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 1차 출동5
제1차 출동과 5천의 결사대 5월3일. 녹도 만호 정운(鄭運)이 보자고 하기에 불러들여 물었더니 “우수사 이억기(李億祺)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가니 통분한 마음 이길 길 없거니와 만약 기회를 늦추다가는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곧 중위장 <난중일기> ( 그러나 달이 바뀌어 5월 2일이 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더 이상 출동을 늦출 수는 없었다.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경상 좌,우수영 함대의 행방도 묘연했고 기대했던 전라우수영 함대와의 연합도 물 건너간 상태였다. 본영인 여수를 비운 사이 있을 수 있는 적의 기습도 커다란 고민거리 중의 하나였다.적이 여수를 손에 넣기라도 하는 날엔 전화(戰禍)가 전라도의 충청도에까지 미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또 적이 전라도를 병탄(倂呑)하고 서해를 돌아 한성 이서(以西)에 상?한 후 전후좌우에서 도성을 압박한다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이었다.
5월 4일 이른 새벽. 출동을 위해 각 기지에서 모여든 전라좌수영 소속의 병선들이 여수항을 가득 메웠다.
판옥선 24척, 협선(종선) 15척, 포작선(소선) 46척, 총 85척으로 구성된 함대의 위용은 늠름하고 당당했다.각 병선의 선상에는 커다란 방패가 빽빽히 둘러쳐졌고, 그 뒤로 사령관의 승선을 기다리는 수병들이 장승처럼 도열해 있었다.이른 새벽(1시경)이었지만 포구에는 많은 인파가 운집해 있었다. 이들 중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는 없었다. 그것은 절망과 감동, 슬픔과 환희 등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온갖 감정이 뒤섞여진 눈물이었다. 또한 재회를 기약할 수 없는 전장으로 자식과 지아비, 아비와 오라비를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절규이자 응원의 환호이기도 했다.누가 과연 그들의 생사를 장담할 수 있을까? “왜란은 개전 초에 막을 수 있었다”는 이순신의 증언 지난날 부산과 동래 연해안 여러 장수들이 만약 전선과 노를 잘 정비하여 바다 가득히 진을 치고 있다가 왜적의 배들을 들이칠 위세를 보이면서 정세와 힘을 잘 살피고 헤아려서 적절히 병법대로 나아가고 물러남으로써 적들이 뭍으로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더라면, 나라를 욕되게 하는 환란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 (92. 4. 39) 병법에 따라 잘 대응했더라면 왜란은 부산에서 막을 수 있었다고 밝혀둔 부분이다. ‘난중일기+장계’를 비교, 조명해 가노라면 왜란은 문경 새재, 충주성, 한강, 임진강, 대동강, 평양성에서도 막아낼 수 있었음을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랬다면 임진왜란은 살수, 귀주 대첩과 같이 민족사에 길이 남는 승전사로 기억되었을 것이며, 조선 인구(당시 약 600만 명)가 반으로 감소되는 일은(<징비록>의 기록) 없었을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감정이 더욱 북받쳐서, 원컨데 한번 죽기를 각오하고 곧바로 왜적의 소굴을 짓이겨서 요망한 기운들을 쓸어버리고 나라의 부끄러움을 만분의 일이라도 씻고자 하옵니다. 성공과 실패, 잘되고 못되는 젓이야 신으로서는 미리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옵니다.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 ( 새벽 2시경, 마침내 출항의 북이 울렸다. 북소리와 함께 우렁찬 군악이 울렸고, 기지 함대들은 일제히 황포돛을 올리고 선봉, 중군, 후군의 순서에 따라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차례로 여수항을 빠져 나왔다.첫 출동에는 총병력 1만5천 명 중 5천 명이 선발되었다. 기타 병력은 여수 본영과 각 기지의 수비를 위해 잔류해 있었으며, 우후(虞侯 : 부관 역) 이몽구(李夢龜)가 진에 남아 있으면서 후방 방비의 총책임을 지는 유진장(留陣將)을 맡았다.전라좌수영이 단독으로 1만 5천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의 평소 빈틈없는 군영 經, 營을 해온 결과였다. 관내 기지들에 대한 점고와 훈련, 도망병 단속 등등 철두철미한 후방 經, 營이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조차 못해낸 병력을 준비해 둘 수 있었던 것이다.왜란을 대비하여 특별히 만든 거북선은 첫 출동 때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전란이 터지기 바로 며칠 전에야 진수식을 마쳤기 때문에 실전 배치를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거북선을 활용한 다양한 전술을 익혀야 했고,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탑재시켜야 할 무기의 종류도 많았다. 이 모든 것이 아직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순신도 거북선이 참전할 수 없었던 점을 매우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5월 4일. 맑다. 먼동이 틀 때에 출항했다. 곧바로 미조항(彌助項 :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앞바다에 이르러 다시 약속했다. 우척후, 우부장, 중부장, 후부장 등은 오른편에서 개이도로 들어가서 (적을) 찾아 치게 하고, 나머지 대장선들은 아울러 평산포, 곡포, 상주포, 미조항을 지나갔다. 남해도 앞을 돌아 소비포(所非浦)에서 밤을 지내고 새벽 일찍 출발하여 당포로 향했다. <난중일기> ( 초라한 모습의 경상우수영 함대 여수항을 빠져나온 함대는 남해도의 미조항을 돌아 소비포 쪽으로 향했다. 단순한 동진(東進)이 아니었다.함대는 육지 쪽 조선군의 형편과 어디엔가 매복해 있을지도 모를 왜군의 동향을 살피면서 빈틈없는 수색적을 병행했다. 만약 왜군 기동함대가 숨어 있는 것을 모르고 부산 쪽으로 나갔다가는 여수 등 후방기지들이 기습을 받게 될 수 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함대는 귀항할 곳도 없이 해상에 고립되는 신세가 될 수 있으므로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전날 경상우수사(元均)와 협력하여 적의 배를 쳐부수는라는 분부를 받고, 지난 5월 4일 축시(丑時 :
5일 새벽에 출발하여 전날 두 도의 수군들이 서로 모이기로 약속한 곳인 당포(唐浦) 앞바다에 이르니, 경상우수사 원균이 약속한 곳에 없으므로 신이 거느린 가볍고 빠른 배를 보내어 당포로 빨리 오라는 내용의 공문을 전했습니다. 6일 아침 진시(辰時 : 아침 8시경)에 원균아
그때
7일 새벽 다 같이 출발하여 적선들이 정박해 있는 천성(天城)과 가덕(加德)을 향하여 갔는데 <옥포파왜병장(玉浦波倭兵狀)> ( 5월 6일. 함대는 사전 연락을 통해 합류하기로 되어 있던 당포에서 원균을 만났다. 원균은 판옥선 1척만을 이끌고 나타났다. 원균의 경상우수영이 있는 가배량은 거제도 남쪽 끝 부분에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부산 일대의 왜군 함대와는 아직 교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평소에도 판옥선 5척, 협선 10척, 포작선 20여 척은 보유하고 있어야 했지만 거느리고 온 병선은 웬일인지 판옥선 1척이 고작이었다.잠시 후 남해도의 고을 수령과 미조항 등의 경상우수영 관내 기지대장들이 1척의 판옥선을 타고 나타났다.이들 기지들도 각기 판옥선 1-2척과 그 밖에 일정 수의 협선과 포작선을 보유하고 있어야 했지만 역시 판옥선 1척뿐이였다. 아무튼 원균 함대는 판옥선 4척과 협선 2척이 전부였다. 병선은 그렇다 치고 병력과 노꾼, 화약무기, 군량미는 제대로 갖추었을까? 4월 29일. 탐색대를 남해도 일대에 보냈을 때 “모든 고을이 텅비어 있었다”는 보고를 받은 바 있었다. 그것이 이유였다. 평소에도 전쟁에 대한 준비가 부실했던 이들은 기지들은 왜란의 소식을 듣자 당황해서 우왕좌왕했고, 이에 동요된 백성과 관리들은 일찌감치 피난을 떠나버리고 말았으며, 급기야는 군사들마저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가버리자 대장들만이 일부 병졸들을 모아 1척의 판옥선을 같이 타고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은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 나오는 임진왜란 초기의 경상우수사 원균의 초라한 모습이다. 우수영에서는 수사(元均)와 우후(虞侯 : 禹應辰)가 병영을 제 손으로 불태워버렸습니다. 우후는 행방불명이고 수사는 한 척의 배만 타고 지금 사천(泗川)포구에 들어붙어 있는데, 수십 명의 격군(格軍 : 노 젓는 군사)뿐이고 군사들은 한 명도 없습니다. 수사(元均)가 지난 19일에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서 지켜볼 생각으로 배를 고을 지경에 대었더니, 전에 쳐들어왔던 왜적 1백 여명이 배반한 백성들을 거느리고 다시 와서 성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선조실록> ( 왜적이 바다를 건너오자 경상우수사 원균은 대적할 평편이 못된다는 것을 알고 전선과 무기들을 모조리 바다에 가라앉히고 수군 1만여 명을 흩어버린 다음, 단지 옥포(玉浦) 만호 이운룡(李雲龍), 영등포(永登浦) 만호 우치적(禹致績)과 함께 남해현 앞바다에 머물러 있다가 육지에 올라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5월) 경상우수영 함대는 전라좌수영보다 넓은 해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함대의 규모도 두 배는 됐어야 했다. 그러나 평소 병선 건조와 동원훈련 등을 소홀히 했고, 게다가 원균 수사는 개전 2개월 전에야 부임한 탓으로 이렇게 초라한 모습의 함대로 전락하고 말았다.왜적 1백여 명을 보고도 겁이 나서 피하는 전력으로는 결코 20-30척 규모의 왜군 기동함대를 상대할 수가 없다. 그 때문에 원균은 그 동안 숨어 지내면서 구원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행여 왜군들의 눈에 뜨일 새라 보름이 넘는 기간을 숨바꼭질하듯 숨어 지냈던 원균은 그렇게 ‘한 곳에 모으고 두 번 세 번 약속을 했다’고 한 것은 부임 2개월 만에 전란을 맞은 원균 쪽이 화약무기 등에 대한 준비(훈련)가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대응책 논의가 있었던 것이다. |
11. 출전 [01:18]
/작곡 : 원일
/음악감독 : 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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