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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와 국방/안보 불감증

조선 수군 1차 출동 2

 

 

조선 수군 제1차 출동2

 

이순신 1592년 5월 4 첫 닭이 울 때 함대를 이끌고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에서 출동했다. 함대의 규모는 판옥선 24, 협선 15, 포작선 46척으로, 85척에 달했다.

 

대함대의 출항 시간을 이렇게 일찍 잡은 것은 적이 조선 함대의 동향을 탐지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새벽같이 출전한 이순신의 함대는 거친 바다를 가로질러 경상도 바다인 당포에서 경상우수영 함대와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순신은 함대를 나누어 한쪽은 개이도를 경유하여 나아가게 하고 나머지는 평산포, 상주포, 미조항을 통과하며 전진하도록 지시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적을 경계하며 이순신의 함대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하루 종일 노를 저어도 적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이순신의 함대가 경상도 소비포 앞바다에 다다를 즈음 날이 저물었다. 연해안에 상륙한 이순신은 그곳에서 지을 치고 밤을 보냈다.

 

다음 날인 5일 새벽, 이순신은 함대를 띄워 경상우수영과 합류하기로 약속한 당포로 급히 노를 재촉했지만 경상우수영 함대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순신은 소선을 원균에게 보내 약속 장소인 당포로 빨리 나오라고 전했다. 이순신의 함대는 원균의 함대를 기다리면서 당포 앞바다에서 밤을 보냈다.

 

원균은 다음 날인 6 10시경에야 경상우수영 경내의 한산섬에서 단지 한 척의 대선을 타고 왔다. 이순신은 원균에게 적선의 수와 현재 머무르고 있는 곳, 접전할 과정 등을 묻고 앞으로의 전투를 의논했다. 그러는 동안 원균의 부하들도 5일과 6일 사이에 대선 세 척, 소선 두 척에 각각 나누어 타고 합류했다. 마침내 결성된 이순신과 원균의 연합 함대는 당포의 거친 바다를 헤치고 나아갔다. 조선의 연합 함대가 거제도 남단 송미포 앞바다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그곳에서 밤을 지냈다.

 

 

 

옥포해전, 이순신의 첫 승

 

조선 협동 함대는 7일 새벽에 일제히 바다에 함선을 띄웠다. 이미 천성, 가덕 방면에 일본의 함대가 있다는 정보가 입수된 상태였다. 이순신과 원균의 협동 함대는 부지런히 노를 저어 정오쯤에는 옥포 앞바다에 아르렀다. 그때 본 함대를 앞질러 먼저 보낸 수색선이 신호용 화살인 신기전(神機箭)을 하늘 높이 날려 적군이 있음을 알려왔다.

바야흐로 전투가 시작되는 긴장된 순간이었다. 조선의 수군들은 적과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온 몸이 굳어졌다. 이때 이순신의 추상같이 엄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옥포의 바다에 울려 퍼졌다.

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태산같이 정중히 하라! (勿令妄動 靜重如山)

 

이순신의 지휘 아래 조선의 함대는 바람에 독전기(督戰旗)를 휘날리며 질서정연하게 진을 지어 옥포를 향해 일제히 들어갔다. 옥포에는 도도 다카토라가 거느린 함선 30여 척이 선창에 흩어져 정박하고 있었다. 적들이 노략질하면서 지른 불로 연기가 온통 뒤덮여 주위의 산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난데없는 대규모의 조선 수군의 출현으로 일본군은 당황했다. 그들은 분주히 함선에 올라 자기들끼리 용기를 복돋우는 듯이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면서 급하게 노를 저었다. 하지만 조선 함대의 위용에 감히 맞서지는 못한 채 해안선을 따라 함선을 몰고 있었다.

조선 함대가 계속 다가가자 도망치던 일본 함대는 그중 여섯 척을 선봉으로 삼아 바다 가운데로 나오기 시작했다. 조선 함대는 동서로 포위하면서 사정거리 안에 일본 함대가 들어서자 일제히 포[1]와 화살을 퍼부어댔다. 일본 함대도 조총과 화살을 일시에 퍼부으며 결사적으로 대항하였다.

 

옥포의 푸른 바다를 사이에 두고 쌍방의 화력이 불꼬리를 휘날리며 날아다녔다. 하지만 조총이 주력인 일본 함대는 대포로 무장한 조선 함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꼬리를 물로 날아오는 포환으로 옥포 바다가 불바다로 변하자 일본 수군은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일시에 선체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포에 맞아 침몰하는 적함의 거친 몸짓은 그보다 더 거친 파도를 만들었고 바다에 뛰어든 일본 수군은 그 파도 속에서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가까스로 해변에 상륙한 적군은 여전히 뒤를 가격하는 조선 함대의 포를 피해 근처의 산으로 도망갔다. 공포에 질린 일본 수군은 서로가 대형에서 뒤쳐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산으로 기어올랐다.

 

이순신 함대가 21, 원균의 함대가 5척의 일본 함선을 포로 쏘아 깨부수고 불살라버려서 그 장엄함이 극치에 달했다. 옥포의 넓은 바다는 불꽃과 연기가 하늘을 가득 덮었으며 산으로 올라간 일본 수군들은 그 광경에 질려 숲 속에서 꼼짝하지 못한 채 땅에 엎드려 있었다. 옥포의 푸른 바닷물을 적의 붉은 피로 물들었고, 조선 화포의 열기로 옥포를 스쳐가는 바람도 뜨거웠다.

 

이순신은 각 함선에서 용감무쌍한 활꾼을 차출했다. 활꾼을 산으로 올려 보내 숲 속에 은신한 일본군을 완전히 궤멸시키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보니 그곳의 산세가 험준하고 숲이 울창하여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일본군보다 그들을 추격할 조선 군사가 더 위험할 것 같았다. 또 추격병을 보낸 사이에 다른 적병들이 들이닥쳐 뒤를 포위하면 속수무책이 될 위험도 있었다.

이순신은 적의 마지막 한 명까지 섬멸하려던 뜻은 이루지 못하고 아쉽게 그곳을 떠나도록 지시했다. 이순신의 지시에 조선 함대는 북향하여 거제도 북쪽 끝에 있는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그곳 영등포에 함대를 정박시킨 이순신은 부하에게 나무를 구하고 물도 길어오게 하면서 밤을 지낼 준비를 했다.

 

 

합포해전과 적진포해전

 

옥포에서 벌어진 최초의 해전에서 일본 함선 26척을 격파하면서 조선의 협동 함대는 단 한 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다. 조선 수군의 적의 습격을 피해 경상도 영등포에 전 함대가 정박하여 전투의 피로를 풀려고 했지만 그 바다의 깊은 물빛에 계속 여유로운 눈길을 줄 수 없었다. 그날 오후 4시경 이순신에게 긴급 보고가 올라온 것이다.

 

장군, 멀지 않은 바다에 적함 다섯 척이 지나갑니다.

 

이순신은 쉬고 있던 전 함대에 다시 출동을 명하여 추격전을 전개했다. 푸른 파도 위에서 펼쳐진 긴박한 추격전은 경상도 웅천의 합포 앞바다까지 계속되었다. 조선 함대의 끈질긴 추격을 견디지 못한 일본 수군은 함선을 포기하고 합포에 내려 도망갈 수 밖에 없었다.조선 수군은 합포에 버려진 다섯 척의 적함을 향해 바다에서 불화살을 쏘았다. 적선에 꽂힌 불화살은 치솟는 불기둥으로 변하여 합포의 포구에 일렁이던 파도도 그 열기에 휩싸였다. 그 동안 육전에서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조선군이었으나 해전에서는 거꾸로 일본군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일 것을 예고하는 화려한 불기둥이었다.

 

그 불기둥을 뒤로한 채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일본의 대선 네 척과 소선 한 척을 수장한 합포해전이었다. 조선 함대는 노를 재촉하여 경상도 창원의 남포 앞바다에 이르러 그곳에 정박하고 다음 날의 전투를 기대하며 밤을 지냈다.

 

1592 5 8의 해가 밝았다. 일본 함대가 진해의 고리량에 정박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지체 없이 전 함대에 출전을 명했다. 조선 함대는 내외의 섬들을 수색하면서 저도를 지나 고성 적진포에 이르렀다. 적진포에는 대선과 중선을 합해 13척의 일본 함대가 포구에 가지런히 정박하고 있었다.

 

아무런 경계도 없이 포구 안 민간인들의 집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있던 일본군은 천둥 치듯이 들이닥친 조선 함대의 위세에 겁을 먹고 황급히 근처 산으로 도망갔다. 이제 남은 것은 텅 빈 일본 함선을 파도처럼 바람처럼 격멸하는 것뿐이다. 조선 수군은 그곳에 있는 적함을 전부를 포로 쏘아 부수고 불살랐다.적진포 해전이 승리로 끝났을 때 이순신에게 뜻 밖의 비보가 전해졌다. 선조가 일본군을 피해 평안도로 피란을 갔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이순신이 출정한 날인 5 4일 이미 서울이 함락되어 선조가 평안도로 피신하고 있었는데, 5 8일 적진포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때에야 소식이 도달한 것이다.

 

조선의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분통해 통곡 소리가 한꺼번에 터졌다. 슬픔에 북받쳐 조선 수군은 서로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왕의 피신 소식은 그 무게로 볼 때 나라의 장래가 예측 불허의 상태로 들어간 것을 의미했고, 전라좌수영의 미래도 장담할 수 없게 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나라의 치욕은 적진포의 푸른 바닷물로도 씻을 수 없었다.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졌고 불안감에 따른 동요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의 전투는 어렵다고 판단한 조선 협동 함대는 선체를 돌렸다. 다음 날 5 9 12, 이순신의 함대는 전라좌수영으로 귀환했다. 세 번 싸워 세 번 승리하면서 무수한 적함과 적군을 조선 바다에 수장시킨 출동이었다. 승리의 열기에 들떠 있는 부하들에게 이순신은 단호하게 지시했다.

전선을 더욱 정비하고 바닷가에서 적의 침입을 대비하라!



[1] 조선의 포 조선 수군의 힘은 기본적으로 판옥선이라는 함선의 우수성에서 나왔고 판옥선의 우수성은 포에서 출발하였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 조선 포의 명칭은 천자문의 한자순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포의 구경이 가장 큰 것은 천자포(天字砲)이다. 포의 명칭에 ()'이 쓰이고 더 재미있는 사실은 () 다음의 글자가 ()인 사실이다. ()는 문자(文字)라고 할 때의 자()이다. 따라서 하늘이라는 글자라는 뜻의 포인 셈이다. 이 포의 구경은 13센티미터이고 직경 11.7센티미터의 둥근 철환을 발사했다. 천자포의 사정거리는 500미터가 넘는 장거리였다.

 

천자포 다음으로 작은 포의 명칭은 지자포(地字包)이다. 천자문의 하늘 천() 다음이 땅 지()인데 포의 명칭도 같은 순서이다. 천자포보다 약간 작은 포탄을 쏘았던 지자포도 사정거리가 350미터가 넘는 장거리를 자랑했다. 조선은 그 외에도 사정거리가 약300미터에 달하는 현자포(玄字包), 황자포(黃字包)도 보유하고 있었다.

 

한편 승자포(勝字包)라는 것도 있는데 이 포는 가까운 거리에서 접전을 할 때에 화약이 달린 화살을 쏘았다. 무게가 가벼워서 이동이 자유로운 것이 장점이었다. 이 승자포의 사정거리도 200미터가 넘었다.

 

그런데 천자문에는 (하늘 천), (땅 지), (감을 현), (누를 황)의 다음 순서로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이므로 이 포는 승자포(勝字包)가 아니라 우자포(宇字包)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는 분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예외 없는 법칙이 없으니 그 사실을 너그러이 넘어갔으면 한다. 다만 조총의 사거리가 50-100미터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동이 자유로운 승자포의 사정거리가 200미터가 넘었으니, 조선의 포는 대단한 화력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만하다.


 



< 출처 : 불멸의 이순신 - 승리의 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