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 속지화를 위해 현해탄을 건너온 왜군 선봉대 제1진이 부산에 상륙했다. 상륙한 왜군들은 부산성과 동래성을 함락하고, 상주→충주를 거쳐 한성을 향해 북상했다. 뒤이어 상륙한 왜군 후속 부대들도 대마도, 나고야에 비상대기하고 있던 병력을 합하면 총 30만 대군이었는데, 이는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병력 동원이었다. 사생결단의 해전을 시작했다. 경상도에서 날아온 급보 12일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包), 현자포(玄字包)를 쏘아보았다. 순찰사 군관 남공심(南公審)이 떠났다. - <난중일기>( 4월 15일에는 거북선 관계 보고서를 전주(全州)에 있는 전라감영(監營)에 보냈다. 그리고 그날 오후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 1540-1597)으로부터 “4월 13일, 왜선 90여 척이 부산포에 와 닿았는데 해마다 오는 세견선(歲遣船)과는 달라 보인다”는 내용의 공문(公文)을 받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이렇게 생각한 역사적으로 볼 때, 왜적들은 부산 쪽을 공격한 다음에는 전라도 쪽으로 몰려오는 것이 통례였다, 또 원균이 보내온 공문의 내용들도 구정에 따라 ‘90여 척’ 등 부산포를 침공한 왜선단의 규모를 알려온 통보성 공문에 불과했다.즉, 향후 홰군의 진로가 어디로 향할 것인지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경상도 쪽으로 출동해 달라는 내용은 더더욱 없었다.
당시는 타도 간의 출동 여부는 조정에서 결정할 사항이었으므로 지방의 수사급 장수들 간에 구원을 요청하고 또 거기에 응할 수 있는 그런 군령체계가 아니었다.
이 같은 상황이었으므로 전라좌수사 같은 날 또 공문이 왔는데 “왜선단 150여 ?이 또 부산에 와 닿았다”는 내용이었다. 이튿날인 4월 16일에는 원균 수사가 다시 “400여 척의 왜선단이 부산에 와 닿았다”는 공문을 보내왔다.
이렇게 원균으로부터 보내져 온 공문은 모두 세 차례로 90여 척, 150여 척, 400여 척 등 왜선단의 규모를 알려온 것들이었다. 같은 날 진주에 있는 경상감사(관찰사) 김수(金? : 1547-1615)로부터 “이달 13일 왜선 4백여 척이 부산포 건너편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적의 형세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극히 우려됩니다. 또 계속 전하겠으니 사변에 대비하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공문이 왔다. 김수 감사의 공문 역시 통보성 공문이며 그 자신도 자체 방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경상도 구원(救援)을 위한 출동 준비 4월 20일이 되자 경상감사로부터 또 공문이 왔는데 내용인즉, ‘전라 수군이 경상도로 구원 나오도록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그 내용을 전라감사와 적의 형세가 극성하여 부산, 동래, 양산이 이미 함락되었고, 적들은 내지(內池)로 향하므로, 보도 우수사에게 해군을 모두 이끌고 적선을 막아내기 위하여 바다로 나가라고 이미 지시하였기 때문에 경상도 여러 진(鎭)에는 전선이 1척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경상)우도에 변고가 생기면 즉시 와서 구원해야 할 일로 조정에 보고를 올렸는데, 지금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뜻을 (전라)감사와 병사들과도 의논하여 시행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 공문을 읽은 공문을 받아든 조정의 출동명령서 경상감사의 4월 20일자 공문이 온 후, 4월 26일과 27일 조정으로부터 출동명령서가 잇달아 내려왔다. 원균과 합세하여 적을 치라고 명령하는 유서(諭書) 왜적이 이미 부산, 동래를 함락시키고 또 밀양으로 쳐들어 왔다고 하는바, 이제 경상우수사 원균의 장계를 보니 여러 포구의 수군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나가 형세를 과시하고 적을 덮쳐 격멸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하는 바, 이는 하나의 좋은 기회이니 그 뒤를 잇달아 나가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네가 원균과 합세하여 적의 배를 쳐부수기만 한다면 적을 평정시키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선전관을 보내어 급히 이르도록 하는 것이니, 너는 각 포구의 전선들을 독촉하여 거느리고 급히 달려가서 기회를 잃지 말도록 하라.그러나 천리 밖에 떨어져 있는지라, 혹시 무슨 뜻밖의 일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이 지시에 구애받지는 말라. 왜군들이 ‘밀양으로 들어왔다’고 했지만 이 때는 신립 장군의 탄금대 패전 하루 전이다.‘원균의 장계를 보니 여러 포구의 수군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나가’라고 되어 있는 것은 원균의 구원 요청 장계가 조정으로 올라갔음을 말하고, ‘그 뒤를 잇달아 나가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고 한 것은 조정이 ‘그러나 천리 밖에 떨어져 있는지라 혹시 무슨 뜻밖의 일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이 지시에 구애받지는 말라’고 한 것은 현지의 장수들인 전라감사, 병사, 우수사, 그리고 토호세력(유림과 명문 가문 등, 고경명, 출동(出動) 쪽을 선택 조정으로부터 출동명령이 하달된 지 이틀 뒤인 4월 29일. 전라좌수영 수뇌부는 조정에서 내려온 명령서에서 “무슨 뜻밖의 일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이 지시에 구애받지는 말라”는 부분을 두고 진해루(鎭海樓 : 현재 진남관 앞 망해루 터에 있던 누각)에서 최종적으로 논의를 하였다. 대다수 장수들의 의견은 ‘출동하자’는 쪽이었지만 ‘굳게 지키자’는 쪽도 적지 않았다.
지키자는 족에서는 ‘기지를 비운 사이 적이 기습을 해온다면 전라도마저 적에게 내주게 될 수 있으며, 그것은 함대 본연의 임무에 위배된다’는 주장을 폈다. 반면에 출동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적이 남해안 일대를 거점화하기 이전에 소탕해야만 전라도를 지켜낼 수 있다’고 맞섰다.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회의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급박한 전시상황에서 첫째, 지키고만 있다가는 조만간 경상도 쪽에 주둔해 있는 왜의 해군이 한꺼번에 공격해 올 것이므로 절대 불리한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적은 20-30척 단위의 기동함대로 편성되어 있다. 왜적을 해상에서 각개로 격파하면서 선제공격을 감행한다면 해볼 만한 싸움이 될 것이다. 둘째, 왜군의 주력은 이미 문경새재(조령)을 넘어 한성을 향해 북상하고 있다. 만약 당장이라도 한성이 함락되고 만다면 앉아서 이곳을 지키고 있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 이상 출전의 불가함을 말하지 말라.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며, 이후부터 소속 부대의 군기(軍紀)를 더욱 엄히 세우라. 그렇게 해서 이날 회의에서는 ‘출동’이 결정되었다. 중지(衆智)가 결집되자 곧이어 출병에 따른 기지별 준비 상황과 해전을 위한 세부 작전계획이 논의되었다. 그리고 결정된 사항들은 전라감사 이광(李珖 : 1541-1607)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 1561-1597)에게 보내졌는데, 공문의 내용은 ‘북상 중인 적을 교란시키고 서해안 방어와 부산 근해의 적 해군을 소탕하기 위해 4월 30일, 이억기 함대가 오는대로 함께 출동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5월 2일. 맑다.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이일(李鎰)과 우수사 원균(元均)의 공문이 도착했다. 송한련(宋漢連)이 남해에서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남해현령[ <난중일기>( 모두 피난 떠나버린 남해도의 여러 고을 옛날에는 변변한 지도도 등대도 없었다. 특히 다도해에는 섬과 암초가 많고, 안개와 비, 그리고 강풍이 부는 날이 많았다. 때문에 해역을 여러 개로 나누고 구역마다 세습으로 이어오는 수로 뱃사공 겸 안내인들을 두었다.더구나 그때는 전시였으므로 야간 항해도 해야 했고, 또 왜군 함대가 어디에 잠복해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남해 현령
‘왜군들은 아직 부산 근해에 머물러 있을 텐데 어떻게 멀리 떨어져 있는 남해도의 고을들이 텅 비게 되었을까?’
경상우수영 관내는 낙동강 하구에서부터 남해도에 이르기까지 3도 수영 관내 중 가장 넓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원균 함대에게 병선과 무기, 군량을 공급해야 할 후방 고을들의 형편이 이와 같다면 사실상 원균의 함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함대와의 합동작전에 과연 기대할 것이 있을까? 경상우수영 함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해상기지로서는 전라좌수영이 최전선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4월 30일까지 여수에서 합류하여 경상도 쪽으로 출동하기로 되어 있던 전라우수영 함대는 5월 1일이 되어도 소식이 없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출동준비에 차질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와 당혹감이 전라좌수영 수뇌진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경상우수영 관내가 온통 비어 있고 전라우수영 함대도 당장 출동을 못할 형편이라면 전라좌수영 함대는 그야말로 ‘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1] 5월 30일. 비가 하루 내내 계속 내렸다. 오후 4시쯤 잠시 갰다가 다시 비가 내렸다. 아침에 윤 봉사, 변유헌에게 적의 정세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이홍명이 보러 왔다. 원균이 송 경략이 보낸 불화살을 자기만 쓰려고 하였으나 병사 편에 공문을 보내 나누어 보내라 하니까. 공문의 내용을 매우 못마땅해하면서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명나라 관리가 보낸 불화살 1천 5백 30개를 나누지 않고 혼자서 모두 쓰려고 하다니 그 잔꾀가 아주 심하여 말로 다하기 어려울 정도다. 저녁에 조붕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해 현령 <난중일기> ( 원균을 옹호하는 세력들이 주장하는 임진왜란이 발발 초기에 남해현에 대한 이순신의 청야작전이 남해현령 |
11. 출전 [01:18]
/작곡 : 원일
/음악감독 : 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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