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
삼가 구원병 나가는 일로 아뢰나이다.
이달 4월 20일 도착한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晬)의 공문에서 말하기를, “적의 형세가 극성하여 부산, 동래, 양산이 이미 함락되었고, 적들은 내지(內池)로 향해 가고 있으므로, 본두 우수사에게 적선을 막아내기 위하여 수군을 모두 이끌고 바라로 나가라고 이미 지시하였기 때문에 경상도 여러 진(鎭)에는 전선이 1척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경상)우도에 변고가 생기면 즉시 와서 구원해야 할 일로 저정에 보고를 올렸는데, 지금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뜻을 (전라)감사와 병사들과도 의논하여 시행하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적의 형세가 극성하여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러 큰 진들이 연달아 함락되고 내지까지 침범당하니 지극히 통분하여 간담이 쪼개지는 듯 아픕니다. 이럴 때 신하된 자로서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라의 치욕을 씻고자 아니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나아가 같이 싸우라는 조정의 명령을 엎드려 기다리면서, 소속 수군과 각 고을 및 포구에는 전선을 정비하여 주장(主將)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라는 내용으로 급보를 띄웠으며 본 도의 감사 및 병마사와도 의논을 하였습니다.
지난 번 지시에서 “사정 형편상 할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가는 기회를 크게 놓치는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은 멀리 있어서 지휘할 수 없으니, 도내의 주장(主將)의 지휘에 일임한다.”라고 하셨습니다.그러나 신은 주장의 한 사람일 뿐이므로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전라)겸관찰사 이광(李珖), 방어사 곽영(郭嶸), 병마절도사
그리고 소속 각 고을과 포구에는 제반 전투 기구를 다시금 잘 손질해 놓고 명령을 기다리라는 내용으로 공문을 보내어 엄중히 신칙하였습니다. 왜적들이 침입해온 지 오래 되었으니 반드시 적들은 지쳐 있을 것이고 지니고 있는 전쟁 물자들 또한 다 떨어져 갈 것으로 생각되므로, 적들을 쳐야 할 시기는 바로 지금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앞뒤로 건너온 적선의 수가 5백여 척이나 된다고 하니, 우리 측의 위세와 무장을 엄중하게 갖추어 적을 습격할 태세를 보임으로써 적들이 무서워서 떨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영 소속의 방답(防䠌), 사도(蛇渡), 여도(呂島), 발포(鉢浦), 녹도(鹿島) 등 다섯 진(鎭)과 포구의 전선들만으로는 그 세력이 몹시 외롭고 약합니다. 그러므로 기타 수군이 나뉘어져 있는 순천, 낙안, 흥양, 보성 등 다섯 고을의 수령들도 규정에 따라 함께 거느리고 가야만 하겠기에 경상도로 구원 나가려면 거쳐야 되는 바다 길목에 있는 본영 앞바다로 일제히 도착하라고 급히 공문을 띄웠습니다.
수군들의 여러 장수들 중에 보성과 녹도 같은 곳은 오는 데 3-4일이나 걸리는 먼 곳에 있으므로 공문을 받고 나서 집합하려면 틀림없이 기일에 대어오기 힘들겠지만, 다른 여러 곳의 장수들은 모두 이달 29일에 본영 앞바다에 모이라고 분명히 지시한 후 곧바로 경상도로 구원 나갈 계획입니다. 경상도순변사, 겸관찰사, 우도수군절도사 등에게도 공문을 띄워 약속하였습니다. - 경상도로 구원 나가는 장계(一)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 (
4월 30일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
삼가 사변에 대비하는 일로 아뢰나이다.
이달 4월 29일 낮 12시경(午時)에 경상수사(元均)의 회답 공문이 왔는데 말하기를, “왜적의 배 5백여 척이 부산, 김해, 양산강, 명지도(鳴旨島; 김해군 명지면) 등 여러 곳에 정박한 후, 적들은 뭍으로 올라가서 제멋대로 날뛰고 있는데, 연해안 각 고을과 포구의 우리 병영(兵營)과 수영(水營)들은 거의 다 적의 수중에 떨어졌고, 성들도 함락되었으며, 봉화까지 끊어져버려 지극히 통부합니다. 그래서 본 도의 수군을 뽑아 출동시켜서 적선 10여 척을 추격하여 불태워버렸으나, 나날이 적병들이 늘어나서 그 세력이 더욱 성해짐으로써 적은 많고 우리는 적기 때문에 대적할 수 없었으며, 본영 역시 이미 함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양 도의 수군이 합세하여 적선을 친다면 뭍으로 오른 왜구들도 뒤를 돌아다보는 걱정거리가 생기게 될 것이니, 귀 도(道)의 전선들을 남김없이 거느리고 당포(唐浦) 앞바다로 달려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소속 해군 중위장인 방답 첨사
선봉장은 우수사와 약속할 때 그 도의 장수 중에서 뽑아 정할 계획이고, 신의 우후 이몽구(李夢龜)를 본영(本營)의 유진장(留鎭將; 본영에 남아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장수)으로 정했으며, 방답, 사도, 여도, 녹도, 발포, 등 다섯 포구에는 신의 군관 중에서 담략이 있는 자를 가장(假將)으로 정하여 엄중히 신칙하여 보냈습니다.
신은 수군의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오늘 4월 30일 새벽 4시경(寅時)에 출발할 계획이므로,
그런데 그날 오후 2시경(未時)에 신이 전령으로 보냈던 본영의 진무(鎭撫)인 순천 수군 이언호(李彦浩)가 급히 돌아와서 “남해 고을 성 안의 관아와 민가들이 모조리 다 텅 비었고 굴뚝에는 연기라고는 전혀 나지 않아 쓸쓸하였으며, 창고의 문들은 이미 열려서 곡식들이 전부 흩어져 없어졌고, 무기고의 병기들 역시 전부 없어졌습니다. 군기창고 밖 행랑채에 다만 한 사람이 남아 있기에 그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온 성의 군사들이 왜적들이 이미 가까이 쳐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전부 도망쳐버렸으며, 현령과 첨사까지도 따라서 도망갔는데,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이 쌀섬을 등에 지고 장전(長箭)을 가지고 남문에서 달려 나오다가 화살 일부를 주었습니다.” 라고 보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장전을 살펴보니 분명히 곡포(曲浦)라고 새겨져 있었으므로 성을 비우고 도망갔다는 말이 그럴듯하였지만, 하인들의 하는 말인지라 꼭 그렇다고 믿기도 어려워서 신의 군관 송한련(宋漢連)에게 지시하기를,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도리어 적에게 군량을 대주어 점차 본 도(전라좌도)로 쳐들어와서 오랫동안 머물러서 퇴각하지 않아도 되도록 도와주슨 셈이 되니, 곡식창고와 무기창고를 불살라서 없애버리도록 하라.”고 전령을 급히 보냈습니다.
그러나 대개 흉측한적들이 세력을 떨쳐 패를 나누어 도적질하며 한 패는 내지로 향하여 전부 쳐부수고는 길게 달려가고, 또 한 패는 연해안을 따라 남김없이 쳐서 함락시키는데도 불구하고 육해군 모든 장수들이 하나도 막아서 싸우지 못하여 이미 적의 소굴로 되어버렸으며, 바닷가 진영으로서 남은 곳이라고는 오직 이(경상) 우수영과 남해, 평산포 등 네 진(鎭)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이 우수영 역시 함락되었고, 남해 섬 전체도 이미 무인지경이 되었다고 하는데, 소위 (경상)우수영은 신이 지키는 진(鎭)과 같은 바다로 서로 연이어 있고, 남해는 북소리나 나팔소리를 서로 들을 수 있고 앉아 있는 사람의 수까지 똑똑히 셀 수 있는 형편이므로, 본 도(전라좌도) 또한 왜적에게 침범당할 걱정이 조석(朝夕)으로 박두하였으니 지극히 한심합니다.[1][2]
본 도의 내지와 연해안 각 고을과 변두리를 방비하기 위하여 새로 뽑은 조방군(助防軍) 등 강한 정예 군사들은 모두 육전으로 나갔고, 변두리 작은 진지에는 병기를 가진 자가 매우 적으며, 수군들로는 단지 맨주먹의 군사들 뿐이어서 그 세력이 심히 약하지만 달리 왜적을 막아낼 계책이 없는 실정입니다.수군 중위장 순천 부사 권준(權俊)은 관찰사의 명령으로 바다에서 떠나 전주로 달려가서 그곳에서 사변에 대비하고 있습니다.그런데다가 장기간 임지에 있던 자들도 한번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만 들으면 가솔을 이끌고 짐을 꾸려 피난 가는 바람에 피난행렬이 길 위에 줄을 이었는데, 혹은 밤을 타서 도망가고, 혹은 틈을 엿보아 이사를 갑니다. 본영의 파수병들과 본고장 백성들 중에서 역시 이와 같이 하는 자들이 있으므로 신은 그 길목을 지키면서 도망가는 자들을 붙잡을 장수를 보냈는데, 도망가는 자 두 명을 잡아와서 우선 목을 베어 군중(軍中)에 효시함으로써 군사들의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경상도로 구원 나가라는 전하의 명령이 지극히 간곡할 뿐더러 신도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들은 뒤부터는 분노가 가슴 속에 서리고 쓰라림이 골수에 사무쳐서 한번 적의 소굴을 무찌름으로써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충성심이 자나 깨나 간절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경상우수사(元均)와 힘을 합쳐 적도들을 쳐부수고 섬멸할 것을 기약합니다.
그러나 첩입군(疊入郡: 우수영과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지금 왜적의 세력이 왕성해진 것은 모두 적들과 바다에서 싸우지 않고 적들이 멋대로 뭍으로 올라가게 내버려 둔 때문입니다.경상도의 바닷가 여러 고을들은 깊은 해자와 높은 성루로 튼튼한 곳이 많겠는데, 성을 기키던 비겁한 군사들이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만 듣고서도 간담이 떨려 모조리 도망칠 생각만 품었으므로, 적이 에워싸기만 하면 반드시 함락되어 온전한 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지난날 부산, 동래, 연해안 여러 장수들이 만약 배와 노를 잘 정비하여 바다 가득히 진을 치고 있다가 왜적의 배를 들이칠 위세를 보이면서 정세와 힘을 잘 살피고 헤아려서 적절히 병법대로 나아가고 물러남으로써 적들이 뭍으로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더라면, 나라를 욕되게 하는 우환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감정이 더욱 북받쳐서, 원컨대 한번 죽을 각오를 하고 곧바로 왜적의 소굴을 짓이겨서 요망한 기운들을 쓸어버리고 나라의 부끄러움을 만분의 하나라도 씻고자 합니다. 성공과 실패, 잘되고 못 되는 것이야 신으로서는 미리 헤아릴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다. - 경상도로 구원 나가는 장계(二)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 (
그런데 4월 27일과 30일, 그리고 뒤에 나오는 5월 3일자 장계는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피난을 떠나는 바람에 중도에서 실종되고 조정에 전달되지 못했다. 그 결과 후에
5월 4일. 맑다. 새벽녘에 출발하여 바로 미조항 앞바다에 이르러 다시 한번 약속했다. 개이도(介伊島; 싸리섬를 거쳐 평산포, 상주포(尙州浦), 미조항(彌助項)을 지나갔다.
남해도 앞을 돌아 소비포(所非浦)에서 밤을 지내고 새벽 일찍 출발하여 당포로 향했다.
그리고 <난중일기>에는 5월 5일부터 5월 28일까지가 빠지고 없는데, 이 기간에 일어난 일들은 뒤에 소개되는 장계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에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5월 29일자 일기는 이날부터 시작되어 6월 10일까지 계속된 제2차 출동에 관한 설명으로서,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6월에 올린 장계 <당포파왜병장>(唐布破倭兵狀)에서 설명되고 있다.
삼가 구원병 나가는 일로 아뢰나이다.
전에 경상도우수사 원균과 함께 힘을 합쳐 왜적의 배들을 쳐부수라는 전하의 분부를 받고, 소속 수군의 여러 장수들은 지난 4월 29일 본영 앞 바다로 모여서 30일에 출발할 계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겸관찰사 이광(李珖) 역시
내지로 향해 올라간 왜적들이 장차 서울로 접근하려 하므로 신 이하 여러 장수들 가운데 분해서 떨쳐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칼날을 무릅쓰고 나아가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왜적들을 맞아 그 돌아갈 길을 끊어놓고 그 배들을 쳐부순다면 왜적들은 뒤가 염려되어 곧바로 되돌아 올 수도 있을 것이기에, 오늘 5월초 4일 첫 닭이 울 때 곧바로 되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기에, 오늘 5월초 4일 첫 닭이 울 때 곧바로 경상도로 향하여 배를 출발하면서, 한편으로 우수사 이억기에게 속히 달려오라고 급보를 띄웠습니다. - 경상도로 구원 나가는 장계(三)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 (
그런데 4월 27일과 4월 30일, 그리고 뒤에 나오는 5월 3일자 장계는 중도에서 실종되었다. 그 때문에 4년이 지난 후에 김응남(金應南; 좌의정)과
후에 가서
김응남 : “원균이 처음에 사람을 보내어 순신을 불러도
<선조실록> (
<선조실록> (
이와 같은 모함의 말이 있었던 시점(時點)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모함에서 거론된 사건은 1592년 4월의 일인데, 이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그 동안 전혀 없다가 4년이 지난 후에야 말들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온각 모함의 말들이 생겨나는 와중에 추가된 또 하나의 모함의 말에 불과하다.
후에 가서 정유년(1597) 2월 마침내 통제사
[1] 이 상황에 관하여 당시 원균의 직속상관인 초유사(招諭使)
“(……) 변란이 터진 첫 시기에 (경상)도의 병사, 수사(좌수사 ‘박홍(朴泓)’과 우수사 ‘원균’), 방어사, 조방장 등이 각 고을에 있던 무기들을 옮겨다가 싸움터에 갖다 놓았었는데, 흩어져 달아날 때 물 속이나 불에 던져버리기도 하고 길바닥에 내버리기도 하였기 때문에 무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창고의 곡식들은 고을 수령들이 적들이 들이닥치기도 전에 겁부터 먹고 스스로 창고를 불태워버렸거나 백성들이 훔쳐다 먹게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군량도 전혀 없습니다.
비록 의병이 일어나더라도 무기와 군량이 모두 모자라니 사람들이 마음을 굳게 갖지 못하고, 적이 온다는 말만 한 번 들으면 모였다가도 곧바로 흩어져버립니다. 온갖 궁리를 다 해도 무기와 군량을 마련할 길이 전혀 없어서 가슴이 몹시 아프고 답답합니다. (……) 경상우도로 침입한 적으로 말하면, 한 부대는 김해, 창원(昌原), 우도의 병영(兵營), 칠원(漆原) 등지를 함락시켜 소굴로 삼았고, 다른 한 부대는 바닷가의 여러 섬들로 들락거리고 있는데, 여러 진(鎭)이나 보(堡)의 장수들은 바라보기만 해도 겁을 먹고 저마다 살 길을 찾아 뭍으로 도망쳐 나오게 되니 바다의 방어초소들은 텅 비었습니다.
우수영에서는 수사(元均)와 우후(虞侯; 우응진(禹應眞)) 가 병영을 제 손으로 불태워버렸습니다. 우후는 행방불명이고 수사는 한 척의 배만 타고 지금 사천(泗川) 포구에 들어붙어 있는데, 수십 명의 격군(格軍; 노 젓는 군사)들뿐이고 군사들은 한 명도 없습니다.신이 고성(固城)에 가 보니, 성은 비록 함락되었지만 왜적이 이미 돌아갔고 군량도 있었습니다. 만약 수사가 성에 들어가서 차지하고 지킨다면 흩어졌던 백성들이 아마 앞을 다투어 모여들어 안착 할 수 있겠기에 두 번이나 수사에게 공문을 보냈습니다.
수사(元均)가 지난 19일에 성 안으로 들어가서 지켜낼 생각으로 배를 고을 지경에 대었더니, 전에 왔던 왜적 1백여 명이 반역한 백승들을 거느리고 다시 와서 성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들으니, 수사(元均)는 선전관 원전(元㙉)이 전한 지시에 따라 전라도 수사와 다시 약속하고 가까운 앞날에 왜적의 배를 쳐부수기로 약속하였다고 합니다. (……)
남해(南海)는 호남과의 경계에 놓여 있는데 아직 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그런데 남해 현령
신이 본 바에 의하면,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화살 한 대 쏘지 않고 성을 버리고 먼저 도망가 버렸으며, 좌병사 이각(李珏)도 뒤따라 동래로 도망쳤습니다. 우병사
우수사 원균(元均)은 우수영을 불태우고 바다로 나가서 배 한 척만 보존하였을 뿐입니다. 병사와 수사는 한 도의 주장(主將)들인데도 하는 짓들이 이러했으니 그 아래의 장수나 군사들이 어찌 도망치고 흩어지지 않겠습니까.양산의 임시 장수인 밀양 부사 박진(朴晉)은 창고와 무기를 불태우고 도망쳤습니다.바닷가 여러 고을에서는 적의 배를 바라보고는 일시에 무너져 뭍으로 도망쳐 나왔는데, 장수들은 도망치는 것을 상책으로 여기고 고을 수령들은 성을 사지(死地)로 생각합니다. 온 도가 다 그러하였으므로 적들은 칼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파죽지세로 수십일 동안에 벌서 서울까지 쳐들어간 것입니다. 예로부터 남의 나라 서울을 지금처럼 쉽게 함락시킨 예는 없었습니다.
만약 군법이 엄하여 싸움에서 패한 자는 반드시 죽이고, 머뭇거린 자도 반드시 죽이고, 성을 버린 자도 반드시 죽이고, 변란이 터진 뒤에 장수로 임명된 자들도 법을 제대로 집행하여 죄를 범한 자를 즉시 목 베었더라면 사람들은 물러서면 처단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니 어지 오늘처럼 무너져 달아나기까지야 되었겠습니까. 장수와 고을 수령들을 처벌하지 않고 도망치는 군사들만 처벌한다는 것은 뒤꼬리나 눌러놓는 격이 될 것입니다. (……) ” <선조실록> (
[2] 마찬가지로 원균의 직속상관인 경상감사 김수의 장계이다.
경상감사 김수(金晬)의 장계
김수(金晬)가 급보를 올렸다.
“수사 원균은 수군의 대장으로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내지(內池)로 피신하고 우후(虞侯) 우응진(禹應眞)을 시켜서 고을 창고를 불 지르게 한 결과 2백 년 동안 저축해 둔 물건들이 하루 아침에 없어져 버렸습니다.” <선조실록> (
<선조실록>(
이순신의 장계에 대한 답변으로 각각 4월 26일과 4월 27일자에 왕의 출동 명령(諭書)이 도착했는데, 왕의 지시문(諭書)에는 앞으로 여러 상황에 대한 대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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