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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와 국방/안보 불감증

조선 수군 1차 출동1

 

 

 

이순신 함대의 제1차 출동 개요

 

5 2. 경상우도 남해에 보냈던 이순신의 군관 송한련(宋漢連)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남해현령과 미조항 첨사, 상주포, 곡포, 평산포 만호 등이 이미 도망쳐버렸고, 무기 등도 모두 흩어져 남은 것이 없다고 했다.

 

이날 저녁에 군호(軍號; 암구호)용호(龍虎)라 하고, 복병(伏兵)산수(山水)라고 정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함대가 500여 척이나 되는데 전라좌수영 군선은 100척에도 미치지 못 했고, 특히 전함다운 전함인 판옥선은 20여 척밖에 되지 않았다.그래서 이억기가 거느린 전라우수영 함대와 합세하려고 했던 것인데, 이억기의 합류가 늦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녹도만호 정운도,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도성 가까이 다가가니 통분함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더 늦추다가 만약 기회를 놓친다면 뒷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더는 출동을 늦출 수가 없었다. 이순신은 출동을 결심했다.

 

5 3. 중위장 이순신(李純信)을 불러 내일 새벽에 출동하도록 지시했다.

 

또 군율을 엄격히 세워 탈영한 수군 황옥천(黃玉千)이란 자를 잡아 효수했다.

5 4. 채 새벽도 오기전인 오전 2 여수를 출발했다. 모든 사람이 잠든 한밤중에 작전을 개시했던 것이다.

 

그때 이순신이 거느린 전라좌수영의 군선은 판옥선이 24, 협선이 15, 포작선이 46, 도합 85척이었다.하지만 협선이나 포작선은 전함이라고 하기에는 병력과 장비가 빈약한 배였으므로 군함다운 군함은 판옥선 24척 밖에는 없었다고 보아야 했다. 그때 거북선도 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한 척이었는지, 아니면 두 척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1]

협선은 소형 전선으로서 적정을 살피거나 적선을 추격하여 나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쾌속선이며, 포작선도 어선을 동원하여 수송 및 연락, 또는 적군을 사로잡는 임무를 수행하는 데 쓰였던 것이다. 이순신은 전투에 앞서 수색 작전의 중요성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자신의 관내는 손바닥 보듯이 환했지만 영남 쪽 바다에 대해서는 사정을 잘 몰랐으므로 그쪽 바다에 대해 잘 아는 광양 현감 어영담(魚泳潭)을 향도로 삼았다.

 

당시 이순신 함대를 이룬 장령의 보직은 다음과 같았다.

 

• 중위장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 좌부장

낙안군수

 

• 전부장

흥양현감

배홍립

• 중부장

광양현감

어영담

• 유군장(遊軍將)

발포가장

나대용

• 우부장

보성군수

김득광(金得光)

• 후부장

녹도만호

정운

• 좌척후장

여도권관

김인영(金仁英)

• 우척후장

사도첨차

김완(金完)

• 한후장(後將)

군관

최대성(崔大成)

• 참퇴장(斬退將)

군관

배응록(裵應祿)

• 돌격장

군관

이언량(李彦良)

 

 

그러나 선봉장은 경상도 장령 가운데서 선발하기로 원균과 약속했으므로 정하지 않았고, 또 순천부사 권준(權晙)은 그때 관찰사의 전령으로 전주로 가서 없었으므로 보직이 미정이었다.

 

한편, 후방을 지킬 장령으로는 이몽구(李夢龜)를 유진장(留陣將)으로 삼아 여수를 맡도록 하고, 방답, 사도, 여도, 녹도 등 책임자가 출전한 진포에는 이순신의 군관 가운데 담력과 지략이 있는 자를 가장(假將), 곧 임시 장수로 임명하여 파견했다.

 

 

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산처럼 무겁고 조용히 행동하라!

 

이순신의 전략전술은 작전해역의 사정과 적정을 정확히 파악하여

적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유인하여 철저한 공격으로 섬멸하는데 있었다.

그는 공을 세우려고 왜적의 머리를 베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한 대의 화살이라도 더 날려 한 놈의 왜병이라도 더 죽이라!

지시했으며, 상대적으로 견고한 우리 전함으로 돌격하여

적선을 파괴하는 전법을 썼다.

 

 

옥포해전에서 빛나는 첫 승리

 

그날 5 4. 이순신은 중부장 어영담을 물길의 안내자 겸 선봉장을 삼고, /우 척후장 김인영과 김완이 거느린 척후선을 멀리 내보내 적군의 동태를 수색 정찰토록 했다.남해 미조항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이순신은 초요기(招搖旗)를 올려 전 함대를 집결시켰다.그리고 우척후장 김인영, 우부장 김득광, 중부장 어영담, 후부장 정운 등은 오른쪽 개이도를 경유하여 수색토록 하고, 나머지 대장선은 모두 평산포, 곡포, 미조항을 수색토록 명령했다.이렇게 함대를 2개 전대(戰隊)로 나누어 수색 정찰하면서 항진을 계속했지만 날이 저물 때까지 적선을 한 척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날은 소비포 앞 바다에서 밤을 세웠다.

 

 
 

 

이튿날 5 5일 새벽. 함대를 지휘하여 당포에 이르렀으나 약속한 원균은 그 다음날 아침 8시쯤 한산도 근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원균이 거느린 군세란 겨우 판옥선 4척에 척후선 2척 뿐이었다.이순신은 원균으로부터 일본 수군의 규모와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 등을 듣고 앞으로의 작전계획을 마련할 수 있었다.또한 원균이 찾아온 때를 전후하여 남해 현령 기효근(奇孝謹), 미조항 첨사 김승룡(金勝龍), 소비포 권관 이영남(李英男), 영등포 만호 우치적(禹致績), 옥포 만호 이운룡(李雲龍) 경상우도 소속 여러 장수가 판옥선 3척과 협선 2척에 나누어 타고 도착했다.이로써 아군의 전체 전력은 포작선을 제외하고 판옥선 28, 협선 17척 등 45척으로 늘어났다.

 

양도의 장수들은 작전회의를 거듭하고 이날 5 6알 밤은 송미포 앞바다에서 보냈다.

이튿날인 5 7일 새벽에 다시 출발하여 적선이 있다는 천성, 가덕도 쪽으로 향하다가 정오쯤 거제도 남쪽 옥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저 멀리서 우척후장인 사도첨사 김완이 신기전을 쏘아 올려 적선 발견을 보고했다.이로써 전라좌수영을 떠난 지 4일 만에 첫 접전이 시작되었다.그때 발견한 적선의 규모는 30여 척이었고, 일본군 병사들은 육지에 올라 약탈에 여념이 없었다.

 

이순신은 즉각 공격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첫 싸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군사들의 심리란 처음 전투에서 지면 사기가 떨어져 계속 지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출동에 앞서서 이렇게 명령했다.

 

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산처럼 무겁고 조용하게 행동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

 

뭍에 올라 노략질을 하던 적병들은 조선 수군을 보자 겁도 없이 배에 올라 응전하기 시작했다. 먼저 적선 6척이 덤벼들었다. 조선 수군이 이들을 포위하여 총통과 화살을 마구 쏘자 적병들도 조총을 난사하며 맞섰다. 그러나 그들은 막강한 전투력을 갖춘 이순신함대의 적수가 아니었다.결국 이순신함대는 5 7일 벌어진 이 해전에서 일본 수군의 대선 13, 중선 6, 소선 2척 등 26척을 격침하여 첫 싸움에 빛나는 승리로 장식했으니 이 싸움이 옥포해전이다.

 

옥포해전에서 첫 승리를 거두자 비로소 조선 수군은 용기를 되찾고 활기를 띄게 되었다. 초전의 승리란 그래서 중요한 법이다.

 

이순신은 계속 함대를 지휘하여 거제도 북쪽 영등포로 이동하여 정박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 4시쯤 적선 5척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바다를 지나가고 있다는 척후장의 급보가 들어왔다. 이에 곧바로 추격을 시작하여 현재 진해시인 웅천 합포에서 적선을 포위했다.당황한 적병들은 배를 버리고 황망히 뭍으로 올라 도망쳤다. 우리 군사들은 적선 5촉울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이것이 두 번째 싸움인 합포해전이다.

 

이튿날인 5 8일 새벽에 웅천 고리량에 적선들이 있다는 첩보를 받고 즉시 출발하여 주변을 수색하면서 저도를 지나 오늘의 통영시 광도면 적진포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적군의 대선과 중선 13척이 정박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순신함대는 이들을 사정없이 공격해 삽시간에 모조리 격파해버렸다. 이것이 세 번째 싸움인 적진포해전이다.

 

이 해전을 마치고 아침식사를 하고 잠시 쉬는데 전라도사 최철견(崔鐵堅)으로부터 임금이 평안도로 피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이순신함대는 뱃머리를 돌려 이튿날인 5 9일 정오쯤 여수 좌수영으로 일단 귀환했다.이렇게 이순신함대는 제1차 출전에서 3 3승을 거두며 적선 42척을 격침시키고 무수한 적군을 사살했는데, 아군의 손실을 부상 1명뿐이었다. 이 옥포, 합포, 적진포 해전을 합쳐 옥포대첩(玉浦大捷)이라고도 부른다.

 

이순신의 출중한 리더십에 따라 백전백승하는 탁월한 지휘능력이 빛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순신은 이 옥포대첩의 공로로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하지만 그는 승첩을 보고하는 장계에 부하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여 그들에게 승전의 공로를 돌렸다. 그리고 장계 말미에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적을 막는 방책에 있어서 수군의 활동보다는 오로지 육전으로만 성을 지키는 방비에 힘썼기 때문에 나라의 수백 년 기업이 하루 아침에 적의 소굴로 변한 것으로 알며, 생각이 이제 미치니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적이 만일 바다로 본도(전라도)를 침범해 온다면 신이 해전으로서 죽기를 각오하고 담당하려니와, 육지로 침범해온다면 본도의 장수들이 전마(戰馬) 중에서 전쟁에 쓸만한 말을 잘 길들여 전쟁에 사용한다면 가히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공식적으로는 이순신의 제2차 출동부터 거북선이 출동한 것으로 되어있다.

 




< 출처 : 불멸의 이순신 - 승리의 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