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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와 국방/안보 불감증

조선 수군 1차 출동3

 

조선 수군 제1차 출동3, 그 뒷 이야기...

 

조선 함대의 막강한 전력

 

1차 출동을 다녀온 순신삼가 적을 쳐서 무찌른 일을 아룁니다라고 시작하는 보고서를 조정에 올렸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 수군은 옥포해전에서 총 26척의 일본 함선을, 합포해전에서 일본의 대선 4척과 소선 1척을, 적진포해전에서 대선과 중선을 합하여 총 13척의 일본 함대를 격침시켰다. 그러면서 아군의 손실은 거의 없었다. 그 사실은 정병 이선지가 왼쪽 할 한 곳에 화살을 맞아 조금 상한 것 외에는 전상자가 없습니다라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완벽한 승리의 원인으로 기습전을 들 수 있다. 옥포해전과 적진포해전에서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출현을 전혀 예상치 못하고 무방비 상태로 당했다. 그들은 아무런 경계도 취하지 않은 채 옥포와 적진포에서 노략질을 자행하고 있었다. 경상도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는 원균의 경상우수영이 거의 궤멸까지 간 상태였으므로 경계의 필요가 없었다는 뜻도 된다.

 

다음으로 우리 함대의 우수성을 들 수 있다. 첫 출동에서 보여준 판옥선의 화력은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자신들이 그토록 성능이 우수한 함대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순신도 거듭 신중을 기하다 출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자신들의 손에 든 천하제일의 무기를 비로소 알아챘다. 조선의 함선은 조총을 무력화시킬 만큼 합판이 튼튼하고 규모가 크고 견고했으며, 전투원의 위치가 높아 적군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싸울 수 있었다. 포의 위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이순신이 옥포에서 벌인 실전을 통해 조선 함선의 힘을 인식한 이상 조선 수군은 더 이상 수세에 몰린 처지가 아니었다.마지막으로 조선 수군의 우세한 화력을 들 수 있다. 이순신의 함대는 판옥선 24, 협선 15척의 전력이었으며 그 뒤를 고기잡이 배 46척까지 받치고 있었다. 또 경상우수영의 원균 함대는 판옥선 4척과 소선 2척으로 합류했다.

 

첫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부딪친 적선은 30여 척이었으므로 나름대로 팽팽했으나 그 균형은 합포해전과 적진포해전에서 깨어졌다. 합포해전에서 조선 함대는 화력을 총동원하여 대선 4, 소선 1척에 불과한 일본 수군을 추격하여 섬멸했다. 그리고 이어진 적진포해전에서도 적의 대선과 중선을 합하여 총 13척을 격파했다. 아군 함선의 손상은 전혀 없이 두 전투에서 일본 함선 총 18척을 궤멸시킨 것이다. 전투의 최선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고, 차선은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면서 이기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미약한 전력의 적을 격멸했지만 적진포해전과 합포해전은 분명 성공한 전투였다고 평할 수 있다.

1차 출동의 승리는 심리적 파급 효과도 컸다. 조선 수군의 승리는 조선 수군만의 승리가 아니었다. 조선 육군은 물론이고 민중에게 희망을 가져다준 승리였다. 육군의 어이없는 참패로 패배감에 젖어 있던 조선은 해전의 승리로 자신감을 회복하고 항전의 결의를 불태웠다. 성공적인 제1차 출동이 가져다준 심리적 자신감은 점차 곽재우, 김면 등이 조직하는 의병대 활동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이순신의 전투 총동원령

 

이순신은 제1차 출동을 감행하면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에는 모두 소집령을 내렸다. 그것은 이순신이 보고서에서 옥포해전을 다룰 때 사도진군관인 보인 이춘은 왜 중선 한 척을 (……) 당파했습니다라고 기록한 것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보인 이춘이라고 했는데 보인(保人)은 현역 복무를 하는 정병을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자를 말한다. 이순신정병만이 아니라 보인도 전투에 나서도록 소집령을 내렸다. 이순신의 적진포해전 기록에도 보인 김봉수 등이 힘을 합하여 왜 대선 한 척을 (……) 총통으로 쏘아 깨뜨리고 불살랐습니다라고 했다.그런데 이순신이 소집령을 내린 대상은 보인만이 아니었다. 합포해전을 다룬 이순신의 보고서에는 방답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전 첨사 이응화가 왜 소선 한 척을 (……) 깨뜨려서 불살랐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죄를 지어 귀양살이하던 자도 전투에 참가시켰다. 이를 볼 때 이순신은 관할 구역 내에서 전투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총동원령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

 

 

원균과의 불화

 

1차 출동 이전에는 이순신의 보고서와 <난중일기>의 어디에도 원균과의 불화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순신의 원균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은 선조에게 올린 제1차 출동 보고서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신이 거느린 경쾌선으로 당포로 빨리 나오라고 공문을 보냈더니 6일 진시(辰時)에 원균이 우수영 경내의 한산섬에서 단지 한 척의 전선을 타고 나타났습니다. (……) 그 도의 여러 장수인 남해 현령 기효근, 미조항 첨사 김승룡, 평산포 권관 김축 등이 판옥선 한 척에 같이 타고, 사량 만호 이여념, 소비포 권관 이영남 등이 각각 협선을 타고, 영등포 만호 우치적, 지세포 만호 한백록, 옥포 만호 이운룡 등은 판옥선 두 척에 같이 타고 어제에 이어 속속 뒤따라왔습니다.

 

이순신의 제1차 출동 보고서에서 원균의 함대와 합류하는 장면을 기록한 대목이다. 보고서를 쓴 지점은 전라좌수영이 설치된 여수로 귀항한 이후였다. 그런데 이순신은 원균이 한산섬에서 단지 한 척의 전선을 타고 나타났다고 기록했다. 이 글은 뒤에 이어진 글과 종합하면 원균과 그의 부하는 5일과 6일 사이에 판옥선 네 척과 협선 두 척을 끌고 합류했습니다라고 표현해도 되는 대목이었다. 이순신은 원균에 대한 불만을 보고서 후반에 가면서 아예 직접적으로 표출한다.

 

우수사 원균은 단 세 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신의 여러 장수들이 사로잡은 왜선을 활을 쏘면서 빼앗으려고 했기 때문에 사부와 격군 두 명이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주장(主將)으로서 부하들의 단속을 잘못한 일이 이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보고서의 앞부분에서 원균이 판옥선 네 척과 협선 두 척을 거느리고 이순신과 합류했다고 기록하다가 여기에서 느닷없이 원균이 단 세척의 전선을 거느린 것으로 바뀌었다. 도한 이순신의 부하들이 사로잡은 적함을 원균의 함대가 활을 쏘면서 빼앗으려고 하여 이순신 휘하의 사부(射夫)와 격군(格軍) 두 명이 상처를 입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사부는 활 쏘는 군사를, 격군은 노 젓는 군사를 말한다.

 

이 정도의 보고서라면 원균은 치명상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원균이 아무리 공을 세우고 싶었다 해도 정도가 심했다. 결국 이런 일이 겹치면서 이순신은 원균에 대해 졸지 않은 감정을 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의 원균에 대한 감정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다시 이어진다.

 

경상도 소속인 거제 현령 김준민(金俊民)은 멀지 않은 바다에서, 그가 관할하는 지역 안에서 연일 고전하여서, 주장인 원균이 빨리 오라는 격문을 보내었으나 끝내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는 해악한 일이오니 조정에서 조처하옵소서.

 

이순신은 남의 부하를 벌하라는 건의까지 했다. 부하의 잘못은 곧 지휘관의 잘못이다. 보고서의 칼날은 원균을 향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 전체의 전력을 높이기 위한 이순신의 고뇌도 엿보이지만 원균 쪽에서 보면 감당하기 어려운 보고서였다.이순신과 원균의 불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무시할 수 없는 기록이 있다. 1차 출동을 끝내고 전라좌수영에 귀한한 날은 1592년 5월 9이다.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제1차 출동 보고서의 발송 일자는 그 다음 날인 5 10일이다. 1592 6월의 <선조수정실록>[1]이다.

 

처음에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병을 청하여 적을 물리치고 연명으로 보고서를 올리려 하였다. 이에 이순신이 말하되 서서히 하자하고는 밤을 타서 스스로 보고서를 보내면서 원균이 군사를 잃어 의지할 데가 없었던 것과 적을 친 공이 없음을 보고하니 원균이 이를 듣고 크게 유감으로 여겼다. 이때부터 각자 보고서를 올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반목하게 되었다.

 

<선조수정실록>이 전하는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다. 이순신과 원균과의 불화는 이순신의 첫 출동 보고서에서 비로소 나타났는데 그 보고서를 필두로 두 장군의 관계는 더 이상 화해할 수 없는 지경으로 악화되었다.

 

 

이순신과 원균의 선전

 

옥포해전은 총 26척의 일본 함선을 불사를 대승리였다. 1차 출동에 대해 기록한 이순신의 보고서는 옥포해전에서 경상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왜선 다섯 척을 쳐부수고 포로로 잡혀 있던 우리나라 사람 한 명을 산채로 빼앗았는데, 왜선 26척을 모두 총통으로 쏘아 맞혀 부수고 불살랐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이순신 측이 21, 원균 측이 5척으로 총 26척의 일본 함대를 격파했다.판옥선 24척을 동원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은 일본 함선 21척을 격파했으니 그 전투력은 대단했고, 판옥선 4척의 전력으로 전투에 참가한 원균 측도 적함 5척을 격파하면서 선전했다. 옥포해전은 이순신이순신대로, 원균은 원균대로 최선을 다한 해전이었다.

 

두 번째 전투인 합포해전은 전라좌수영 함대가 일본의 대선 4척과 소선 1척을 모두 격파했지만 마지막 적진포해전에 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순신의 보고서에서는 적진포해전에서 왜의 대선과 중선을 합하여 13척이 바다 어귀에 열박(列泊)하고 있었습니다. 왜적들은 포구 안 어염집을 분탕한 뒤 우리 군사들의 위세를 보고는 겁내어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순신은 그 기록에 이어서 다음과 같은 세부적인 글을 보고서에 남겼다.

 

낙안 군수 신호(申浩)는 그 부의 소속인 순천대장 유섭과 힘을 합하여 왜 재선 한 척을, 같은 부의 통장으로 고을에 사는 급제 박영남(朴永男)과 보인 김봉수 등이 힘을 합하여 왜 대선 한 척을, 보성 군수 김득광(金得光)이 왜 대선 한 척을,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이 왜 대선 한 척을, 사도 첨사 김완이 왜 대선 한 척을, 녹도 만호 정운(鄭運)이 왜 대선 한 척을, 그 부의 통장으로 귀양살이를 하던 전 봉사 주몽용이 왜 중선 한 척을, 신의 대솔 군관인 전 봉사 이설(李渫)과 송희립(宋希立) 등이 힘을 합하여 왜 대선 두 척을, 군관 정로위 이봉수가 왜 대선 한 척을, 군관 별시위 송한연이 왜 중선 안 척을 모두 총통으로 쏘아 깨뜨리고 불살랐습니다.

 

이 글에 따르면 적진포해전에서 전라좌수영 함대가 격파한 일본 함선은 총 11척이었다. 그런데 앞의 글에서는 적진포에 있던 적함은 모두 13척이었다. 조선 수군을 목격한 일본군이 모두 산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적함은 무방비 상태에 있었으므로 조선 함대는 13척의 적함 전부를 격파했으리라고 자연스럽게 추정할 수 있다. 그럼 나머지 2척은, 이순신의 계산 실수로 볼 수도 있지만 원균의 함대를 떠올리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원균도 판옥선 4척과 협선 2척 정도로 이 전투에 참가했으며 이미 옥포해전에서 5척의 일본 함선을 격파했다. 그렇다면 적진포해전에서 사라진 2은 원균 측의 전공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1차 출동은 이순신의 함대가 적을 장악한 가운데 원균의 함대도 분투한 전투의 연속이었다.[2]



[1] 활자본. 42 8. 수정문제가 논의된 것은 인조반정으로 북인세력이 물러가고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서인으로 지목된 이이(李珥) ·성혼(成渾) ·박순(朴淳) ·정철(鄭澈), 남인 유성룡(柳成龍)에 대하여 없는 사실을 꾸며 비방한 사실을 바로잡자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런 사유로 인조 즉위 초에 경연관 이수광(李睟 ) ·임숙영(任叔英) 등이 수정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다가 1641(인조 19) 대제학 이식(李植)의 상소로 수정을 결의하고 그로 하여금 전담하여 수정하게 하였다.

 

1643년 수정실록청을 설치하고 수정작업을 시작하였으나, 이식 등이 다른 일로 파면되고 사망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가 1657(효종 8) 김육(金堉) ·채유후(蔡裕後) 등이 재차 수정실록청을 설치하고 동년 9월에 완성하였다. 42권 중 선조 즉위년부터 1629년까지 30권은 이식이 편찬하였고, 1630년부터 1641년까지의 12권은 김육 등이 편찬하였다. 당쟁 이후의 실록은 당론의 영향을 받는 일이 가끔 있어 이처럼 수정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전의 실록을 파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권을 잡은 서인이 다시 편찬한 실록인 만큼 이순신에 대한 평가가 공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는 광해군을 자신의 승통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선조를 자신의 승통으로 삼았기 때문에 <선조수정실록>에서 선조가 원균을 두둔한 만큼 원균을 옹호하는 내용이 첨가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또한 이순신은 당파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동인인 유성룡의 친구로서 당파세력에 의해 동인으로 분류되었다.

 

[2] 논란이 되는 이 부분은 후에 기술될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 전문(全文)에서 원균의만행을 밝힐 수 있다.

 

☆-- 아쉬운 미수록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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