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 제1차 출동2
대함대의 출항 시간을 이렇게 일찍 잡은 것은 적이 조선 함대의 동향을 탐지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새벽같이 출전한 이순신의 함대는 거친 바다를 가로질러 경상도 바다인 당포에서 경상우수영 함대와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적을 경계하며 이순신의 함대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하루 종일 노를 저어도 적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이순신의 함대가 경상도 소비포 앞바다에 다다를 즈음 날이 저물었다. 연해안에 상륙한
다음 날인 5일 새벽, 원균은 다음 날인 6일 10시경에야 경상우수영 경내의 한산섬에서 단지 한 척의 대선을 타고 왔다. 옥포해전, 이순신의 첫 승 조선 협동 함대는 7일 새벽에 일제히 바다에 함선을 띄웠다. 이미 천성, 가덕 방면에 일본의 함대가 있다는 정보가 입수된 상태였다. 바야흐로 전투가 시작되는 긴장된 순간이었다. 조선의 수군들은 적과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온 몸이 굳어졌다. 이때 이순신의 추상같이 엄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옥포의 바다에 울려 퍼졌다. “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태산같이 정중히 하라!” (勿令妄動 靜重如山) 이순신의 지휘 아래 조선의 함대는 바람에 독전기(督戰旗)를 휘날리며 질서정연하게 진을 지어 옥포를 향해 일제히 들어갔다. 옥포에는 도도 다카토라가 거느린 함선 30여 척이 선창에 흩어져 정박하고 있었다. 적들이 노략질하면서 지른 불로 연기가 온통 뒤덮여 주위의 산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난데없는 대규모의 조선 수군의 출현으로 일본군은 당황했다. 그들은 분주히 함선에 올라 자기들끼리 용기를 복돋우는 듯이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면서 급하게 노를 저었다. 하지만 조선 함대의 위용에 감히 맞서지는 못한 채 해안선을 따라 함선을 몰고 있었다. 조선 함대가 계속 다가가자 도망치던 일본 함대는 그중 여섯 척을 선봉으로 삼아 바다 가운데로 나오기 시작했다. 조선 함대는 동서로 포위하면서 사정거리 안에 일본 함대가 들어서자 일제히 포[1]와 화살을 퍼부어댔다. 일본 함대도 조총과 화살을 일시에 퍼부으며 결사적으로 대항하였다. 옥포의 푸른 바다를 사이에 두고 쌍방의 화력이 불꼬리를 휘날리며 날아다녔다. 하지만 조총이 주력인 일본 함대는 대포로 무장한 조선 함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꼬리를 물로 날아오는 포환으로 옥포 바다가 불바다로 변하자 일본 수군은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일시에 선체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포에 맞아 침몰하는 적함의 거친 몸짓은 그보다 더 거친 파도를 만들었고 바다에 뛰어든 일본 수군은 그 파도 속에서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가까스로 해변에 상륙한 적군은 여전히 뒤를 가격하는 조선 함대의 포를 피해 근처의 산으로 도망갔다. 공포에 질린 일본 수군은 서로가 대형에서 뒤쳐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산으로 기어올랐다.
합포해전과 적진포해전 옥포에서 벌어진 최초의 해전에서 일본 함선 26척을 격파하면서 조선의 협동 함대는 단 한 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다. 조선 수군의 적의 습격을 피해 경상도 영등포에 전 함대가 정박하여 전투의 피로를 풀려고 했지만 그 바다의 깊은 물빛에 계속 여유로운 눈길을 줄 수 없었다. 그날 오후 4시경
“장군, 멀지 않은 바다에 적함 다섯 척이 지나갑니다.”
그 불기둥을 뒤로한 채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일본의 대선 네 척과 소선 한 척을 수장한 합포해전이었다. 조선 함대는 노를 재촉하여 경상도 창원의 남포 앞바다에 이르러 그곳에 정박하고 다음 날의 전투를 기대하며 밤을 지냈다.
아무런 경계도 없이 포구 안 민간인들의 집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있던 일본군은 천둥 치듯이 들이닥친 조선 함대의 위세에 겁을 먹고 황급히 근처 산으로 도망갔다. 이제 남은 것은 텅 빈 일본 함선을 파도처럼 바람처럼 격멸하는 것뿐이다. 조선 수군은 그곳에 있는 적함을 전부를 포로 쏘아 부수고 불살랐다.적진포 해전이 승리로 끝났을 때
조선의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분통해 통곡 소리가 한꺼번에 터졌다. 슬픔에 북받쳐 조선 수군은 서로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왕의 피신 소식은 그 무게로 볼 때 나라의 장래가 예측 불허의 상태로 들어간 것을 의미했고, 전라좌수영의 미래도 장담할 수 없게 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나라의 치욕은 적진포의 푸른 바닷물로도 씻을 수 없었다.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졌고 불안감에 따른 동요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의 전투는 어렵다고 판단한 조선 협동 함대는 선체를 돌렸다. 다음 날 5월 9일 “전선을 더욱 정비하고 바닷가에서 적의 침입을 대비하라!” [1] 조선의 포 – 조선 수군의 힘은 기본적으로 판옥선이라는 함선의 우수성에서 나왔고 판옥선의 우수성은 포에서 출발하였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 조선 포의 명칭은 천자문의 한자순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포의 구경이 가장 큰 것은 천자포(天字砲)이다. 포의 명칭에 ‘천(天)'이 쓰이고 더 재미있는 사실은 ‘천(天)’ 다음의 글자가 ‘자(字)’인 사실이다. 자(字)는 문자(文字)라고 할 때의 자(字)이다. 따라서 ‘하늘이라는 글자’라는 뜻의 포인 셈이다. 이 포의 구경은 13센티미터이고 직경 11.7센티미터의 둥근 철환을 발사했다. 천자포의 사정거리는 500미터가 넘는 장거리였다.
천자포 다음으로 작은 포의 명칭은 지자포(地字包)이다. 천자문의 ‘하늘 천(天)’ 다음이 ‘땅 지(地)’인데 포의 명칭도 같은 순서이다. 천자포보다 약간 작은 포탄을 쏘았던 지자포도 사정거리가 350미터가 넘는 장거리를 자랑했다. 조선은 그 외에도 사정거리가 약300미터에 달하는 현자포(玄字包), 황자포(黃字包)도 보유하고 있었다.
한편 승자포(勝字包)라는 것도 있는데 이 포는 가까운 거리에서 접전을 할 때에 화약이 달린 화살을 쏘았다. 무게가 가벼워서 이동이 자유로운 것이 장점이었다. 이 승자포의 사정거리도 200미터가 넘었다.
그런데 천자문에는 ‘天(하늘 천), 地(땅 지), 玄(감을 현), 黃(누를 황)’의 다음 순서로 ‘宇(집 우) 宙(집 주) 洪(넓을 홍) 荒(거칠 황)’이므로 이 포는 승자포(勝字包)가 아니라 우자포(宇字包)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는 분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예외 없는 법칙이 없으니 그 사실을 너그러이 넘어갔으면 한다. 다만 조총의 사거리가 50-100미터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동이 자유로운 승자포의 사정거리가 200미터가 넘었으니, 조선의 포는 대단한 화력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만하다. |
< 출처 : 불멸의 이순신 - 승리의 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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