러남으로써 적들이 뭍으로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더라면, 나라를 욕되게 하는 우환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감정이 더욱 북받쳐서, 원컨대 한번 죽을 각오를 하고 곧바로 왜적의 소굴을 짓이겨서 요망한 기운들을 쓸어버리고 나라의 부끄러움을 만분의 하나라도 씻고자 합니다. 성공과 실패, 잘되고 못 되는 것이야 신으로서는 미리 헤아릴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다. - 경상도로 구원 나가는 장계()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 (1592. 4. 30)

 

그런데 4 27일과 30, 그리고 뒤에 나오는 5 3일자 장계는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피난을 떠나는 바람에 중도에서 실종되고 조정에 전달되지 못했다. 그 결과 후에 이순신을 모함하는 세력들이 이순신을 허위 사실로 공격하는 데 대한 문서상의 반증자료로 이용될 수가 없었다. (5 4일자 <난중일기> 참조.)

 

5 4. 맑다. 새벽녘에 출발하여 바로 미조항 앞바다에 이르러 다시 한번 약속했다. 개이도(介伊島; 싸리섬를 거쳐 평산포, 상주포(尙州浦), 미조항(彌助項)을 지나갔다.

남해도 앞을 돌아 소비포(所非浦)에서 밤을 지내고 새벽 일찍 출발하여 당포로 향했다.

 

이순신은 이날 새벽에 첫 닭이 울기 전에 출발하려는 순간에도 조정에 장계를 올린다. 이것이 세 번째 올리는 <경상도로 구원나가는 장계()>이다.

 

그리고 <난중일기>에는 5 5일부터 5 28일까지가 빠지고 없는데, 이 기간에 일어난 일들은 뒤에 소개되는 장계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에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5 29일자 일기는 이날부터 시작되어 6 10일까지 계속된 제2차 출동에 관한 설명으로서,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6월에 올린 장계 <당포파왜병장>(唐布破倭兵狀)에서 설명되고 있다.

 

 

이순신 - 경상도로 구원 나가는 장계()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

 

삼가 구원병 나가는 일로 아뢰나이다.

전에 경상도우수사 원균과 함께 힘을 합쳐 왜적의 배들을 쳐부수라는 전하의 분부를 받고, 소속 수군의 여러 장수들은 지난 4 29일 본영 앞 바다로 모여서 30일에 출발할 계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겸관찰사 이광(李珖) 역시 좌수영의 수군 병력이 외롭고 약한 것을 염려하여 본도(전라도)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 수군을 거느리고 신의 뒤를 따라가라고 지시하였다고 하며, 또 우수사 이억기도 공문을 보내어 이 달 30일에 배를 출발하겠다고 하기에 그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서 군대의 위세를 성대하게 갖추어 일제히 출발하겠다는 뜻은 이미 급보한 바 있습니다.

 

내지로 향해 올라간 왜적들이 장차 서울로 접근하려 하므로 신 이하 여러 장수들 가운데 분해서 떨쳐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칼날을 무릅쓰고 나아가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왜적들을 맞아 그 돌아갈 길을 끊어놓고 그 배들을 쳐부순다면 왜적들은 뒤가 염려되어 곧바로 되돌아 올 수도 있을 것이기에, 오늘 5월초 4일 첫 닭이 울 때 곧바로 되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기에, 오늘 5월초 4일 첫 닭이 울 때 곧바로 경상도로 향하여 배를 출발하면서, 한편으로 우수사 이억기에게 속히 달려오라고 급보를 띄웠습니다. - 경상도로 구원 나가는 장계()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 (1592. 5. 3)

 

이순신은 이억기 함대가 4 30일 출발한다고 했기 때문에 5 3일까지 기다렸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이에 좌수영 함대는 단독으로 출항했다(선조가 한성을 떠난 것은 4 30, 이순신이 임금의 피난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은 적진포 해전이 끝난 후인 5 8일이다.한편, 이억기 함대는 6 3일 당포에서 처음으로 이순신 함대와 합류한다.

그런데 4 27일과 4 30, 그리고 뒤에 나오는 53일자 장계는 중도에서 실종되었다. 그 때문에 4년이 지난 후에 김응남(金應南; 좌의정)이덕열(李德悅; 좌승지) 등 원균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이순신을 모함할 때 선조 앞 어전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엉터리 주장을 하게 된다.

 

 

후에 가서 이순신을 모함한 말들

 

김응남 : “원균이 처음에 사람을 보내어 순신을 불러도 이순신이 오지 않으므로 원균이 통곡했다고 합니다. 원균이 이순신에게 군사를 요청했는데 성공은 도리어 이순신의 차지가 되었기 때문에 그 일로 두 장수 사이가 서로 막혀졌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1596. 6. 26)

 

이덕열 : “이순신 (원균이) 열댓 번 부른 후에야 비로소 나가 적선 60척을 깨뜨리고 먼저 자기 공로를 보고했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1596. 11. 7)

 

이와 같은 모함의 말이 있었던 시점(時點)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모함에서 거론된 사건은 1592 4월의 일인데, 이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그 동안 전혀 없다가 4년이 지난 후에야 말들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온각 모함의 말들이 생겨나는 와중에 추가된 또 하나의 모함의 말에 불과하다.

 

후에 가서 정유년(1597) 2월 마침내 통제사 이순신은 잡혀서 서울로 압송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 어전회의 내용이 <원균행장록>에 인용되어 실렸고, 오늘날에 와서는 일부 인사들이 위와 같은 <선조실록>의 기록을 원균을 옹호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1] 이 상황에 관하여 당시 원균의 직속상관인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장계를 소개한다.

 

김성일의 장계

 

(……) 변란이 터진 첫 시기에 (경상)도의 병사, 수사(좌수사 박홍(朴泓)과 우수사 원균), 방어사, 조방장 등이 각 고을에 있던 무기들을 옮겨다가 싸움터에 갖다 놓았었는데, 흩어져 달아날 때 물 속이나 불에 던져버리기도 하고 길바닥에 내버리기도 하였기 때문에 무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창고의 곡식들은 고을 수령들이 적들이 들이닥치기도 전에 겁부터 먹고 스스로 창고를 불태워버렸거나 백성들이 훔쳐다 먹게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군량도 전혀 없습니다.

비록 의병이 일어나더라도 무기와 군량이 모두 모자라니 사람들이 마음을 굳게 갖지 못하고, 적이 온다는 말만 한 번 들으면 모였다가도 곧바로 흩어져버립니다. 온갖 궁리를 다 해도 무기와 군량을 마련할 길이 전혀 없어서 가슴이 몹시 아프고 답답합니다. (……) 경상우도로 침입한 적으로 말하면, 한 부대는 김해, 창원(昌原), 우도의 병영(兵營), 칠원(漆原) 등지를 함락시켜 소굴로 삼았고, 다른 한 부대는 바닷가의 여러 섬들로 들락거리고 있는데, 여러 진()이나 보()의 장수들은 바라보기만 해도 겁을 먹고 저마다 살 길을 찾아 뭍으로 도망쳐 나오게 되니 바다의 방어초소들은 텅 비었습니다.

 

우수영에서는 수사(元均)와 우후(虞侯; 우응진(禹應眞)) 가 병영을 제 손으로 불태워버렸습니다. 우후는 행방불명이고 수사는 한 척의 배만 타고 지금 사천(泗川) 포구에 들어붙어 있는데, 수십 명의 격군(格軍; 노 젓는 군사)들뿐이고 군사들은 한 명도 없습니다.신이 고성(固城)에 가 보니, 성은 비록 함락되었지만 왜적이 이미 돌아갔고 군량도 있었습니다. 만약 수사가 성에 들어가서 차지하고 지킨다면 흩어졌던 백성들이 아마 앞을 다투어 모여들어 안착 할 수 있겠기에 두 번이나 수사에게 공문을 보냈습니다.

 

수사(元均)가 지난 19일에 성 안으로 들어가서 지켜낼 생각으로 배를 고을 지경에 대었더니, 전에 왔던 왜적 1백여 명이 반역한 백승들을 거느리고 다시 와서 성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들으니, 수사(元均)는 선전관 원전()이 전한 지시에 따라 전라도 수사와 다시 약속하고 가까운 앞날에 왜적의 배를 쳐부수기로 약속하였다고 합니다. (……)

 

남해(南海)는 호남과의 경계에 놓여 있는데 아직 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그런데 남해 현령 기효근(奇孝謹)이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보고하기를, 이 고을은 전라좌수영에 바짝 붙어있습니다. 만약 적이 여기를 차지한다면 이곳에 있는 군량에 의거하여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틀림없이 앞으로 호남까지 쳐들어가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그래서 남해 현령이 바다로 나간 틈을 타서 (전라 좌수사 이순신) 자기 군관을 시켜창고들을 모두 불태워 버리게 하니 고을의 백성들과 함께 들어와 있던 미조항, 평산포의 군사들이 모조리 흩어졌습니다. 현령이 고을로 돌아오니 빈 성만 남아 있어서 할 수 없이 보리를 거두러 군량을 삼고, 흩어진 군사들을 거두어 모아 간신히 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적이 오면 반드시 먼저 무너져 흩어질 것입니다. (……)

 

신이 본 바에 의하면,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화살 한 대 쏘지 않고 성을 버리고 먼저 도망가 버렸으며, 좌병사 이각(李珏)도 뒤따라 동래로 도망쳤습니다.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늙고 겁이 많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위축되어 있습니다.

 

우수사 원균(元均)은 우수영을 불태우고 바다로 나가서 배 한 척만 보존하였을 뿐입니다. 병사와 수사는 한 도의 주장(主將)들인데도 하는 짓들이 이러했으니 그 아래의 장수나 군사들이 어찌 도망치고 흩어지지 않겠습니까.양산의 임시 장수인 밀양 부사 박진(朴晉)은 창고와 무기를 불태우고 도망쳤습니다.바닷가 여러 고을에서는 적의 배를 바라보고는 일시에 무너져 뭍으로 도망쳐 나왔는데, 장수들은 도망치는 것을 상책으로 여기고 고을 수령들은 성을 사지(死地)로 생각합니다. 온 도가 다 그러하였으므로 적들은 칼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파죽지세로 수십일 동안에 벌서 서울까지 쳐들어간 것입니다. 예로부터 남의 나라 서울을 지금처럼 쉽게 함락시킨 예는 없었습니다.

 

만약 군법이 엄하여 싸움에서 패한 자는 반드시 죽이고, 머뭇거린 자도 반드시 죽이고, 성을 버린 자도 반드시 죽이고, 변란이 터진 뒤에 장수로 임명된 자들도 법을 제대로 집행하여 죄를 범한 자를 즉시 목 베었더라면 사람들은 물러서면 처단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니 어지 오늘처럼 무너져 달아나기까지야 되었겠습니까. 장수와 고을 수령들을 처벌하지 않고 도망치는 군사들만 처벌한다는 것은 뒤꼬리나 눌러놓는 격이 될 것입니다. (……)   <선조실록> (1592. 6. 28)

 

김성일 초유사(招諭使)는 경상도의 관, 민 합동 사령관 격으로 김수(金晬) 경상감사와 함께 원균에게는 직속상관이다. 그런데 김성일은 장계에서 개전 초의 원균의 행동을 기록하면서, <1백여 명의 왜군들을 보고도 겁이 나서 감히 공격할 생각을 자지 못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김성일은 이순신의 청야작전(淸野作戰; 적이 침입하기 전에 모든 것을 태우고 소개시키는 작전)을 위해 마치 남해 군수가 바다로 나간 틈을 엿보아서 남해현의 모든 양곡 창고와 무기고를 불태운 것처럼 보고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4 30일자의 <장계>(경상도로 구원나가는 장계()) 5 2일자 <난중일기>를 보면, 남해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사람을 보냈을 때에는 이미 남해현의 무기고와 군량 창고는 다 누군가에 의해 약탈당한 상태에 있었다고 하였다.

 

[2] 마찬가지로 원균의 직속상관인 경상감사 김수의 장계이다.

 

경상감사 김수(金晬)의 장계

 

김수(金晬)가 급보를 올렸다.

수사 원균은 수군의 대장으로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내지(內池)로 피신하고 우후(虞侯) 우응진(禹應眞)을 시켜서 고을 창고를 불 지르게 한 결과 2백 년 동안 저축해 둔 물건들이 하루 아침에 없어져 버렸습니다.   <선조실록> (1592. 6. 28)

 

<선조실록>(1592. 6. 28)에 김수와 김성일의 장계가 같은 날짜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그 무렵 의주 행재소와 소통이 시작되면서 경상도의 한 관리가 두 사람의 장계를 같이 가지고 올라갔기 때문인듯하다.4 23일부터 4 30일까지는 <난중일기>가 빠져 있는데, 적들이 바로 앞까지 쳐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장계를 올리고, 그 회계(回啓)를 기다리며 작전회의를 하느라 거의 배일 밤을 새우다시피 하여 일기를 쓸 여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순신의 장계에 대한 답변으로 각각 4 26일과 4 27일자에 왕의 출동 명령(諭書)이 도착했는데, 왕의 지시문(諭書)에는 앞으로 여러 상황에 대한 대처는 이순신이 여러 수사들과 상의하여 처리해도 좋다는 것이었다.이에 따라 이순신은 경상도 바다로의 출전을 결정하고, 4 27일자 유서에 따라 당일로 경상도 구원 나가는 일에 대한 보고서를 올린다. 그리고 소속 각 부대에 출동을 위한 소집명령을 내린다.

 

블로그 > 유익가득! 알렉스의 블로그!
원본 http://blog.naver.com/imcrazy4u/140027995615

 

 

 
대하드라마 중에서 가장 재미있고 관심있게 봤던 것이라면
 
역시나 불멸의 이순신이다.
 
장면 하나하나에 담긴 장군님의 모습들,,
 
참 인간적인 면들을 많이 보여준 것 같았다.
 
 
 
 
벌써 드라마가 끝난지 몇개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OST를 들을 때면 그 때의 감동이 밀려온다.
 
스케일있는 작품답게 웅장하면서도 또한 섬세한 느낌이 살아있어
 
드라마의 편집장면들과 참 잘 어울렸었는데,,
 
왠만한 외국 OST 못지 않은 완성도를 갖고 있다고 본다.
 
 
 
 불멸의 이순신 OST - Title (칼의 노래)
 
 
 
 
이것이 바로 한산도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학익진.
 
적들을 앞에서 에워싸고 모든 화포를 중앙에 집중시켜 방포하면
 
당연히 꼼짝못하고 몰살될 수 밖에 없는 진법이다.
 
세계 4대 해전 중의 하나로 꼽힌 한산도 대첩
 
그 학익진의 위용을 보여주었던 장면에 흘러나왔던 음악 역시
 
나름 아끼고 즐겨 듣는 것 중 하나이다.
 
 
 
 불멸의 이순신 OST - 학익진
 

 
 
 

 

 

 

 

 
 
 
 
 
 
 
 
 
 
 
 
 
 
 
 
 
 

 
 

 

             

          

    

 


 





 

 





 

'안보와 국방 > 안보 불감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수군 1차 출동 2  (0) 2007.07.01
조선 수군 1차 출동1  (0) 2007.07.01
조선 수군 출동전 이순신 상황파악  (0) 2007.06.30
조선수군 2차 출동  (0) 2007.06.30
임진강 전투  (0) 2007.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