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 1차 출동6
산같이 정중하라(靜重如山)! 5월 6일. 두 함대는 당포항(唐浦港)을 출발해서 거제도 남단에 위치한 송미포(松未浦)에 닻을 내리고 밤을 지냈다.이튿날이 5월 7일. 조선 함대는 아침 일찍 가덕도를 향해 돛을 올렸다. 그리고 옥포로 이동하던 중인 이 소식은 곧 사령선인 기함(旗艦) 기라졸(旗羅卒 : 수기병)들의 수기 신호를 통해 전 함대에 알려졌다. 거제도 송미포(松未浦) 앞바다에 이르니 날이 저물었으므로 밤을 보냈습니다. 7일 새벽 다 같이 출발하여 적선들이 정박해 있는 천성(天城)과 가덕(加德)을 향해 갔는데 <옥포파왜병장(玉浦波倭兵狀)> ( 첫 출전으로 인한 두려움과 긴장감 때문인지 병사들의 몸은 평소 훈련 때와는 달리 굳어 있었고,
조선 함대는 양지암을 돌아 곧장 옥포만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옥포만은 왜군들의 약탈과 방화로 시커먼 연기가 하늘 높이 솟구쳐 그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수십 척의 왜선들이 옥포 선창에 정박해 있는 것이 보였다.전투선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왜군 측 병선들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선체에 둘려쳐진 오색의 대형 휘장과 크고 작은 깃발들이 바람에 휘날렸다. “함대, 전투 속력으로!” 이순신의 명령이 떨어지지 조선 함대의 선봉, 중군, 후군은 위용을 갖추고 힘차게 군악을 울리며 왜선단을 향해 돌진하였다.분탕질에 여념이 없었던 왜군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과 귀를 의심하며 잠시 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조선 함대는 모두 도망가고 없다’는 생각에 천하태평으로 분탕질에 나선 터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선단이 나타나 처음 듣는 요란한 군악을 울리면서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군악 소리와 병선의 모양으로 봐서 그것은 분명 왜군 함대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시리(時理, 時利)와 지리(地理, 地利)에서의 우위 다급해진 왜군측은 급히 징을 치고 고동을 불면서 인근 마을에 나가 있는 왜군들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약탈을 위해 멀리 나가 있던 왜군들은 10-20리 밖까지 떨어져 있었으므로 때맞춰 돌아오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왜군 함대는 기동력과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조선 함대가 시리(時利)에 매우 유리한 입장이었다. 또한 만(灣) 안에 밀집해 있는 왜군 함대 뒤편의 병선들은 앞쪽 병선들로 인해 시야가 가려져 있었던 데 반해 조선 함대는 일렬로 진을 형성하고 있었고, 전 함대가 사격에 나설 수 있었으므로 조선 함대는 진법과 지리(地利)에서도 유리한 입장이었다. 그 포구 앞바다로 줄지어 나란히 들어가 보니, 왜선 50여 척이 옥포 선창에 나뉘어 정박해 있었습니다.큰 매는 사방으로 온갖 무늬를 그린 비단 휘장을 둘러쳤고, 그 휘장 주변으로는 대나무 막대기를 꽂아 놓았으며, 붉은 색과 흰 색의 작은 깃발들을 어지럽게 매달아 놓았는데, 깃발 모양은 마치 펄럭이는 천이나 매달린 등 모양이었는데 모두 무늬 있는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바람 따라 펄럭거려서 바라보니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습니다. <옥포파왜병장> ( 정보에 밝았던 그런데 왜적의 무리들이 그 포구로 들어가서 분탕질을 쳐서 연기가 온 산에 가득 찼는데, 우리 수군의 배를 돌아보더니 엎치락뒤치락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뿔뿔이 흩어져 뛰어가서 배에 타고는 아우성을 치며 노를 재촉하여 바다 가운데로는 나오지 못하고 기슭을 타고 배를 저어 가는데, 6척이 선봉에서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옥포파왜병장> ( 왜군 측에서 보면 분탕질은 군수물자 조달을 위한 일종의 약탈행위이다. 옥포에 주둔해 있던 왜군 함대의 주장(主將)은 도도 다카도라(1556-1630)라는 맹장(猛將)이었고, 그가 거느린 병력은 약 3천명 정도로 오늘날로 보면 연대(해군에서는 전대)급 규모였다. 왜군들은 분탕질을 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보초를 세워 두었다. 그러나 조선의 군대는 수륙군 모두 도망가고 없는 줄로만 알았고, 대다수의 보초병들은 5월(양력 6월)의 따가운 햇살을 피해 소나무 그늘에 앉아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가롭게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함대가 다가왔고, 시야에 펼쳐진 것은 크고 작은 병선을 합쳐 모두 100여 척은 되어 보이는 대 함대였다. 함대의 진형도 오(伍)와 열(列)이 정연해서 전체의 모습은 마치 산과 같은 위용이었다.
기겁을 한 왜의 초병들은 급히 소리를 질렀고 소라고동을 불어 위급함을 알렸다. 이에 선상(船上)의 왜군들과 분탕질에 나섰던 왜군 단위부대들, 사령관 도도 다카도라 등 모두가 놀랐다.기함 누각(樓閣) 위에 챠양막을 치고 곤한 단잠에 빠져 있던 도도는 갑작스런 소리에 벌떡 일어나 장막을 젖혔다. 밖을 내려다 보니 군사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소리를 질렀고, 바다 쪽을 바라보니 웬 낯선 함대가 접근해 오고 있었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순간이었다. ‘저것은 분명 조선 함대가 아닌가?’ 도도는 투구와 칼을 집어 들고 부리나케 갑판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전원 전투준비!” “대장들은 함교(艦橋)를 지켜라!”
왜군들은 부산에 닿은 이후 지금까지 조선의 수군이라고는 배 한 척, 사람 한 명 구경해 보지 못했고, 탐색선을 보내 경상도 해안의 여러 수군 기지들을 이 잡듯 뒤졌지만 배와 무기를 파하고 모두 달아난 후였다. 때문에 도도 역시 조선 수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 온 터였다.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적 함대의 출현에 도도는 크게 당황했다. 자신의 함대는 거의 무방비 상태였으며 적에게 완벽한 기습을 허용한 꼴이었기 때문이다. “안 되겠다!” 이곳을 빠져나갈 것이니 즉각 이동 가능한 병선들을 모아라!!” 다급해진 도도가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장졸간에 당한 기습이었기 때문에 도도에게는 자존심 따위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자신의 방심을 탓해본들 죽고 후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약탈을 위해 뭍으로 나갔던 왜군들이 속속 돌아와 전투태세에 돌입하는 가운데 사령관 도도의 탈출을 돕기 위해 몇 척의 왜선들이 그가 탄 배를 호위하며 기슭을 타고 급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왜군 측에서는 조선 함대가 외항 쪽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해안선을 따라 탈출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학익진(鶴翼陣), 그리고 일시집중타(一時集中打), 편현일제타방(片舷一齊打方) 신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이 한 마음으로 분발하여 모두 죽을 힘을 다하니 배 안에 있던 관리와 군사들 또한 그 뜻을 본받아 서로 격려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공을 세우려 하였습니다. <옥포파왜병장> ( 장계에서처럼 조선 함대 수병들이 이렇게 분발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시리(時利)와 지리(地利) 모두에게서 조선 함대는 유리한 입장이었고, 거기에다 도망치는 적을 보자 사기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적은 해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꼬리를 내린 격이었으므로, 조선 함대 측에서는 일찌감치 승리를 예감할 수 있었다. 둘째, 적의 탈출을 허용한다는 것은 조선 함대 입장에서 보면 일단은 실패작이다. 적의 퇴로를 차단, 단 한 척이라도 남김없이 파괴함으로써 왜군 측의 피해를 최대화하는 것이 이번 출동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양쪽으로 에워싸고 대들면서 대포를 쏘고 화살과 실탄을 쏘아대기를 마치 바람처럼 천둥처럼 하자, 적들도 조총과 화살을 쏘아대다가 기운이 지쳐서 배에 싣고 있던 물건들을 바다에 내던지기에 정신이 없었는데, 화살에 맞은 놈은 부지기수였고,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쳐서 달아나는 놈도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적들은 일거에 무너져 흩어져서 바위 언덕으로 기어 올라갔는데, 서로 뒤떨어질까봐 겁내었습니다. <옥포파왜병장> ( 양지암을 돌아 선봉, 중군, 후군으로 진형을 갖추고 속도와 군악 소리를 높이며 왜선단과의 거리를 좁혀 들어가던 조선 함대는 왜선단 전방 300여 미터에 이르자 대포 소리와 함께 두 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옥포리 포구를 에워싸는 듯한 진형으로 계속 다가갔다. 훗날의 장계를 보면, 이와 같은 진법을
학익진을 친 쪽은 마치 체조에서 양팔 간격으로 벌린 상태로 적을 둘러싼 모습이다. 따라서 좌우로 거치적거리는 것 없이 선체를 돌려가면서 ‘좌현대포 쏘아!’, ‘정면대포 쏘아!’, ‘우현대포 쏘아!’를 반복할 수가 있다. 또한 뒷줄에 있는 선단과 교대해서 뜨거워진 대포를 식힐 수 있으므로 전 함대와 전 함포가 모두 가동될 수 있었다.
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학익진법은 이순신의 핵심적인 해전법으로 현대 해전사에서나 볼 수 있는 ‘일시집중타’ (片舷一齊打方 또는 ‘Salvo 사격법’이라고 한다.)의 원조로서 훗날 세계사에서 세력의 지각변동을 가져오는 시발점이 되었다.
반면에 포위된 왜군 함대는 물 위에 떠있는 오리떼처럼 오밀조밀하게 몰려 있는 형국으로 조선 함대처럼 선체를 돌려가면서 사격하기가 어려웠고, 앞줄과 뒷줄 선단 간에 교대사격도 곤란했다. 또 뒷줄에 위치한 선단은 사격을 하려고 해도 앞줄의 선단에 사각(射角)이 가려서 팔짱을 끼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때문에 당시 옥포의 왜군 함대가 조선 함대와 비슷한 수준의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해도 학익진을 편 조선함대에 대한 화력전에서의 불리함을 결코 면할 길이 없었다. 이렇게 유리한 진형을 갖춘 조선 함대는 대포들을 조준하면서 산과 같은 무게로 왜선단을 압박해 들어갔다. 한편, 왜군 측은 포위당한 입장이었으므로 해상 탈출은 전혀 시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포위망이 좁혀지기 전에 탈출을 시도했던 사령관 도도의 배와 몇 척의 호위선들만이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나 있었다. 탈출을 포기한 왜군 대장들은 육지로 상륙한 부대들이 속속 귀대하자 조총수들로 하여금 속히 밀집사격 대형을 갖추게 했다.왜군 돌격대들도 일본도를 뽑아 들고 조선 함대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었다.일이 이렇게 된 이상 왜장들에게 전투는 불가피한 산택이었다. ‘까짓 거, 한번 붙어주지!’하는 오기가 발동했고, 그러한 오기 속에는 ‘조총의 뜨거운 맛을 보여주마!’하는 자신감도 베어 있었다. 왜장들은 약탈나간 부대들이 모두 복귀할 때까지 초전의 수적 열세를 극복해 낸다면 승산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목청 높여 군사들의 선전을 독려했다. 그런데 학익진을 편 채 포위망을 좁혀오던 조선 함대는 “꽹~!”하는 징소리와 함께 전방 70미터 지점에서 일제히 멈춰 섰다. 요란하게 울려대던 군악도 그 순간 뚝 멈췄다. 조총으로 혼을 뺀 뒤 일본도를 휘두르며 노도처럼 돌격해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던 왜군들은 조선 함대가 제자리에 멈춰 서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에게 조총이 있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접근해 오지 못하는 구나.’ 왜군들은 대체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적들이 조총에 맞서 항전하다가 패퇴한 자기들 육군의 소식을 들었다면 쉽게 공격해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하늘과 바다를 뒤흔드는 포성과 함께 수백 수천 발의 소발화, 중발화, 대발화를 매단 불화살형 포탄들이 옥포 하늘을 새까맣게 수놓으며 왜선단을 향해 포물선을 긋기 시작했다.경천동지(驚天動地)의 순간이었다.일본도를 뽑아 들고 결전을 준비하고 있던 왜군들은 가공할 대포 소리와 화력에 넋을 잃고 말았다. 왜군들로서는 그렇게 크고 많은 대포들이 일시에 사격을 가하는 것은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세계 해전사를 통틀어 최초로 선보인 ‘일시집중타(一時集中打)’, 즉 백병전이 없는 순수 함포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독 안에 든 쥐 정신 수습하기도 전에 수천 발의 포탄과 화살탄이 왜선단을 행해 빗발치듯 쏟아졌다. 여기저기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외마디 비명 소리가 왜군 진영을 휘몰아쳤고, 왜선들은 각종 살탄 공격으로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되었다.연쇄적인 폭음과 함께 많은 수의 왜군들이 발화탄이 터지면서 만들어낸 폭풍에 곤두박질 쳤으며 그대로 바다로 떨어져 죽는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층루에 버티고 서서 한껏 기세를 뽐내던 왜장들도 하나 둘 살탄과 화살을 맞고 층각 아래로 떨어졌다.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이 광경을
학익진의 일시 집중타가 시작되자 경천동지의 폭발음과 함께 각종 발사물들은 옥포하늘을 뒤덮었다.
몇 차례의 집중타를 얻어맞자 앞줄에 위치한 왜선들은 조선 함대의 공격으로 이미 깨지고 부셔진데다가 크고 작은 화살들이 가시처럼 꽂혀서 불타고 있었다.휘황찬란하게 나부끼던 깃발과 비단 휘장들은 좋은 불쏘시개가 되었고, 그 불길은 그나마 피해가 가벼웠던 뒤편 병선들로 옮겨가고 있었다.그 상황에서도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해 육지에 있던 왜군들과 후미 함대의 왜군들은 사무라이 특유의 강단을 살려 급히 조총부대를 규합해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했다.콩 볶는 듯한 조총사격으로 왜군 측은 잠시 전열을 가다듬은 듯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 함대는 조총의 유효 사정거리인 50미터를 벗어나 있었다. 또한 빽빽이 둘러쳐진 방패 뒤에서 붙어서 쏘고 숨고 또 쏘아대는 조선 함대의 수병들은 자욱한 포연과 무수한 허수아비들 속에서는 구분해 내기 어려웠다.그리고 조준한 포적은 계속 이동하고 있었다. 때문에 애써 사격을 해보지만 도대체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군은 믿었던 조총에 대해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일본도를 들고 돌격전에 나서려면 왜군 돌격대들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그들은 일생을 통해서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겨 온 일본도를 버리고 장막과 깃발, 돛, 선체, 갑옷, 그리고 동료들 몸에 붙은 불부터 꺼야 했다. 분신처럼 간직해온 일본도마저 내팽개치고 불끄기에 나섰지만 이미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는 불길은 잡을 수가 없었다. 이때, 왜군 측에는 퇴각령이 내려졌다. 왜장들로서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이렇게 독 안에 든 쥐 모양으로 갇혀 있다가는 불에 타 죽거나 적의 집중포망에 걸려 떼 죽음을 당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왜장들은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해전을 치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한, 해전이란 먼저 총포류로 사격을 가한 후 배를 접근시켜서 창칼로 승부를 내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고, 그것이 자신들의 주특기였다. 그런데 자신들의 주특기는 하나도 통하지 않고 있었다.창칼로 끝장을 내기 위해서는 바짝 접근해서 적선 위로 타넘어가야 했지만 불타는 배를 이끌고는 나아갈 수가 없었다.뭐가 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적은 강했고, 교묘한 전술로 자신들을 우롱하고 있었다.생각하면 할수록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일단 접어두고 살길부터 찾고 볼 일이었다. 왜장들에게 허용된 선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뭍으로 달아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해상을 포위망을 뚫는 것이었다. 육지로 도망친다면 당장은 목숨을 건질 수 있겠지만 적들은 자신들의 도주를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또 육지에서는 또 다른 조선군이 매복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이미 많은 수의 병력을 잃었기 때문에 그토록 자신하던 백병전도 무의미했다. 혹 무사히 목숨을 건진다 해도 부산까지 걸어서 간다는 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아무튼 육지 쪽을 택했다가는 전멸로 이어질 공산이 컸다.결국 그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단 하나, 해상 돌파였다. 하지만 그나마도 성공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고 적이 포위망을 더욱 좁혀 오기 전에 시작해야 했다. 특공선단들의 맹활약 북이 울리자 방패를 빽빽하게 세우고 현자포에 산탄으로 무장한 협선들이 왜선단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탈출을 시도하는 중,소형의 왜선들을 향해 현자포로 산탄 세계를 퍼부었다.
왜군들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 틈에 조선의 협선들은 선체에 불화살을 쏘아 맞췄다.각 전선에서는 “명중률을 높여라!”, “저기 기어 나오는 왜선을 쏴라!” 등과 같은 조준사격 지시가 숨 가쁘게 내려졌다. 이에 사수들은 대포의 조준사격에 한층 열을 올렸고, 시위를 당기는 궁수들의 모습에도 분연한 각오가 넘쳐 흘렀다.조선 함대의 조준사격은 선체를 표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백발백중으로 왜선들을 타격했다. 이에 돌격전으로 해상 탈출을 꾀하던 왜군들은 전열이 흩어졌고 주력 병기였던 조총은 탄환을 장전하는데 1분이나 걸렸기 때문에 제대로 반격 한 번 하지 못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왜병들 역시 태반이 즉사 내지는 익사했다. 겁쟁이에서 용사로 왜군들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전우들의 시체와 기밀문서를 수장시킨 뒤 육지로 도망치는 일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바다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방패로 몸을 가리면서 화살탄이 날아오지 않는 선단 뒤쪽 바다로 뛰어들었다.특공선단에서는 왜선단 코앞까지 접근해 들어가서 발화탄을 매단 화살을 쉴 새 없이 발사했다. 이렇게 되자 이제 화염에 휩싸이지 않은 왜선은 없었다.보기에도 아찔한 검붉은 불길이 바닷바람을 타고 옥포리의 온 바다, 온 하늘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완벽한 승리였다.간신히 육지까지 기어 올라간 왜군들은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달아나고 있었다. 그 광경을본 우선 수많은 전장을 다니면서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벌떼 같은 함포공격을 생각할 때마다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바다의 나라라는 일본의 선봉 함대로서 그까짓 조선 해군 따위에게 이렇다 할 응전 한 번 못해 보고 도망쳐 왔기 때문에 심한 자기 모멸감에 빠져있었다.땅을 치고 통곡하다 못해 할복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배도 잃었고, 늘 자신의 분신처럼 지니고 다녔던 일본도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앙처럼 믿어 왔던 조총도 실전에서는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너무도 분했고,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그 와중에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심한 허기가 몰려들었다. ‘식량은 또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모두가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좌부장(左部將) 낙안 군수 신호(申浩)는 왜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수고 머리 하나를 베었는데 배 안에 있던 칼, 갑옷, 의관 등은 모두 왜장의 물건인 듯했습니다. 우부장 보성 군수 김득광(金得光)은 왜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수고 우리나라 포로 1명을 도로 빼앗았으며, 전부장(前部將)인 흥양 현감 배흥립(裵興立)은 왜의 큰 배 2척을 쳐부수었고, 중부장인 광양 현감 어영담(魚泳潭)은 왜의 중간 배 2척과 작은 배 2턱을 쳐부수었고, 중위장(中衛將)인 방답 첨사 우부기전통장(右部騎戰統將)인 진(鎭)의 군관 보인 이춘(李春)은 왜의 중간 배 1척을 쳐부수었고, 유군장(遊軍將)인 발포 가장 신의 군관 훈련봉사 좌부기전통장(左部騎戰統將)인 순천 대장(代將) 전(前) 봉사 유섭(兪?)은 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수고 잡혀갔던 우리나라 소녀 1명을 도로 빼앗았고, 한후장(?後將)인 신의 군관 급제(及第)
모두 합하여 왜선 26척을 총통으로 쏘아 맞혀 깨뜨리고 불태웠는데, 온 바다에 불꽃과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옥포파왜병장> ( 옥포해전을 치른 후 전과(戰果)를 보고한 장계이다. 해당 고을 장수들의 이름으로 보고되는 것은 그 고을 출신 장병과 그 고을을 후원하는 후방 고을들의 공로가 된다.
장계를 토대로 전라좌수영 각 수군 기지등? 공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라좌수영 관내 기지 장병들은 모두 16척의 왜선을 깨쳤다. 본영 소속의 장수들인 이춘, 이렇게 다져보면 전라좌수영 관내의 기지들과 여수 본영 함대들 중에서 공을 세우지 않은 곳은 없었고, 원균의 경상우수영 측도 5척을 깨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모두 26척이다.전라좌수영 함대의 판옥선은 24척, 경상우수영 함대의 판옥선은 3-4척으로 약 5월 6일, 당포에서 양측 함대가 만났을 때 ‘장수들을 모아 놓고 여러 차례 약속했다’고 한 그 ‘약속’은 작전회의 및 지시이다. 그 때 옥포해전은 임진왜란 중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해전과 육전을 통해서 조선군이 거둔 첫 승전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이 해전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던 조선의 운명이 실낱 같은 희망의 불씨를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울러 구국(救國)의 신념으로 사생결단의 출동을 감행한 당시 왜군의 군대 편성은 각 영지별로 병선을 만들고 병사들을 수송하여 바다를 건너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배를 잃게 되면 다시 그 영지에서 배를 건조해야 했다. 때문에 한 번 소멸된 함대가 재건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년 이상의 긴 시간이 필요했다.북상하고 있던 왜군부대들에게는 증원과 보급이 시급한 상황이었는데, 재건에 1년 이상이나 소요되는 기동함대 하나가 이렇게 사라져 버렸으므로 임진왜란 때 왜군 측의 파탄은 사실상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치고 빠지기, 그 속에 담긴 ‘부하 사랑’ (情 經, 營) 옥포해전 후, 전리품 노획작업을 끝낸 조선 함대는 다시 돛을 올렸다. 그리고는 바로 옥포만을 빠져 나와 오후 4시경 거제도 북단에 있는 영등포까지 이동해서 숙영(宿營)할 준비를 했다. 산으로 올라간 적도들은 숲 속으로 기어들어가 기가 꺽이지 않은 놈이 없으므로, 신은 여러 배에서 용맹한 사부(射夫)들을 뽑아서 산에 오른 적들을 쫓아가 잡도록 하려고도 생각했습니다.그러나 거제도는 섬 전체가 산세가 험하고 수목이 울창하여 발붙이기가 어려울 뿐더러, 당시 우리는 적의 소굴 안에 있는데다 배에 사부조차 없으면 혹시 뒤로 포위당할 염려도 있고 날도 이미 저물어 가므로 뜻대로 하지 못하고 영등포 앞바다로 물러나와 머물면서 군사들을 시켜 나무도 하고 물도 길어 오게하여 밤을 지내려고 했습니다. <옥포파왜병장> (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의 해전에서 도 하나 특징은 휘하 장병들의 생명을 소중히 했다는 것이다. 옥포만을 떠나오기 전, 패주(敗走)하는 적을 뒤쫓지 않았던 것도 군사들의 희생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장계에는 ‘거제도는 산세가 험준하고 수목이 무성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거제도에는 원시림이 울창했을 것이다. 또한 거제도는 큰 섬이다. 사수들을 선발해서 적을 뒤쫓는다고 해도 10만의 병사로도 완전히 소탕하려면 최소한 몇 달 이상은 걸림직한 큰 섬이었다. 게다가 조선 함대로서는 주변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적의 점령지 해역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인근에 큰 적이 있었다면 포성과 하늘 높이 치솟은 연기를 보고 덮쳐올 염려도 있었고, 왜군들이 비록 겁을 먹고 도망치는 입장이었다고는 해도 그들과의 창칼 싸움은 절대 피해야 했다.또 멀리 분탕질을 나갔던 왜군 부대들이 여기저기서 복귀해 오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상황들을 종합해보면, 어떤 경우든 조선 함대가 옥포만에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었다.전략상으로 보아도 적을 좀더 죽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적의 기동함대들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서 각개 격파해서 왜군들의 발을 묶는 것이 중요했고, 그것이 1차 출동의 목적이기도 했다.
때문에
옥포해전 때 올린 장계(옥포파왜병장)에서 조선군의 피해 내용을 보면 전사자는 단 한 명도 없었고, 부상자만 한 명 있었다. 그것도 칼에 의한 것이 아니라 화살에 왼팔을 조금 다쳤을 뿐이었다.이것을 보면, 왜군들이 육지로 쫓겨간 후에도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왜선에 뛰어올라 전리품을 노획케 하고 죽은 자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한 것으로 보인다.어쨌거나 왜군 기동함대 하나를 격멸하는 해전을 치르고도 단 한 명의 부상자 밖에 내지 않았다는 사실은 승리 이상의 성과였으며, ‘환상의 해전’이라는 표현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11. 출전 [01:18] /작곡 : 원일 /음악감독 : 원일
★~ 58th.. 드디어 첫 출전을 앞두고, 장군의 목소리....
'드디어 출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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